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03
– 184화에 계속 –
2부 184화 발칸의 전운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하계 일정에 동반하기 전, 이영은 외교관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했다.
대한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간에는 별다른 외교 이슈가 없었다. 한국은 유럽에서 ‘친러국가’이자 협상국의 일원으로 여겨졌기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까워질 입장이 아니었다.
이영이 이선에게 받은 명령도, 합스부르크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면밀히 살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가장 큰 국제문제라면 역시 발칸 문제겠지.”
1912-13년의 발칸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끝났음을 암시했다.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몬테네그로 연합군은 옛 종주국 오스만제국을 대파했다.
1913년 5월 런던 조약으로 1차 발칸전쟁은 종결되었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땅을 제외한 모든 유럽 영토를 발칸동맹국에게 내놓아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리품을 두고 발칸동맹 간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480만 인구 중 45만을 동원,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 외곽까지 진격해 발칸전쟁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믿는 불가리아는, 자국이 확보한 영토가 승리 기여도에 비해 적다고 생각했다.
마케도니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대립은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고, 그리스와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었다.
「동맹을 깨고 먼저 공격하는 나라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심지어 발칸동맹의 후원국인 러시아조차 불가리아에게 자중하라고 경고를 보냈음에도, 베를린과 빈의 부추김을 받은 불가리아는 1913년 6월 29일 세르비아를 향해 선제공격을 가했다.
세르비아는 이미 방위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고, 그리스와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 참전했다. 불가리아는 여기까지는 예상하고 이길 수 있다고 계산했으나, 에디르네 탈환을 원하는 오스만과 도브루자 지역을 놓고 분쟁 중인 루마니아도 전쟁에 개입했다.
아무리 불가리아가 ‘발칸의 프로이센’일지라도, 동서남북으로 5대 1의 구도가 만들어졌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1913년 8월 10일, 한 달 만에 불가리아는 패배를 인정하고, 1차 발칸전쟁에서 얻은 영토의 대부분을 토해내야 했다.
“대(大)세르비아 만세!”
“남슬라브 민족의 맹주, 세르비아!”
무수한 피를 흘리고도 얻은 게 없게 된 불가리아는 이를 갈았고, 막대한 영토를 얻게 된 세르비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세르비아는 1년 전에 비해 영토가 2배로 늘었고, 인구도 65% 늘었다.
기세가 오른 세르비아는 숙원인 아드리아해로의 진출을 위해 알바니아로 진격했다.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알바니아를 무시하고 세르비아군이 계속 진격해 들어가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단호한 경고를 보냈다.
「세르비아가 정해진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를 점령하는 건, 전쟁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말뿐만 아니라 진짜로 전쟁을 각오할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알바니아 문제로 전쟁까지 각오하는 건 동의할 수 없다고 만류했다.
결국 러시아도 세르비아에게 철수를 권유함에 따라, 1913년 10월 세르비아군은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 독립국 알바니아의 지위는 새로운 조약에 의해 보장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신생 알바니아의 후견국이 되었다.
“알바니아 영토로 규정된 지역의 대부분은 14세기 대세르비아의 영토였다. 그런데도 오스트리아가 끝내 바다로 가는 길을 막는구나!”
“이제 세르비아와 남슬라브 민족의 주적은 터키가 아니라 오스트리아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멸망해야만 남슬라브 민족에게 영광이 되돌아올 것이다.”
‘발칸의 피에몬테’를 자처하는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향해 칼을 갈았다.
극렬 급진 민족주의 결사, ‘단결 아니면 죽음!’은 기관지 ≪피에몬테≫를 통해 반(反)오스트리아 여론을 선동했다.
세르비아 여론은 급속도로 급진적 민족주의와 반 오스트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의 휘발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 * *
1914년 6월 10일. 세르비아 왕국 수도 베오그라드.
주 세르비아 공사를 겸임하고 있는 이영은 베오그라드를 방문하여, 국왕 페타르 1세 및 총리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와 회견했다.
1914년 현재, 유럽 대부분 국가와 수교를 맺은 대한제국의 파견 공관은 다음과 같았다.
런던, 주 영국 대사관(포르투갈 공사 겸임).
파리, 주 프랑스 대사관(스페인 공사 겸임).
상트페테르부르크, 주 러시아 대사관(스웨덴 공사 겸임).
베를린, 주 독일 공사관(스위스 공사 겸임).
빈,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관(세르비아 공사 겸임).
로마, 주 이탈리아 공사관(그리스 공사 겸임).
브뤼셀, 주 벨기에 공사관(네덜란드 공사 겸임).
코펜하겐, 주 덴마크 공사관(노르웨이 공사 겸임).
모스크바, 스톡홀름, 헤이그, 베른, 마드리드, 리스본에는 총영사관 설치.
이는 철저하게 상호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주한 공사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킨 미국·일본·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에는 특명전권대사(Ambassador extraordinary and plenipotentiary)를 파견했고, 공사급이 주재하는 나라에는 역시 특명전권공사(Envoy extraordinary and plenipotentiary)를 파견했다. 주중 공사나 주일 공사가 주한 공사를 겸임하고 영사를 파견하는 나라에는 이웃 주재국에서 공사를 겸임하고 대리공사(Chargé d’affaires) 겸 총영사(Consul-general)를 파견했다.
한국 외교의 저변 확대는, 근래 상승한 한국의 국력과 위신과도 관계가 있었다. 주요 열강들 간에 교환하는 대사급 외교관을 파견한다는 것 자체가 위신 상승의 반영이었다.
이해관계가 적은 나라와도 수교와 외교관 파견이 이뤄졌다.
예컨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한국 간에는 특별한 교류가 없었지만, 상호 외교사절 파견 원칙에 따라 전권공사를 주재하고 교류했다.
“어서 오시오, 대공. 베오그라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부를 대리하여 국왕 폐하께 인사를 드립니다.”
대한제국과 세르비아는 별다른 관계가 없었고, 있다 해도 우방국인 러시아를 통해 교류했다.
1914년에 이르러서야 한국과 세르비아 간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는 세르비아가 동아시아 국가와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다.
세르비아는 자타공인 골수 친러국가였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든든한 후견국이었다. 불가리아가 떨어져 나가면서,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슬라브 형제국가로 떠올랐다.
세르비아의 시선에서 대한제국은 동양의 친러국가였고, 한국 황제는 후견인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친우였으며, 황제의 아우이자 공사로 파견된 이영은 ‘러시아 사위’였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세르비아는 한국과 이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한국을 동양의 피에몬테라고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세르비아는 발칸의 피에몬테를 추구합니다. 귀국은 우리에게 있어 좋은 모범입니다. 귀국은 단기간에 국력을 신장시켜 옛 지배자인 청국을 무찔렀으니, 세르비아가 힘을 키워 옛 지배자인 오스만을 무찌른 것과 같습니다.”
세르비아 총리 파시치는 이영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한국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달변가로 소문난 파시치는, 적대국인 오스트리아를 방문했을 때도 달변으로 ‘무장해제’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각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듣고 보니 우리 두 나라 간에는 공통점이 많군요.”
“우리 두 나라 모두 러시아의 우방이자, 주변 민족을 압제하는 거대 제국에 저항하고 있지요. 한국은 골리앗에 맞서는 동양의 다윗이니, 세르비아도 그렇습니다.”
중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빗대 하는 말에, 이영은 외교적 침착함을 발휘해 답하지 않았다. 이영의 본업은 오스트리아 주재 공사였고, 세르비아의 오스트리아 반대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대한국은 평화와 번영을 원합니다. 귀국은 지난 2년간의 전쟁으로 승리를 이뤄 냈으나, 동시에 피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귀국에 평화와 번영이 깃들길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과연 현재의 세르비아에 필요한 건 평화와 번영입니다.”
파시치는 공감을 표했다.
‘단결 아니면 죽음!’에는 군부 핵심인사들이 상당수 참여했고, 이들은 오스만에 이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을 선동했다. 특히 점령지에는 군정을 설치하여 민간정부의 명령조차 듣지 않으려 했다.
파시치도 언젠가 무력으로 남슬라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국력을 감안하지 않고 잇달아 전쟁을 벌이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파시치와 급진당 내각이 문민통제에 나서자, 군부 일각에서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배후는 바로 ‘단결 아니면 죽음!’이었다.
‘단결 아니면 죽음!’ 혹은 흑수단, 이들은 바로 1903년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흑수단은 1903년 6월 친오스트리아 정책과 각종 기행으로 인심을 잃은 전 국왕 알렉산다르 1세 부부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오브레노비치 왕조를 멸망시켰다. 정적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페타르가 추대되니, 그가 바로 페타르 1세였다.
「단결 아니면 죽음!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국가의 주권자를 바꾸는 게 아니다. 세르비아 정치와 사회의 철저한 혁신, 제국의 압제로 타락해 버린 우리 인종의 갱생이다. 남슬라브의 통일이라는 민족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파시즘의 원형을 보여 주는 것 같은 흑수단은, 남슬라브 국가 건설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각종 공작, 암살, 테러, 전쟁 유도, 쿠데타 모의 등 온갖 음모를 획책했다.
파시치와 급진당 역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했음에도, 이들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흑수단의 증오대상이 되었다.
“대공, 세르비아의 공격성은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완전한 통제에 있습니다.”
이영이 대면한 세르비아 주재 러시아 공사 니콜라이 가르트비크(Nikolai Hartwig)가 비대한 몸을 흔들며 호언장담했다.
가르트비크는 베오그라드에서 ‘무관(無冠)의 왕’으로 불렸다. 그는 배후에서 발칸동맹의 체결과 전쟁 발발을 주도했다. ‘발칸을 위해서라면 극동을 희생시킬 수 있는’ 철저한 범슬라브주의자였다.
세르비아 정부와 군부는 가르트비크를 후견인으로 여겼고, 베오그라드 정치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외교관으로선 도가 지나친 거조에, 스톨리핀은 발칸전쟁이 끝난 후에 그를 본국으로 소환할 예정이었다.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경의 책무는 이제 다하였으니, 사임을 권하는 바이오.”
하지만 실각된 건 오히려 스톨리핀이었다. 1913년 6월, 1차 발칸전쟁이 종결된 직후, 스톨리핀은 국무회의 의장 겸 내무대신에서 경질되었다. 재임을 시작한 지 꼭 6년 만이었다.
‘위대한 러시아’를 부르짖으며 6년간 개혁을 집행하여 러시아를 발전시킨 스톨리핀이었지만, 그에 반대하여 결집한 황실-귀족-대지주-군부-수구파-범슬라브주의자의 단합에 결국 실각하고 말았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차르조차 스톨리핀을 저버림에 따라, 결국 그는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스톨리핀의 후임으로 임명된 재무대신 코콥초프는 온건한 보수파 인사로, 가급적 스톨리핀의 정책을 계승하여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스톨리핀 실각으로 기세를 올린 반대파들은 강경한 대외정책 드라이브를 내걸었고, 스톨리핀이 외쳤던 ‘20년간의 평화’는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러시아가 전쟁을 원치 않는 이상, 세르비아도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가르트비크는 자신이 세르비아 정계와 군부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파시치 정부를 확고하게 지지했고, 세르비아군의 현대화를 위해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고 있는 프랑스도 지지를 표명했다. 러시아 공사의 예외적인 지지표명에 흑수단도 쿠데타 계획을 뒤로 미뤄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흑수단은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을 획책했고, 다음 목표는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세르비아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저는 황명을 받아 근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에서 조사에 나섰습니다. 극정보에 따르면, 흑수단을 자처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거물급 인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 같습니다.”
제국익문사 구주특파원 조한민이 이영을 찾았다. 전형적인 지식인풍의 조한민이라는 사내가, 통신사 특파원이 아닌 대한제국 유럽 정보조직의 총책이라는 것을 불과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거물이라면 누구를 의미합니까?”
“보스니아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반드시 수복해야 할 고토입니다. 그리고 6월 28일은 민족주의자들이 신성시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에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이가 있지요.”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1389년 6월 28일, 중세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만제국에게 코소보 전투에서 참패했다. 세르비아 고난의 역사는 바로 이날부터 시작되었으니, 민족주의자들은 6월 28일을 ‘성 비투스의 날‘이라고 부르며 기념했다.
1914년 6월 28일은 세르비아가 발칸의 고토를 수복하고 맞이하는 첫 ‘성 비투스의 날’이었다. 하필이면 이날에 증오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한다고 하니,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격노했다.
“그렇다면 대공께 알려 경고를 보내야 하지 않겠소? 아니, 세르비아 정부에 먼저…….”
“제가 황명을 받들어 유럽에서 정보를 수집한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정보들을 확보했지만, 이런 극비사항에 이렇게 쉽게 접근한 것도 이상합니다. 암살이란 건 극비리에 진행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세르비아 군부에서는 거의 공공연한 비밀이더군요. 그렇다면 정부도 모를 리 없고, 알면서 묵인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설마…….”
세르비아 군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전쟁을 원한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할 방법이 없고, 세르비아의 후견국인 러시아도 선제공격 시에는 도와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세르비아 정벌을 원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강경파들이 전쟁을 선포할 만한 명분을 내주면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선제공격하여, 러시아와 그 동맹인 프랑스의 개입을 얻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용납할 수 없군. 내가 직접 황태자 전하께 알리겠소. 전하를 노리는 암살 음모가 있으니 사라예보 방문은 자제해 달라고.”
“하오나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중립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황태자는 큰 그릇을 지닌 인물이오. 그가 황제가 된다면 제국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더욱이 그런 불장난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면, 용서할 수 있겠소?”
프란츠 페르디난트와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설령 친분이 없더라도 올곧은 성품의 이영은 전쟁을 획책하는 비열한 음모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먼저 성상께 아뢴 다음에 훈령을 받도록 하시지요. 저도 성상께 정보를 보냈습니다.”
“성상께서는 러시아 황제 폐하의 암살도 막은 바 있으시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성상께 훈령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이영은 즉시 황성을 향해 극비전문을 보냈다.
「세르비아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을 획책하여, 전쟁을 도발하려는 것 같습니다. …… 신이 국익을 위하여 어찌해야 할지 훈령을 내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