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7
– 178화에 계속 –
2부 178화 강박 관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는 네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올가(올랴), 타티야나(타냐), 마리야(마샤), 아나스타샤(나스챠), 알렉세이(알로샤).
5남매는 우애가 남달랐고, 서로를 아끼고 보듬었다. 니콜라이도 군주로서는 낙제여도 가장으로서는 더없이 모범적이었기에, 자식들에게 훌륭한 아버지였다.
“너희도 잘 알겠지만, 한국 황제는 너희들의 증조할아버지와 나를 암살에서 막은 은인이자 친우다. 그는 내 형제와도 같으니, 황태자는 조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너희들도 황태자를 사촌처럼 생각하고 친절히 대해 주거라.”
차르의 소개에 이진은 황송해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론이죠, 아버지. 알로샤의 치료도 한국 황제께서 도와주셨잖아요. 어떻게 그 은혜를 잊겠어요? 황태자 전하, 처음 뵙지만 편히 대해 주세요. 아버지 말씀대로 우리는 사촌과도 같으니까.”
장녀 올가가 싹싹한 태도로 화답했다. 올가는 맏이답게 점잖고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총명하고 리더십이 있어서 황후 알렉산드라로부터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영광입니다, 여대공 전하. 기꺼이 따르지요.”
“좋아요. 네 생각은 어때, 타냐?”
“한국 황제 폐하는 우리의 은인이니까, 아버지와 언니의 뜻을 따라야지.”
차녀 타티야나는 네 자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황실에서 무도회가 열리면 그녀와 파트너가 되려는 귀족 청년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다만 성격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라, 자신을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타냐, 황태자는 너와 나이가 같더구나. 황태자가 러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네가 특별히 신경 써 주렴.”
“예, 아버지. 황태자 전하, 잘 부탁드려요.”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들의 환대에 이진은 기뻤다. 특히 타티야나 공주는 동양인의 관점에서 봐도 아름다웠다. 적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 서구형이라기보다는 동서양의 미가 조화된 듯한 외모와 이목구비, 큰 키와 날씬한 체구.
이영의 ‘그녀’처럼 놀랍도록 빼어난 미인은 아닐지라도, 공주라는 후광까지 더해지니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올가와 타티야나라면, 예브게니 오네긴이 떠오르네요. 거기서도 올랴와 타냐는 사이좋은 자매죠.”
“전하, 푸시킨을 읽어 보셨어요?”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의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해 언급하자, 올가와 타티야나가 반가워했다.
“네, 러시아 역사와 문학에 대해서도 공부했습니다. 러시아에선 특히 푸시킨이 사랑받는다고.”
“맞아요! 부모님께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올랴와 타냐처럼 되길 바란다고 지은 이름이에요. 그렇죠, 아버지?”
“그래, 맞다. 돌이켜 보면 이선은 어릴 적부터 놀랍도록 박학다식했지. 러시아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 과연 한국인들은 교육을 열심히 한다더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답구나!”
“정말 대단하네요.”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부황과 비견될 수 있겠습니까?”
차르와 공주들의 칭찬에 이진은 겸손함을 표했지만, 내심 만족스러웠다. 러시아에 오기 전 숙부 이영과 함께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제 부황께서 알렉세이 황태자 전하의 치료를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황태자께서는 건강하신지요?”
공주들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극비사안이었다. 이선도 비밀을 지켜 줬기에, 이진도 치료를 도와줬다는 정도만 알았지 혈우병인건 몰랐다.
니콜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설명하란 의미였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건강하고 활달한 아이예요.”
“오, 그럼 저도 전하께 인사 드려야겠습니다. 장차 러시아를 다스릴 분이시니까요.”
“예, 물론이죠. 그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사실 알렉세이의 건강은 썩 좋지 못했다. 작년 가을, 여행을 가서 배를 타며 놀다가 실수로 노에 부딪혔다. 허벅지에 상처가 나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하마터면 생사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쫓겨난 라스푸틴을 대신해 치료사로 떠오른 부랴트인 약제사 바드마예프와 한국 한의사가 특별히 제조한 약과 식습관 개선으로 일시적으로 고통을 줄여 주었지만, 혈우병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그조차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 러시아 황실에서 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다행히도 알렉세이는 회복되었지만, 하마터면 아들을 잃을 뻔한 차르 부부는 당분간 알렉세이가 혼자서 걷는 것조차 금지했다. 황태자의 시종 역할을 하는 해군 수병이 안거나 업고 다녔다.
“태자, 러시아에 머무르는 동안 가족처럼 편하게 지내길 바라오. 그대는 내 조카나 다름없으니.”
니콜라이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차르의 말에 이진은 머리를 숙이며 감복했다.
“폐하께서 저를 조카처럼 생각해 주신다니, 저 역시 폐하를 백부님처럼 모시고 따르겠습니다.”
“좋소, 좋아. 그럼 또 만납시다. 올랴, 타냐. 황후와 마샤, 나스챠에게도 진을 소개해 주거라.”
“예, 아버지.”
니콜라이의 배려 덕에, 이진은 러시아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으며 황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이선이 알렉세이의 치료를 도와준 덕에, 황후 알렉산드라 역시 이선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황후는 더욱 적극적으로 은인의 아들을 반겼다.
“한국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라면 언제든지 방문을 환영하지요. 아예 러시아에 체류하는 동안 궁전에서 머무르는 건 어때요?”
“너무나 감사드립니다만, 그렇게까지 실례를 끼칠 수는 있겠습니까. 제가 황궁에서 지내면 본국에서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공사관에서 머무르겠습니다.”
“실례라니, 당치도 않은 말씀. 정 그렇다면, 자주 황궁을 방문해서 우리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 줘요.”
“예, 황후 폐하.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덕분에 이진은 공주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공주들도 ‘영국 사촌’, ‘독일 사촌’, ‘덴마크 사촌’에 이어 ‘한국 사촌’이 생긴 걸 반가워했다. 이진과 공주들은 서로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진, 한국은 어떤 나라에요?”
“러시아에 비하면 크기는 작지만,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근래에는 부황의 통치하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요.”
이진은 자부심을 담아 한국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쉽게 와닿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도 러시아의 이웃나라였다. 근래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러시아와 ‘슬라브-정교회 형제국가들’만큼 좋았다.
“진은 프랑스어도 참 잘하네요. 러시아 귀족사회에선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쓰지요. 한국도 그런가요?”
“음, 그건 아닙니다. 전 어릴 적부터 특별히 교육을 받아서. 사실 한국에서 서양 언어를 구사하는 건 드물지요. 만약 한문을 외국어라고 분류한다면, 한국 지식인들은 대부분 한문을 읽고 쓸 줄 압니다.”
이진이나 이영은 어릴 적부터 특별교육을 받아 영어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다. 유럽 상류층 사이에선 프랑스어가 공용어였고, 특히 문화사대주의가 심한 러시아 귀족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프랑스어 구사능력이 교양의 척도였다.
“참, 그러고 보니 진과 함께 온 대공께서 러시아 귀족 여인과 결혼한다면서요? 한국 황제께서 허락하신 건가요?”
“예, 부황도 숙부님의 결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와, 놀라운 일이에요. 한국은 동양이지만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군요.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엄청난 화젯거리에요.”
그럴 법도 했다. 이미 외교관 이위종이 러시아 귀족인 엘리자베타 놀켄과 결혼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한국 왕족과의 결혼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러시아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서 동양인과의 혼혈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러시아 귀족 중의 상당수는 그 뿌리가 몽골-타타르에 있었다. 19세기 들어 러시아에 복속된 캅카스, 투르키스탄의 무슬림 귀족들이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례도 충분히 있었다.
러시아령 극동에서는 더욱 흔한 일이라, 러시아인과 몽골-퉁구스계의 혼인이 빈번했다.
하지만 러시아제국에 속하지 않은 동양 국가의 왕족과 러시아 귀족이 결혼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영이 엄청난 부자라 여자가 돈에 넘어갔다는 둥, 브론스키 장군이 차르와 친밀한 한국 황제와 사돈을 맺고 싶어서 무리수를 뒀다는 둥 루머가 떠돌았다.
“숙부님은 현명하고 성실한 분입니다. 숙모님 되실 분도 아름답고 총명한 분이고요. 분명 국적과 신분과 관계없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흐음, 그럼 진도 기회가 되면 외국 여인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가요?”
“마샤, 그런 질문은 실례잖니.”
셋째 마리야의 물음에 올가가 한마디 했다. 이진은 답하기가 난처했지만, 곧 단호하게 답했다.
“안타깝지만, 황위에 오를 사람은 그러기가 어렵죠. 아직 한국에서는, 국민이 외국인 황후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이진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그는 러시아 황실의 따뜻한 환대에 크게 감복한 상태였다.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황실보다 더 인간적인 친밀감을 주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있는 숙부가 부럽기는 해.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공주에게 청혼하여 로마노프 황가의 일원이 되고 싶지.’
하지만 나이가 아직 어리다고 해도, 이진은 황태자였다.
‘제위에 오르기 위해선, 책잡히는 일을 만들면 안 되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국민은 외국인 황후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거야. 뜻대로 혼인을 할 수 없는 건 러시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유럽과는 정반대네요. 여기는 무조건 외국 왕족들과 결혼하길 바라거든요.”
유럽에서는 왕족은 왕족하고만 결혼이 가능했기에, 자국 귀족과의 결혼도 귀천상혼으로 여겨 삼갔다. 당장 미하일 대공이 사랑하는 여인도 자국 귀족이었지만,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르는 반대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비 조피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사랑하여 결혼하였음에도, 백작가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맞아, 꼭 외국 왕족이랑 결혼하지 않으면 좋겠어. 우리는 러시아를 떠나고 싶지 않은데.”
올가와 타티야나는 혼령기에 접어들고 있었기에, 혼사가 들어왔다. 러시아 공주들은 유럽 왕가에게 있어 최고의 신붓감이었다.
올가에게는 루마니아 왕태자 카롤이, 타티야나에게는 세르비아 왕태자 알렉산다르가 구혼했다.
하지만 러시아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올가와 타티야나는 구혼을 거절했다. 특히 아픈 동생 알렉세이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정략결혼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 시대의 군주로서 예외적으로 자상한 아버지였고, 딸들이 원하는 대로 연애결혼을 하길 바랐다.
“그런데, 예전에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대요. 아버지는 한국 황제께서 러시아 황실과 혼인을 하길 바랐는데, 바로 진과 같은 이유로 거절하셨다죠. 그래서 아버지 말씀하시길, 그럼 장차 사돈이 되자고 하셨대요.”
“에이, 진짜로? 언니, 아버지가 정말 그랬어?”
“나도 어머니에게 들었어.”
1896년 이선이 러시아에 사절단으로 방문했을 때, 그런 말이 오고 간 적은 있었다. 이진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진은 동생이 많죠?”
“예. 남동생…… 둘, 여동생 셋.”
숫자를 세는 이진의 목소리가 묘했다. 여전히 이안은 아우로 여기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동기(同氣)를 사랑하라고 명하였으니 존중했다.
“그럼 동생 중의 한 사람이 결혼할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러시아를 떠나고 싶지 않은데, 한국은 너무 멀어!”
“그 왕자더러 러시아에 오라고 하면 되지!”
“오호라, 그런 방법이 있네?”
‘은은 공주들에 비해 너무 어리고, 그럼 안이 국혼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긴 안은 계승권에서 거리가 있으니까 그래도 되겠지. 숙부님처럼. 하지만 안이 저 강력한 러시아 황실을 처가로 업게 된다면…….’
자매들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진은 공주들의 말이 신경 쓰였다.
‘아냐, 설마. 부황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러시아 황가랑 국혼을 해도 나나 은이 해야 맞지. 혼혈아인 건 상관없지만, 기독교 국가에서 서자는 인정받지 못하잖아? 하물며 안의 어머니는 러시아에선 정치범이었잖아. 저쪽에서도 절대 못 받아들일 일이지.’
이진의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쳤다가, 문득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이안을 동기로 아끼고자 했는데, 감정적으로는 계속 잠재적인 경쟁자로 받아들였다. 본능적인 경쟁의식이었다.
‘저들 자매가 서로를 아끼는 것처럼, 나도 동생들을 아껴야 해. ……그래도 저들은 이복이 아니니까 저럴 수 있지. 이복이라면 저럴 수 있겠어? …… 아냐,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부황께서 순친왕, 의친왕, 영친왕을 아끼는 걸 본받아야 해.’
이진은 남모를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이선이 젊은 시절에 국가의 멸망을 막고 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면, 이진은 계승에 대한 강박관념이었다. 위대한 부황을 본받아야 하는데, 자신은 너무 작고 초라한 것 같았다. 자신이 아버지의 업적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진은 니콜라이에게 인간적 공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니콜라이 역시 위대한 황제인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본받아야 하지만, 자신은 제국을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 강박관념은 니콜라이에게 거듭 무리수를 두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되었으니, 진의 고민이 많겠구나.”
조카처럼 대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듯, 니콜라이도 이진을 친밀하게 대했다.
“능력은 부족하나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짐도 처음 즉위했을 때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너무나도 위대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초라하고 어리석게 보였지. 네 부친은 한국에서 표트르 대제나 알렉산드르 2세에 비견될 만큼 많은 업적을 세웠다고 들었다. 그러니 네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이해가 된다.”
“폐하…….”
“네 말이 맞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위대한 황제와 비교해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 너는 네 나름대로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면 된다.”
“감사합니다. 폐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니콜라이의 공감과 격려에 이진은 감격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친에게서도 듣지 못한 위로였다. ‘위대한 선조를 두었지만 자신은 평범하다고 느끼는’ 제위계승자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