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14
– 195화에 계속 –
2부 195화 대원수부
대한제국의 세계대전 참전과 산동 파병은 제국 선포 이래 최대의 군사적 사안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14년 전 의화단전쟁의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세계대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짐은 대한국군의 대원수로서, 승리의 그 날까지 장병들과 함께 고락을 함께하겠다. 충용한 국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
“대한의 승전과 연합군의 최종승리를 위하여, 대한국군은 분골쇄신하겠습니다!”
“대한국 만세! 대원수 폐하 만세!”
이선은 대원수로서 전쟁 기간 동안 군복을 상시 착용하고, 전시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한국헌법에 따르면, 통수권(統帥權)은 대원수인 황제에게 있었다. 대원수는 최고 통수기관인 원수부(元帥府)를 통해 군령권을 행사했다.
원수부는 대원수 직속기관으로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이었는데, 이는 프로이센 참모본부나 일본 대본영과 유사한 형태였다. 일본 대본영이 프로이센 참모본부를 모델로 했고, 대한제국군도 프로이센군을 모델로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고, 전시에는 이런 방식이 필요하겠지.’
일본과 달리 조선은 예로부터 문관 우위의 사회였기에, 갑신경장 이후 무관의 급격한 지위 상승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특권의식을 지니거나 정부를 무시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군부 자체가 이선과 개화당이 이끈 근대화의 최대 수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부 수뇌부는 개화당과 대개 인적으로 유착관계였다.
1900년대의 군제개혁 이후 정치군인에 가까웠던 군부 1세대는 모두 은퇴했다.
박유굉, 박승환, 홍범도, 이동휘, 노백린, 조성환, 이갑, 유동열 등 근대적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제복군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군부의 독립성이 확립되었다.
‘과도기와 전시임을 감안하여 종전 때까지만 이 체제를 유지하고, 전후에는 실질적인 통수권을 내각에게 넘겨 문민통제를 이루도록 해야겠다.’
실제 역사에서 프로이센 군부와 일본 군부가 보인 폭주와 추태를 기억하고 있는 이선으로선, 통수권을 영구히 황제 직속으로 유지할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했으니 군부의 역할이 더욱 커질 터. 경이 군무대신으로서 정부와 군부를 잇는 통로가 되어야 하오.”
“예, 폐하.”
박유굉은 일본 육사와 프로이센 전쟁대학을 졸업한 근대적 제복군인 1호였고, 초대 원수부 참모총장으로 재임했다. 제복군인 최선임자인 박유굉에게 군무부를 맡긴 건, 일본처럼 군인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부와 군부 간에 원활한 소통과 관리를 위해서였다.
“참모총장. 전시가 되었으니 경에게 중대한 책무가 있네. 승리를 위하여 만전을 기하도록.”
“삼가 명을 받듭니다, 폐하!”
박유굉의 후임인 2대 참모총장으로 홍범도가 임명되자, 군부에서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명문가인 반남 박문 출신에 일본·독일 유학파인 박유굉과 달리, 홍범도는 평안도 상한(常漢) 출신에 엘리트 참모라기보다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이었다. 홍범도 자신도 참모총장보다는 사단장이 더 어울리는 지위라고 생각했지만, 이선은 그에게 중책을 맡겼다.
홍범도는 그야말로 신생 대한제국군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관학교 1기,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의 영웅, 평양 군영의 사병 출신에서 참모총장에 이르기까지 입지전적인 출세.
“홍 장군이 대단하긴 하지. 사격술은 백발백중이요, 병사들에게 신뢰받는 지휘관이고.”
“체격만 봐도 위압적이지 않나.”
1868년생인 홍범도는 당대에는 드물게도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이었고, 체격에서 주는 위압감이 굉장했다. 간혹 그의 출신 성분이 낮다고 고깝게 여기는 이도 없잖아 있었으나, 면전에 서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서북 출신들이 군부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모두 성상께서 발탁한 인사일세. 그동안 차별받던 지역에다 상무적 기풍이 있으니 문관보다는 무관에 쏠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나.”
예컨대 홍범도는 평양,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 노백린은 황해도 송화, 이갑은 평안도 숙천, 유동열은 평안도 박천 출신이었다.
오랫동안 차별받았기에 오히려 재빨리 개화를 받아들였고, 1894년 조청일전쟁의 전장이 되었던 서북 일대에서 무관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니, 시간이 지나 군부의 주류로 떠오른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서북 출신 장교들은 대개 진취적이고, 만주 팽창을 염원했으며, 철저한 근황파였다. 외국의 새로운 군사교리를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거부감이 없었다.
정부는 여전히 기호 출신의 개화당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군부는 서북 출신 소장파들이 주류로 떠올랐다.
“유럽의 대전은 절호의 기회다. 만주를 확고하게 장악하고, 대륙으로 팽창하며, 열강의 반열에 오른다.”
세계대전을 기회로 받아들인 건, 개화당 지도부나 군부 소장파나 큰 차이가 없었다. 최소한의 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고자 했다.
전시 최고사령부인 대원수부(大元帥府)회의가 특별히 구성되었다.
대원수부 회의에는 대원수 이선, 정부를 대표하여 총리대신 박영효, 내무대신 서재필, 외무대신 이완용, 군부를 대표하여 군무대신 박유굉 대장, 원수부 참모총장 홍범도 부장, 해군사령관 이규풍 부장, 참모차장 겸 병참(兵站)국장 김정우 참장, 정보국장 이동휘 참장, 작전국장 겸 항공국장 노백린 참장, 군부 원로인 시종무관장 백성기 부장이 참석했다.
총장이나 국장이 부재 시에는 차장이 대리했고, 이동휘와 노백린이 파병군 사령부에 합류하면서 차장이 일시 대리했다.
대원수부는 전시 최고통수기구로서, 대한제국군 전체의 지휘와 전시계획을 확립하는 기관이었다.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설치된 러시아 제국군 최고사령부, 스타프카(Stavka)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었다.
10월 25일. 영국령 위해위에 상륙한 대한제국군 선발대는, 영국군 2개 대대와 함께 산동반도 북부 연대(옌타이)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연대 방어를 포기하고, 주둔 병력을 모두 청도(칭다오)로 퇴각시켜 집결했다.
손쉽게 연대에 태극기를 꽂은 한국군은, 청도를 향해 진격하며 공세를 준비했다.
대원수부에서는 파병군 사령부에 연대 함락을 치하하고, 청도 요새를 포위하고 철저히 준비하여 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을 보냈다.
“곧 전개될 청도 공성전이야 압도적인 전력차가 존재하니까, 어렵지 않게 승리로 끝날 수 있소. 문제는 그다음이오.”
“폐하, 그다음이라 하오시면?”
“이번 전쟁은 국가의 총력을 기울인 전쟁이 될 것이오. 각국의 군수 생산력, 즉 경제력과 산업력에 승부가 갈릴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대한은 군수산업 자체가 열강과 비교하면 미비하기 짝이 없소. 이번 기회에 최대한 군수능력을 갖춰야 하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대한제국의 군수능력은 유럽으로 치면 발칸 국가들보단 우월하고 벨기에보다 낮았다.
총력전이란 개념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13개 상비사단을 운용하고 전시에 60만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는 게 한계였다. 수백만 대군을 운용하는 유럽과 비교하면 한참 처졌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 전쟁이 대한의 국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지요? 산동 전선을 정리하고 나면 독일과 다시 충돌할 일이…….”
“물론 대한이야 유럽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소. 그런데 이미 전쟁의 대세는 국가의 총력을 동원하는 전쟁으로 나아가고 있소. 우리도 미래를 위하여 대비를 해야 합니다.”
이선은 4년 이내로 전시에 100만 이상의 대군을 운용할 수 있는 군수능력을 갖추길 원했다.
중공업으로의 전환은 이를 위한 길이었고, 전쟁은 수요를 창출했다. 평시에는 열강과 경쟁할 능력이 못 되었지만, 전쟁은 수출 활로를 활짝 펼쳤다. 중공업은 농업국가를 막 벗어나 경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는 대한제국 산업의 새로운 미래가 될 터였다.
“우리의 주적은 독일만이 아니라, 대한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나라요. 러시아와 일본이 모두 연합국이 되었으니 당장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중화질서를 재현하길 원하는 군벌은 결국 만주를 노리게 될 것이오.”
세계대전의 장기화는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후퇴하게 됨을 의미했고, 러시아 세력권으로 간주된 만주와 몽골에서 공백이 발생할 터였다.
그 공백을 놓고 한국과 중국이 충돌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신생 중화민국이 군벌 연합체에 불과했지만, 중화통일을 원하는 군벌이 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가장 상책은 중국을 영구히 분열시키는 것이지만, 서투른 시도는 중화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었다. 4억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보다 치밀하고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산동을 점령한다 해도, 독일의 이권을 대한이 그대로 인수한다고 하면 안 될 것이오. 명목상으로는 전후에 연합국 최고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에 반환한다고 해야 하오.”
“그런데 일본이 동의하겠습니까? 결국 일본이 해군뿐만 아니라 육군도 동원하였습니다만.”
본래 일본은 해군만 동원하기로 했지만, 육군이 따돌리려는 시도에 분개해 산동 전역에 합류하려고 했다.
변수가 된 건 의외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의화단전쟁 이후 실전경험이 없는 한국군이 독일군을 상대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여순 요새 공격의 경험이 있는 일본에 육군 파병을 촉구했다.
「수적으로는 한국군이 훨씬 우세하다고 하지만, 대규모 요새 공략 경험이 없는 한국군에게만 맡기기에는 독일군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일본 육군도 투입하길 바랍니다.」
영국의 요청은 한국 입장에선 영 못마땅했지만, 만전을 기하겠다는데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육군 3사단 29여단과 야전중포연대를 동원해 청도 포위전에 합류하기로 했다.
여전히 산동 전역의 주력은 한국군이었지만, 일본이 대규모 함대까지 동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지하는 비중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점이오. 산동은 대한의 지척에 있지만, 일본하고는 떨어져 있소. 일본이 산동 이권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무리수를 둘 가능성은 충분하지. 일본은 복건과 절강 이권을 차지하길 원하니, 산동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을 압박할 수도 있고.”
“어쩌면 한일 공동으로 중국을 압박하자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열강이 중국에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더 큰 요구를 할지도 모르고.”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북수남진 해주육종 정책을 택하고, 오쿠마 내각이 성립된 이후로는 정당정치를 확립해 나아가고 있습니다만, 전임 정부의 강경책을 답습하겠습니까?”
실제 역사에서 일본은 산동 점령 직후에 21개조 요구라는 강경한 정책을 중국에 강요한다.
변화한 역사의 일본은 군부와 팽창주의자들의 힘이 많이 꺾인 상태라, 강압책을 답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폭주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칭다오 함락은 걱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다음이지. 전쟁만 일어나면 일본이 정신줄을 놓는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실제 역사에서도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건 야마가타나 군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정책 결정에서 몰아내려 했던 직업외교관 출신 외무대신 가토 다키아키(加藤高明)였다.
‘오쿠마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가토가 입각한 이상, 뭔가 사고를 칠 것 같긴 한데……. 차라리 악역을 일본에 떠넘기고, 적당히 중재하는 척하면서 이익을 노려볼까.’
“일본이 동맹이긴 하지만, 그들의 팽창욕은 통제하기 어렵소.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대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팽창을 향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
“만주는 대한에 특수한 이해관계가 있고, 산동은 바다를 사이에 놓고 대한과 지척입니다. 만주와 산동에 일본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중국에 어떤 압박을 가하든 개의치 않아도 되겠습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하오.”
외무대신 이완용의 말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완용, 내 기대 이상으로 충실한 제국주의자가 되었군. 만주 문제의 악역은 이완용에게 맡겨도 되겠어.’
원로 김옥균과 유길준이 ‘동양 평화’를 중시하는 비교적 온건한 제국주의자라면, 박영효와 이완용은 대륙진출을 원하는 강경한 제국주의자였다. 이들은 세계대전을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타프카(러시아 최고사령부)에 파견할 연락장교를 선발하고, 유럽 동부전선의 전황에 대해 면밀히 살피도록 합시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의 관심사는 서부전선보다 동부전선에 있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는 우세를 보였지만, 독일군에게는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선은 실제 역사처럼 러시아제국이 참패하여 완전히 붕괴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고, 어떻게든 관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소. 산동의 대한국군에게 승리를 기원합시다.”
“예, 폐하!”
대원수부 회의를 마치고 석조전으로 돌아오는 이선을 향해 황태자 이진이 거수경례를 했다.
“대원수 폐하! 대원수께 삼가 군례를 올립니다!”
“오, 태자. 공부는 어떠한가?”
“교수님의 지도와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 충실히 행하고 있습니다.”
이진은 육군 참위 정복을 입고 있었다. 원수부 관제에 따르면 황태자는 명목상 원수 예우를 받을 수 있으나, 이선은 이진이 먼저 군사교육을 모두 이수하기를 원했다. 마침 18세가 되었으니 무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연령대이기도 했다.
군부는 황태자를 무관학교에 입교시켜 생도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게 할 수는 없고, 시종무관으로부터 유년군사교육을 받은 점을 감안하여 육군대학의 청강생으로 참관하게 했다. 이진에게는 참위 계급이 주어졌다.
“귀관들이 황태자의 학우인가?”
“예, 폐하! 삼가 어학우(御學友)를 맡게 된 육군 정위 홍사익입니다.”
“아아, 광무 13년도 무관학교 수석 졸업생. 기억하네.”
“영광입니다, 폐하!”
군부는 황태자에게 육군대학의 최고 엘리트들을 보좌역으로 맡겼다.
홍사익(洪思翊)은 실제 역사에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에 편입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군 중장까지 오른 이였다. 바뀐 역사에서는 그 능력을 조국을 위해 쓰게 되었으니, 육군유년학교 수석-육군무관학교 수석졸업-육군대학 수석이었다.
“귀관도 어째 낯이 좀 익군.”
“영광입니다, 폐하! 태자 전하의 어학우를 맡게 된 육군 정위 김좌진입니다.”
‘아, 어쩐지.’
김좌진(金佐鎭)은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인물이었다. 홍사익과는 육군유년학교와 무관학교 동기로, 간발의 차로 차석으로 졸업했다.
“국군의 미래인 귀관들에게 태자를 맡기니 든든하군.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길 바라네.”
“삼가 명을 받듭니다, 폐하!”
홍사익과 김좌진은 황제이자 대원수를 향해 거수경례했다.
이선의 말처럼, 이들은 대한제국군의 미래였다. 장차 동양 최강으로 떠오를 한국군을 이끌 이들이었다.
“장차 국군의 근간을 이룰 인재들이다. 신하가 아닌 선학(先學)이라 생각하고 많이 배우도록 하여라.”
“예, 폐하!”
이진은 아버지에게 거수경례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미래의 대원수로서 부족함이 없어야지. 부황께서 전쟁을 잇달아 승리로 이끌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만드셨듯이, 부황의 대업을 이어받아 대한을 최강국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이진은 저자신이 미래의 대원수가 되는 날을 꿈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