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07
– 188화에 계속 –
2부 188화 최후통첩
오스트리아 군부가 간절히 답을 기다리는 존재, 카이저 빌헬름 2세는 7월에 위기가 촉발되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독일 황실의 호화유람선 호엔촐레른호를 타고 북해의 피오르드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빌헬름의 곁에는 아첨꾼들이 득실거렸고, 카이저의 휴가를 방해할 만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보스니아 총독의 암살 소식도, 유감스럽긴 하지만 카이저가 휴가를 취소할 만한 사유는 아니었다. 카이저의 이런 여유로운 태도는 일정 부분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영향력이었다.
「경애하는 황제 폐하! 폐하의 염려 덕에, 저는 매우 건강합니다.
…… 세르비아인들의 행태가 괘씸하긴 하지만,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보입니다. 세르비아는 너무나도 하찮은 존재라, 세계정책을 관여하는 폐하께서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일부 호전적인 강경파들이 전쟁을 부르짖고 있으나,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들이니, 이들은 죽음이 두려워 자살을 시도하자는 멍청이들입니다.
유럽의 평화는 오직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의 혜안과 인내, 자제력에 달려 있습니다. 오직, 폐하께 유럽의 평화가 달려 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전문은 카이저의 기분을 매우 유쾌하게 만들었다. 빌헬름의 허세와 허풍으로 가득 찬 태도를 정확히 파악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카이저를 한껏 평화의 수호자로 치켜세워 주며 설득했다.
“브라보, 프란츠! 프란츠는 정말 대범하단 말이야. 미래의 황제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빌헬름은 걱정을 접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말대로, 세르비아는 ‘너무나도 하찮아서’ 세계정책을 이끄는 카이저가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친서에도, 카이저는 「이중제국을 위협하는 범슬라브주의 선동가들의 광기」를 비난하면서도 전쟁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카이저의 휴가는 당초 예정보다 길어졌다. 카이저는 자신의 자랑인 제국해군(Kaiserliche Marine)을 노르웨이로 불러, 노르웨이 국왕과 함께 관함식을 여는 여유까지 보였다.
오스트리아 강경파들은 카이저의 여유에 속이 탔지만, 그렇게 7월은 하릴없이 지나갔다.
7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각료들이 러시아의 국빈초청을 받아, 전함 프랑스호를 타고 군항 크론시타트에 도착했다.
전제국가인 러시아에 어울리지 않는 혁명곡인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와 군가가 잇달아 연주되고, 러시아는 최고의 예우로 프랑스 대통령을 맞이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친히 영접을 나와 군함 위에 올라탔다.
“황제 폐하의 환대에 프랑스 국민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 각하, 짐이 각하와의 회담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미처 모르실 겁니다.”
20년을 맞이한 러시아-프랑스 동맹은 더욱 끈끈해졌다. 프랑스 차관과 투자는 러시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러시아는 그 존재만으로 독일의 배후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든든한 우방이었다.
3일의 국빈 방문 기간 동안, 양국 정상은 중대 사안에 대해 논의했다.
“우리 동맹에 영국을 반드시 끌어들여야 합니다. 영국의 합류만으로 독일의 위협에 억지력을 부과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프랑스 역시 영국과 구속력 있는 군사동맹을 맺고자 합니다.”
차르는 영국에 대한 과거의 반감을 모두 저버리고, 삼국협상을 군사동맹으로 확대하길 원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상호 군사적 의무가 있었으나, 영국에는 아직 그런 의무가 없었다.
“근래 발칸에서 발생한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법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황태자를 노린 암살 시도와 총독의 암살은 오스트리아에게 세르비아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트리아 일각에서 전쟁을 부르짖는다고 하는데, 만약 오스트리아가 이런 사소한 일로 전쟁까지 감행한다면, 러시아 여론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왕족에 대한 암살 미수는 흔한 일입니다. 짐은 23년 전 일본에서, 미치광이에 의해 암살시도를 당해 이마에 부상을 당했지요. 한국 황제가 될 왕자가 아니었더라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만.”
차르가 손짓을 하자, 만찬장 건너편에 앉아있던 주 러시아 한국 대사 이상설이 다가왔다. 이선의 신임을 받는 이상설은 이범진을 대신해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이선과 차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영 대공이 부인과 함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보스니아행에 동행했다 들었소. 그는 평안합니까?”
“예, 친왕 전하께서는 무탈하십니다.”
“한국 왕족들은 암살 현장에 동반하게 되는 전통이 있나 보군. 그와 동행하면 암살도 면하게 되고. 하하하!”
차르의 농담에 이상설이 고개를 숙였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계획이 미수에 그친 데에는 이영의 만류가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튼, 암살 미수는 전쟁 요건이 못 된다는 겁니다. 만약 23년 전에 이를 명분으로 삼았으면 일본 따위는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겠으나…….”
“폐하의 말씀에 끼어드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23년 전의 일본은 러시아에 전국적인 사죄를 애원했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르비아는 적반하장으로 오스트리아를 도발하고 모욕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본이 힘을 키워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도발한 것처럼, 세르비아도 오스트리아의 일본이 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 프리츠 서파리의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러자 푸앵카레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수사가 미리 결론을 짜놓고 진행하는 게 아닌지 우려합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따뜻한 친구지요. 그리고 러시아에는 맹방 프랑스가 있습니다. 귀국은 반드시 이를 명심해야 할 겁니다.”
프랑스 대통령의 말은 공개적으로 세르비아와 러시아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당히 비외교적인 표현이라 제3국 외교관들은 깜짝 놀랐다.
공개적인 만찬장에서도 그럴 진데, 비공개적인 회담에선 프랑스와 러시아 모두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발칸을 장악하려는 시도, 독일이 터키 해협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모두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발칸전쟁에 이어, 올해 초에 있었던 독일 군사고문단의 오스만 파견은 러시아를 격노하게 했다. 군사고문단장 리만 폰 잔더스(Liman von Sanders) 장군은 오스만제국군 1군단장을 겸임하며 콘스탄티노플 방어를 맡게 됐는데, 이를 독일의 장악시도라고 본 러시아는 강력히 항의했다.
이른바 ‘해협 위기’는 독일이 한발 물러서서 잔더스가 군사고문단장 지위만 맡도록 함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독러관계는 카이저가 ‘끝장났다’고 할 정도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순에 이르고 있었다.
“프랑스는 전폭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합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불요불굴 연대에 직면하게 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양국은 반드시 강경책을 고수해야 합니다.”
이로써, 발칸 문제에 대응하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입장이 정리되었다.
영국을 중재자로 내세워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에 평화적인 대화를 주선해 보되, 만약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전쟁을 도발하면 양국이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합의였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합의는 우방국인 영국과 한국에도 통보되었다.
8월 2일 일요일, 독일 포츠담.
실제 역사대로라면 이미 세계대전이 발발해야 했지만, 8월 초까지 아무 일이 없었다.
마침내 카이저는 4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독일로 복귀했다. 카이저의 복귀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스트리아는 외무대신 베르히톨트를 파견했다.
프란츠 요제프의 친서를 지참하고 온 베르히톨트는, 강경파와 온건파 양쪽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왔다. 온건파는 독일의 외교적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에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고, 강경파는 독일이 러시아를 묶어 두는 사이 세르비아에게 일격을 날리려고 했다.
애매모호하지만 독일의 확고한 지원을 원하는 프란츠 요제프의 친서를 받은 빌헬름은, 흔쾌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우방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을 확신해도 됩니다.”
너무나도 흔쾌하게 지원의사를 밝히니, 베르히톨트는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제국-왕국 정부는 세르비아를 향해 최후통첩을 보내려고 합니다. 정부는 세르비아가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최후통첩을 보내려고 하나, 만약 그들이 불응할 시에는…….”
“불응할 시에는 어찌할 생각이오?”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순간 카이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양국 간의 국지전으로 국한된다면, 전쟁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그럼, 러시아가 개입할 우려는 없겠습니까?”
“짐이 차르를 잘 아는데, 그가 전쟁을 각오할 생각은 없을 겁니다. 프랑스가 부추기고 있는 모양인데, 그들도 전쟁 준비가 안 되긴 매한가지.”
카이저의 오스트리아 적극 지지 표명은, 얼마 전 프랑스-러시아 회담에서 보인 양국의 단합 태세로 비롯된 것이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밀착한다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더한 끈끈함을 보여 주겠다. 이게 카이저의 생각이었다.
“다만, 짐은 가급적 평화적인 해결책을 원합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선택지입니다. 가장 좋은 건 세르비아가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거지요. 독일은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세르비아와 러시아에 불만을 품고 있는 불가리아와 오스만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압박할 계획이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이 얼마나 확고한지 유럽에 보여 줍시다.”
“예, 폐하. 폐하의 뜻을 빈에 전하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거침없이 ‘백지수표’를 던진 카이저였지만, 살아남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영향으로 외교적 해결책을 선호하게 되었다.
베를린의 확고한 지지는 오스트리아가 최후통첩(Ultimatum)으로 나아가게 했다.
하지만 카이저가 외교적 해결책을 선호한다는 게 드러나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헝가리 총리 티서의 온건론이 다시 힘을 얻었다.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되,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압력을 행사합시다.”
“제국-왕국에 외교적 승리를 안겨 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정도 요구조차 거부한다면, 그때는 저들도 전쟁을 원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프란츠 요제프도 황태자의 온건론을 받아들였다. 황제의 지시를 받은 외무부가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최후통첩 안건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왕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권과 영토에 반대하는 선전선동을 즉각 중단한다.
2. 반오스트리아-헝가리적인 교육을 일체 금지시킨다.
3. ‘민족방위단’과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고, 선전수단을 몰수한다.
4. 선전선동에 참여한 자들이 군과 공직에 관여되어있을 경우, 즉시 축출하고 처벌한다.
5. 사라예보 암살 사건에 관여한 자들을 지체 없이 체포한다.
6. 사라예보 사건에 사용된 불법적 무기거래와 불법월경을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
7. 6월 28일 이후에도 반오스트리아-헝가리적인 언동을 일삼은 고위관리들의 발언을 해명한다.
8. 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에 지체 없이 보고한다.」
단, 최후통첩이 보내지는 시기는 8월 14일 세르비아 총선 이후로 연기되었다.
“선거가 끝나면, 보다 합리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과연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8월 14일 총선은 파시치 총리가 이끄는 인민급진당의 승리로 예상됐다. 아직 개표가 진행 중이지만, 급진당에 과반이 넘는 무난한 승리가 유력했다.
총선 이튿날인 15일 오후 6시,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사 기슬 남작이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기한은 48시간이었다.
총선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받은 최후통첩에 세르비아 정부는 당황했다.
마침 세르비아 주재 러시아 공사도 공석이었다. 얼마 전 가르트비크 공사가 갑자기 급사하는 바람에, 아직 후임자가 도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세르비아는 폐하께서 수락을 권고하시는 최후통첩의 어느 항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르비아 왕태자 알렉산다르는 즉각 페테르부르크에 자문을 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가 답을 보내기 전까지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결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도발로 저들에게 유리한 명분을 내줄 이유가 없습니다.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고, 저들에게 선택권을 넘깁시다. 만약 그럼에도 저들이 전쟁을 선택한다면,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보호자로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1913년 알바니아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첩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세르비아 정부도 납득했다. 오스트리아의 요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굴욕적이고 부당하게 느껴지겠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었다.
“러시아가 확고하게 세르비아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확인했으니 됐네. 이번 기회에 흑수단 무리를 정리하고, 군부를 확실히 통제해야겠어. 하마터면 저들 때문에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당할 뻔하지 않았나! 극단주의자들은 국가에 도움이 안 돼.”
파시치는 결단을 내렸다. 총선이 끝난 이상, 더 이상 강경한 민족주의 여론에 끌려다닐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그의 권력을 위협하는 건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흑수단이었다.
8월 17일, 세르비아의 최후통첩 응답이 전달됐다.
세르비아는 「정부가 사적 개인들의 범죄를 모두 책임질 수 없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적법한 수사에 따라 획득한 증거를 제공하면」 통첩의 사항들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책임소재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긴 했지만, 일단 세르비아는 모든 사항에 동의했다.
일전을 각오하던 태도를 저버리고, 백기를 든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적 승리이자, 강경파에 대한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승리였다.
“세르비아는 제국-왕국 정부의 합리적이고 관용 어린 통첩에 응했다. 제국과 왕국에 영광 있으라!”
실제 역사에서 유럽이 세계대전의 참화에 들어섰던 1914년 8월, 분명 역사는 바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독일은 분쟁을 국지적인 문제로 제한하려 했다. 러시아도 세르비아에 일보후퇴를 종용했다.
그 결과,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평화주의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생존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주화파들은, 이로써 자신들이 화약고에 떨어진 불씨를 잠재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붙은 불씨는, 그렇게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