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0
– 50화에 계속 –
50화 운현궁의 밀사
고려대대가 승리의 개선가를 올리며 돌아오자, 이선도 기쁘게 승전보를 받아들였다.
연해주 고려인과 간도 조선인을 가릴 것 없이 이선에 대한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홍호자놈들, 다 쓸어버렸다니 내 속이 다 시원하군!”
“우리 동네 순이라고 있지? 홍호자놈들에게 잡혀가서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번에 풀려났다는군.”
“그거 다행이군! 우리 군대가 활약한 덕이야.”
“전권 위원이란 분이 새로 오신 덕에 우리 삶이 아주 좋아졌네.”
“군대를 가라, 학교를 보내라, 여러모로 귀찮은 점도 있지만 조선하고 비교하면 천국이지.”
“보통 높으신 분들이 우리 같은 아랫것들 신경 쓰는 걸 봤나? 근데 이분은 다른 것 같아. 진심으로 백성들의 삶을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
“맞아. 보기 드문 훌륭한 분이야.”
이선이 월경(越境)이라는 다소 무리수를 둬가면서 마적 토벌을 단행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연해주 고려인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경을 평안히 한다.
둘째, 국적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의 보호자로서 역할을 다 한다.
셋째, ‘국경 너머서 싸우는’ 행위를 통해 고려대대의 실전 경험을 확실히 한다.
넷째, 만주의 청 지방 당국에 마적을 용납할 수 없다는 무력시위를 보여 준다.
다섯째, 장기적으로 청과 러시아 간에 국경 분쟁을 유도한다.
‘모두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일석오조지. 이홍장은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니 어떻게든 외교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 주위의 강경파들은 임오군란이 아니더라도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려 들 거다.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고 있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청나라와 일본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나라는 현재로선 러시아뿐이니, 극동에 더 관심을 갖게 해야 해.’
이제는 내부의 거악을 뿌리 뽑을 차례였다. 이선은 조선에서 소식이 오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해 온 건 역시 운현궁이었다.
이선은 청나라에서 홍삼 무역을 전담하고 있는 송상 송금덕에게 운현궁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미 조선을 떠나기 전, 할아버지 대원군에게만은 밀서를 남겨놓고 떠난 이선이었다.
처음 이선의 망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대원군이 느끼는 배신감은 상당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을 보았나! 어릴 적부터 그토록 총애해 줬거늘, 이 할아비에게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대원위 합하, 이해해 주십시오. 군 대감께서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피하신 겁니다. 사실은…….”
송금덕으로부터 망명의 전말을 전해 들은 대원군은 다른 방향으로 분기탱천했다.
“이런 고얀 계집이 있나! 제아무리 영보당과 완화군이 밉기로서니, 일국의 국모가 되어 왕실의 장자를 죽이려 해? 그것도 마마(痘疫)를 옮겨서? 내 이 요망한 계집을…….”
은근히 의심했던 바가 사실로 드러나자, 대원군의 분노가 폭발했다.
“합하, 누가 들을지도 모릅니다.”
“들을 테면 들으라지! 내 이번 일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야.”
“합하, 아무쪼록 이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군 대감께서는 대국에서 때를 기다리며 힘을 축적하다가, 정세가 유리해지면 돌아오시려 합니다.”
노회한 정략가, 대원군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알겠네. 내가 유리한 정세를 조성해 놓도록 하지. 그동안 완화군은 청국의 집정자들과 친분을 맺어 두라고 하게. 장차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이미 군 대감께서 손을 쓰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대원위 합하의 존함을 팔았습니다만, 이에 대한 용서를 구하신다 합니다.”
송금덕은 이선이 이홍장과 친분을 다진 일, 홍삼 무역에 뛰어든 일을 설명했다.
“이홍장이 청국의 실세인 건 틀림없지. 하지만 조선에 계속 서양과의 수교를 권하니, 이유원이를 비롯한 줏대 없는 신료들이 이에 부화뇌동하고 있단 말이야. 주상조차도 그들 말에 넘어가고 있지. 지금 조선이 서양과 수교하면 청나라 꼴이 될 수 있네. 완화군에게 이홍장과 친분을 맺되, 너무 물들지는 말라고 하게.”
이래서 이선은 송금덕에게 서양 각국과 수교를 논의했다는 말은 쏙 빼라 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군 대감과 운현궁 사이를 연락하는 건 제가 계속 맡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조선에서의 홍삼 물량 확보와 밀입국은 내가 돕도록 하지. 각별히 보안에 조심하도록.”
이는 모두 대원군 집정기에 금지되었던 사항이었지만, 손자를 위해 거리낌 없이 도울 뜻을 밝혔다.
“감사합니다, 합하.”
1882년, 임오년 초. 조선을 떠난 지 2년 만에, 마침내 조선의 밀사가 이선과 접촉을 꾀했다.
“어서 오시오, 송 공. 1년 만에 보는군. 홍삼 무역은 잘되어 가고 있소?”
원산항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온 건, 바로 송금덕이었다.
“예, 북양 대신과 대원위 합하의 도움으로 아주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송금덕은 자신을 따라온 중년의 사내를 소개했다.
“전(前) 인천부사 윤협 공이십니다.”
“군 대감을 뵙습니다. 일전에 궁에서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예, 기억합니다. 먼 길에 고생하셨습니다, 영감.”
윤협은 대원군의 측근으로 경흥부사, 황해 수사와 인천부사를 역임한 외국통이었다.
조선에서 드물게도 서양 사정에 대해 잘 아는 관료로, 중국에서 구해 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보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1860년대 국경 지대인 경흥부사로 재임하던 중에 러시아의 수교 논의를 거절했는데, 러시아인들을 경흥부 관저로 초대해 필담으로 논의를 한 바 있었다.
이때 윤협은 제법 서양에 대해 지식을 드러내 러시아인들을 놀라게 했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를 하며, 러시아의 강대함을 높이 평가했었다고 한다.
윤협은 대원군의 측근이라 수교 반대파이긴 했지만,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인천으로 들어왔을 당시 인천부사였다. 일본 외교관들과 협상을 하며 의견을 조율했는데, 윤협이 교린의 원칙을 어겼다며 파직되었다.
사실 이는 명분이고, 대원군파인 윤협에게 외교 통상의 문제를 맡기지 않으려는 조정 주류의 생각이었다.
“대원위 합하와 영보당께서는 평안하십니까?”
이선은 먼저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안위부터 물었다.
“무탈하십니다. 두 분께서도 군 대감께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윤협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군 대감, 저는 대원위 합하의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대감께서 왜 아라사에 계신지, 또 아라사의 벼슬을 받아 무엇을 하시려는지 궁금해하십니다.”
작년에 이선이 멀리 러시아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대원군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노회한 정략가인 그도, 이선의 속내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침내 이선이 조선에 가까운 극동 연해주에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은 대원군은, 송금덕이 연해주로 가는 길에, 비밀리에 윤협을 따라 보내게 했다.
“이 손자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합하께서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지요.”
이선은 그동안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송금덕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자 윤협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아라사 황제의 목숨을 구하고, 그 대가로 아라사의 고위직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된 셈이지요.”
“대감의 일은 실로 놀랍습니다. 합하께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제법 서양 정세에 밝은 윤협이라지만, 이선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시오. 손자 이선이 연해주에서 조선 백성들을 모아 잘 해내고 있다고. 비록 타국에서나마, 할아버님께서 늘 생각하시던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선은 자신이 연해주에서 거둔 성과도 윤협에게 설명했다. 대원군은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개혁을 추구했다. 본질적으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나름대로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이선의 행보를 이해 못 해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대감께서는 아라사에 계속 남으실 생각입니까? 대원위 합하께서 섭섭해하실 터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곧 뵈러 가야지요. 이 불초 손자가 가는 길에 선물도 두둑이 들고.”
“선물이라 하심은…….”
“제가 청국과 아라사에서 얻은 것들이지요. 운현궁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선이 은유적으로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윤협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운현궁에 그리 보고 드리지요.”
“참, 운현궁에 별다른 일은 없습니까?”
“별다른 일이라 하오시면?”
“다들 무탈하시는지 말입니다. 백부님이시라든지…….”
“아, 무탈하시지요. 얼마 전에 예조판서가 되셨습니다.”
“이재선 공께서는요? 무탈하십니까?”
이선은 이재면뿐만 아니라, 궁금한 인물이 또 있었다. 대원군의 서장자,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李載先)의 운명이 궁금했다.
역사대로라면 그는 ‘이재선 역모 사건’에 추대되어 죽었어야 했다.
“무탈하십니다.”
‘역시, 역사가 바뀌었군.’
1881년 이재선 역모 사건의 본질은, 대원군 지지자 중 과격파들이 ‘토왜(討倭)’를 명분으로 임금을 몰아내고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장자’이자 임금의 이복형일 뿐이니, 그 어떤 혈통적 정통성이 없었다. 대원군파가 무리해서 일으키려 했던 정변에 가까웠다.
‘만약 내가 조선에 남아 있었더라면, 중궁전이 날 죽이지 않았더라도 운현궁에서 역모 수괴로 추대됐겠지. 이래저래 죽음을 면치 못했을걸.’
임금의 장자라는 위치는 이복형보다 만 배는 더 우월한 위치였다. 만약 완화군이 조선에 남아 있었더라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역모의 수괴로 추대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 역사에서 이재선 역모 사건에 대원군이 얼마나 개입했는지는 의문이나, 완화군의 생존으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
완화군의 생존을 일고 있는 대원군은 측근들을 단속시켰고, 이재선과 과격파도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결과, 1881년은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다들 무탈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운현궁의 처지가 지금 매우 곤란합니다. 조정과 중궁전에서는 의심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으니…….”
일본과의 수교 외에도 서양과의 수교가 가시화되자, 보수파들의 불만이 폭증했다. 이들은 이른바 ‘척양척왜론’을 들고 나왔고, 과격파들 가운데선 대놓고 ‘토왜’를 부르짖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에 대원군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여론의 추이를 신경 쓰는 건 분명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이재선과 과격파들이 역모를 꾀하다 참살당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를 임금과 중전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번엔 제가 묻고 싶습니다. 영감이 생각하건대, 지금 이 시점에서 척양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불가하지요. 서양 오랑캐의 힘은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대원군파 중에선 드물게 외국 정세에 밝은 윤협이 솔직히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 대원위 합하께서도 정세를 보는 눈이 밝다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과 청국조차도 척양은 포기했습니다. 서양과의 수교는 피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합하께서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정치에는 늘 그렇듯이, 명분이 필요한 법입니다.”
윤협이 대원군의 입장을 돌려서 말했다. 좋든 싫든 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이겨낸 전력으로 인해, 조선 내에서 양이(攘夷)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대원군은 재집권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반(反) 민씨, 척왜를 내걸고 일어난 구식군인의 반란도 이용한 것이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민심은 천심이지요. 운현궁은 그 누구보다 민심을 잘 읽으니, 민심이라는 호랑이 등에 타서 대의명분을 쟁취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수단인 것인데…….”
이선이 우려하는 건 임오군란 그다음이었다.
막상 집권한 대원군은 무작정 외세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청, 일본, 서양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의 정권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대원군은 ‘나는 서양과의 수교와 개방 정책을 그대로 이어나갈 터이니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이홍장과 청의 지배층은 이를 믿지 않았고, 대원군의 납치로 귀결되었다.
이선은 그걸 막고자 했다. 대원군 납치와 청군 주둔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의 정치에 외세라는 변수가 생기는 걸 막아야 했다.
“아무래도 제가 곧 조선으로 돌아가야겠군요. 곧 미국, 영국, 덕국(독일)이 조선과 수교할 예정으로 압니다. 아라사 또한 전권 사절을 보낼 예정입니다. 저는 그보다 먼저 가서 예비 교섭을 도울 생각입니다.”
“그 말씀은 곧, 아라사의 외교 사절 자격으로 조선으로 오신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성상의 장자이자 성조(聖朝)의 신하인데, 마땅히 조선 측 대표를 맡아야지요.”
이선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운현궁에 전해 주십시오. 제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날이, 조선에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는 날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