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17
– 198화에 계속 –
2부 198화 중국 분열 계획
1914년 12월, 산동의 독일군이 항복한 이후 독일이 조차한 교주만·청도·연대는 연합군의 공동 관리 하에 들어갔다. 한국군과 일본군은 각 1개 여단을 산동에 주둔시켰다.
전후처리를 어찌할지를 두고, 한일 양국 간에 은밀히 논의가 시작됐다.
이선의 밀명을 받은 김옥균이 개인자격으로 도일(渡日)을 준비했다. 김옥균은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와도 오래전부터 막역한 사이였으므로, 정부에서 직함을 맡고 있지 않은 김옥균의 도일은 개인적인 방문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정부와 세밀한 논의를 한 상황이었다. 이선, 김옥균, 박영효는 일본에게 통보할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했다.
“고균, 경의 나이도 어느덧 예순넷이 되었구려. 원훈인 경에게 매번 외교의 중책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오.”
“망극하옵니다. 신은 성상의 하명이라면 언제, 어느 때건 가리지 않고 나설 것입니다.”
김옥균은 문득 30년도 더 된 옛일을 떠올렸다. 조선의 개화를 위하여 무작정 일본으로 달려가 덤벼들던 시절을. 그때만 해도 일본이 조선보다 한참 앞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대등하게, 아니 일본보다 더 교묘하고 능수능란하게 국익을 획득하고 있었다.
“현재 중화민국 대총통인 손문이나 국무총리 송교인은 중국 헌정의 상징이라 할 수 있소. 현재 일본 총리대신 오쿠마나 외무대신 가토는 일본 헌정의 옹호자지. 고균과 금릉위도 대한 헌정의 시초로 평가받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삼국에 모두 헌정을 지향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으니, 실로 동양 삼화주의를 실현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겉보기에는, 동양 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삼국 모두에 ‘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중국 집권 국민당이 좀 더 혁명적이고, 일본 집권 헌정동지회와 한국 집권 입헌개화당이 좀 더 보수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일단은 서구식 자유주의를 지향했다.
“뭐, 손문과 송교인은 훌륭한 인격자들이지. 중국이 만주와 몽골에 손만 안 뻗는다면야, 한중우호도 침해되지 않을 것이고.”
“손문과 송교인은 이미 신과 밀약을 맺었나이다. 그들은 중국을 통치하기도 어려운 처지니, 굳이 청국과 대립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문과 송교인은 혁명 전에 김옥균과 밀약을 맺고, 혁명이 성공하면 중국 18성 외의 지역에서는 손을 떼겠다고 약조했다. 그 약조는 지금까지는 충실히 이행되고 있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런데 국민당이 얼마나 더 정권을 유지할지 의문이오. 현 국민당 정권은 군벌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소. 산동 전역은 중화민국의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고, 세계대전으로 열강이 중국 정세에 개입하지 않는 걸 기회라고 생각하는 군벌도 있을 거요. 정통성이 부족한 군벌이 집권하면, 청국 멸망과 영토수복을 부르짖겠지.”
지방에서 왕초 노릇 하려는 군소군벌이 있는가 하면, 정권 전복과 중국 지배를 꿈꾸는 야심을 품은 대군벌도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온갖 야심가들이 중국에 난무했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굳이 그럴 필요야.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한 군벌이 정권을 잡으면, 다른 군벌은 ‘나는 왜 저놈만 못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소. 결국 서로 간에 권력쟁탈을 놓고 끝없는 투쟁이 계속될 거요. 중국에 본격적인 군벌 시대가 개막하는 거지.”
김옥균은 이선이 원하는 바를 짐작했다. 이선은 신해혁명을 배후에서 후원하여 청나라를 중국 18성의 중화민국과 만주-몽골-신강-티베트의 북청으로 분리시켰다.
‘그다음은 중국의 분열을 계획하시는가.’
“중국에 안정적인 통일정권이 들어서지 않고 분열해야만, 청국의 안위가 보장되고 대한의 활동영역도 넓어질 거요.”
“그럼 익문사에 모종의 공작을 준비하도록 할까요? 부총통 원세개는 야심이 가득한 자지요. 이미 정변을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세개는 경과 내가 모두 잘 알지. 조선에서 쫓겨난 게 엊그제 같은데, 끝내 살아남아 중화민국 부총통까지 될 줄이야.”
“그럼 원세개가 정변을 도모하도록 슬쩍 밀어 준다면…….”
말은 그렇게 해도, 김옥균은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조선이 약했을 때는 속방 취급하며 정복자처럼 군림하던 원세개지만, 오늘날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자 거리낌 없이 이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하자면, 이선도 김옥균처럼 원세개를 혐오했다. 강자에게는 약하지만, 약자에게 강하고, 언제든지 이익을 위해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인간.
‘뭐,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런 인간도 충분히 쓸모가 있지.’
“아니,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원세개가 자발적으로 정변을 일으킬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중국의 정권 교체에 좀 더 열을 올릴 나라가 있지.”
“일본이로군요.”
북청의 영역인 남만주와 내몽골 동부를 세력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한국은, 중화민국과 충돌할 일이 별로 없었다. 산동 문제는 예외적인 사안이었다.
하지만 대만을 기반으로 복건을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더 나아가 절강까지 나아가길 원하는 일본은 남경 정권과 지대한 관계가 있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당 지도부는 과거 자신들이 망명을 했던 일본에도 비타협적이었고, 일본은 국민당 정권을 껄끄럽게 여겼다.
“하지만 오쿠마 총리는 외교 문제에 있어 무리수를 둘 사람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내각이 문민 중심의 자유주의 정당이고…….”
“국내에서는 진보적이지만, 국외에서는 강경한 제국주의자. 우리는 이미 그런 사람을 본 적 있소. 고균도 직접 만난 적이 있잖소?”
“과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그랬지요.”
“일본처럼 팽창주의 욕구가 강한 나라는, 문민정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소. 군부와 투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론을 부추기기 위해서 강경하게 나올 수 있지. 약간만 찔러 주면, 바로 반응을 보일 거요.”
김옥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화당도 국내정책은 진보적이었지만, 대외정책은 제국주의였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실제 역사와 여건이 다르기는 하지만, 오쿠마 내각이 무리수를 둘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총리대신 각하.”
“덕분에 평안합니다. 날도 추운데 근래 건강은 어떠십니까? 늙으니까 건강부터 염려가 됩니다, 허허.”
도쿄 총리관저를 방문한 김옥균은 오쿠마 시게노부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올해 77세의 오쿠마는 여전히 정정했다. 메이지유신의 공로자 중 한 명이요, 메이지정부 초기에는 대장경(재무장관)으로 정권 실세였다.
1881년 헌법 제정과정에서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정당정치를 주장했던 오쿠마는, 프로이센식 정치체제를 주장한 이토와 대립 끝에 이른바 ‘메이지 14년 정변’으로 실각했다.
1898년에 총리로 취임하여 국정을 맡은 시기를 제외하고, 오쿠마는 오랜 야당 생활을 해 왔다.
정계에서 은퇴하여 자신이 설립한 와세다 대학 이사장직에 전념하던 중, 육군에 이어 해군마저 지멘스 비리 사건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실각하면서 70대의 오쿠마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각하께서 주도하시는 자유의 훈풍이 동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니, 아주 따뜻합니다.”
“하하하, 역시 고균의 언변은 여전합니다.”
총리로 취임한 오쿠마는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을 제외하고, 전원 문민 정치인을 입각시켰다.
호헌세력인 입헌동지회(立憲同志会)가 정부를 주도했다. 특히 사법대신에는 호헌운동의 주도자로, ‘헌정의 신’으로 이름 높은 오자키 유키오가 취임했다.
오쿠마는 정당의 역할을 더 강화하기 위해, 내각에 참정관(参政官)을 신설하여 현직 의원들을 임명했다. 각부 대신과 제국의회 의원을 직접 연결하여, 정부를 의회의 통제하에 두려는 시도였다.
일본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군부의 목소리는 약화되고, 문민 정치인과 정당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그야말로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현실로 성사된 것처럼 보였다.
“산동 전역의 승리에 모든 한국 국민이 기뻐합니다. 한일 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독일 군국주의에 맞서고 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에도 한층 가까워지고 있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유럽 열강이 대전쟁으로 동양 문제에 신경 쓰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중국 문제를 논의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김옥균과 오쿠마의 생각이 일치했으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습니다. 산동 문제에 대해서입니까?”
“좀 더 포괄적인 합의를 위해서지요. 황제 폐하와 정부의 제안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동양의 평화와 안정, 우호를 위하여……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안에 합의하길 희망한다.
1. 한국은 남만주를 세력권으로 하고, 일본은 복건을 세력권으로 하는 기존의 합의를 존중한다.
2. 산동의 독일 이권은 한일 양국이 나눠 가진다.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전시에는 일시 점령을 내세우고 전후에 체결될 조약을 통해 최종적으로 열강의 승인을 받는다.
2-1. 한국은 산동반도 북부 연대와 지부의 이권을 계승한다.
2-2. 일본은 산동반도 남부 교주만과 청도의 이권을 계승한다.
2-3. 독일이 부설한 교제철도는 남만주철도의 선례를 따라,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3. 전쟁으로 인해 열강의 중국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다. 한일 양국의 권익이 확대되도록 양국은 공동으로 협력한다.
4. 한국이 하북으로 세력권을 확대하고, 일본이 절강과 강소로 세력권을 확대할 수 있도록 양국은 협조한다.」
한국의 제안을 읽어 본 오쿠마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반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산동 전역에 귀국이 많은 병력을 투입시켰는데, 정녕 교주만과 청도를 일본이 확보해도 좋겠습니까?”
독일이 중점적으로 개발한 곳은 교주만의 청도였다. 연대에도 지부라는 좋은 항구가 있었으나, 독일이 발전시킨 청도에 비하면 부족했다.
“대한은 귀국과 이익을 다툴 생각이 없습니다. 독일이 동양함대의 본거지로 개발한 곳이니만큼,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귀국이 청도를 보유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 판단했습니다.”
김옥균은 좋은 말로 포장했다.
일본이 청도에 눈독을 들인 것과 달리, 한국 정부와 군부는 청도보다 오히려 연대에 더 관심을 보였다. 연대는 요동반도 대련에서 지척이고, 인천-청국령 대련-연대를 잇는 서해 삼각형 벨트를 구상하는 한국에 좀 더 유용한 위치에 있었다.
“강소와 절강은 영국의 세력권에 가까운데…….”
“그렇습니다만, 대전쟁에 휘말린 영국이 중국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습니까? 장강 하류의 강소와 절강이야말로 현재 중국의 중심이지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면, 마땅히 귀국이 선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건을 넘어 강소와 절강으로 세력권을 확대한다는 건 영국과 대립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김옥균은 일본의 야욕을 한껏 부추겼다.
일본 상공업계와 해군은 복건-절강-강소 해안을 잇는 세력권을 얻기를 희망했고, 복건 아모이(샤먼)에서 산동 남부 청도까지 이어지는 넓은 해안선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국이 세력권을 확대하길 희망한다고 통보한 하북(구 직례성)은 일본의 세력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서로 협조하기에 충분했다.
요컨대 중국의 해안 일대를 남북으로 나눠 이권을 갈라 먹자는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요.”
“이는 밀약이니, 극비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오쿠마는 한국의 제안을 검토했다.
내각의 2인자이자 일본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외무대신 가토 다키아키는 한국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가토는 직업외교관 출신으로 원로와 군부의 간섭을 막아 외무성의 독립적 지위를 이끌어 냈다.
가토는 이토, 이노우에, 마쓰가타 등 원로들을 뒷방 늙은이로 내몰고 외교정책을 뜻대로 풀어 나갔다.
“일본 혼자서도 중국에 요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한국이 협력하겠다니 좋은 일입니다. 받아들이시지요.”
“음. 하지만 중국에 과도한 요구를 하면, 영국을 비롯한 열강이 반대하지 않겠소?”
“열강은 중국 문제를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롭지 못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속히 기정사실화하면 됩니다.”
“국민당 정권이 요구를 받아들이겠소? 그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안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요.”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총리의 물음에 가토가 씩 웃었다.
“근래 부총통 원세개 장군이 히오키군(주중 일본공사)과 꽤나 가깝습니다.”
“그가 손문과 송교인을 설득할 거란 말이오?”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정변을 도모하자는 말인가?”
쿠데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오쿠마는 놀란 표정이었다.
“일본에서도 군부가 정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게 불과 7년 전 일이네. 사토 히로시였나? 그 정신 나간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정변이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중국에서 군부가 정변으로 정권을 잡는다면, 일본에서도 헛된 망상을 품는 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중국과 일본은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 정부는 군부를 억제하고 있지만, 중국은 전혀 그러질 못합니다. 군벌들의 세상이지요. 시간의 문제지, 중국에선 결국 군벌 정권이 들어설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가 미리 선을 만들어 놓는 게 낫지요.”
“으음…….”
오래전부터 군부의 문민통제를 주장해 왔던 오쿠마는, 중국에서라도 쿠데타를 도모한다는 발상에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우리 육군과 해군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라도, 중국 이권은 확실히 획득해야 합니다. 산동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 채 철수하고, 유럽의 전쟁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도 중국에 교두보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육군과 해군이 얼마나 짖어 대겠습니까? 여론은 또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러일전쟁의 실패와 엄청난 손실로 대륙으로의 팽창욕구가 한동안 꺾였다고는 하나, 일본제국은 결국 팽창을 추구하는 국가였다.
한반도와 만주를 향한 북진론이 중국 강남으로의 남진론으로 대체되고, 육군을 대신해 해군이 대세를 차지했을 뿐, 결국 팽창을 염원하는 건 일본 군부와 정계 대다수의 머릿속에 고정으로 박혀 있었다.
문민정부가 호전적인 군부와 여론을 통제하려면, 역설적으로 대외강경책을 선도해야 했다.
만약 문민정부가 실각해서 군부가 주도하는 정부가 들어서면, 더욱 호전적인 정책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문민정부가 강경책을 예방책으로 쓰는 게 낫다.
‘일본 자유주의자’의 기이한 대외정책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