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13
– 194화에 계속 –
2부 194화 대한제국군 출병
1914년 10월, 대한제국의 대독(對獨) 선전포고 이후 인천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역(戰域)에 대한 연합국 합동회의가 열렸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한국, 일본 5개국이 참여했다.
“독일이 차지한 산동과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고, 독일 동양함대를 격파합시다.”
“동양함대와 태평양의 섬들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해군이 맡도록 하지요.”
독일령 뉴기니, 즉 카이저빌헬름스란트(파푸아뉴기니)·캐롤라인제도·마셜제도·솔로몬제도·비스마르크제도·사모아에 대한 공격이 결정됐다. 영국령 호주와 뉴질랜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일본령 남양군도에서 출격하여 점령할 계획이었다.
“섬들이야 크게 문제가 될 게 없고, 문제는 산동의 독일군인데…….”
독일은 1898년 이래 ‘키아우초우(Kiautschou)’, 즉 산동반도 남부의 교주만(膠州灣)에 조차지를 확보했다. 독일이 건설한 청도(靑島, 칭다오)는 완전히 독일풍 도시였다.
의화단전쟁 이후 독일은 ‘츠푸(芝罘, 지부)’, 즉 산동반도 북부의 연대(煙臺, 옌타이)를 추가로 확보했다. 여기에 교주만과 산동의 성도인 제남을 잇는 교제철도(膠濟鐵道)의 부설권까지 얻어, 사실상 산동 전역을 세력권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청도를 요새화하고, 해병 4천여 명을 수비대로 배치했다.
“산동은 인천에서 황해만 건너면 될 정도로 가깝습니다. 대한제국이 육군 사단을 파병하여 제압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대표 박유굉 대장이 육군을 파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산동에 사단급 병력을 파병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러시아 정도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극동 배치병력도 유럽으로 동원하고 있는 만큼, 현실적으로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한국의 파병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영국은 천진에 주둔 중인 2개 대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병력을 얼마나 동원할 수 있습니까?”
“전함 7척, 순양함 10척을 동원해 교주만을 봉쇄하도록 하겠습니다.”
“육군은 얼마나 파병 가능합니까?”
“한국이 육군을 파병하다면, 굳이 일본까지 파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상 전투에 필요하다면, 해군육전대를 파병하도록 하지요.”
일본대표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郎) 해군 중장은 육군 파병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일전쟁 이후 군부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해군은, 육군에게 전공을 세울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가뜩이나 사이가 나빴던 육군과 해군은, 해군을 곤란하게 만든 지멘스 비리 사건을 독일에 폭로한 배후가 육군으로 의심됨에 따라 더욱 사갈시(蛇蝎視)하게 되었다.
“그럼 한국에서 1개 사단 이상을 투입하여 지상전을 맡고, 영국과 일본이 해군을 동원해 교주만을 봉쇄합시다.”
“그럼 한국군이 위해위를 산동 공략의 전진기지로 삼을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요.”
북경의 턱밑인 산동에 독일 세력권이 형성된 걸 위험하다고 생각한 영국은, 위해위(威海衛, 웨이하이)를 조차하고 독일을 견제했다.
“그럼 즉시 전투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조속히 독일을 아시아에서 몰아냅시다.”
5개국 대표는 승리를 다짐하며 악수했다.
“독일은 오랫동안 우리의 우호국이었는데, 왜 전쟁을 벌여야하는가?”
“만약 유럽에서 독일이 이기면 뒷감당은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전세는 독일에 유리하다!”
친독 성향의 일본 육군은 정부와 해군이 주도한 대독 전쟁에 불쾌감을 느꼈다.
일본 육군은 독일군을 모델로 만들어졌고, 독일에 대한 숭배와도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마주리안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압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육군은 찬탄과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모르는 소리. 유럽의 대전란은 일본의 국운이 발전할 수 있는 천우신조의 기회다.”
“중국과 태평양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이권을 일본이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 원로 이노우에 가오루, 해군의 수장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적극적인 참전파였다. 최고 원로인 이토 히로부미는 유럽의 전세를 지켜보고 군대를 움직이자는 신중론을 제시했으나, 오쿠마 내각은 신속한 행동에 나섰다.
“신속히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라!”
10월 15일, 일본 해군이 먼저 출격했다. 일본은 공고급 최신 전함 4척, 구형 전함 3척, 순양함 12척, 구축함 24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교주만을 봉쇄하고 독일 동양함대와 교전에 나섰다.
독일 동양함대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슈페 (Maximilian von Spee) 제독은 중과부적을 인지하고, 봉쇄가 완료되기 전에 태평양으로 항진하여 통상파괴전에 나섰다.
일본 해군은 독일 함대를 추격하기보다는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확보해 나가는 데 열을 올렸다. 일본령 남양군도에서 출격한 해군은 마셜제도, 캐롤라인제도, 비스마르크제도를 잇달아 점령했다.
영국 함대는 태평양에서 통상파괴전에 나선 독일 함대를 추격하고,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뉴기니와 솔로몬제도, 나우루를 점령했다.
독일령 태평양은 빠르게 무너졌다. 독일은 도저히 태평양까지 신경 쓸 여지가 없었고, 공격에 직면하여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일령 산동은 달랐다.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총독 알프레트 발데크(Alfred Waldeck) 해군 중장에게 즉시 항복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자, 빌헬름 2세는 전문을 보내 독려했다.
「아시아인들에게 키아우초우를 내준다는 건, 베를린이 러시아인에게 짓밟히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
독일령 산동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지원이 올 가능성도 없었다. 그럼에도 카이저는 자존심 때문에 결사항전을 주문했다. 황화론자인 빌헬름은, 독일군이 아시아인에게 항복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카이저의 명령을 따른다! 수치스럽게 항복하느니, 독일제국의 군인답게 명예롭게 싸우다 전사하자!”
독일군은 해병 2,700명, 육군 1,400명, 수병 700명으로 채 5천 명이 되지 않았다.
가망성 없는 싸움이지만, 발데크는 카이저의 명을 받들어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이로써 산동 전역이 형성되었다.
“저들이 항복을 거부하니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무력으로 항복을 받아 내는 수밖에.”
대한제국 육군은 최정예인 근위사단을 파병하고, 육군항공대가 첫 출격을 준비했다.
해군은 사실상 전력인 순양함 4척과 구축함 8척, 해군육전대 1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총 병력은 2만 4천, 독일군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였다.
독일이 지배하는 산동도 명목상은 중화민국 영토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에 산동 파병을 통보했다.
* * *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무렵, 중화민국은 문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청국이 각국에 빚진 막대한 외채의 대부분을 계승한 중화민국으로서는, 돈 나올 구석은 없는데 빚만 잔뜩 진 상황이었다.
결국 빚을 내서 이자를 갚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1913년도에 2억이 넘는 막대한 공채가 발행되었고, 해외에 대규모 차관을 요청했다.
“저래서야 차관 상환 능력이나 되겠소?”
“해관세와 염세를 담보로 걸어야지.”
영국·미국·프랑스·독일 4개국이 결성한 신디케이트는 애당초 청국에 차관을 빌려주려고 했으나, 신해혁명으로 중단되었다. 신생 중국이 다시 차관을 요청하자 가혹한 조건을 달았다.
신디케이트는 다른 열강이 독자적으로 중국에 차관을 대부해 주는 걸 막기 위해, 러시아·한국·일본에도 이권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신디케이트에 합류시켰다.
“러시아의 북만주-몽골 이권, 한국의 남만주 이권, 일본의 복건 이권을 보장해 줄 터이니 한목소리를 냅시다.”
마치 의화단전쟁 때처럼, 세계패권을 두고 대립하던 열강들도 중국 이권에서만큼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도덕외교’를 내세운 윌슨의 미국만이 예외였다.
7개국 신디케이트는 중국에 7천 5백만 파운드를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연리 5%, 관세와 염세를 담보로, 염업의 회계심사권한을 달라는 요구를 했다.
“중국이 청조처럼 반식민지나 다름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것 같은가?”
삼민주의에 ‘민족’을 내건 국민당 정부로서는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차관 협상은 결렬되었고, 신생 중화민국의 경제적 위기는 심화되었다.
“상황이 오히려 청조 시절보다 더 나쁘군.”
“그러기에 내가 뭐랬소? 국민당이 중국을 망칠 거라고 했지?”
“중국에서 삼민주의라는 건 가당치도 않아요. 중국은 예로부터 황제의 나라. 비록 황제는 사라졌지만, 황제와도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군부가 나서야 하오.”
군부를 중심으로 서서히 불만세력이 형성되었다.
국민당은 실질적인 힘을 지닌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북양파가 갈라진 안휘파와 직례파, 남방의 남양파와 호광파 4대 군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군대는 정부가 아닌 군벌 우두머리, 즉 단기서·풍국장·원세개·여원홍 4인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들은 권력을 위해 언제든지 총구를 겨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현재 대한제국의 주적도 중국의 군벌, 특히 중국에 중앙집권제를 부활시키려는 군벌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대륙을 향해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칼을 벼르고 있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화민국은 상황을 관망했다. 육군총장 단기서는 프로이센 육군대학 출신인 친독파임에도 대독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백인들의 전쟁에 왜 중국이 개입해야 한단 말이오?”
“중국의 위신을 높이고 산동을 탈환하려면 독일에 선전포고해야 합니다!”
“우리 처지도 어려운 판에, 남의 전쟁에 끼어들 이유가 없소.”
중화민국 대총통 손문과 국무총리 송교인은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과 한국이 잇달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은 더욱 중국의 중립을 희망했다. 심지어 주중독일공사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했다.
“중국이 중립을 유지해 준다면, 산동을 중국에 반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연합국에 패해 산동을 내주느니, 자발적으로 중국에 넘겨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연합군의 파병 명분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독일의 제안은 위기를 넘기기 위한 기만술에 불과합니다. 만약 독일이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산동이 아니라 더 과도한 요구도 하게 될 겁니다. 무력으로 탈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연합군의 산동 진격을 수락하고, 전투에 협조해 주기 바랍니다.”
산동 전역을 준비하던 한영일 3국에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5개국이 공동으로 중국을 압박했다. 결국 중국은 독일의 제안을 거부해야 했다.
“그럼 교주만을 탈환한 후에, 중국에 반환할 수 있겠습니까?”
“독일의 식민지 문제는 전후에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결정할 사항입니다. 귀국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단기서의 주장대로 중국도 참전하여 스스로 산동을 탈환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군벌연합체에 불과한 현재의 중국은 독일과 싸울 능력도 되지 못했고, 국민당 지도부는 전쟁을 틈타 군부의 힘이 더 강력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미 군부를 통제하기 어려운 지경인데,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더 얼마나 설치려고.”
“산동을 탈환하면 전후에 돌려준다는 연합국의 선의를 믿어 봅시다.”
중화민국은 중립을 유지하되, 연합국의 산동 작전을 묵인한다는 비밀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 육군은 위해위에 상륙하여 영국 육군과 함께 먼저 산동 북부의 연대를 점령하고, 청도로 진격하기로 했다.
일본 해군과 영국 해군은 교주만을 봉쇄하고, 육군이 청도에 근접하면 육·해군 합동공격으로 총공세를 가하기로 합의했다.
* * *
1914년 10월 17일은 조청일전쟁 평양전투 승전 2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평양의 기념식에 참석한 이선은 대륙으로의 진격을 선언했다.
“대한국민 여러분! 20년 전 우리는 청조의 침략을 이곳에서 막아 내고 자주독립을 지켜 냈습니다. 20년이 지나, 대한은 열강의 일원으로 함께 연합하여 싸우게 되었습니다. 20년 전의 만주 진격이 자주독립을 위한 힘찬 행군이었다면, 오늘날 대한국군의 산동 진격은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와아아아!”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군 만세!”
국민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던 나라가, 황제의 연설처럼 오늘날 열강의 일원이 되어 그 막강하다는 독일제국과 싸운다니 감개무량한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틀 후, 인천.
대한제국 산동파병군이 제물포항에 집결하였다. 이선은 대원수로서 파병군을 사열했다.
“대원수 폐하! 근위사단은 필승의 각오로 조속히 적을 무찌르겠습니다.”
산동파병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근위사단장 박승환 부장은 황제 앞에서 승리를 다짐했다.
4개 보병연대, 1개 포병연대, 1개 기병연대를 갖춘 근위사단은 일반사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일반사단은 참장이 사단장이었지만, 근위사단만은 부장이 사단장이었다. 여기에 야전중포연대를 차출하여 추가로 더 배치, 총 7개 연대 규모였다.
“귀관들은 대한에서 독일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피지기백전불태라 하였다. 사령관을 보좌하여 승리를 쟁취하라!”
“대원수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파병군 참모장을 맡은 이동휘 참장, 육군항공대를 맡은 원수부 항공국장 노백린 참장, 제1근위보병연대장 이갑 정령, 러시아 주재무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근위기병연대장 유동열 정령, 근위포병연대장 어담(魚潭) 정령.
모두 독일 유학파 내지 육군대학에서 팔켄하인에게 직접 프로이센 군사교리를 교육받은 장교들이었다.
이들이 현재 대한제국 군부의 주류였고, ‘프로이센의 제자’들이 옛 스승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내 독일과 일전을 벌이게 됐군요.”
“대한이 싸워 왔던 청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강적이오. 비록 적의 병력이 적다고 해도, 만반의 준비를 다 해 승리를 거둡시다.”
“물론입니다.”
대한제국군은 조청일전쟁과 의화단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경험했지만, 청군을 싸워 이겼을 뿐이었다.
열강과 직접 전투를 벌여 본 적은 없었다. 마침내 제대로 된 강적과 첫 전투를 벌인다는 것에, 대한제국군 지휘부는 전율을 느꼈다.
“장병 여러분, 위해위 전투를 기억하는가? 19년이 지나, 바로 그 위해위에 돌아가게 되었다. 대한해군의 힘을 세계에 보여 주자!”
“네!”
1895년 위해위 전투는 당시 조선 해군이 유일하게 전공을 세운 전투였다. 일본 연합함대가 북양함대 본거지인 위해위를 공격했을 때, 당시 조선 해군은 어뢰정밖에 없음에도 침투하여 적함을 격침시켰다.
그동안 여러 전공을 세우며 우대를 받는 육군과 달리, 여전히 해군은 대한제국 군부에서 서자 취급이었다. 파병함대 사령관을 맡은 신순성 참장과 해군육전대 제1연대장 안중근 정령은 해군도 전공을 세울 수 있다는 걸 육군에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대한국군이여, 대륙으로 진격하라!”
광무 18년 10월, 대한제국군의 출병으로 산동 전역이 개시되었다.
연합군으로서의 첫 전투이자, 근대화 이후 서양 열강과 싸우는 최초의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