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21
– 202화에 계속 –
2부 202화 대한해군 구주원정함대
대한제국 육군이 30년의 노력 끝에 열강과 일전을 벌여 볼 정도로 성장하는 동안, 해군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였다.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이라는 두 차례 전쟁, 국토방위와 북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육군은 계속 팽창해 왔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는 해군은 순양함 한 척 건조하는 것조차 버거웠고, 광무 18년(1914)에 마침내 전함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는 천하를 얻게 된 기분이었다.
“전함 충무공 이순신은 대한해군의 상징이자 보물일세. 위로는 황제 폐하께서 내탕금을 하사하시고, 아래로는 해군 장병들과 국민이 성금을 모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네!”
“예!”
최신 드레드노트급 전함 의 비용은 275만 파운드, 즉 2,750만 원. 이 중에 황제가 내탕금으로 2할을 부담하고, 해군 장병들과 국민이 낸 성금으로 1할을 모으고, 나머지는 정부 예산으로 책정되었다.
해군은 1914년 8월에 영국으로부터 전함을 인도받기로 했고, 장교와 수병들을 영국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예상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전함 충무공 이순신은 영국 왕립해군으로 임대됐다.
1. 임대료는 종전 후 인도가 완료될 시까지 일 1천 파운드로 한다.
2. 한국의 전함 할부금 납부는 종전 후로 연기한다.
3. 작전 중 파손되면 수리를 모두 완료하고 인도 지연에 대한 보상금이 있어야 한다.
4. 작전 중 침몰하면 영국은 동형급 전함으로 보상한다.
5. 영국에 임대를 하되, 한국 해군 장교들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탑승과 참관을 허용한다.
한국이 내건 조건이 모두 수락됨에 따라, 전함 충무공 이순신을 인수하기 위해 영국에 왔던 장병들은 그대로 잔류했다.
장교들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함에 탑승했고, 하사관과 수병들은 영국 왕립해군의 지도와 훈련을 받았다.
해군은 이들에게 , 일명 라는 거창한 직함을 부여했고, 종전이 이뤄질 때까지 영국에 주둔하기로 했다.
청도 공략전에 이어,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작전에 나선 독일 순양함 을 잡기 위해, 한국도 순양함 전단을 파견했다. 통상파괴전의 놀라운 성과를 거둔 엠덴을 직접 잡지는 못했지만, 영국 및 일본 해군과 함께 인도양에서 추격전을 벌이며 최초로 대양작전의 경험을 쌓았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머나먼 타지에서 대한의 국위를 빛내고 있는 해군!」
「연안해군에서 대양해군으로! 빛나는 대한해군의 미래!」
해군은 열심히 여론전에 나섰다.
해군이 군부의 절대다수이자 주류인 육군에 맞서 발언권이라도 확보하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황제와 여론에 호소하는 방법이라는 걸 체득했다.
원수부 해군국에서는 이라는 계간지를 만들어 홍보에 나섰다.
「대한해군의 자랑, 전함 충무공 이순신 – 탄생 비화(祕話)와 현재」
「서전(스웨덴) 올림픽을 제패한 해군육전대 안중근 정령 – 백발백중의 사격수에서 청도 공략전의 영웅까지」
해군의 필사적인 프로파간다에 육군은 용쓴다며 코웃음을 쳤지만, 여론전의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치열한 참호전. 영불 연합군과 독일, 일진일퇴의 공방전 계속.」
「러시아군, 코카서스 전역에서 터키군 대파!」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탈퇴하여 연합국으로 참전!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연합국의 최종 승리를 향하여 전진!」
관영통신사인 제국익문사 구주특파원은 유럽의 속보를 빠르게 한국으로 전달했고, 민영언론들도 앞다투어 보도했다.
산동 전역 이후에 대한제국의 군사작전은 잠잠해졌고, 저 멀리 유럽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 소재였다.
‘교양 있는’ 한국인들은 만나면 유럽의 전쟁에 대해 논의했다.
전선에서는 수많은 병사가 죽어 가고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스포츠 중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독일이 그렇게 세다며?”
“그러니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동서에서 달려들어도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게 아니겠나.”
“그 강하다는 독일군을 격파한 우리 대한국군은 얼마나 강한 건가?”
“이봐, 착각하지 말게. 산동에 있었던 독일군은 한 줌도 안 된다고. 전체 독일군 병력은 수백만이라더군.”
“그 수백만 대군을 무찌르려면 전쟁이 조속히 끝날 일은 없겠군. 우리 연합국이 이겨야 할 텐데.”
“우리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네. 전쟁 특수 덕에 수출이 늘어서 쏠쏠해.”
“중국을 넘어 러시아까지 수출 판로가 열렸으니 말이야. 하하하.”
상류층과 지식인의 관심사가 유럽에 쏠리자, 해군의 여론전은 성과를 발휘했다.
「제해권을 장악한 연합국, 해안을 봉쇄당한 독일 – 자원이 풍족한 연합국, 기아 위기의 독일」
「전쟁은 지상에서만이 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대전략은 바다에서 승부가 난다!」
「대한해군 구주원정함대 장교의 특별기고 – 광무 19년, 현재의 전쟁」
관전무관을 제외하고 현시점에서 유일하게 유럽에 파견되어 있는 해군은, 특별히 전선에 투입될 일은 없었지만, 유럽에 있는 기회를 활용했다.
이들은 가장 빠르게 전훈을 흡수할 위치에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신순성 참장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개전 초기만 해도 순양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청도 공략전과 인도양 전역에 참전했다.
그런데 졸지에 충무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제독으로 진급하여 영국에 도착했다.
이름은 거창하게 ‘구주원정함대’란 이름이 붙었지만, 실질적으로 영국 왕립해군에 배속된 전함 충무공 이순신이 전부였다.
부대장으로서 직접 지휘를 하는 게 아니라, 세계 최강 해군의 전쟁을 직접 참관하고 최신교리를 익히라는 명령이었다.
38세의 신순성은 해군무관학교의 전신인 통제영학당 출신의 영국 유학파로 해군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엘리트였고, 유력한 차기 작전사령관이었다.
“제독님을 보좌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오, 이 정령.”
남쪽 출신의 뱃사람답게 피부가 햇볕에 그을린 이재수(李在守) 정령은 전함 충무공 이순신의 초대 함장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구주원정함대로 전환되면서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재수는 군부에서 매우 드문 제주도 출신이었다. 아니, 제주도 출신으로 고위직까지 오른 건 그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재수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건 꼭 30년 전인 1885년이었다.
* * *
“양선이다! 이양선이 출몰했다!”
“이양선이 제주목과 대정현에 침입했다!”
“즉시 제주 전역에 봉화를 올려라!”
“영길리 놈들인가?”
“아라사 수군이라고 합니다!”
1885년, 영국이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러시아 봉쇄를 결정하고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조선의 영토 보호를 천명하며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함대를 출진시켜 제주항에 정박했다.
그러자 영국은 러시아가 제주도를 점령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고, 거문도에 주둔하던 전함을 제주 해역으로 출동시켰다.
제주 앞바다에서 영러 양국 함대가 무력충돌 직전까지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졸지에 그레이트 게임이 애먼 제주도에서 전쟁으로 확산될 판이었다.
완화군 이선의 적극적인 노력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재, 천진 회담에서 조선의 중립화가 결정되면서 영국도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나도 저런 배를 타고 말겠어.”
그레이트 게임의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제주도에 살던 한 소년의 인생을 바꾸게 되었다.
소년 이재수의 부친 이시준은 본래 대정현의 관노였으나, 갑신경장으로 노비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자유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도 당장 살길이 막막했기에, 이시준은 당시만 해도 천역(賤役)으로 여겨졌던 제주목의 수군으로 편입되었다.
장갑함을 끌고 온 영국과 러시아에 비해, 제주 수군에게는 판옥선이 전부였다. 영러 해군이 충돌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제주 수군은 문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상황이 종료됐지만, 그동안 제주도민이 겪은 공포는 상당했다.
아비가 수군이었던 소년 이재수는 더욱 그랬다. 거대한 강철 군함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고, 자신도 언젠가 저런 배에 타겠다고 결심했다.
꿈은 높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제주는 버림받은 섬이었다. 제주에는 가혹한 세금과 진상품이 부가되었다. 공납의 폐해로 본토에는 대동법이 제정되었지만, 제주도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제주도민들은 말, 소, 사슴, 전복, 버섯, 감귤 등 특산품을 갈취당했다.
조정에 막대한 진상품을 바쳤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가끔 중죄인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는 게 전부였다. 제주가 얼마나 오지로 취급받았던지, 폐위된 광해군이 제주로 이배(移配)되자 ‘어찌 이런 곳까지!’라고 외치며 울부짖을 정도였다. 200년이 지나 1840년대에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김정희도 오지 취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조정은 심지어 제주도민들에게 출륙 금지령을 내려 200년 동안 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제주도는 오랫동안 절망과 탄식뿐인 섬이었다.
“조선의 삼면은 바다이고, 수많은 섬을 갖고 있다. 작금 세계의 대세는 해상무역이다. 바다를 저버리고 어찌 국권을 지키길 바라겠는가?”
개화당 정권의 수립은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정권의 실력자인 완화군 이선과 김옥균은 해양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공도(空島)정책을 철폐해 울릉도를 비롯한 먼 섬들에도 주민을 이주시키고, 개발을 추진하며, 바다 자원의 탐색에 나섰다. 근대적 해군을 창설하고, 해양 주권을 확립했다.
조선이 보유한 가장 큰 섬인 제주도에도 변화가 들어섰다. 무분별한 착취가 종결되고, 합리적인 세금이 부과되었다. 신무기로 무장한 진위대가 제주에도 주둔했고, 신식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관노의 아들이지만 총명했던 이재수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제주소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재수는 총명하니 우리 학교의 자랑이다. 제주에는 상급학교가 없으니 본토에 유학을 가는 게 좋겠구나. 소원대로 상선학교로 진학하길 원하느냐?”
이재수가 지망하던 학교는 본래 상선학교였다. 제주도 출신으로 벼슬길에 오른 사례가 워낙 드물었기에, 그도 무관보다는 큰 배의 선주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때마침 조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본토의 청년들이 그랬듯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 사는 이재수에게도 애국적 열광이 밀려왔다.
조선 육군은 청군에 맞서 승승장구했으나, 북양함대를 대파하는 건 일본 해군의 몫이었다. 이재수는 조선에도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저는 해군 무관이 되어 조선의 바다를 지키고 싶습니다!”
과연 조청일전쟁의 승리는 해군의 발전에도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강화 통제영학당은 해군무관학교로 개편되어 문호를 확대했다.
이재수는 신(新) 해군무관학교 1기로 입교하여 광무 3년(1899) 참위로 임관했다.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였다.
“제주 촌놈.”
“아비가 대정현 관노였다며?”
“허, 섬 촌놈이 엄청나게 출세했구만.”
평안도 상한 출신 홍범도가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떠올랐듯이, 국민군을 중시하는 군부에서는 출신이나 신분 차별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바닷일은 조선에서 오랫동안 기피되는 천역이었으므로, 해군은 육군에 비해 경쟁률도 낮았고, 생도들의 신분도 양반 출신이 드물었다.
그런데도 변방 중의 변방인 제주 출신, 관노의 아들인 이재수는 은연중에 따돌림을 받았다.
의식적으로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제주 방언은 워낙 차이가 컸으므로 출신이 은연중에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차별을 받을수록 이재수는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저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도 프랑스 본토에서 떨어진 코르시카란 섬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숱한 조롱을 받았지만, 마침내 프랑스를 넘어 유럽을 제패하기에 이르렀지.’
야망을 지닌 19세기 세계 청년들이 나폴레옹을 모델로 삼았듯이, 이재수도 를 닳도록 읽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섬 출신이듯이 자신도 남쪽 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이재수는 나폴레옹을 인생의 모범으로 삼아 공부에 매진했다.
해군은 영국을 모범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어를 중시했지만, 이재수는 일부러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해군무관학교 동기인 안중근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할 정도였다.
“이재수 부위, 제주 출신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참 아름다운 섬이지. 여유만 있다면 짐도 쉬러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광무 5년(1901), 신축년. 이재수는 의화단전쟁에 참전한 공훈자 중의 한 명으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국토의 남단에 있는 만큼, 제주는 대한에 있어 소중한 섬이네. 귀관이 최초의 제주 출신 해군 장교로서 모범이 되어 주길 바라네.”
“크나큰 영광입니다, 대원수 폐하!”
황제로부터 친히 훈장을 수여 받은 이재수를 무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섬 제주 출신, 관노의 아들인 이재수에게 찾아온 입지전적인 영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신축년에 이재수는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의 착취에 반발하여 제주도민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프랑스의 압박을 받은 조정에 의해 처형당한다.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가 만든 변화였다.
* * *
“영국 해군이 터키 다르다넬스 해협으로의 진격을 결정했습니다. 전함 충무공 이순신에도 합류 명령이 왔습니다.”
“무모한 작전이라고 그렇게 만류했건만, 어쩔 수가 없군.”
1915년 봄, 영국 해군장관 처칠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공격하여 단숨에 콘스탄티노플을 굴복시키고, 오스만 제국을 전열에서 몰아내어 러시아와 연결한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해군이 대규모 포격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의 요새를 무력화하고, 육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때까지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육·해군 합동작전이라 반발이 컸지만, 처칠은 작전을 밀어붙였다.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놓고 육군과 해군 간에 의견대립이 컸고, 해군 내부에서도 이견이 속출했다.
결국 처칠이 이런저런 의견을 다 무시하고 작전을 속행하기로 결정, 영불 연합함대가 다르다넬스로 출격했다.
영국 지중해함대의 모항인 몰타에 정박해 있던 전함 충무공 이순신에도 출격 명령이 떨어져, 신순성과 이재수 이하 대한제국 해군 장교들도 전함에 탑승했다.
‘기묘한 기분이군.’
이재수는 문득 30년 전을 떠올리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국과 러시아 간에 충돌을 보면서 강철 군함에 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30년이 지나 러시아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출격하는 영국 해군과 함께하고 있다니.
참으로 역설적인 변화가 아닐 수가 없었다.
“전함, 출격!”
전함 충무공 이순신의 실질적인 지휘는 영국 해군이 했지만, 명목상 대한제국 해군에서 임대되었기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대한해군 구주원정함대의 역사적인 첫 출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