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02
– 183화에 계속 –
2부 183화 1914년 6월
광무 18년(1914) 5월 31일, 건원절. 황제 이선의 47번째 탄일을 맞이했다.
올해 건원절에는 근위사단과 1~12 상비사단에서 선발한 병사들의 합동 열병식이 있었다.
“대한국 만세! 대원수 폐하 만세!”
병사들은 대원수인 황제를 향해 경의를 표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했다. 동양의 육군 강국으로 떠오른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얼굴에는 강인함과 자부심이 보였다.
“갑신경장으로부터 30년. 영국의 고든 장군을 초빙해 신군을 창설한 지도 꼭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조선에는 군대라고 부를 만한 병력도 없었지요. 오늘날 대한에는 세계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수십만의 강병이 존재하니, 실로 성상의 성덕(聖德)입니다.”
황제의 곁에서 열병을 지켜보던 김옥균은, 30년 전 신군 창설 이전을 떠올리며 감개무량해 했다.
“이 어찌 짐 한 사람의 공이겠소? 경과 개화당 동지들, 문무 관료들이 합심하여 이룬 공이오.”
이선은 겸양을 표했지만, 내심 자부심을 느꼈다. 대한제국은 외세의 침략조차 제대로 막지 못했던 조선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주독립과 국토방위를 넘어, 대외 작전까지도 가능한 군대를 만들었다.
“매년 막대한 군비 예산을 투입해 오늘날의 강병을 만들어 냈소. 2천만 국민의 헌신이 없었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었지. 경제 성장이 있었기에 강병도 가능했소. 부국과 강병은 함께 가야지, 빈국강병은 패망으로의 지름길이오.”
광무 1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인구는 남만주 자치령 및 해외 이주 인구를 제외하고 본토 2,100만이었다. 의학의 발전과 경제적 안정으로 인해 1900년대에 베이비붐을 맞이하면서, 불과 10년 사이에 1,800만에서 2,100만으로 인구 증가율이 17%에 달했다. 1910년대에는 인구 증가율이 더 가속화되고 있어 1920년에는 2,500만에 달하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 동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공식 인구는 1,560만, 비공식 인구까지 포함하면 약 1,700만으로 추정된다. 공식 통계에 2천만을 넘긴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대한제국은 세계에서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2,100만이란 인구는 세계 인구가 약 18억이던 시절에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브라질(2,300만)보다는 약간 적지만, 스페인(2,050만)과 발칸전쟁 패전 이후 인구가 줄어든 오스만제국(1,850만)보다 많았다.
20만 상비군과 63만 동원 병력은 인구의 1%를 상비군으로, 3%를 전시 신속동원 가능 병력으로 하려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실로 부국과 강병이 함께 가고 있지요. 지난 몇 년 사이에 국가 세입과 예산이 급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토지개혁의 완성과 식산흥업 정책의 성공은 대한제국의 국부를 증대시켰다.
정부의 1년 예산은 광무 11년 5천만 원에서 광무 18년 1억 2천만 원으로 급증했다.
이 당시 세계에는 아직 GDP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부와 총생산 등을 합산하면 대한제국의 경제력은 세계 13위 정도로 추정되었다. 미국과 유럽 열강들, 인구가 많은 중국과 신흥 산업국인 일본을 제외하고, 옛 강국 오스만제국, 유럽 강소국 스웨덴-스위스나 남미의 브라질-아르헨티나보다 총생산에서 위에 있으리라 추정되었다.
종합해 보면, 서양 열강에 대한제국의 국력은 유럽의 식민제국이자 중견국(Middle Power)인 네덜란드·벨기에·스페인과 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 옛 종주국 오스만을 상대로 기세를 올린 발칸동맹 4개국(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몬테네그로)을 모두 합친 것보다 대한제국의 인구와 생산력이 우월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함께 서양 열강의 인정을 받는 나라, 확고한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 인정받았다.
충분히 잠재력은 있었지만 그 가능성이 제한되었던 한국이, 마침내 1910년대에 이르러 잠재력을 현실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군은 유럽 열강에 비견될 수는 없어도, 육군만 놓고 보면 유럽 중견국에 비견될 만하며, 동양에서는 일본과 1, 2위를 다투는 군대다.」
「3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근대적 군대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단 30년 만에 유럽 중견국에 필적할 만한 군대를 확보했다.」
「군대만이 아니다. 30년 전에, 이 나라에는 공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가난하고 낙후한 농업국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과 30년 만에 공장이 늘어선 산업국가로 전환하고 있다.」
「한국의 위업은 가히 피에몬테에 비견할 만하다. 1850년대만 해도, 이탈리아 북서부의 소국 피에몬테-사르데냐가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1870년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한국의 성장은 오히려 이탈리아보다도 빠르다. 한국은 신속히 동양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서양 언론도 갑신경장 이후 30년간의 성과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대한제국의 빠른 성장을 피에몬테에 빗댔다. ‘동양의 프로이센’이라는 별칭은 이미 일본이 가져갔기 때문에, 한국에는 ‘동양의 피에몬테’라는 별칭이 붙어졌다.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지가 된 이 피에몬테(Piemonte)라는 별칭은, ‘제국 곁에서 성장한 소국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통합을 이뤄 내고 대국으로 성장’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피에몬테가 이탈리아 소국들을 통합해 옛 종주국인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한 것처럼, 한국도 그러했다.
한민족을 단결시키고, 북방민족들과 연대해 옛 종주국 중국과 경쟁할 수 있는 국가로 성장했다.
이탈리아가 언젠가 합스부르크 제국을 무너트리고 미수복 영토(Irredentismo)를 되찾고 싶은 것처럼, 한국도 중국을 무너트리고 ‘북방 고토’를 되찾고 싶어 했다.
1914년 현재, 또 다른 피에몬테가 되고 싶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발칸의 피에몬테’를 꿈꾸는 세르비아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무너트리고, 제국의 지배를 받던 남슬라브 민족들을 통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길 원하는 세르비아.
세르비아 극렬 민족주의 비밀결사, ‘단결 아니면 죽음(Ujedinjenje ili smrt)!’, 혹은 흑수단(黑手團, Crna ruka)으로 더 유명한 결사의 기관지 이름이 ≪피에몬테≫라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발칸 소국의 급진 결사단체에 불과한 이들이, 역사를 진동할 계획을 모의하고 있었다.
* * *
1914년 6월 1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수도 빈.
400년 넘게 중부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는 합스부르크 제국. 이 유서 깊은 제국의 수도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빈을 순환하는 원형 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바로크 양식과 근래 유행하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아르누보)양식의 건물들이 늘어섰다.
수십 민족 5,200만 인구가 공존하는 제국의 수도답게,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다.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보슈냐크인, 루테니아인, 루신인, 유대인, 기타 등등.
물론 이 다양한 민족 사이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온 동양인은 흔치 않은 존재였다.
“빈은 정말 아름답군요. 황성의 도시계획을 빈에서 본받을 만해요.”
빈의 전경을 보며 새삼 감탄하는 이 젊은 동양인은 바로 ‘프린츠(Prinz Yi)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주재 대한제국 특명전권공사 이영이었다.
1914년 초, 이영이 수행하던 황태자 이진은 유럽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 유럽에 잔류하게 된 이영에게는 뜻밖에도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의 직책이 주어졌다.
「지극한 성은에 감읍하오나, 신은 전문 외교관이 아니거니와,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영어와 프랑스어는 할 줄 알아도, 그들의 언어인 독일어도 하지 못합니다. 황공하오나 임명을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짐은 그대에게 외교의 중책을 맡기고자 한다. 그대의 총명함을 믿기에, 독일어는 금방 익히리라 믿는다. 하물며 유럽의 외교 공용어는 프랑스어니 크게 문제 될 것도 없다.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도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으로, 특히 유서 깊은 왕족과 귀족을 존중하는 나라이다. 그러니 짐이 그대를 전권공사에 임명한 것이니, 사양하지 말라.」
이영의 사양에도, 이선은 공사 임명을 강행했다. 이강과 이영이 유럽에 체류하며 왕실 외교를 대행한 건 수차례 있었지만, 공식 외교관 직함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국 이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주재 대한제국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다.
“황제 폐하,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부를 대리하여, 삼가 국서와 신임장을 봉정하는 바입니다.”
이영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군주의 아우가 전권공사를 맡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도 관심을 보였다.
“반갑소, 대공(Prinz). 대공의 형님 되시는 한국 황제 폐하와는 오래전에 빈에서 뵌 기억이 있소.”
“예, 저도 말씀 들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현명함과 신중함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오, 그래요? 별말씀을. 그때 폐하께서 즉위식에 초청하셨는데, 황태자의 책무로 인해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했소.”
1896년 이선이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을 방문했을 때, 프란츠 페르디난트와도 회견을 한 바 있었다. 이선은 이듬해 즉위식에 초청했으나, 백부 프란츠 요제프의 반대로 동아시아행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공께서 특별한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소. 러시아 백작 가문의 영애시라고.”
“예, 브론스키 백작 영애, 아나스타샤 안드레예브나입니다. 지금은 대한제국 친왕비이지요.”
“매우 흥미롭소. 인종과 국적,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이라.”
작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올린 이영과 아나스타샤의 결혼은 호사가들에게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동양 왕족이 서양 귀족 영애와 결혼하는 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오스만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는 유럽인이 부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대개 정식결혼이 아닌 축첩이었다.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믿는 제국주의 시대인 만큼, 이영과 아나스타샤의 결혼 소식은 대개 기묘한 반응을 보이길 마련이었다.
“한국 황제는 러시아 차르의 친우가 아닌가? 브론스키 장군이 차르의 총애를 얻으려고 딸을 팔았군.”
“동양 왕실은 워낙 부자라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
“동양에서는 하렘을 두지 않나? 백인 기독교인 여성이 그걸 어떻게 감내할지 모르겠네.”
“한국 황제도 폴란드 여자를 정부로 두고 있지 않나?”
“그 나라의 새로운 풍습인가 보지. 아우가 형이 부러웠나 보군, 흐흐.”
“하긴. 그 러시아 아가씨를 본 적이 있는데, 진짜 엄청난 미인이더군. 반할 만도 해.”
이런 이야기를 이영의 면전에서는 하지 않아도, 돌아 돌아 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연히 이영으로선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이를 위해서 부모님의 충격과 종친들의 비난도 감내해야 했다.
바로 이영의 이런 점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나 역시 신분이 다른 결혼으로 인해, 내 아내 조피가 고생을 하게 됐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백작가의 영애인 조피 초테크(Sophie Chotek)와 결혼하는 바람에, 황제와 불화를 겪게 되었다. 왕족은 원칙적으로 왕족하고만 결혼해야 하는데, 테셴 대공가의 시녀였던 백작영애와 결혼한다는 건 귀촌상혼이었다.
황태자의 고집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결국 황제도 포기하고 결혼을 승인했다. 단, 그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제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받은 호엔부르크 공작 작위만을 계승할 수 있었다.
조피는 결혼 후에도 홀대를 당했다. 대공비의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조피는 남편과 나란히 앉아 오페라를 관람하거나 남편의 팔짱을 끼고 무도회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황태자가 황실 특별좌석에 앉으면, 그녀는 멀리 떨어진 귀족 좌석에 앉아야 했다. 황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어린 여대공보다도 의전 서열이 떨어져 맨 뒤에 서야 했다. 궁내부대신과 황실 시종들도 조피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조피는 굴욕을 감내했으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 이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가뜩이나 좋지 못했던 백부와 조카 사이는, 조피에게 계속되는 모욕과 푸대접으로 인해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숱한 비난과 멸시를 견뎌 내야 했소. 대공과 부인께서도 이를 견뎌 내야 할 거요. 우리가 견뎌 냈듯이, 대공 부부께서도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믿소.”
“전하의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도 반드시 그러리라 믿습니다.”
조피 공비도 대한제국 친왕비이자 공사부인, 아나스타를 초청하여 환대했다.
“당신이 한국 대공 전하와 결혼하게 된 분이시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주님께서 두 분의 사랑을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공비 전하. 저 역시 주님께서 황태자 전하와 공비 전하를 보우하시길 빌겠습니다.”
아나스타샤는 해외에 거주하는 덕에 보수적인 한국 황실을 체험할 일이 없었지만, 신분이 높은 황족과 본국에서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했다는 점에서 조피와 같았다. 마음이 선량한 조피는 아나스타샤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고 특별히 아꼈다.
“대공, 올해 여름휴가는 아드리아해에서 보낼 생각이오. 대공 부부를 함께 초청하고 싶소이다만.”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이영, 조피 공비와 아나스타샤 사이에는 특별한 결혼이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우호의 감정이 싹텄다.
“크나큰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그런데 저희 부부가 동반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무엇이겠소?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귀빈이자 나의 귀빈이기도 하오.”
“전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1914년 6월 하순으로 예정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훈련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어서 부부동반으로 보스니아의 주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 후,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휴양지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예정이었다.
사라예보 방문이 예정된 6월 28일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14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이 특별한 행사에 초대를 받은 이영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