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86
– 167화에 계속 –
2부 167화 대청제국 붕괴
남북화의 재개 후, 청국 대표단과 민국 대표단은 조약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는 양측 모두를 만족시킬 조건으로 정해졌으나, 그 과정까지 순탄하고 원활한 건 아니었다.
“중국 18성 중에 황하 이북은 대청의 통치권역에 남겨 주길 바라오. 북경은 대청의 경사(京師)로 남아야 하오.”
“북경은 대명의 수도였고, 하북의 주민도 절대다수가 한인이거늘, 어찌 할양을 인정하겠소?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18성 중 단 1성도 포기할 수 없소. 18성 이외의 지역은 뜻대로 하시오.”
양측 대표는 지도를 보면서 선을 그었다. 물론 그 지역에 사는 주민의 의견 같은 건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다른 곳은 몰라도, 경사 자금성과 종묘, 역대 황제의 묘역을 후손된 입장에서 어찌 포기하겠소?”
“그럼 그 지역에 한하여 황실의 사유권을 인정하는 형태로 합시다.”
양측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타협책이 제기되는 수순이었다.
“그동안 대청이 각국과 맺은 조약은 어찌할 것이오?”
“중국과 관련된 조약은 마땅히 민국 정부가 승계해야겠지요.”
“그럼 채무도 모두 민국 정부가 승계하겠지요?”
“아니, 뭐요! 그동안 실정과 패전으로 막대한 빚을 진 건 황실과 조정인데, 어째서 민국이 뒤집어써야한단 말이오?”
“그럼 권리만 승계하고 의무는 승계하지 않을 작정이오? 인구와 자산, 세수(稅收)의 대부분을 민국이 승계하는데 당연히 채무도 승계해야지!”
청조가 전쟁 배상금과 기타 근대화 비용으로 짊어지고 있는 막대한 대외 채무를 누가 갚느냐 가지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열강과 맺은 조약과 차관을 부정했다가는 중화민국의 앞날이 불투명했으므로, 민국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채무도 떠안았다. 다만 배상금과 차관의 일부는 청조가 승계하도록 했다.
“중국 18성의 주민, 행정 조직, 군대는 모두 민국이 계승하겠소. 단, 만주 왕공과 만주 팔기는 민국을 떠나길 희망하오.”
“그렇다면 한인 중에서도 황제를 따르길 원하는 이들이 만주로 향하길 원한다면, 자유의사를 허용하도록 합시다.”
“허어, 그러길 원한다면 그럽시다. 단, 중국 18성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귀국을 원한다면 자유의사를 허용해야지요?”
“그렇다면 양국의 국적 기준은 속인(屬人)이 원칙이오, 속지(屬地)가 원칙이오?”
“속인을 원칙으로 해야지요. 한인은 중화민국. 만주, 몽골, 서장, 회교도 등은 청국.”
“그럼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텐데?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모두 중국에서 받아들일 용의가 있소?”
봉금정책이 해제된 이래, 청국령 만주 인구의 대다수는 한족이었다.
“그들은 대개 하북과 산동 출신으로, 만주행은 부득이하게 떠났을 뿐이오. 인구교환을 단행하도록 합시다. 한인은 중국으로, 만주인은 만주로.”
“이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비용은 책임질 용의가 있으시고?”
“당장의 손실을 두려워 피차 국민국가를 세울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소?”
결국 전례 없는 인구교환이 합의되었다.
자유의사를 존중하여 이주를 택한다고는 하지만, 혁명이 뭔지도 모르는 주민들에게 펼쳐질 혼란상이 뻔히 보였다.
그럼에도 민족주의와 국민국가를 내세운 혁명파는 모든 한인이 중화민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인이 지역과 출신에 따라 정체성이 상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상의 공동체’였다.
모든 사안에 합의한 양측 대표는 조약문을 작성했다.
1. 대청 황제는 사위(辭位)하여 중화민국 정부에 중국 18성의 통치권을 이양한다.
– 직례, 하남, 산동, 산서, 섬서, 강소, 강서, 안휘, 절강, 복건, 호북, 호남, 광동, 광서, 사천, 귀주, 운남, 감숙.
2. 대청 황제는 중국 18성 이외 지역의 통치권을 유지하며, 중화민국은 이를 승인한다.
– 동삼성(만주) : 봉천, 길림, 흑룡강. 신강(동투르키스탄), 내몽고(차하르), 외몽고(할하), 서몽고(우량하이), 서장(티베트), 청해(코코노르).
3. 중화민국 정부는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의 예로 예우하며, 민국과 대청은 근린이 된다.
4. 대청 황제는 사위한 후에도 자금성의 내성과 이화원, 역대 황제의 종묘와 능묘 일대를 사유하고 관리할 권한을 가진다. 민국 정부는 대청 황실의 사유재산을 보호한다.
5. 대청 황제는 사위한 뒤에 잠시 자금성에 거처하다가, 훗날 성경(盛京, 봉천)으로 옮겨 간다.
6. 덕종(德宗, 광서제)을 모신 숭릉(崇陵) 공정은 예정대로 마무리하며, 봉안예식은 옛 법도대로 한다.
7. 대청국이 해외 각국과 맺은 조약은 중화민국이 승계하고, 권리와 의무도 승계한다.
8. 대청국이 해외 각국에 진 채무는 중화민국이 8할을 승계하며, 해외 각국에 있는 정부 소유의 자산(국채, 외교공관 등)은 중화민국이 소유한다.
9. 중국 18성에 봉직하는 청조의 신료들은 민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희망자에 한하여 만주로 이전한다. 이외 지역에 봉직하는 신료 중 희망자는 민국으로 이전한다.
10. 중국 18성에 주둔하는 신군은 민국 육군부의 편제에 편입된다. 경사 금위군은 희망자에 한하여 만주로 이전한다. 이외 지역에 주둔하는 신군 중 희망자에 한하여 민국으로 이전한다.
11. 만주 왕공과 각지의 팔기(八旗)는 만주 이전을 원칙으로 하며, 중국에 잔류를 희망할 시에는 민국 정부가 이들의 신원을 보장한다.
12. 원칙적으로 한인(漢人)은 중화민국, 만몽회장(滿蒙回藏)인은 대청국의 국민이 되나, 각국에 거주하는 주민은 국적을 선택해 체류할 권리가 있다. 이들이 귀국을 원할 시에는 양국 정부가 협조하여 이주를 지원한다.
대청 선통 2년 2월 28일, 중화민국 원년 4월 15일.
대청 흠차전권대신 당소의, 중화민국 전권대표 오정방이 합의하고 서명함.
12개 조항이 합의되고, 구체적인 이행을 담은 규정도 아울러 확정됐다.
남북조약으로 청조는 여전히 중국 본토를 제외한 지역의 통치권을 지킬 수 있겠으나, 청조의 268년 중국 지배는 종말을 맞이했다.
중화민국은 중국 본토를 평화적으로 인수할 수 있었으나, 그 강역은 명나라 시절로 되돌아갔다. 애초에 혁명파가 생각하는 ‘중국’의 강역이었다.
합의안이 북경과 남경에 각각 전달되자, 양측의 강경파가 모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결국 현실론이 승리했다.
“도대체 청조와 만주족에게 무슨 특권을 이리도 많이 내주는 겁니까!”
“타협하지 않으면 어떻게 혁명을 성공시키겠소? 내전을 계속할 수는 없소. 청조를 중국 밖으로 내몬 것으로 만족합시다.”
“중국의 모든 영토를 내준다고? 열성조의 위업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치욕 속에 살자는 말인가? 최소한 황하 이북은 지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타협하지 않으면 어떻게 종묘와 사직을 유지하겠소? 저들을 진압할 무력도 없는데. 우리의 고향 만주와 정복지 다수를 지킨 것으로 만족합시다.”
선통 2년 3월 2일, 1912년 4월 18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최후의 어전회의가 개최되었다.
자금성 밖에 여전히 정변군의 대포가 겨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무겁고 침통한 분위기였다.
대청제국의 황제와 황태후, 섭정왕과 황족들, 총리와 대신들이 마지막 어전회의에 참석했다.
“황제 폐하, 신등은 수치와 죄스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아뢰나이다. 대청의 사직이 미증유의 위기에 놓인 작금에 이르러, 조정은 소위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화의를 맺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조약만을 삼가 봉정하오니, 평화를 향한 민심의 열망을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총리대신 이경희가 문무백관을 대표해 조약문을 황제에게 바쳤다.
겨우 나이 7세, 어린 선통제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황제를 대신해 부친인 섭정왕 재풍이 조약문을 읽고,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 예허나라(葉赫那拉)씨가 떨리는 손으로 조약문을 받아들였다.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는 아무런 실권은 없었지만, 명목상 황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하고 있기에 최종 결재 권한이 있었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순간도 명목상 왕대비의 전교가 있었듯이, 대청제국에도 유사한 절차가 필요했다.
즉, 268년 대청제국의 종지부를 찍는 선언은 황태후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나는 구중궁궐의 아녀자가 되어 무엇을 알겠느냐마는, 어찌 감히 천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이미 황태후는 어제 황족들과 대신들에게 조약문을 받아들이라는 진언을 받고 가납한 상황이었다.
황태후는 법적 양자인 어린 황제를 대리하여 최종 결단을 내렸다.
“아아, 내 어찌 일개 성씨의 존영을 위하여 억조 인민의 호오를 저버리겠는가! 민심이 공화를 원한다면 차마 저버릴 수가 없도다.”
연극적인 어조였지만, 황태후는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섭정왕과 총리 이하 모든 왕공과 대신들이 부복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어찌하여 열성조의 위업을 저버리고, 궁벽한 땅으로 되돌아가려 하십니까? 신은 차마 죽을지언정 망극한 조서를 따를 수가 없나이다!”
금위군 통령 양필이 어전 밖에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그를 따르는 소수의 청조 충신들이 따라 이마를 찧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단기서를 따르는 정변군 장교들이 냉소를 지으며 양필 일파를 비웃었다.
“제법 충신을 자처하고 있다마는, 황명을 거스르는 자가 어찌 충신이라 하겠는가?”
“닥쳐라, 이 역적놈들아! 네놈들을 죽여 살점을 씹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다!”
“허허, 할 수 있으면 해 보든지. 송과 명의 충신들은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 사직과 함께 죽음을 택했다. 너희들은 과연 그런 용기가 있느냐?”
“내 어찌 한낱 목숨을 잃는 걸 두려워하겠는가! 누군가 사직을 지키기 위해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겠노라!”
양필이 숨겨 온 단도를 빼들어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다른 이들이 급히 그를 제압해서 말렸다.
“아직 대청은 망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황명을 거스르고 함부로 죽으려 하는가! 그건 진정한 충성이 아닐세!”
“우리의 고향인 만주가 남아 있네! 고토로 되돌아가 와신상담하여 힘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대업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칼을 빼앗긴 양필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 역시 무의미하게 죽는 것보다 살아서 기회를 노리는 걸 택했다.
“내 반드시 이 치욕을 씻고, 역적들을 토벌하여 경사를 수복하리라!”
어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황태후는 조약문과 황제의 명의로 작성된 교서에 옥새를 찍는 걸로 268년 청조의 중국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도열해 있던 문무 관료들이 황제를 향해 마지막 만세를 외쳤다. 울부짖는 자, 침통해하는 자, 냉소를 머금은 자, 기뻐하는 자 등 희비가 엇갈렸다.
옥좌 위의 어린 황제는 이 모든 소동이 지겹다는 듯, 부친인 섭정왕을 향해 천진하게 물었다.
“아버지, 다들 왜 저러는 거야?”
“문무백관이 폐하의 성단을 칭송하는 겁니다.”
“그럼 이제 끝난 거야? 집으로 돌아가도 돼?”
“예,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요. 태조께서 우리를 기다리실 겁니다.”
재풍은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저도 모르게 목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황태후는 더욱 서글프게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부의는 부친과 양모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엄숙하고도 역설적인 희비극(喜悲劇)을 이해하기에는, 그는 너무 어렸다.
부의가 이해를 했건 못 했건, 대청국과 중화민국 간의 합의한 내용을 알리는 교서는 황제의 명의로 전국에 반포되었다.
「대청 봉천승운황제는 만백성에게 고하노라.
황제는 천명과 민심의 뜻을 받들어, 사위하여 중화민국 임시정부에 중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이양하였다.
……
대청국과 중화민국은 상호의 국체를 존중하며, 평화가 억조창생과 만대에 이를 것을 기원하노라.
짐은 만주와 몽골, 신강과 서장의 황제이자 칸으로서, 그대들에 대한 우의를 잊지 않으리라.
아무쪼록 국민이 평안하고 국가가 태평하기를 바랄 뿐이다. 짐은 북방으로 물러나 평안한 세월을 보내면서 친히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리라.
이는 바로 황제가 몸소 선택한 결단이니, 그대들은 따를지어다.
선통 2년 3월 3일, 대청 황제 어명어새.」
1912년 4월 19일, 대청 황제가 중국의 지배권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교서가 전역에 반포되었다.
혁명파는 대청제국의 붕괴와 혁명의 승리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혁명 만세! 중화민족 만세!”
“공화국 만세! 중화민국 만세!”
명나라 이후 268년 만에 ‘한족 국가’를 되찾은 이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중국 각지는 물론이요, 대청제국의 수도였던 북경에도 황룡기를 대신해 철혈십팔성기와 청천백일기가 내걸렸다.
선통 2년, 대청제국은 붕괴했다. 광서제 사후 겨우 20개월 만의 일이었다.
중국의 천자이자 만주의 한, 몽골의 칸, 티베트의 전륜성왕, 무슬림의 보호자라는 다층적인 성격을 지닌 ‘키메라의 제국’, 대청제국.
중국 혁명에도 불구하고 청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다른 중국 왕조들과는 다른 키메라의 제국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대청제국의 핵심은 중국이었고, 중국의 통치권을 내놓은 청조는 더 이상 ‘대청제국’을 자처할 수가 없었다. 다민족적 대제국은 이제 사라져 가는 과거의 유산이었다.
여전히 조약에 따르면 청조는 몽골, 신강, 티베트와 동군연합을 구성하지만, 중국을 상실한 청조가 이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청조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국민국가, 만주국으로 재탄생해야 했다.
1912년, 중화민국 원년, 신해혁명은 성공했다.
1792년 프랑스 공화국 수립으로부터 꼭 120년, 중국에서 공화혁명이 재현되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과 다른 가장 큰 요인은, 민중의 폭발적인 힘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군사정변과 군부 유력자 간의 합의로 점철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신생 중화민국에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지역별로 항쟁하는 군벌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는 요인이었다.
대청제국의 잔해 위에서, 중국의 패권을 쟁취하려는 야심가들의 시대가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