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5
– 176화에 계속 –
2부 176화 서경 평양부
평양은 대한제국 제2도시이자 한민족의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려의 부수도인 서경(西京)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은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았으나, 여전히 제2의 도시였다. 평양은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번영하는 도시였다.
외국인의 입장에서도 평양은 남달라 보였는지, 18세기 청나라 사신으로 온 만주인 아극돈(阿克敦)은 이런 평을 남겼다.
「옥과 금의 공납이 크게 통해 끊어지지 않으니, 평양이 가난해질까 어찌 걱정하리오. 도성이 번성해서 예사스런 곳과 다르다.」
상업을 상대적으로 천시했던 조선도 18세기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부유한 상인이나 큰 장사치는 앉아서 재화를 움직여 남쪽으로는 일본과 통하며 북쪽으로는 연경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끌어들여 더러는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자들도 있다. 이런 자는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이며, 그다음은 평양이다.」
하지만 택리지에는 평양의 번영에 대해서만 언급하지 않는다.
「서북 사람들은 설혹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은 현령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의 습속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한성 사람은 서북 지방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고, 사대부 또한 가서 살지 않는다.」
상업적 번영과 달리, 평양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치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 박탈감이 폭발한 게 홍경래의 난이었다. 홍경래는 ‘서북 사람들의 한’을 자극하여 반란을 도모했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서북은 조선왕조 내내 아웃사이더였다. 한양의 세도가를 향한 서북 주민들의 분노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했다. 조선 후기 최대의 지역 문제는 기호와 서북의 갈등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전환점이 왔다.
고려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평양을 ‘황도(皇都)’ 개경에 버금가는 ‘서도(西都)’로 우대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정책과도 흡사한 측면이 있었으니, 한국이 본격적으로 평양을 우대하기 시작한 것은 조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북진 정책을 추진하면서였다.
대외무역의 증대와 철도교통의 발달은 평양을 상공업 중심지로 떠오르게 했다. 광산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북 일대에 금광 열풍이 불었다. 자연히 부가 축적되고, 도시는 번영하였다.
본래 개성의 송상과 함께 토착자본을 대표하는 동래의 내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이었다.
대한제국에서도 개성, 동래, 평양, 의주가 상업 중심지로 떠올라, 개화의 바람을 탄 신흥 자본가 계층이 등장했다.
「평양은 북으로는 만주와 연경, 남으로는 한양과 동래로 이어진다. 여러 재화가 모여들어 길가의 점포에는 없는 물건이 없으니, 옛 파사(波斯, 페르시아)와 같도다.
…… 평양의 번성은 실로 대한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 높도다, 성상의 덕이여! 크도다, 성상의 은혜여!」
광무 9년(1905)에 출판된 ≪평양지≫에는 예전과 다른 평양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한양 중심의 패권에 억눌려있던 평양 사람들에게 있어, 이선은 역사적인 부흥을 가져온 위대한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갑신경장 이후 서북인의 대대적인 등용, 상공업의 발전, 1894년 평양 전투의 승리, 1902년 서경 선포와 신도시 육성, 러일전쟁기 군수공업지대의 형성과 호황은 모두 이선이 이뤄 낸 성과였다.
고려의 서경 우대정책 이래 이렇게까지 평양에 신경을 써 준 군주는 없었고, 빛나는 승리를 이끌어 낸 지도자도 없었다.
오랫동안 상대적 박탈감을 받아 온 이들에게 있어, 이선은 위대한 영웅 그 자체였다.
“대고구려의 후예, 대한국 만세!”
“광개토대왕의 재래(再來)이신 황제 폐하 만세!”
612년 고구려-수 전쟁 승전 1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평양에서 대대적으로 개최된 건, 공교롭게도 대청제국의 붕괴와 맞물려서였다.
관념적으로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해 왔는데, 정말로 만주 경영을 향한 길이 열린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 평양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은 절정에 달했고, 대한제국과 황제를 열렬히 찬양했다.
이선은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태상황의 만수절 행사가 끝난 후 황실을 대동하고 평양으로 향했다.
* * *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폐하, 온 신민이 환영합니다!”
9월 18일. 황실특별열차가 평양역에 당도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하게 환영했다.
황제가 순행하는 곳마다 환영이 쏟아지기 마련이라지만, 금년 평양 순행은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짐은 그대들의 환영과 충정에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황제가 정중히 감사를 표하자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와아아아아아!”
“만세! 만세! 만만세!”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 천만세에 무궁케 하소서.”
즉석에서 만세삼창과 국가 제창이 이뤄졌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으음, 좀 지나친 감이 있는데. 뭐, 올해는 특별한 해니까.’
개인숭배를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이선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정도의 반응이었다. 일본에서도 천황이 지방 순행을 하면 축제 분위기가 된다지만, 일본의 천황 숭배에 필적할 만한 황제 숭배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선도 결국 사람인지라, 자신을 저렇게 좋아해 주는데 마다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전국적으로 어딜 가나 환영받는다지만, 유독 평양에서는 더욱 존숭을 받으니 이선도 만족스러웠다.
‘역시 부황은 위대해! 우리 역사상 이렇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군주가 또 있었나?’
오히려 감격은 황태자가 더 받았다. 이진은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버지와 신민들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어린 정친왕 이안과 예친왕 이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에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게 느껴졌다.
이선과 황실 인사들이 역을 벗어날 때까지, 열광은 끊이지 않았다.
평양역에서 흥경궁까지는 전차가 놓여있었다. 평양은 황성 다음으로 도시계획이 이뤄졌고, 전차가 부설되었다.
전차가 움직이는 동안 도로에 도열해 있던 주민들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거듭 만세를 외쳤다.
“저 사람들, 동원한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성상을 흠모하여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입니다.”
서경유수 이채연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당대 최고의 도시계획 전문가인 이채연은 서울 황성부에 이어 서경 평양부의 육성계획도 맡았다.
“아니라면 다행이군. 좋소, 그럼 완공된 서경을 보러 갑시다.”
1902년 흥경궁 건설을 시작으로, 10년간의 서경 육성계획은 마침내 완공되었다.
전통적인 평양 시가지 서쪽의 너른 들판에 신도시가 형성되어, 격자형(格子刑, 바둑판 모양) 도시계획에 맞춘 근대적 도시가 들어섰다.
서울 도시계획이 파리와 빈을 모델로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갖추었다면, 서경 신도시는 베를린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모델로 근대적 도시를 추구했다.
“오오, 마치 운터 덴 린덴에 온 것 같소.”
“아니, 그보단 네바강변의 넵스키 대로 같은데?”
서경 신도시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경(柳京)’이라는 이름처럼 대동강변을 따라 잘 조성된 버드나무와 이오니아 양식의 웅장한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관청 중심가를 보면서, 베를린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보리수나무 아래)’이나 페테르부르크 중심가인 ‘넵스키 대로(Nevskii prospekt)’를 떠올렸다.
관청 중심가에는 서경유수관(평양부청), 평안남도 향회, 평양법원, 평양 주둔 4사단 사령부, 평양우체국, 국립 평양대학교, 관립 자혜병원, 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박물관, 대경기장이 완공되었다.
고대 아테네를 모범으로 삼은 프로이센 고전주의(Preussischer Klassizismus)가 고스란히 평양에 이식된 것 같았다.
서경 신도시는 단순히 도시 외관에만 신경 쓴 게 아니라, 사회간접자본도 동양 최고 수준으로 갖춰졌다. 전기와 수도가 모든 구역에 공급됐다. 도로에는 전차와 가로등이 밤늦게까지 불을 밝혔고, 어디든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일정 구역마다 관청, 소학교, 우체국, 경찰서, 소방서, 보건소가 설치되어 편의를 갖추었다.
“훌륭하오. 무릇 도시라면 이래야지. 경들의 노고가 많았소. 서경 건설에 관여한 모든 이들이라면, 유수에서 인부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훈포장(勳褒章)과 포상을 수여하겠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서경 신도시를 살펴본 이선은 만족감을 표했다. 그의 이상을 구현할 계획도시로 부족함이 없었다.
당초 목표한 대로 행정, 입법, 사법, 군사, 교통, 교육, 의료, 문화를 한자리에 모은 계획도시였다.
서경은 북방, 즉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창이었다.
대청제국이 붕괴하여 대한제국의 만주 경영이 본격화되고, 남만주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이어져 유라시아와 연결된 지금,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족함이 없었다.
즉위 이래 평양을 종종 찾은 이선이었지만, 올해는 특별히 한 달 이상 체류를 했다. 흥경궁에서 머무르며 각종 행사를 참관하고, 의주까지 시찰을 다녀왔다.
평양에서는 10월이 되면 더욱 특별했다.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단군이 비공식적인 국조(國祖)로 격상됐고,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가 확립되었다. 대종교는 단군이 나라를 열었다고 알려진 음력 10월 3일을 대신해서 양력 10월 3일을 단군기원절로 삼았다.
이는 조청일전쟁 평양전투 승전기념일인 10월 17일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매년 10월마다 민족주의자들이 평양에 모여들면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특히 올해는 고수전쟁 승전 13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으니 더욱 그랬다.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승리, 대수전쟁 승전 1300주년을 맞이하여 짐은 무한한 영광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 수나라 113만 대군은 고구려의 단호한 저항 앞에 산산조각 나고야 말았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얕본 결과 수나라는 망하고 말았으니, 패권을 내세워 독립을 침해하려는 자들에게 똑똑한 교훈이 되었다!”
10월 17일, 승전기념일을 맞이하여 이선은 서경 신도시에 건설된 경기장에서 연설을 했다. 입장권을 얻은 수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18년 전, 청나라의 침략도 바로 이 평양에서 저지되었다.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오만은 바로 여기서 격퇴되었으니, 대청국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년이 지나, 대청국은 붕괴했으나 대한국은 번영하고 있다. 수나라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를 노리는 침략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보여 주었도다! 그렇다! 대한은 결코 침략자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영구히 자주독립을 지켜 낼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대한국 만세!”
영원한 자주독립을 천명하는 황제의 연설에 열렬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이윽고 평양을 지키는 제4사단 병사들의 열병식이 뒤따랐다. 근위사단 다음가는 최고 정예로 평가받는 4사단의 행진에 평양 주민들은 기뻐하며 환호했다.
열병식이 끝난 후, 이선은 다시 단상에 올랐다.
“대한은 자주와 독립, 평화와 정의를 존중하는 나라이다. 비록 한때 청나라가 우리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 주었으나, 평양과 북경의 승리로 치욕은 씻어 냈다. 만주는 더 이상 대한의 적이 아니며, 소중한 근린이다. 우리는 덕으로 이웃을 감싸 안는다. 대한은 대청의 독립을 보장하며, 형제지국으로서 영원하리라. 동맹 영국과 우방 아라사도 우리와 함께한다. 북방은 평화와 협화 위에서 함께 번영할 것이다! 짐의 국민들이여, 새로운 시대가 우리를 기다린다! 진취적으로 미래를 개척하자!”
짝짝짝짝짝!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는 황제의 연설에 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예로부터 제국에는 두 개의 수도가 있었다. 중국의 장안과 낙양, 북경과 남경이 그러하다. 이는 비단 중국만의 사례가 아니다. 일본의 교토와 도쿄가 있고,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제국을 지향했던 고려에도 개경과 서경이란 전례가 있다. 대한도 당당한 제국의 일원이 되었으니, 전례를 감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짐은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서경, 평양은 북방, 대륙으로 향하는 대한의 창이다. 단언컨대, 대한의 미래는 북방에 있다. 서경은 북방의 수도이자, 대한의 양경(兩京)으로서 길이 번영하리라! 서경 평양부를 대한국의 양경으로 선포한다! 이제 서경 평양부의 지위는 서울 황성부와 같다!”
부수도에서 서울과 대등한 양경으로. 황제의 선언에 평양 사람들은 열광이 절정에 달했다.
“오오, 평양이 황성과 대등한 수도라니!”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귀빈석에 앉아 있던 박영효는 서경유수 이채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성상께서 평양으로 천도를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중요한 사안을 어찌 내각과의 협의도 없이 하시겠습니까?”
이선의 본심으로 말하자면, 천도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500년 수도인 서울에서 천도를 감행하기에는 지난한 정치적 갈등이 벌어질 게 분명하므로, 양경이라는 형식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흠, 양경제도라면 이미 내각에서 동의한 바가 있지만……. 성상께서 평양을 이렇게까지 우대하시다니, 역시 청국의 붕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인가.”
이선은 전례와 제국의 격을 고려하여 양경을 선포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이고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선택했다.
대청제국의 붕괴, 남만주 세력권 확보는 북방으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 서울보다는 200km 북쪽에 있는 평양이 북방으로 나아가기에 더 수월했다.
평양은 대동강을 따라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신도시를 육성하기가 더욱 수월했다. 전통사회에서는 수운이라는 측면에서 평양이 서울보다 밀렸지만, 철도교통이 확립된 근대에는 교통의 요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500년간 기득권을 누려 온 경화사족의 서울을 대신해 신흥계층을 대표하는 평양을 육성하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개화당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기는 했지만, 선왕의 사위이자 명문 반남 박문 출신인 박영효가 상징적이듯, 이들의 본질은 경화사족이었다.
이선은 지난 30년간 국가를 이끌어 온 개화당의 역사적 사명이 끝나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성장을 희망했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짐은 흥경궁을 행재(行在)로 삼아, 내년부터 매년 3개월은 서경에서 체류하며 북방의 정책을 관할하고자 한다!”
이선의 선언은 단순히 양경 선포가 아니라, 1912년 이후의 북방 정책을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대청제국의 붕괴와 만주 이전, 그리고 세계대전과 러시아제국의 변동을 대비하기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