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1
– 172화에 계속 –
2부 172화 2차 한러협약
1912년 7월 6일, 올림픽이 개최된 무렵.
발트해의 여름 휴양지 페르노프(에스토니아 패르누)에서 독일-러시아 정상회담이 있었다. 카이저와 차르뿐만 아니라, 양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대표단으로 동반했다.
1910년 차르의 포츠담 방문의 답례로 이뤄진 이 회담은, 근래의 불화를 깨고 유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회담에 동반한 독일 제국재상 베트만-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Hollweg)와 러시아 국무회의 의장 스톨리핀은 카이저와 차르의 돌출행동을 미연에 방지했다.
빌헬름은 특유의 장광설로 니콜라이의 심기를 어지럽혔고, 이미 카이저에 여러 번 농락당한 바 있는 차르는 정치적 대화는 피하려 했다. 니콜라이는 독일 팔촌의 드넓은 오지랖을 꺼려했다.
“친애하는 니키, 영국과 미국의 자본 침략에 맞서 범유럽이 단결할 필요가 있어요. 독일과 러시아가 연합하면, 그리고 독일의 기술과 러시아의 자원이 만나면 두려울 게 없을 겁니다. 바쿠 유전을 양국이 함께 개발하는 건 어떻습니까?”
“음, 생각해 보지요. 날도 더운데 좀 쉬었다가 이야기하시지요.”
“니키, 중국 문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짐은 청국의 존립을 적극 지지하는 바입니다. 동양에서 공화국이라니, 가당치도 않지요. 러시아와 독일이 공동으로 청국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러시아가 만주와 몽골, 투르키스탄을 통제하길 바랍니다. 그건 러시아의 당연한 운명입니다. 저 산투성이뿐인 발칸보다는, 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친애하는 빌리,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무튼 날이 너무 더우니 쉬도록 하십시다.”
이번만은 차르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의외로 카이저도 선을 넘지 않고 진중하게 처신했다.
“근래 양국 간에 군비가 지나치게 증대하고 있어 여론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군비 증대는 본질적으로 방어적 성격입니다. 모든 나라의 군사력은 어디까지나 예방 조치고, 전쟁에 이르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걸 목표로 해야지요.”
베트만과 스톨리핀은 최근에 증대하는 군비와 발칸의 충돌에 대해 정중하게 회담을 나눴다. 온건한 보수파인 베트만, 국내 개혁의 완수를 위해 대외 평화를 원하는 스톨리핀은 모두 전쟁을 원치 않았다.
“발칸에서 불안한 상황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충돌이 발생할까 우려가 됩니다. 특히 발칸 국가들에 대한 러시아 여론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슬라브-정교회 국가에 대한 러시아의 역사적 사명은 이미 완수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오스만의 곤경을 이용할 의도가 없습니다.”
범슬라브주의에 도취된 일부 러시아 여론과 달리, 스톨리핀은 발칸 국가들을 도와 오스만제국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반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귀국은 오스트리아의 발칸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스트리아의 발칸 정책이 모험적이고 공격적이라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국이 빈을 독려하는 일은 없겠군요?”
“베를린은 빈의 모험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할 일이 추호도 없습니다.”
“귀국의 현명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독일이 삼국협상과 꼭 대립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충분히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지요.”
베트만과 스톨리핀은 의견 합의에 일치했다. 두 수상은 만족감을 표명하며 악수했다.
“앞으로 정상회담을 정례적으로 하지요. 2년에 한 번씩 모이면 어떻겠습니까? 다음은 1914년 여름에.”
“좋습니다. 양국 간 평화를 상징하는 정례 회담이 되겠군요.”
1912년 7월, 독일-러시아 데탕트는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였다. 양국 공동성명은 평화와 균형, 지금까지 내려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우호를 다짐했다.
하지만 예고했던 1914년 여름의 회담은 불투명했다. 독일과 러시아가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베를린은 동맹인 빈을 포기할 수 없었고, 페테르부르크도 동맹인 파리와 베오그라드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고착화된 동맹 관계는 극단적 대립을 내포하고 있었다.
* * *
대한제국 사절단이 러시아를 방문한 건, 독러 정상회담이 끝나고 차르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한 직후였다. 페테르고프의 여름궁전에서 회견이 예정됐다.
“황제 폐하, 대한제국 황제께서 보내시는 국서를 삼가 봉정합니다.”
“귀국 황제 폐하께서는 안녕하시오?”
“예, 덕분에 평안하십니다.”
니콜라이는 웃으면서 친우 이선의 아우인 이영을 맞이했다. 이영은 러시아에서 대공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대공은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다면서요? 황족이 대학을 다니다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자, 그럼 어서 식사하러 가십시다.”
카이저가 혼자 떠들고 니콜라이는 듣는 쪽이던 회담과 달리, 여름궁전의 오찬은 주로 니콜라이가 이야기하고 이영은 경청했다.
니콜라이는 내심 허세와 자신감 과잉의 화신과도 같은 카이저를 꺼려했고, 이선처럼 ‘현명하지만 겸손한’ 태도를 좋아했다. 이영은 달변인 이선에 비하면 말수가 적었지만,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는 차르의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짐의 사촌 키릴이 한국에서 환대를 받았다고 들었소.”
“예, 황제 폐하께서 키릴 대공의 방문에 크게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그 답례로 대공이 러시아에 와서 기쁘오. 짐 역시 대공이 머무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명목상 이영의 방문은, 키릴 대공의 방한 답례였다.
실상은 만주-몽골 문제를 두고 러시아와 한국의 최종 합의를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조약의 실무는 이상설과 이범진-이위종 부자(父子)가 맡겠지만,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감독할 이는 이영이었다.
“러시아 황제 폐하께서는 조약에 흔쾌히 동의하셨습니다만, 문제는 스톨리핀 총리가 아시아 정책이 모험적이라고 완곡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습니까.”
실제 역사에선 이미 1911년 9월에 암살당한 스톨리핀이지만, 변화한 역사에서는 1912년에도 계속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 스톨리핀이 주도하는 농업개혁은 궤도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발칸 문제를 놓고도 총리와 각료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총리의 대외정책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스톨리핀이 원하는 ‘20년의 평화’를 위해, 대외정책을 평화 일변도로 맞춰 놓았다. 그래서 오랜 숙적 영국과도 협상하고, 갈등을 빚던 독일과도 데탕트에 나섰다. 증대하던 군비도 절감하여 개혁에 필요한 비용으로 돌리려 했다. 특히 해군의 건함계획은 스톨리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스톨리핀의 처남인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는 평화 정책을 지휘했다. 군부와 강경파 언론들은 사조노프를 ‘새가슴’이라고 비난했고, 외무부 일각에서도 사조노프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발칸에서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발칸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아시아의 안정을 원할 겁니다.”
1912년 5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이른바 발칸동맹이었다. 그리스와 몬테네그로도 동맹에 합류할 의사를 보였다.
오스만이 이탈리아에게 연전연패하는 걸 보면서, 발칸 동맹국들은 전쟁의 불씨를 붙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슬라브-정교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러시아는 발칸동맹의 후원자였고, 군부와 정부의 강경파들은 발칸동맹의 전쟁 계획을 지지했다.
“그럼 각자 할 일을 하십시다. 나는 황제 폐하를, 이상설 대감과 이범진 공사는 총리와 외무대신의 설득을 맡아 주십시오. 이위종 영사는 궁정 내 여론을 격동시켜 주고.”
“예, 알겠습니다.”
‘도대체 누가 러시아의 지배자란 말인가? 짐인가, 스톨리핀인가?’
니콜라이는 내심 불쾌했다. 러시아 역사상 이렇게 강력했던 관료가 없었다. 아무리 헌법을 도입하고 의회제를 도입했다지만, 스톨리핀의 권력은 차르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농업개혁 문제도, 1912년도 예산 문제도 그랬다.
스톨리핀은 귀족 대지주들의 반발을 가차 없이 쳐 내고, 봉건적 토지제도의 완전한 해체와 자영농 육성을 원칙으로 하는 농업개혁을 원안대로 진행했다.
황실과 귀족들은 차르에게 ‘스톨리핀이 귀족들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며, 거듭 청원서를 올렸다. 귀가 얇은 차르는 스톨리핀을 불러 개혁의 후퇴를 요구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크오. 로마노프 왕조 이래 300년간 귀족들은 러시아의 중추였소. 그들을 배려해 줍시다.”
“폐하,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이익은 귀족들의 이익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혁명을 방지하려면 농민을 부유하게 육성해야 하고, 충성스러운 계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귀족들이 약간의 희생을 감내해야 합니다.”
스톨리핀의 말은 정론이었고, 결국 차르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보수파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톨리핀의 농업개혁법은 두마에서 가까스로 통과되어 차르의 승인을 받았다.
더 큰 갈등은 1912년도 예산 문제였다. 군비 증액 요구에 맞서 스톨리핀은 군비를 절감하고자 했다. 특히 쓰시마 해전으로 궤멸당한 피해를 극복하고 있지 못한 해군이 막대한 건함 예산을 요구했는데, 스톨리핀은 단호히 거절했다.
“해군의 요구도 타당하지 않소? 건함에 필요한 예산을 부여합시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우선순위라는 게 있습니다. 해군의 건함 예산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합니다. 지금 시급한 일은 농업개혁의 완성과 산업의 발전입니다.”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경은 도대체 왜 이렇게 완고한가? 경의 방법만 옳다고 생각하는 건가?”
차르의 질책에 스톨리핀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러시아와 차르를 위해 최선의 방책을 준비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저를 신임하지 못하신다면, 사임하겠습니다.”
차르도 스톨리핀을 경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인내하고 말았다.
“러시아에는 경의 혜안과 지도력이 필요하다. 사임은 윤허하지 않겠다. 예산은 뜻대로 하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러시아와 폐하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스톨리핀이 승리했다. 차르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그를 경질할 수 없을 만큼 스톨리핀의 정책은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1907년에서 12년까지 러시아 산업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농민들에게 부여한 인센티브는 농업생산량의 증대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농업생산량이 15% 증가했고, 특히 시베리아는 25%에 달했다. 1912년 러시아의 농업생산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미국-캐나다-아르헨티나를 합친 것보다 30%가 많았다.
스톨리핀의 계획대로 전쟁 없이 개혁이 완성된다면, 제정은 튼튼하고 충성스러운 농민들의 지지 위에 번영할 터였다.
“아주 대단한 의장 나으리시지. 혼자 잘났어!”
하지만 스톨리핀의 단호하고 독선적인 성격은 모든 정파를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혁명가들에 대한 강경하고 잔인한 탄압으로 좌파들과 원수가 됐고, 농업개혁으로 기득권을 빼앗긴 반동파들도 적이 됐다. 두마를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 선거권도 개악한 결과, 자유주의자들의 원망을 샀다. 중앙집권을 추진하는 스톨리핀은 소수민족 자치주의자들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온건한 외교 정책과 군비 절감으로 인해 대외강경파들의 비난도 받았다.
그 결과, 10월당을 제외한 모든 정파와 적대관계였다. 영국식 의회제였다면 이미 불신임을 맞아 내각이 붕괴했겠지만, 오직 차르의 신임만 믿고 개혁을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좋다. 백번 양보해서 국내정책만은 그의 뜻대로 한다고 치자. 하지만 대외정책만은 끌려다니지 않겠다.”
차르는 대외정책만큼은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아시아와 발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 쌍두독수리는 유라시아의 제왕이 되어야 했다.
「짐의 좋은 형제이신 황제 폐하! 유라시아의 천명이 마침내 전환되었습니다. 러시아의 보호와 지도하에, 자주와 독립을 꿈꾸는 유라시아 내륙의 주민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
과연 이선이 일찌감치 ‘예언’한 대로 대청제국이 붕괴했다. 그 빈자리에 북청, 즉 만주-몽골-티베트-동투르키스탄 연합국가가 탄생했다.
그 보호자가 될 나라는 단연 러시아였다. 니콜라이로서는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임페라토르(로마)와 칸(몽골)을 모두 계승한 러시아 쌍두독수리는 마땅히 이들을 보호하고 지도할 의무가 있다.”
차르의 궁정에 ‘아시아 파벌’이 결집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아시아 세력권 확대를 위해, 대한제국과 2차 협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폐하, 아시아 문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건 실익이 부족합니다. 러시아가 청국의 보호자가 되는 건 신생 중국과 적대하는 행위고, 영국의 우려를 살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가 중국 혁명가 따위를 두려워해야 하오? 영국은 티베트에만 간섭하지 않으면 우려하지 않을 거요. 동투르키스탄도 완충지대로 존중해 줄 거요. 러시아가 지배하는 건 몽골과 만주요.”
“하오나…….”
“러시아는 쌍두독수리이니, 한쪽은 유럽을 향하고, 한쪽은 아시아를 향한다. 바로 경이 한 말이 아니오? 아시아로의 진출과 극동의 발전은 20세기 러시아의 사명이오.”
차르는 스톨리핀의 반대를 억눌렀다.
스톨리핀도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사명에 동의했으나, 이는 러시아령 시베리아와 극동의 발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몽골과 만주로의 진출은 실익이 없고, 결국 한국과의 뜻대로 놀아나는 게 아닌지 우려했다.
‘한국은 러시아를 거대한 우산으로 삼아,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배하려는 게 아닌가?’
스톨리핀의 우려와 달리, 차르는 한국을 충실한 하위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한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슬라브-정교회 형제국들 같은 존재였다.
‘발칸동맹을 내세워 튀르크를 유럽에서 몰아내려는 것처럼, 한국을 내세워 중국을 북방에서 영구히 몰아낸다.’
최고 결정권자인 차르가 결심을 굳힌 이상, 협약은 기정사실이었다.
차르의 압력에 굴복한 외무대신 사조노프는 한국 전권대표 이상설과 논의하여 협약 합의문을 도출했다.
1. 러시아제국과 대한제국은 청국의 주권과 영토를 보전하며, 제3국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으로 보호한다.
2. 외몽골 전역, 동경 117도 이서의 내몽골, 북위 44도 이북의 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간주한다. 동경 117도 이동의 내몽골, 북위 44도 이남의 만주는 한국의 세력권으로 간주한다.
3. 몽골과 티베트의 자치를 존중하되, 독립은 허용하지 않는다.
4. 청국에 정변이나 전쟁과 같은 정치적 변동이 발생할 경우, 양국은 공동으로 대응한다.
5. 이 협약은 5년간 유효하며, 5년 후의 정세에 따라 내용을 상호 동의하에 변경할 수 있다.
1912년 7월 15일(율리우스력), 광무 16년 7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따져 보면 러시아와 한국은 중화민국으로부터 청조를 보호하며, 그 세력권을 나눠 가졌다.
2차 한러협약은 비밀조약이었지만, 동맹 당사국인 영국·프랑스·일본에도 사전 통보되어 승인을 받았다.
영국은 청국의 독립과 무역상의 문호개방주의를 해치지 않는 한 이견이 없다고 회답하였고, 프랑스와 일본도 같은 취지로 회답하였다. ‘5국 앙탕트’ 체제는 아시아에서 원활하게 작동되었다.
청국은 러시아와 한국의 공동 세력권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것이었다.
조약은 표면적으로 러시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한국은 그 하위파트너로 만족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5년 뒤, 1917년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아는가?’
이선은 조약문을 보고 빙긋 웃었다. 지금 당장은 러시아가 청국을 보호하고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5년 뒤에는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1910년대는 정세가 급변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1912년 북청의 판도와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