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06
– 187화에 계속 –
2부 187화 7월 위기
「세르비아왕국 정부는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며, 황태자 전하의 무사함을 신께 감사드린다. 세르비아는 테러리즘에 맞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와 협력할 것을 다짐한다. …… 다만, 일부 극렬한 오스트리아 여론이 세르비아 정부와 세르비아인들을 테러리스트들과 한 패로 몰아, 반(反)세르비아적인 언동을 일삼으며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불행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행태에 단호하게 맞설 것이다.」
암살미수에 대한 세르비아의 첫 반응은, 강온 양면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을 감행한 자들을 비난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협력을 다짐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이번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획책한다면 맞서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나마 정부의 공식 성명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으나, 민족주의와 영토회복주의가 지배적인 세르비아 여론은 노골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비난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족해방투사들, 성 비투스의 날에 폭군을 향해 정의의 폭탄을 던지다!」
「압제자를 향한 폭탄은 불행하게도 명중하지 못했으나, 세르비아 민족의 대의를 적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었다.」
「세르비아는 요구한다! 세르비아는 맞서 싸운다!」
「세르비아가 튀르크 침략자를 무찌르고 마케도니아와 코소보를 해방시켰 듯이, 언젠가 보스니아-헤르체비고나,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달마티아를 게르만 침략자로부터 해방하는 날이 올 것이다…….」
「게르만의 부역자들이 사라예보에서 반세르비아 포그롬을 일으키다! 저들이 세르비아인을 공격한다면, 우리 정부도 분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무기를 들자! 슬라브 형제,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는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 발생한 반세르비아 폭동은, 세르비아의 강경한 여론에 더욱 불을 질렀다. 폭동의 명분을 내준 황태자 암살 미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비록 의거는 실패했지만, 명분은 갖추어졌다. 오스트리아가 무조건 선제공격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러시아가 우리를 도와 참전할 것이다.”
“만약 독일이 개입한다면?”
“독일은 러시아의 동맹 프랑스가 저지해 줄 것이다.”
“명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우리가 피해자로 보이게 만들어야겠군.”
“동지들, 마침내 합스부르크 제국을 타도하고 남슬라브 국가를 건설할 시기가 왔다. 튀르크에 이어 오스트리아에 맞서는 해방전쟁의 때가 왔다!”
암살을 기도한 ‘단결 아니면 죽음!’, 일명 흑수단은 전쟁을 획책했다. 암살 기도의 배후에 있는 일명 ‘아피스(Apis)’,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중령은 흑수단의 우두머리였다. 아피스에게 세르비아 군부의 상당수가 동조해 있었고, 이는 정부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망할 극단주의자 놈들, 어떻게든 국가를 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군. 선거만 끝나면 두고 보자.”
“러시아도 전쟁까지는 원치 않을 겁니다. 군부의 망동을 저지해야 합니다.”
세르비아 총리 파시치는 흑수단의 행태에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 또한 언젠가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목표에 공감했지만, 두 차례 발칸전쟁을 치른 지가 겨우 1년이었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울 때가 아니었다.
이미 5월에 군부 쿠데타설이 나올 정도로 급진당 내각과 흑수단의 관계는 최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파시치는 이번 기회에 흑수단을 숙청하고 군부를 통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당장 8월 14일로 예정된 총선이 문제였다. 세르비아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민족주의와 영토회복주의에 기울어져 있었고, 만약 급진당 내각이 오스트리아에 굴복하거나 ‘발칸전쟁의 승리자 군부’를 숙청하려 한다면 유권자들은 내각을 끌어내려고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과 강경한 민족주의 여론이 세르비아 정부의 행동을 제한했다.
세르비아 여론의 과격한 언동은 시시각각 번역되어 빈에 소개되었다. 중립적이었던 오스트리아인조차 분노를 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르비아라는 독사가 우리 발밑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독사가 발목을 물려고 한다면, 물도록 내버려 둬야겠습니까? 당연히 발을 들어 짓밟아야 합니다!”
참모총장 회첸도르프 원수는 어떻게든 전쟁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군부 대다수가 참모총장을 지지했고, 정부 각료들도 그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전쟁은 절대로 안 되오! 만약 세르비아를 도와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그 순간 세계대전이오. 지금은 러시아랑 싸울 때가 아니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성경에도 피를 보는 복수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외교적 조치로 해결해야 합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전쟁을 결사반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고위 각료 중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주화론을 강력히 지지하는 건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István Tisza) 백작이었다.
그동안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가장 격렬하게 대립해 온 장본인이 티서라는 걸 생각해 보면 역설적이기 짝이 없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다민족 연방제국’이라는 구상은 헝가리의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었던 티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히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티서가 황태자를 지지하는 건, 만약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해서 병합할 경우, 가뜩이나 제국 내에 많은 슬라브인에 450만이나 되는 극렬한 슬라브주의자들을 포함시키게 되는 것이었다. 설령 합병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슬라브인들이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헝가리로서는 어떻게든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러시아가 개입을 못 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으로 끝내면 됩니다.”
“무슨 수로?”
“러시아는 독일이 해결해 줄 겁니다.”
결국 오스트리아 군부가 바라는 건 독일의 개입과 지원이었다. 독일이 러시아를 묶어 두는 사이, 오스트리아가 단독으로 세르비아를 무찌르고 굴복시키는 게 목표였다.
“폐하, 참모총장의 말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세르비아에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반오스트리아적인 행위를 중지시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재위 어느덧 66년, 80대 중반의 고령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지난 세기의 화신과도 같았다. 그는 격렬한 변화를 원치 않았고, 자신의 치세에 전쟁이 재개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황태자는 한 개인이 아니다. 이 제국의 후계자다. 제국의 후계자를 노린 행위는 곧 제국의 붕괴를 노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암살 계획에 세르비아가 개입되어 있다면, 그들에게 따끔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사적으로는 자신의 뜻을 어기고 귀천상혼을 택한 조카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공적으로 볼 때 조카는 자신의 후계자였다. 자신의 후계자를 노린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암살 배후에 세르비아가 연관되어 있다면, 프란츠 요제프는 전쟁을 각오하겠다고 암시했다.
「암살 공모자들은 모두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세르비아 국경을 넘어 범슬라브주의 선동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범행에 사용한 무기는 세르비아제이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나 군부가 직접적으로 암살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사건 발생 2주 만인 7월 11일, 사건을 맡은 예심판사 페퍼는 1차 보고서를 올렸다. 주범과 공범들은 세르비아에서 훈련을 받고 무기를 받아 국경을 넘은 건 인정했지만, 정부나 군부와 무관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전쟁을 부르짖는 오스트리아 군부조차도 ‘흑수단’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민간에서 발생한 일을 정부에 책임을 돌리고, 전쟁까지 획책하는 건 명분이 부족하지요.”
“세르비아에게 자국 내의 극단적인 여론을 자제시키게 하는 외교적 압박이면 충분할 듯합니다.”
어떻게든 사건의 배후를 세르비아로 단정 지으라는 총독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수사를 진행해 보고한 페퍼의 보고서 덕에 주화파들은 개가(凱歌)를 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7월 12일 일요일.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는 일요일을 맞아 사라예보 시내의 가톨릭 성당으로 향했다. 날은 무덥고, 총독의 기분은 매우 불쾌했다.
“국익을 위해서 수사를 적당히 조정하는 게 뭐가 어렵단 말이냐? 제길, 이래서 법률가 놈들은 안 돼.”
총독은 투덜거렸다. 반세르비아 폭동을 배후에서 부채질하면서까지 지난 2주 동안 전쟁을 획책했지만, 예심판사가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보고서를 올리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뭉그러졌다.
군부는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세르비아를 무너트리길 원했다. 무언가 다른 명분을 만들어야겠다고 골똘해하던 총독으로선, 설마 자신이 명분이 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당에 막 도착하던 차에, 총독은 초췌한 청년의 회색 눈과 잠시 시선이 부딪혔다. 그 순간, 청년은 가슴에서 작은 총을 꺼냈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총독의 가슴과 목에 명중했다.
총독을 명중시킨 암살자는 바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만, 경찰과 군중이 그를 때려눕혔다. 암살자는 포승줄에 묶여 가면서도 당당했다.
“세르비아 만세! 압제자는 죽었다!”
암살자의 이름은 가브릴로 프린치프. 메흐메드바사치와 함께 2주 전 암살미수 사건 이후 체포를 피해 암약해 있던 마지막 공범이었다. 보스니아 경찰의 단속에도 용케 숨는 데 성공했던 프린치프는 다음 목표를 노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라는 명이 떨어지기 전, 메흐메드바사치의 원래 목표는 보스니아 총독 포티오레크였다. 이들은 황태자를 대신해 원래 목표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마침내 프린치프가 성공시켰다.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육군대장, 세르비아 암살자의 흉탄에 당하다!」
「세르비아의 무도한 폭력행위를 언제까지 눈감아 줘야 하는가?」
보스니아 총독 암살 사건은 다시 빈의 여론을 격동시켰다. 특히 군부의 분노가 대단했다.
“보십시오! 세르비아는 절대로 이중제국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황태자 전하를 노리는 데 실패하자 총독을 저격했습니다. 다음은 또 누구겠습니까?”
“저들은 다시 황태자 전하를 노리고, 어쩌면 황제 폐하까지 노릴지도 모릅니다!”
제2의 사라예보 암살은 강경파의 득세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세르비아는 더욱 불을 질렀다.
「세르비아 애국투사 가브릴로 프린치프, 보스니아의 압제자를 저격하다!」
「총독은 폭군이자 압제자였다. 지난 암살미수 이후 세르비아인들을 탄압한 포그롬의 배후에 있는 자로서,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다.」
「빈을 향한 시원한 일격! 압제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베오그라드는 축제 분위기였다. 베오그라드 시내에는 총독 저격을 축하하는 깃발까지 내걸렸다.
“도대체 귀국이 원하는 건 뭡니까? 정녕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원하는 겁니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나, 이번 사건은 세르비아 정부와 무관한 일입니다. 정부도 언론을 단속하고 싶지만,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총독의 암살, 세르비아 여론의 축하, 총선을 앞둔 세르비아 정부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이중제국의 온건파 각료들조차 전쟁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타협과 평화가 아닌 대립과 전쟁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징벌이 필요하다. 이제 필요한 건 베를린의 협력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급격히 강경론으로 기울어졌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주화론을 지지하던 외무대신 레오폴트 베르히톨트(Leopold Berchtold) 백작조차도 강경론으로 전환할 정도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베를린의 협력을 얻으라 명했다. 베르히톨트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친서를 지참하고 베를린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내심 전쟁을 결심했음에도, 최종결단까지 시일이 걸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독일의 결정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신속하게 세르비아를 비난하고 격파에 나섰다면, 두 나라 간의 분쟁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전쟁을 하는 건 좋은데, 8월 중순까지는 미뤄야 합니다.”
“외교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군사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7월 6일부터 병사들의 수확휴가가 시작됐어요. 관례대로라면 7월 말까지는 보장해 줘야 합니다.”
“아니, 휴가는 취소하면 안 됩니까?”
“병사들과 주민들의 불만은 차치하더라도, 올가을 식량 수급에 중대한 문제가 생길 겁니다. 갑자기 취소하면 주변국의 의혹도 사게 될 테고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낙후한 사정이 전쟁계획에 발목을 잡았다. 유럽의 농번기인 7월에는 인력이 부족했고, 이중제국의 농촌에서는 여름철 군복무가 청년들을 논밭으로 가지 못하게 해서 혼란을 초래했다. 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징집병들을 일시적으로 귀향시켜 농사를 돕도록 했다.
이미 병사 수만 명의 하계 수확휴가는 시작됐고, 그걸 취소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소수민족 농민들의 반감을 사고, 철도망을 혼잡하게 하고, 오스트리아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휴가를 마친 후 동원령을 내려도, 실제 동원까지 최소 16일은 필요합니다. 그럼 8월 중순은 되어야 전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요.”
동맹인 독일군이 알면 기겁을 할 일이지만, 철도사정이 낙후한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기술적이고 행정적인 이유로 동원령에서 실제 병력동원까지 16일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독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어차피 카이저는 여름휴가 중이니까 베를린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야겠구만.”
때는 7월 중순으로, 한창 여름 휴가철이었다.
각국 정부와 군부의 핵심 인사들은 이미 휴가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세르비아의 참모총장이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령 체코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정도로, 다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카이저 빌헬름 2세도 7월 초부터 3주 일정으로 노르웨이 피오르드로 요트 여행을 떠났다.
카이저는 ‘친우’ 프란츠 페르디난트로부터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은 후, 안심하고 예정된 휴가를 떠났다. 카이저는 발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보스니아 총독 암살 소식에도 휴가를 끝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카이저가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7월 하순에 오스트리아는 외무대신을 특사로 파견하기로 정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는 니콜라이 2세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를 국빈방문 할 예정이었다.
독일-오스트리아 회동, 프랑스-러시아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7월 하순이 위기를 관리할 결정적인 순간이 될 예정이었다.
그 무렵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1914년 7월은 유럽에서 마음 놓고 여유롭게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