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498
– 179화에 계속 –
2부 179화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1913년 2월 21일, 그레고리력 3월 6일 목요일.
로마노프 왕가 3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1613년 2월 21일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즉위한 이래, 로마노프 왕조는 꼭 300년이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시기에 이르러 낙후했던 러시아는 제국을 자처할 만큼 충분히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했다.
표트르 대제 이래 14대 황제, 로마노프 왕조 18번째 군주인 니콜라이 2세는 기쁜 마음으로 300주년을 맞이했다.
「류리크와 블라디미르 대공의 계승자, 미하일 1세와 표트르 대제의 후손인 짐은 위대한 왕조의 300주년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왕좌에 계셨던 선조들과 러시아의 자식들의 헌신으로 위대한 러시아가 건설되었다. 주님의 은총과 전사들의 헌신, 국민의 단결로 제국은 영원하리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온통 300주년을 기념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거리는 온통 백-청-적의 국기 색상으로 장식되었다. 미하일 1세 이래 역대 황제들의 대형 초상화가 걸리고,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과 황제들의 동상에는 리본과 화환으로 장식됐다. 상점과 전차의 위에는 러시아 국가인 ‘Боже, Царя храни(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가 새겨졌다.
가장 압권은 거대한 오벨리스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쌍두독수리였다. 왕관을 쓴 쌍두독수리에는 ‘1613–1913’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프로파간다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추운 날씨였지만, 수많은 사람이 희년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제국 전체의 고위인사들이 페테르부르크에 모여들었다.
로마노프의 대공들, 명문 귀족들, 대신과 고위관료들, 육군 장성과 해군 제독들, 국무원과 두마와 젬스트보의 의원들, 즉 ‘러시아의 통치계급’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민족제국 러시아를 상징하는 발트와 폴란드의 공작들, 캅카스의 제후들, 투르키스탄 히바의 칸과 부하라의 아미르, 유라시아의 부족장들, 수많은 민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들, 러시아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온 정교회 주교들, 무슬림 이맘, 유대 랍비, 불교 승려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
외국에서 보낸 특사들도 대열에 있었다. 대한제국 사절단도 그중의 일부였다.
“황제 폐하 만세!”
“자비로운 어버이 차르 만세!”
“로마노프 왕조 만세!”
“러시아 제국 만세!”
통치계급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국민도 축하 대열에 합류했다. 언제 혁명의 소용돌이가 쳤냐는 듯, 국민은 열광적으로 왕조 300주년을 축하했다.
근위대의 행진에 이어 황제와 황태자, 황후와 네 공주가 탄 마차가 대로에 모습을 드러내자 열광은 절정에 달했다.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강인하고 강대한 군주여, 우리의 영광 위에 군림하소서!”
“적들의 두려움 위에 군림하소서. 차르는 정교회의 수호자이시니. 하느님, 차르를 보호하소서!”
국가 제창과 만세가 끊이지 않았다. 차르가 손을 들며 화답하자, 개중에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치는 이도 있었다.
1906년 혁명을 관찰했던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
“분명히 몇 년 전만 해도 차르를 타도하라는 붉은 깃발이 휘날렸지 않았나?”
“그랬지. 하지만 러시아인들의 본질은 차르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라고.”
“이 분위기로 봐선, 제정이 영원불멸할 것 같군.”
유럽 대부분 국가가 군주정이었지만,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이런 열광적인 충성은 없어 보였다. 군주와 국민의 단결이 강하다는 영국에서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차르 일가에 이어, 멋진 제복을 입은 관료와 군인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이 카잔 대성당 앞에 깔린 붉은 융단 위를 지나갔다. 차르가 성당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만세는 끊이지 않았다.
기념행사는 일요일까지 4일 내내 계속되었다. 근위대의 열병식, 화려한 무도회, 민족대표와의 참관 등 행사가 잇달았다.
고려인 대표단은 집단체조와 전통무예를 선보였는데, 대한제국 사절단도 참석하여 박수를 보냈다.
서로는 폴란드에서 동으로는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민족제국의 대표들이 차르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보면서 이진은 감탄했다.
아직 해외경험이 적은 이진으로서는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 숭배도 대단했지만, 러시아의 차르 숭배는 엄청난 규모가 더해지니 비견될 만한 나라가 없어 보였다.
“정말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사랑하는군요! 군주와 국민이 이토록 일치단결하다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닙니까?”
이진도 열광적인 300주년 기념행사에 완전히 매료된 듯이 외쳤다.
“모름지기 제국이란 이런 것이로군요. 국민은 군주를 존숭하고, 군주는 국민을 사랑하니 진정 군민일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이진의 곁에 있는 이영과 이상설, 이위종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1906년 혁명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로서는 러시아 전제정이 얼마나 위태로운 순간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의 열기를 차갑게 식게 만들자니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왜 부황께서 어릴 적부터 러시아를 우방으로 삼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열강 중에서 대한에 이렇게 우호적인 나라가 또 있겠습니까?”
이진은 진정으로 러시아에 감화된 것 같았다. 차르와 황실의 환대에 이어, 제국의 위용과 국민의 열광을 보고 난 직후니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니콜라이가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간에, 이진의 감정은 러시아를 향해 기울어졌다.
“전하, 물론 러시아는 대한의 소중한 우방입니다. 영토의 방대함과 군사력의 막강함도 대단하지요.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가보면 또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작금의 세계를 선도하고 대표하는 나라는, 단연코 이 3개국입니다.”
이영의 말에 이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불독 3국이 막강하다는 건 그도 익히 배워 알고 있었다.
“예, 물론 그 나라들에서도 배울 점이 많겠지요.”
“독일의 기술, 학문, 육군, 법제. 프랑스의 문화, 민법, 애국심, 국민교육. 영국의 공업, 해군, 의회, 입헌군주제는 대한이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점들을 살피시길 성상께선 원하고 계실 겁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를 최고의 우방으로 여기며, 이선은 차르와 사적으로도 친밀한 관계. 하지만 러시아를 모범으로 삼지는 않았다. 표트르 대제의 대개혁을 본받는다는 말은 해도, 현재의 러시아를 본받자는 말은 없었다.
황형의 뜻을 짐작하고 있는 이영은 조카에게 일깨워 주었다.
“숙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앞으로 견문을 많이 넓히고 돌아가야지요.”
부황이 원하는 바가 그렇다면, 이진은 물론 따를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이진은 본능적으로 러시아가 끌렸다. 거대한 제국의 기념행사는 이진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경험이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멋진 나라를 다스리고 계시군요. 폐하의 조카가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구나. 네 부친에 이어 네가 제위에 오른다면, 우리 두 나라의 우애는 영원할 것이다.”
이진의 찬사에 니콜라이는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이런 종류의 찬사라면 이선도 아낌없이 행했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이선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적 찬사라면, 아직 어린 이진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말했다.
이 또한 외교라 할 수 있었으나, 아직 이진이 배워야 할 길은 멀었다.
* * *
1913년 봄, 300주년을 맞이한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는 절정에 달해있는 것처럼 보였다.
러일전쟁과 혁명의 위기를 딛고, 스톨리핀의 지휘 아래 러시아의 개혁이 착착 진행되었다.
농업과 공업의 발전은 1913년 현재 대호황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의 농업생산량은 세계 1위고, 공업생산량도 미국·영국·독일에 이어 세계 4위였다. 미국의 막대한 생산력이 유럽인들에게 와닿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열강 중 3위로 여겨졌다.
“러시아 국채에 투자를 하라고. 매년 안정적으로 5%의 이익은 남길 수 있어.”
러시아 토착자본은 아직 미약했지만, 공업의 발전에 따른 해외자본의 투자도 급증했다. 러시아 국채는 런던과 파리 금융가에서 가장 선호하는 안전자산 중 하나였다.
외교적으로도 크림전쟁 이래 오랜 고립을 딛고, 삼국협상의 일원이었다. 프랑스는 확고한 동맹이었고, 오랜 숙적이었던 영국과도 협력관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는 발칸을 놓고 경쟁관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을 더욱 만족시키는 건, 러시아가 배후에서 조종한 발칸동맹이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불가리아 연합군, 터키 발칸통치의 거점 살로니카를 함락!」
「불가리아군, 터키군을 대파! 콘스탄티노플에서 불과 30km 떨어진 차탈차 전선까지 전진!」
「그리스 해군, 터키 해군을 섬멸하고 에게 해의 섬들을 해방!」
「세르비아군, 마케도니아 전역에서 터키군을 몰아내고 알바니아로 진격!」
「불가리아-세르비아 연합군, 터키의 옛수도인 아드리아노플을 포위!」
당초 예상과 달리,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몬테네그로 동맹은 단기간에 오스만 군대를 대파했다.
특히 자치를 얻고 35년, 독립을 선언한 지는 불과 4년 밖에 안 된 불가리아의 선전은 놀라울 정도였다. 인구 480만에 불과한 불가리아에서, 단기간에 병력을 45만이나 동원했다. 성년 남성들은 거의 동원되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발칸의 프로이센’이라는 별칭은 과언이 아니었다.
“불가리아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480만 인구에서 45만을 단기간에 동원하다니, 이런 동원제도는 연구할 가치가 있네.”
주러시아 대한제국 무관 유동열 부령이 발칸전쟁의 관전무관으로 급파됐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측 관전무관을 지낸 바 있는 유동열은 친러국가인 불가리아 측 관전무관이었다. 그의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은 슬라브인들에게 환영받았다.
“30년 전에 유길준 대감이 중립론을 제시하면서, 오스만의 자치국인 불가리아를 참고사례로 꼽은 바 있지요. 조선이나 불가리아나 단기간에 이렇게 국력을 신장시키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35년 만에 발발한 대규모 전쟁에, 전 유럽의 특파원이 모여들었다. 제국익문사 유럽특파원 조한민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불가리아에서도 한국의 승리는 연구된 바 있습니다. 한국이 옛 종주국인 청국을 무찌르고 수도 북경까지 진격한 것처럼, 불가리아도 옛 종주국인 오스만을 무찌르고 차리그라드(콘스탄티노플)까지 왔습니다!”
지식인처럼 보이는 불가리아 장교가 한국인들에게 우호를 표했다. 한국의 승리가 모범 사례로 여겨진다는 말에, 유동열도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과연 두 나라 사이에는 비슷한 측면이 많습니다. 귀국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민족해방을 내걸고 시작한 발칸전쟁은, ‘약소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기에는 잔혹한 양상을 보였다.
오스만의 수백 년 압제와 수탈에 악감정을 품고 있는 발칸 국가들은, 점령지의 무슬림들을 터키 부역자로 몰아 학살하고 추방했다. 피에 피를 씻는 악순환이었다.
이슬람제국인 오스만의 악행은 크게 부풀려져도, 같은 기독교라는 의식 때문에 발칸국가들의 악행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러시아 언론들이 심했는데,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 러시아 출신 기자가 있었다.
「발칸전쟁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대리전에 불과하다. 발칸동맹은 러시아제국의 팽창을 대리해 주는 소(小)제국주의 국가들일 뿐이다. 이들은 기독교 문명을 내걸고 터키인들을 몰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행태가 문명적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피로 피를 씻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탐욕스러운 국가들은 터키를 무찌르고 나면, 이제 전리품을 두고 서로 물어뜯을 것이다. 발칸의 어리석은 행위는 반드시 더 큰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차이퉁의 특파원, 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 레프 트로츠키는 발칸전쟁의 악행을 고발하고, 발칸위기가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리라고 암시했다.
망명 중인 전직 혁명가이자 현직 기자의 고발에,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운 러시아 언론들은 ‘근거 없는 공격일 뿐!’이라고 받아쳤다.
러시아는 마침내 범슬라브주의의 꿈, 콘스탄티노플이 정교회가 수복하리라는 꿈이 이뤄지리라고 도취되어 있었다.
“만약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진입하면, 그 즉시 전쟁이오! 결코 용납하지 않겠소!”
“세르비아군은 즉시 알바니아에서 철수하시오! 이 이상 진격은 허용하지 않겠소!”
러시아 국무회의 의장 스톨리핀은 범슬라브주의적 환상에 도취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발칸동맹을 압박했다.
불가리아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영국과 독일을 자극할 것이고, 세르비아군의 알바니아 점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각오하게 할 것이다. 기껏 이뤄놓은 평화체제가 흔들릴 수 있었다.
물주인 러시아 정부의 압박에도 불가리아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지만, 연전연패하던 오스만 군대도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서 수도를 지켜 냈다.
“도대체 스톨리핀은 누구 편이냐? 왜 터키와 오스트리아 편을 들고 있는 거냐?”
범슬라브주의자와 군부의 불만이 쏟아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의 알바니아 진격에 불만을 품고 위협을 가하자, 러시아군은 부분동원령을 내려 오스트리아를 압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순간에 전쟁 위기가 닥칠 판이었다. 러시아군의 부분동원령은 스톨리핀의 결사반대로 취소되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러시아의 국익을 고려할 뿐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러시아에 필요한 건 평화, 20년간의 평화다!”
스톨리핀은 군부를 주저앉히고, 대대적인 군비 증액을 요구한 1913년도 예산도 거침없이 깎아 버렸다.
‘20년간의 평화’를 향한 스톨리핀의 신념은 발칸동맹의 연전연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스톨리핀이 수상으로 있는 동안은, 러시아가 발칸을 이유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어 보였다.
바로 그 때문에, 스톨리핀의 몰락이 다가왔다. 이미 대대적인 농지개혁으로 반동파 귀족들과 대지주들의 불만을 산 스톨리핀이었다. 여기에 군부와도 척을 지고, 발칸전쟁으로 범슬라브주의자들의 비난도 받았다. 강력한 탄압으로 사회주의자들과는 원수였고, 의회 해산과 선거법 개정으로 자유주의자들과도 갈라졌다.
모든 정파와 적대하고도 스톨리핀이 버틸 수 있는 건, 결국 뚝심 있게 밀어붙인 정책의 성과와 차르의 신임뿐이었다.
결국 이조차도 한계에 도달했다. 발칸동맹을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는 니콜라이에게, 스톨리핀의 방해는 용납할 수 없었다.
“스톨리핀은 선을 넘었어. 더 이상 그 자리에 놔둘 생각이 없네.”
발칸전쟁은 결국 스톨리핀을 실각시켰다. 발칸이 러시아의 블랙홀, 아니 유럽의 블랙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