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4
– 175화에 계속 –
2부 175화 아버지와 아들 (2)
광무 16년, 메이지 45년(1912) 8월 29일.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睦仁)가 서거했다. 향년 61세(만 59세). 사인은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였다. 실제 역사보다 한 달을 더 살았지만, 환갑을 보지는 못했다.
급진적인 근대화를 이루어낸 ‘메이지 시대’의 천황으로서는 의외로 서양 문물에 부정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이었으나, 변화한 시대를 받아들이고 근대적 군주상을 충실히 수행했다.
「천황 폐하 붕어(崩御)!」
이튿날, 속보로 세계 각국에 타진되었다. 일본 정부는 애도의 표시로 조기(弔旗)와 상장(喪章)을 내걸었다.
메이지는 그 자체로 한시대의 상징으로서 일본인들의 숭배대상이 되었다. 천황 숭배를 교육받은 일본 국민은 통곡하며 한 시대의 종언을 슬프게 받아들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천황 폐하의 서거에 가장 큰 애도의 뜻을 표하며, 근린이자 동맹국의 슬픔을 함께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유신의 업적을 이루고, 대한과 함께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셨다…….」
대한제국 정부도 메이지의 서거에 애도를 표했다. 에드워드 7세 서거의 전례를 따라 조기를 내걸고, 이선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정중히 조의를 표했다. 일본도 한국의 정중한 조의에 감사를 표했다.
“고균이 조문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애도를 표하고, 새 천황을 알현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이선은 일본 정계에 인맥이 두터운 김옥균을 조문단장으로 파견했다. 단순히 조문과 알현이 목적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중국 정세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황위는 황태자 요시히토(嘉仁)가 즉시 계승했다. 나이 34세, 선량하지만 병약하고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는 황자였다. 그런 점에서 순친왕 이척과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요시히토는 한국에 꽤나 우호적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 선포 1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일본 대표로 방한한 바 있었고, 이는 일본 황태자의 최초 해외 순방이었다. 한국은 답례로 이듬해 메이지유신 40주년 기념행사에 황자 이진을 보냈다. 이진에게는 첫 해외 방문이었다.
“한일 양국은 근린이자 동맹국으로서 우호가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폐하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과연 이웃나라만큼 중요한 나라는 없지요.”
요시히토는 11살 위인 이선에게 매료된 듯했다.
부친인 메이지는 하나뿐인 아들에게 냉랭했다. 메이지는 배우는 속도가 늦고 언행이 엄숙하지 못한 아들에게 엄격하고 냉정했다. 자연히 부자관계는 좋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황실에서 고립되어 있던 요시히토는 이선의 따뜻한 환대와 군주로서의 품격에 기쁨과 존경을 느꼈다.
일본으로 귀국한 요시히토는, 이듬해 방문할 이진을 영접하기 위해 일부러 한국어를 공부할 정도였다.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로선 예외적인 학구열이었다.
‘비록 천황에게 아무런 권력이 없다고 해도, 새 천황이 한국에 우호적인 건 바람직한 일이지.’
한일관계는 근래 최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영일동맹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이 해주육종 북수남진 정책을 취한 이상 한국과 마찰을 빚을 일도 거의 없었다. 일본은 대만을 기점으로 삼아 복건과 절강으로 세력권을 넓혔고, 한국도 이를 지지했다.
러일전쟁 이후 조슈벌과 육군의 힘이 완전히 빠지는 바람에, 일본에는 문민통제와 정당정치가 서서히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30년 전 김옥균의 구상인 ‘일본은 동양의 영국, 한국은 동양의 프랑스’라는 구도가 정말로 갖춰졌다.
실제 역사에서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는 일본제국이었지만, 현재처럼 우호적이라면 관계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메이지의 사인이 서구식 식습관으로 인한 당뇨병악화라. 으음, 나도 슬슬 조심해야겠어.’
이선이 주목한 건 메이지의 사인이었다. 메이지는 말년에 갈수록 육식에 와인을 곁들이는 서구식 식습관을 즐겼고, 승마 외에는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아 성인병을 키웠다. 결국 당뇨의 합병증인 요독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선은 뜨끔했다. 육식과 와인이라면 자신이 메이지보다 더 즐겼을 터였다. 소고기는 식단에서 빠지지 않았고, 특히 포트와인을 매일 저녁마다 입에 달고 살았다. 포르투갈과 수교한 이유가 와인 수입이 목적이냐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인데 술만은 포기 못하겠다. 대신 식습관을 개선하고, 운동 열심히 하자!’
그나마 이선은 운동을 꾸준히 해 온 덕에 건강을 유지했다. 과도한 정무로 피곤함을 느껴도, 매일 최소한 산책과 조깅은 했다.
양반 체면에도 뛰지 않는다는데, 지엄한 황제가 군복 차림으로 궁궐 정원을 뛰어다니는 건 궁인들이 보기에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주말이 되면 서양인이나 시종무관들과 승마, 테니스, 펜싱 등을 함께하곤 했다. 격렬히 몸을 움직이고 나면 힘들긴 해도 성취감이 있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니 예전만 못하구만. 마흔다섯이면 아직 한창 나이인데…….’
어느덧 40대 중반에 이르자, 이선은 점점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 책봉도 이진의 나이가 16세에 이르러 때맞춰 한 것이었지만, 황제의 다양한 의례를 태자에게 일부 맡길 목적도 있었다.
국가의 상징으로서 온갖 다양한 의전행사도 맡고 있는 이선이지만, 나이를 먹어 가며 점차 정무에 집중하길 원했다. 지금도 일부 의례는 순친왕과 의친왕이 대리하고 있었지만, 황제가 필요한 자리들이 많았다.
“태자, 짐을 대신하여 종묘 제례에 임해 주길 바란다.”
“예, 폐하!”
“예성강 철교 준공식도 태자가 짐을 대리해 참석했으면 하는구나.”
“삼가 명을 받듭니다!”
이진은 기꺼이 황제의 대리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를 숭배하는 아들로서는 부친의 짐을 일부나마 대신 져 준다는 것 자체에 만족감을 느꼈다.
‘국가의 상징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걸 미리미리 배워 둬야지.’
이선이 선호하는 교육법은,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는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것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직접적으로 ‘미래의 군주는 이래야 한다, 황족들은 이래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최상급의 교수진이 제공하는 교육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길 원했다.
조선을 계승한 군주로서 유학적 전통도 포기할 수 없으니, 이진은 성균관 교수진으로부터 성리학과 사서삼경 등 유교 경전도 익히긴 했으나, 역시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건 근대학문이었다.
이진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궁중교사가 붙었다. 이들로부터 영어, 프랑스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지리, 역사, 자연과학 등을 익혔다. 일부러 입헌군주국인 영국인, 민주공화국인 미국인과 프랑스인을 택해 입헌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었다.
“만민은 평등하게 태어났습니다. 비록 능력과 재산에 따른 차별은 있으나, 인간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군민공치는 시대적 대세로, 헌법과 의회는 국가의 안정과 진보를 약속합니다.”
이진은 국내학교에 진학한 최초의 황자이기도 했다. 광무 11년, 황족과 종친 자제, 칙임관 이상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황립 광무학교(光武學敎)가 설립되었다. 이진은 광무학교에서 처음으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광무학교의 초대 학장은 영선군 이준용이었다. 근왕(勤王)을 중시하지만 교육을 통한 문명진보론을 신봉하는 이준용은 미래의 황제와 관료들의 교육에 꽤나 공을 들였다.
2대 학장은 총리에서 퇴임한 유길준이 부임했다. 최초의 미국 유학파인 유길준은 군민공치와 입헌을 신봉했고, 군주제와 의회제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황태자 전하의 배움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고 있사오니, 국가의 홍복입니다.”
“고맙소. 대한 최고의 정치학자이자 총리를 역임한 경이 태자의 스승으로 적임이라 생각하오. 각별히 신경 써 주길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유길준은 미국 프린스턴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고 귀국한 이승만을 강사로 영입했다. 김규식처럼 외교관 복귀를 계획했던 이승만은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태자의 교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수락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미국식 민주공화정은 현존하는 정치 체제에서 가장 선진적입니다. 지금은 세계가 영국을 우러러보지만, 우리가 살아갈 20세기에는 미국을 우러러보게 될 것입니다.”
“교수님, 미국은 군주가 없지 않습니까? 대한의 모범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진은 이승만의 가르침에 의문을 표시했다. 대한은 ‘제국’인데, 어찌 공화국인 미국이 모범이 될 수 있냐는 말이었다.
“전하, 좋은 질문이십니다. 미국 대통령은 일종의 선출직 군주에 가깝습니다. 물론 대한은 존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계시기에, 미국식 공화정이 직접적인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미국의 선진적인 제도를 참고할 필요는 있지요. 미국처럼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투표로 권리를 행사한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진은 여전히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릴 적부터 ‘영국식, 미국식, 프랑스식이 좋다’라는 말을 들어온 이진은 군말 없이 받아들였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그런 제도를 가진 나라가 어디 있나? 심지어 유럽이라는 독일이나 러시아는 어떻고? 대한의 황제는 카이저나 차르에 더 가깝지.’
이진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군주는 아버지였고, 다른 나라가 아닌 아버지의 방식을 따르고 싶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에게 정치를 배우고 싶었다.
태자가 된 직후, 이진은 이선에게 청했다.
“아바마마, 부황께서 어리석은 소자에게 통치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살아온 시대와 네가 살아갈 시대는 다르다. 내 방식을 가르쳐 봐야 네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네 스승들의 가르침을 익히도록 해라. 네가 스물이 되면, 그때부터 실무를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이선은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스승으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이하게도 미래인의 기억이 있는 덕에, 특별한 통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어찌 통치법을 가르치겠나?’
이진은 아버지의 거절에 실망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배움을 이어 나갔다.
* * *
9월 8일, 태상황의 환갑을 맞이하여 만수절 행사가 성대하게 행해졌다.
“태상황 폐하, 만수성절을 맞이하여, 소자 선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수무강을 축원드리옵니다.”
“고맙소. 나는 황상의 덕으로 더없이 건강하구려.”
퇴위 후 15년, 어느덧 환갑을 맞이한 태상황은 노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태상황 폐하, 소손 진이 감축드리옵니다.”
“오오, 우리 손자. 네가 어느덧 자라 어엿한 태자가 되었으니, 이 할아비는 여한이 없구나!”
“황공하옵니다. 성수무강하시옵소서!”
퇴위한 태상황과 이선의 관계는 한동안 서먹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장손 이진의 탄생과 성장이 부자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다. 대원군이 아들과의 관계는 애증이어도 손자 완화군을 총애한 것처럼, 태상황도 손자를 특별히 아꼈다.
‘태상황은 내게 좋은 할아버지여도, 좋은 군주는 못 됐지. 부황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지 몰라.’
이선이 할아버지 대원군을 존경과 안타까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가졌던 것과 달리, 이진은 할아버지 태상황을 실패한 군주로 여겼다.
어렸을 때는 왜 한창 나이인 40대 중반에 할아버지가 퇴위하고 아버지가 즉위했는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그런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커서 역사를 배운 다음에야, 이진은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서자라지만, 아버지가 부인의 말만 듣고 장자를 홀대했다고? 그럼에도 아들은 국가를 개조하였는데, 끝내 아들을 시기해서 적국과 내통해 몰아내려고 하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게 예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제위는 덕과 재능이 있는 인물이 올라야 해. 부황과도 같은 분이여야지. 부황을 모범으로, 태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자.’
장손을 아끼는 할아버지가 알게 되면 참으로 실망할 생각을, 이진은 거리낌 없이 했다.
“태자,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느냐?”
“아아, 소손이 태자가 되어 책무가 막중해졌으니, 앞으로 더욱 배움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참으로 기특하구나. 어린 나이에부터 제왕학을 익히게 되었으니, 마치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태상황은 옛 일을 떠올렸다. 군주로서의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채 12세에 즉위하여, 대원군이 섭정하는 기간 동안 제왕학에 매진했던 시절을. 제왕학을 익히면서 대원군의 섭정에 의문을 갖게 되었고, 기나긴 부자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흥, 할아버지께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면 아들에게 밀려나서 뒷방 늙은이가 될 일이 없었겠죠.’
이진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소손은 그저 부친만 바라볼 뿐이니, 어찌 어린 나이에 군주의 책무를 맡게 된 조부님과 비견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말도 잘하는구나.”
조손(祖孫)간에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이선은 빙긋 웃었다. 설마 아들이 할아버지에 대한 경멸감을 숨기고 있으리라곤 그도 미처 생각하진 못했다.
“태상황께서 태자를 아껴주시고, 손자는 조부를 위해 효성을 다하니,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아, 대원군께서 어찌 그토록 손자를 총애하셨는지, 내가 할아버지가 되기 전엔 몰랐다오. 하하하.”
“소자도 언젠가 손자를 보게 될 날이 올 터인데, 기대가 됩니다. 진아, 기다리마.”
“아, 아바마마!”
이진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맞소. 태자가 되었으니 혼례를 염두에 두어야할 터. 생각해둔 바가 있으시오?”
농담과 달리, 이선은 장남의 결혼을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외국 왕실과의 국혼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직 때가 이르옵니다. 그래도 스물은 되어야지요.”
“전례를 생각해보면 슬슬 고려할 때인데…….”
“아직 영친왕도 혼례를 올리지 않았는데, 어찌 조카가 먼저 하겠습니까? 먼저 기다려야지요.”
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오자, 이영은 마시고 있던 잔을 떨어트릴 뻔 했다.
“그래, 영아. 네 나이가 벌써 스물여섯이거늘, 너는 대체 언제 혼례를 올릴 생각이더냐?”
태상황의 물음에 이영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 밖에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그간 학업에 시급하였는지라…….”
“이제 학업도 끝나지 않았느냐. 혼례를 올려야지. 황상, 영친왕의 혼례를 추진해야겠소.”
“예, 마땅히 그래야지요.”
이선은 웃으면서 이영을 쳐다보았다. 이영은 형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고민이었다.
“내년 초에 러시아에서 왕조 건국 300주년 기념행사가 있습니다. 대한에도 초청이 왔지요. 마땅히 황족을 보내야할 터인데, 태자를 보내고자 합니다.”
“부황께서 맡겨주신다면, 소자는 만리길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진은 기뻤다. 자신도 부황처럼 어린 나이에 유럽에 가서 선진문물을 보고 되돌아오고 싶었는데, 마침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니 기쁠 따름이었다.
“영친왕이 조카를 수행해줬으면 하네. 그대는 러시아에 다시 가야할 일이 있지 않은가?”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마땅히 따를 뿐입니다.”
이영은 형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형의 배려에 깊게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