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23
– 204화에 계속 –
2부 204화 대퇴각
1915년 가을, 러시아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갈리치아 일대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대퇴각(Великое отступление)’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문자 그대로 엄청난 규모의 퇴각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감행한 청야 작전의 선례를 따라 감행된 초토화 작전은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군대는 철도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초토화 작전에서 희생될 주민이었다.
“주민들은 모두 동쪽으로 이전시켜라! 적군에게 넘어갈 수 있는 모든 물자를 파괴하라!”
공장과 논밭이 불타올랐다. 가을 추수철을 앞두고 벌어진 초토화 작전은 현지 주민들에게 무작정 모든 걸 버리고 피난을 갈 것을 요구했고, 식량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은 고통에 빠졌다.
“장교님! 이대로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동쪽으로 가라고 하시면, 저희는 겨울을 어떻게 나란 말입니까?”
“이주할 지방의 당국에서 여러분을 책임져 줄 겁니다.”
북서전선군 산하의 소대장으로 어느 폴란드 농촌 마을에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고려인 출신 장교 표트르 최 중위는 수치심을 느꼈다.
상부에서는 그렇게 말하라고 명령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건 장교들 사이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250만에 달하는 피난민들은 열차에 실려 가다가 아무 마을에서나 짐짝 취급하면서 던져졌고, 이주당한 지역에서 이들을 책임질 식량과 연료는 턱없이 모자랐다.
러시아군은 100년 전 나폴레옹을 격퇴했듯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목적으로 초토화를 감행했지만, 현실은 러시아 후방의 사기만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참담한 꼴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의 존재는 후방 주민들을 놀라게 했고, 러시아인들에게 해묵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게 다 독일놈들과 내통한 유대인 때문이다.”
“유대인, 폴란드인, 독일인은 모두 제국의 적이다!”
전방의 폴란드 마을이 초토화 작전으로 불타오르는 동안, 후방에는 유대인 마을들이 포그롬으로 불타올랐다.
혼란은 군대로 전염되었고, 사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패배하는 게 아닌가?”
“초토화하며 퇴각하는 건 패배를 자인하는 게 아닌가?”
동양인으로서는 드물게 제국군 장교가 된 표트르 최는,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병사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 걱정하지 말게. 어디까지나 반격을 위한 일시적인 후퇴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이지.”
“소대장님 말씀은 믿고 싶지만, 장군들 말은 못 믿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 고생을 하면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적들의 군홧발로부터 모국을 지키지 않으면 어찌 되겠나?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무찔렀듯이, 저 오만한 카이저의 군대도 무찌르게 될 걸세.”
표트르는 전선의 참호에서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마음을 얻었기에, 인종이 달라도 그럭저럭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다. 전우애라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무식한 사병들과 친해져 봐야 무슨 소용. 말이나 통하나?”
“맞네, 사병 대다수가 옛 농노 무지렁이 출신들인데.”
“뭐, 동양인들은 대개 농부들이니 농노들과 통하는 게 있겠지.”
귀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장교단은 병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다. 대개혁 이후 장교단이 개방되어 농노 출신이나 소수민족들도 고위장교가 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주류는 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병사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초이 중위, 몽골계랬나?”
“카레이스키(고려인)입니다, 대위님.”
“카레예츠(한국)? 거긴 다른 나라 아닌가?”
“맞습니다, 만주와 일본 사이에 있는.”
“그래? 그런데 왜 러시아를 위해 복무하나?”
표트르는 성공한 부농집안 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였기에 계급적 편견은 시달리지 않았지만, 동양인으로서 인종적 편견은 늘 있었다.
고려인이 러시아 극동에 이주해서 산 지 50년이 넘었다는 점, 그들 대부분이 러시아의 충성스러운 국민이라는 점, 대한제국과 러시아가 우방이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장교라고 해도 드물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표트르가 하는 대답이 있었다.
“저는 고려인이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난 러시아 국민입니다. 발트 독일인들이 혈통은 독일계여도, 독일이 아닌 러시아를 위해 충성하듯이.”
발트 독일인은 독일계이지만 러시아 군부에서 중책을 맡은 이가 많았는데, 패전이 거듭되자 이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졌다.
“러시아가 이렇게까지 연전연패할 리가 없어.”
“유대인뿐만 아니라 독일계도 독일과 내통해서 작전을 넘겨주고 있다더군.”
“그들의 수장이 바로 차리나(황후) 아닌가. 차리나가 독일 출신인데 어련하려고?”
물론 알렉산드라 황후가 독일과 내통 중이라는 건 근거 없는 유언비어였지만, 황후가 전세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장교와 병사 간의 뿌리 깊은 편견, 거듭되는 패전, 심각한 물자 부족은 러시아 병사들의 집단 항복과 탈영으로 이어졌다.
전선에서 붕괴 조짐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라는 니콜라이를 부추겨 강력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니키, 당신은 러시아의 전제군주예요. 은혜도 모르고 반기를 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필요한 건 따끔한 채찍입니다!”
「포고령 – 전군에 포고한다. 만약 러시아군으로서의 맹세를 저버리고 적에게 항복할 경우, 가족에게 연금 지급을 중단한다. 반역 혐의가 밝혀질 경우에 전후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낼 것이다.」
포고령은 러시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는커녕 더욱 떨어트리게 만들었다. 가혹한 조치는 국민들에게 군의 붕괴가 현실이냐는 인상만 불러일으켰다.
“대패와 폴란드 함락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총사령관이 책임을 져야지요.”
궁정을 중심으로, 비난의 화살이 총사령관 니콜라이 대공에게 쏟아졌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진작부터 니콜라이 대공을 의심해 왔다. 차르의 당숙이자 군인 출신으로 군부의 신망이 높고, 두마에 대해서도 유화적이라 관료와 정치가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니콜라이 대공이 진보적 인사라기보단, 전쟁 승리를 위해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는 대의제 정부의 필요성에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니콜라이 대공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공이 황제가 되고 싶어서 군부, 두마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패전으로 국민이 동요한 틈을 타, 군부의 힘을 내세워 두마와 짜고 내 남편을 폐위시키려고!”
황후는 니콜라이 대공이 군부의 추대를 받아, 두마와 손을 잡고 대의제 정부를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퇴각’은 전략적인 퇴각이 아니라, 니콜라이 대공이 황위로 가기 위해 의도적인 패배를 조장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니키, 대공을 총사령관직에서 경질하고 당신이 직접 총사령관을 맡아야 해요. 저 음흉한 대공에게 군대를 계속 맡겼다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콜랴(니콜라이 대공의 애칭) 아저씨는 오랫동안 내게 충성을 바쳐 왔소. 그럴 사람이 아닌데…….”
“사람 마음이란 건 권력 앞에서 언제든지 바뀌기 마련이에요. 10년 전을 생각해 보세요. 대공에게 수도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했더니, 폐하의 명을 거역하고 자기 머리에 총을 쏘겠다고 했잖아요?”
알렉산드라가 해묵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피의 일요일과 1906년 혁명 당시, 비테와 니콜라이 대공은 두마 설립과 헌법 제정을 촉구했었다. 차르가 대공에게 군사독재자로서의 전권을 부여하고 혁명 진압을 제안하자, 대공은 그러느니 차라리 자기 머리에 총을 쏘겠다고 하여 차르를 굴복시켰다.
그 결과 10월 선언이 발표되었고, 러시아에 헌법과 의회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신성한 전제군주’를 맹신하는 차르에게는 쓰라린 후퇴로 기억되었다.
“알릭스, 당신 말이 맞소. 콜랴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도 그 주위에 누군가 야망을 부추긴다면 위험해질 수 있지. 군을 통제하지 못하면 위험하지. 내가 직접 군을 맡아야겠소.”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폐하! 폐하는 대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표트르 대제, 조국전쟁의 위대한 승리자인 알렉산드르 1세와 비견되실 겁니다!”
9월 20일,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니콜라이 대공이 총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놀랍게도 후임 총사령관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 맡았다.
“짐이 직접 전군 총사령관을 맡아 러시아를 승리로 이끌겠다. 총사령부에서 군을 지휘하는 동안, 섭정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맡기겠다. 국무회의는 황후를 보좌하여 국가를 통치해 주길 바란다. 신의 가호로 신성한 러시아는 승리할 것이다. 신이 우리와 함께하시길!”
국무회의, 군부, 두마는 차르의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폐하께서 전쟁에 대해 뭘 아시나?”
“알긴 뭘 압니까. 그냥 명령서에 서명만 하는 분인데.”
“악수(惡手)도 이런 악수가 없군. 패전의 책임을 몽땅 총사령관인 니콜라이 대공에게 넘겼는데, 폐하께서 직접 총사령관을 맡았다가 전황이 더욱 악화되면, 그 책임은 결국 폐하께서 지게 될 게 아니오?”
“더군다나 섭정을 황후께 맡기다니. 독일과 전쟁 중인데 독일 출신 황후가 섭정을 맡으면 국민이 좋아하겠소?”
“아니, 뭐 솔직히 황후께선 그 누구보다 철저한 러시아 정교도가 되긴 하셨지.”
“그래서 문제라는 거요. 황후께서는 종교에 심취하여 여전히 중세를 살고 계십니다. 대전쟁 중인 국가에서 중세적 섭정이 가당키나 합니까?”
“전쟁 문제라면, 참모총장 알렉세예프 장군이 폐하를 잘 보좌할 수 있을 거요. 통치도 코콥초프 수상이 황후를 잘 설득할 수 있기를 바라야지.”
일선 장군들은 그나마 동요가 덜했다. 차르가 총사령관을 맡아도 전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상 얼굴마담 역할만 수행할 거고, 실질적인 지휘는 참모총장인 미하일 알렉세예프(Mikhail Alekseyev) 대장이 맡을 터였다.
문제는 섭정으로서 통치를 책임질 황후였다. 각료들은 황후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우려했다.
차르는 최고사령관직에 올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스타프카(총사령부)가 있는 모길료프(Mogilev)로 향했다. 졸지에 독일인 황후가 독일과 전쟁 중인 러시아의 섭정이 되고 말았다.
* * *
러시아에서 잇달아 들어오는 소식은 이선도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역시 라스푸틴이 문제가 아니라 알렉산드라가 문제였어. 아니, 결국 니콜라이가 문제지!”
역사와 달리 라스푸틴의 존재는 사라졌지만, 결국 알렉산드라의 국정농단과 니콜라이의 묵인이 발생하고 말았다.
문제는 라스푸틴도 알렉산드라도 아닌 니콜라이였다. 니콜라이의 우유부단함, 판단력 부족, 얇은 귀, 의심, 콤플렉스, 확연하게 갈리는 호불호, 전제정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니콜라이가 전제정을 포기한다면, 신앙심 돈독하고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국민의 상징이자 입헌군주가 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 자신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누굴 탓하겠나. 그동안 니콜라이의 그런 점을 이용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
이선도 지난 20년 넘게 니콜라이의 성격적인 약점을 이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이가 이선을 확고하게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국익을 쟁취했다.
‘망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이대로 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인간적인 감정을 넘어, 이선은 지금껏 러시아에 공들인 게 많았다. 한국에 대해 극히 우호적인 이웃 강대국 전제군주의 몰락은 국익에도 손해였다. 그나마 민주공화국이라면 모를까, 세계혁명을 꿈꾸는 공산주의 국가가 지척에 등장하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폐하, 러시아에서 군수품 생산량을 증대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좋다. 대한도 이제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간다. 민간공장을 군용으로 돌려도 좋다. 군수물자를 최대한 많이 생산해서 러시아로 수출한다.”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리는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의 수출품은 부족한 양이나마 가뭄 끝의 단비였다.
아직 러시아에 금 보유고는 충분했으므로, 군수물자가 부족한 러시아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러시아에서 육군항공대 참전을 요청했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정대로 육군항공대를 러시아에 배치한다. 항공국에서는 준비하도록.”
“예!”
대한제국 육군항공대는 1915년 10월부터 러시아 남부전선에 배치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로부터 라이센스 생산을 허가받은 중폭격기 일리야 무로메츠, 라이트 형제와 협력하여 개발한 대한제국의 독자적 복엽전투기 ‘광무(光武)’의 생산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산동 전역에서 첫 실전을 경험한 육군항공대는, 본격적인 세계대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결국 차르와 러시아를 돕기로 결정하셨군요.”
지금껏 전쟁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마르가리타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폴란드 점령과 러시아군의 초토화 작전 소식이 전해졌다. 고향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쫓겨난다는 소식은 마르가리타의 마음은 비애(悲哀)로 물들었다.
대한제국이 적극적으로 러시아의 편을 돕기로 결정하자, 마르가리타는 이선의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비판했다.
“오래전부터 해 온 이야기인데, 대한에는 러시아가 필요하오. 망하게 내버려 둘 수 없소.”
“그런 억압적이고 비인도적인 정권은 차라리 망하는 게 인류의 진보에 기여 하는 길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인류의 진보보다 대한의 국익이 더 중요하오.”
이선은 마르가리타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그녀는 자신의 오랜 벗이자 동반자였다. 하지만 서로 간에 분명한 간격이 있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가 해방될 수도 있을 거요. 그러니 때를 기다려 봅시다.”
“과연 그럴까요? 설령 그럴지라도, 지금 고통받는 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전쟁이란 비참한 거지……. 하지만 중대한 전환의 시기가 될지도 모르오.”
실제 역사대로라면, 폴란드를 분할하던 세 제국이 모두 붕괴하고, 독립을 되찾을 때까지 3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긴 어려웠다.
이선은 마르가리타를 다독거린 후, 차남 이안에게 부탁했다.
“안아, 네 어머님을 잘 모시거라.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건 너뿐이니.”
어느덧 나이 14세.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안은 갈색 눈에 갈색 고수머리를 지닌, 동서양의 이국적인 미가 조화된 잘생긴 소년이었다.
“어머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소자는 부황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이안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이라는 걸 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헤아리긴 어려웠지만, 군주로서 매일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안도 이진 못지않게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앙했다.
교육을 받고 철이 들수록, 이안은 자신이 대한제국 황제의 아들, 친왕이라는 걸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