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0
– 171화에 계속 –
2부 171화 평화의 제전
1912년 6월, 스웨덴 스톡홀름.
올림픽 출전을 위해 온 대한제국 선수단은 주 스톡홀름 한국 총영사관의 지원을 받았다.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허허, 기차로 보름 만에 왔는데 고생이라 할 게 있겠소. 오랜만이오, 영사. 가내 두루 평안하시오?”
“예, 평안합니다. 공께서도 그간 두루 평안하셨습니까?”
선수단장을 맡은 학무대신 이상설과 대리영사 이위종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대표단으로 함께 참석했으므로 친분이 깊었다.
“대한의 대표선수들을 소개하겠소. 사격 대표선수로 선발된 시종무관 안중근 부령, 육상 대표선수로 선발된 학무부 주사 여운형 판임관이오.”
“반갑습니다, 여러분. 건승을 기원합니다. 안 부령은 뵌 적이 있군요.”
“예, 일전에 러시아로 파견되었을 때 뵌 적이 있지요.”
“여 주사는 초면인데, 풍채가 서양인 못지않습니다.”
“하하, 영사님이야말로 모던한 신사다우십니다.”
이위종은 안중근, 여운형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이른 나이에 외교관이 되어 대리영사까지 승진한 이위종이지만, 여운형과 동년배였다.
안중근과 여운형은 여장을 풀어 시내로 나가고,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사관에서 대화를 이어 갔다.
“만국평화회의에 이어 세계선수권(올림픽)이라.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되는구려.”
“성상께서 16년 전 러시아 황제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길에 그리스에 들려 올림픽을 참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부친께서 사절단의 일원이었는데, 공께서도 함께하셨지요?”
1896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선과 조선 사절단이 가는 길에, 그리스에 들려 1회 올림픽의 폐막식을 참관한 바 있었다.
“그랬지요. 폐막식에 참석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경기를 본 적은 없소.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지.”
“저는 12년 전 프랑스 파리 올림픽을 참관한 바 있습니다.”
“오, 그랬소? 어쩐 일로?”
“당시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개최될 때 부친께서도 대한국 대표위원으로 오셨는지라, 저도 동행해서 프랑스 유학생활을 하게 됐죠.”
“아, 과연 어릴 적부터 경험이 풍부하시군.”
이위종과 한동안 환담을 나누던 이상설은, 진지한 화제로 전환했다.
“학무대신인 내가 선수단장까지 맡아 스웨덴까지 온 건, 성상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오.”
“과연, 공께서 직접 오신 걸 보고 그러리라 짐작했습니다.”
“성상께서는 유럽에서 머지않아 큰 전쟁이 나리라 생각하고 계시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흠……. 작년에 발발한 이탈리아와 오스만의 전쟁은, 이탈리아의 우세로 진행 중입니다. 더 이상 확전 없이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날 것 같습니다.”
1911년 10월, 이탈리아가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리비아)를 노리고 전쟁을 선포했다.
리비아 현지인들이 사막에서 게릴라전으로 이탈리아군을 괴롭히고 있다지만, 정규군 간의 전쟁은 이탈리아의 우세로 전개됐다. 특히 해전에서는 이탈리아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성상께서는 이 전쟁을 시작으로, 발칸반도에서 전운이 확산되리라 짐작하고 계시오.”
“흠,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군요. 오스만의 약점이 드러났으니, 러시아가 후원하는 발칸국가들이…….”
전쟁은 이탈리아와 오스만 양국 간의 전쟁이었지만, 도미노처럼 확산되었다.
오스만의 패배는 발칸을 격동시켰고, 1912년 오스만령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이 잇달았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해방’시키길 원하는 발칸 국가들, 즉 그리스-불가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4개국은 발칸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발칸동맹을 후원하는 나라는, 물론 ‘슬라브-정교회 형제국’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러시아였다.
“7월 중에 러시아를 방문하여 만주와 몽골 문제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사항을 논의하려 합니다. 영사도 함께하라는 황명이 있었소.”
“예, 알겠습니다.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6월 말, 영친왕 이영이 영국에서 올림픽 참관을 위해 스웨덴을 방문했다.
“전하께서 직접 친림해 주시니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대한의 대표단이 유럽에서 국위를 선양하는데, 내가 가까운 영국에 있으면서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영은 얼마 전 케임브리지 킹스킬리지에서 역사학과 경제학 학위를 마쳤다. 학업 성적과 논문 평가는 우수했고, 이영은 학과를 대표하여 졸업생 연설도 했다.
학위과정을 마친 이영은, 태상황의 만수절 환갑연에 참석하기 위해 스웨덴과 러시아를 경유해 귀국할 예정이었다.
“전하, 직접 결제해 주실 사안이…….”
“오, 알겠소.”
이위종은 근래 이영과 함께 황제가 하달하는 특별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선은 러시아와 유럽에 있는 대한제국 황실의 자산을 모두 스웨덴으로 옮기라 명했다. 발렌베리 가문의 스웨덴 엔스킬다은행(SEB)이 대한제국 황실의 유럽자산 예금과 운용을 맡았다.
이선과 스웨덴의 관계는 노벨 가문으로부터 비롯됐다. 러시아 바쿠 유전을 개발한 브라노벨의 상임이사로 매년 넉넉한 배당금을 받으며, 이선은 지난 30년간 자산을 재투자하여 황실 재산을 상당히 축적해 왔다.
그동안 황실이 정부로부터 내탕금을 거의 손을 벌리지 않는 건, 해외자산이 있는 덕분이었다. 오히려 근대화를 위한 각종 예산이 부족하면 내탕금을 꺼내어 보태곤 했다.
이강과 이영이 유럽에 체류할 때에는 이들이 이선을 대리했다.
‘황형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자산을 모으셨단 말인가?’
이영은 영국 경제학계의 총아인 케인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경제학을 익혀 이론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지만, 투자는 경험이 없었다. 이선이 축적해 온 자산 규모를 보고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이영의 유학과 체류 비용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모든 자산을 정리해 스웨덴으로 옮기라고 하니, 이영은 의문이 들었지만 군말 없이 형을 대리해 서류에 서명했다.
‘왜 하필 스웨덴이지? 산업 전망이 유망한가?’
이영은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선이 자산을 스웨덴으로 옮기게 한 건 물론 전쟁에 대비해서였다. 예컨대 이선이 다수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국채는 지금까지 상당한 수익을 내고 있었지만, 전쟁 이후에는 휴짓조각이 될 터였다.
엄정중립을 표방하는 스웨덴은 전쟁에 말릴 가능성이 적었다. 이선은 발렌베리와 손잡고 회사를 설립해 스웨덴의 철광석을 매점했는데, 이는 전시에 유용한 자원이었다.
유럽은 평화로웠지만, 이선의 시야는 이미 전쟁을 향하고 있었다.
“제5회 올림픽이 개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7월 5일,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의 선언으로 제5회 올림픽이 개회되었다.
29개국 대표단이 스웨덴어 알파벳 순서대로 차례대로 입장했다. 특기할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체코) 3국으로 나누어 출전했다는 점이고, 러시아도 핀란드 대공국은 독자적으로 출전했다. 핀란드가 러시아 국기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마찰이 빚었지만, 조직위가 타협하여 국기 없이 팻말만 들도록 했다.
스웨덴어로 한국은 ‘Korea’이므로, 캐나다(‘Kanada’) 다음인 14번째로 입장했다.
“Kejsardömet Korea, Empire coréen!”
기수를 맡은 여운형이 태극기를 들고 보무당당하게 행진했다.
당당한 체격에 선이 굵은 외모, 흰 피부에 카이저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여운형은, 유럽에서 곧잘 오해를 받고는 했다.
“무슈, 터키에서 왔나요?”
“아닙니다, 마담. 한국 사람입니다.”
여운형은 한국에서도 별명이 ‘토이기(터키) 청년’이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외모였다.
“Colonel An!!”
“오오오오!”
하지만, 관중들의 환호를 받는 건 기수인 여운형보다 그 옆에서 행진하는 안중근이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그는 아시아인 최초의 메달리스트였다.
개막식 이전에 치러진 50m 권총사격에서, 안중근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단연코 주목받는 인사였다.
개막식 전에 일부 종목은 이미 시작하였다. 사격도 그중의 하나였다.
안중근은 30m 권총과 50m 권총경기에 출전했다.
6월 29일, 30m 권총경기가 있었다.
50여 명의 출전선수 중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므로, 안중근은 금방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격 선수들은 상당수가 군인이었다. 이때만 해도 올림픽 대표단에 군인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훗날 명성을 떨칠 조지 패튼(George S. Patton)은 미합중국 기병 중위이자 근대5종 대표선수로 출전했다.
군인들은 군복 차림으로 경기에 임했고, 대한제국 시종무관 제복을 입은 안중근은 더욱 주목 대상이었다.
“동양인이 총을 제대로 쏠 줄이나 아나?”
“원숭이처럼 흉내는 낼 줄 알겠지.”
일부 관중들의 조롱이 있었지만, 안중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격 솜씨라면 그 누구보다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컨디션만 좋다면 말이다.
‘제길, 여태 시차적응이 안 됐으니……. 어제 괜히 술을 마셨나.’
금방 시차적응에 성공한 여운형과 달리, 안중근은 시차적응도 안 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잠을 이뤄 보겠다고 술을 마셨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켜 경기 당일에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하필 첫 경기는 오전 9시였고, 안중근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오오, 저 동양인, 제법 잘 쏘는데?”
“그러게, 9위라니 대단해.”
안중근의 30m 최종 순위는 300점 만점에 275점을 쏘아 9위였다. 287점을 올린 미국의 알프레드 레인(Alfred Lane)이 금메달을 획득했다.
컨디션이 그토록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형님, 세계 9위도 충분히 훌륭한 성과입니다. 기분 푸세요.”
“나는 대한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대표하여 출전했다고 생각하네. 동양인을 열등하게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네.”
1900년 북경 전투의 충격 이후, 안중근은 언젠가 반드시 서양을 뛰어넘겠다는 목표를 가슴 속에 안고 살았다. 올림픽은 참여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과 아시아를 위해 승리하겠다는 마음을 지닌 안중근은 반드시 최고를 차지해야 했다.
7월 1일, 50m 권총경기.
안중근은 이틀간 절치부심하며, 오늘 경기를 준비했다. 이번만은 물러설 수 없었다.
50m 거리에서 6발씩 10번, 60발을 쏴서 최고 성적을 가리는 경기였다. 55명의 선수가 경쟁했다.
“미국 대표 알프레드 레인, 499점!”
“오오오!”
30m 금메달리스트인 레인이 이번에도 499점을 맞춰 경쟁자들보다 한참 앞섰다. 그다음 순위는 474점이었다. 성능이 떨어지는 소형 권총으로 속사로 쏘니 아무래도 결과가 미흡했다.
안중근은 침착하게 권총을 들고, 목표를 정확히 겨누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먼저 6발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한국 대표, 중근-안, 500점!”
“뭐, 뭐라고?”
“정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렸다. 유일하게 500점을 돌파한 선수가 동양인이라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아니, 틀림없습니다. 총점 500점이 맞습니다!”
“50m 권총경기의 승자는 한국 대표 중근 안입니다!”
심판진이 안중근의 승리를 선언하자, 일제히 환호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아!”
“대단해, 정말 대단하군!”
경쟁했던 선수들이 안중근에게 악수를 청하며 승리를 축하했다. 안중근은 모자를 벗어 선수와 관중들에게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 영광을 대한제국 황제 폐하와 국민에게 돌립니다!”
안중근의 사격 금메달 소식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시아의 올림픽 참여는 이번이 첫 대회였음에도, 첫 출전에 금메달까지 획득한 것이었다.
일본 대표단은 2인이 육상과 마라톤에 참여했는데, 메달이 아니라 첫 출전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아직 육상에서 동양인이 서양인을 따라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본 선수단과 한국 대표로 출전한 여운형도 세계의 벽을 체험하며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만큼 안중근의 승리는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올림픽은 서양, 백인들의 잔치였다. 이번 대회는 예외적으로, 미국 대표로 출전한 원주민 출신 카하나모쿠(Kahanamoku)가 수영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 안중근과 카나하모쿠의 금메달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함’을 믿는 이들에게 놀라운 결과였다.
“안 중령님, 우승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집중, 오직 집중이었습니다.”
“중령님만의 특별한 비결이 있다면?”
“아, 우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그만큼 사격솜씨가 뛰어나지요. 전 그 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안 중령님! 여기도 좀! 우리 신문과도 인터뷰를!”
안중근은 일약 1912년 올림픽의 스타가 되었다. 겸손하고 담담한 태도의 안중근은 서양인들에게도 인상적이었다. 안중근과 인터뷰하려는 언론이 줄을 섰다.
물론 가장 놀랍게 받아들인 곳은, 모국인 한국이었다.
「안중근 부령, 서전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빛 승리를 올리다!」
「안중근 – 대한의 자랑, 아세아의 자랑!」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대신해서 올림픽을 정복하다니. 이것도 역사의 변화라면 변화인가. 참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군.’
이선은 특별한 뿌듯함을 느꼈다. 역사의 변화가 수많은 한민족의 운명을 바꿨고, 하얼빈 의거의 주인공 안중근은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국위선양의 공을 세운 안중근 부령을 특진하고, 귀국하는 대로 특별훈장을 수여하겠다.”
황제의 발표는 국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무슨 사격대회에서 우승한 거로 특진과 훈장이냐?’고 트집을 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안중근의 금메달 소식은 한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봤소? 우리 한국인이 세계무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다니!”
“암, 이게 바로 우리 대한의 힘이지!”
올림픽 금메달 하나일 뿐이지만, 국민의 열광은 상상 이상이었다.
막 세계무대에 뛰어든 한국인들은, 세계의 수위에 올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세계무대의 경쟁에서 최고를 차지한 것이었다.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그들을 기쁘게 했다.
「한국인 안중근, 스웨덴에서 승전보! 아시아의 자랑!」
「안중근 부령은 대한제국군의 촉망받는 장교로, 지난 일로전쟁에서 제3군 관전무관을 지낸 바 있습니다. 본관은 그때부터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금메달 소식을 알리는 호외가 쏟아졌다.
한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고, 동양인이 서양인을 앞질러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은, 서양에 대한 애증에 시달리던 일본인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안중근의 승리는 아시아의 승리로 포장되었고, 러일전쟁 관전무관을 지낸 안중근과 인연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숟가락 얹기도 있었다.
“흠,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열광하기는. 하여튼 이놈의 언론이란.”
일본 원로 이토 히로부미는 신문을 보면서 쯧쯧거렸다. 나이 72세, 이미 늙은 그로선 대단치도 않은 일에 왜 여론이 열광하는지 의문이었다. 이토에게 아시아주의란 별로 의미도 없는 이념적 과잉이었다.
“그래도 첫 우승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으면 좋았을 뻔했군……. 정부가 선전하기에 좋았을 텐데.”
이토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어느새 커져서, 세계무대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순간을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올림픽은 경쟁이 아니라 참여에 의의가 있는 평화의 제전이라지만,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참여한 이상 대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1912년 올림픽은 평화로운 유럽의 마지막을 알리는 대회였다.
근대 유럽은 고대 그리스와 달라서, 올림픽 휴전이란 없었다. 1916년 베를린 올림픽은 아예 개최되지 않을 운명이었다.
[1912년 북청의 판도와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