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35
– 216화에 계속 –
2부 216화 3차 한러협약
“포기란 없다. 나는 러시아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브루실로프는 신속히 군의 궤주(潰走)를 막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브루실로프가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하면서 군의 붕괴는 막았지만, 효율적인 전쟁기계인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가차 없이 도살했다.
아직까진 인력에 부족함이 없는 러시아군은 남부전선에 병력을 계속 투입했다. 이들도 경험으로 체득한 바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만만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만 교전하고 독일군이 상대라면 퇴각했다.
“끝까지 사수하라! 패퇴는 허용하지 않겠다!”
스타프카는 병력을 계속 축차투입하며 사수를 종용했다. 브루실로프의 지휘권 인수 이후 전선의 붕괴는 막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중부동맹군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많았다.
8월까지 동맹군은 로브노(리우네), 테르노폴, 프로스크로프(흐멜니츠키), 카메네츠-포돌스키 등 우크라이나 서부를 점령하고 러시아군을 동쪽으로 밀어냈다. 개전 이래 가장 빠른 진격이었다.
이 기간에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30만에, 포로도 20만에 달했다. 피해가 50만이라면 집단군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셈이었으나, 러시아는 계속 병력을 투입해 전선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이러다 전쟁에서 지는 거 아냐?”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물가부터 해결하라고 해! 자고 일어나면 빵값이 오른다고!”
“쯧쯧, 생각을 하라고! 우크라이나를 상실하면 식량 공급은 더 안 되는 거지!”
“빌어먹을, 언제까지 이 망할 전쟁이 계속되는 거야?”
러시아는 전선의 피해 못지않게 후방의 사기 저하는 심각했다.
모든 참전국에서 식료품 가격이 상승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오른 건 러시아였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는 식료품 가격이 50% 정도 상승했으나, 러시아는 평균 120% 이상 상승했다.
1916년 7월 모스크바의 빵 가격은 2년 전에 비해 2.5배, 버터는 3.2배, 육류는 3.8배나 급등했다. 임금 상승은 미미해서 물가 상승을 따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인플레이션의 시작에 불과했으니, 최대 식량 생산지인 우크라이나가 최전선이 되면서 향후 공급은 더 절망적이었다.
“도대체 식량 공급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요?”
“1916년 6월의 경우,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수송량이 계획치의 35%밖에 안 됩니다. 이러니 공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러시아의 광활한 영역을 연결해 주는 철도수송체계도 한계에 도달했다. 수송의 우선순위는 군수품에 있었고, 민간공급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식량 문제로 고통을 받는 건 해상봉쇄를 당하고 있는 독일도 마찬가지였으나, 독일은 정교한 철도수송체계와 효율적인 관료제로 배급을 시행하고 있었다. 만약 독일이 목표한 대로 우크라이나를 얻는다면, 고질적인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전선과 후방의 사기 저하가 심각합니다. 형식적이라고 해도 좋으니, 연합국이 병력을 파병해 러시아 국민에게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십시오.”
러시아는 연합국에 파병을 호소했다. 투입할 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떨어진 국민의 사기를 끌어 올릴 상징적인 조치를 원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가 응해서 소수의 병력을 파병하긴 했지만, 서부전선의 격화로 제 코가 석자인 이들로선 정말 상징적인 의미의 파병이었다.
군수품과 함께 소수의 장갑차, 기병대, 항공대 등이 파병되었다. 그 수는 불과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에 망명정부를 구성한 세르비아가 의용사단을 보내고, 항복한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병사들의 지원을 받아 을 편성했지만, 현재로선 범슬라브주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황제 폐하의 정부는 귀국이 파병해 주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1916년 7월, 마침내 러시아는 대한제국과 일본에 파병을 요청했다. 현재 연합국 중에 병력의 여유가 있는 나라는 극동의 한국과 일본뿐이었다.
“일본제국은 이미 함대를 유럽에 보낸 것으로 연합국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일본에도 지상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러일전쟁의 앙금이 남아 있는 일본은 파병을 거절했다.
일본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고급 전함 4척을 필두로 한 원정함대를 지중해로 보냈다. 러일전쟁 이후 해군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 일본은 육군을 유럽까지 파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파병의 우선협상대상이 된 나라는 한국이었다.
“러시아와 한국, 우리 황제 폐하와 귀국 황제 폐하의 친밀한 우의는 세상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양국의 우호 관계를 고려하여, 귀국이 고난에 처한 러시아에 힘이 되어 주길 바랍니다.
러시아 외무부는 주러 한국대사 이완용과 공식적인 지위는 없지만 특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영친왕 이영을 초청하여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했다.
“알겠습니다. 귀국 정부의 의사를 황제 폐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파병 요청에, 이완용과 이영의 의견은 갈렸다.
“이미 일본은 거절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건 일본이 약삭빠르지만 잘 대처한 거지요. 만약에 독일이 이기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입니다.”
좋게 말하면 냉철한 현실주의자요, 나쁘게 말하면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인 이완용은 러시아의 패전 가능성을 감지했다. 그렇다면 파병은 무의미했다.
“러시아제국은 대한의 중요한 우방입니다. 러시아가 패전하면 대한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위기에 처한 국가에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보답이 뒤따를 것입니다.”
러시아 귀족 여인과 결혼한 이영에게는 사적인 감정이 있지 않겠느냐는 시선도 있었지만, 이영은 명분이든 실질이든 파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러시아, 특히 차르는 지금껏 한국과 이선에 막대한 호의를 베풀어 왔고, 이제 그 호의를 보답할 때가 아니냐는 압박이 있었다.
그런 명분은 차치하더라도, 이영은 파병이 실질적으로도 국익에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했다.
최종판단은 황제와 정부의 몫이었다. 파병 정식요청이 한국으로 전달되었다.
* * *
러시아의 파병 요청은 이선에게 있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나 다름없었다. 이선은 진작부터 파병 의사가 있었으나, 러시아가 먼저 위급에 청해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에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군대를 러시아까지 파병해야 합니까? 유럽의 참상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구태여 귀중한 병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 병력을 보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총리 서재필이 파병에 부정적인 의사를 보였다. 그 자신은 결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친미·친영 성향의 자유주의자인 서재필은 러시아 전제정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전제정을 지키기 위해 굳이 군대까지 파병할 필요까지 있겠느냐는 판단이었다.
“총리대신,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러시아는 대한과 이해관계를 많이 공유하는 나라입니다.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파병 자체만으로 얻는 게 많을 겁니다.”
외무대신 이상설과 내무대신 민영환은 파병을 지지했다.
“물론 전황이 러시아에 불리하긴 하지만, 육군항공대의 보고에 따르면 패전을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현재 국군은 광무 4년의 북벌전쟁 이후로 실전 경험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는데 말이지요. 병력을 소모할 목적으로 파병할 수는 없겠으나, 그동안 익혀 온 군사교리와 최신무기를 시험해 볼 때가 왔습니다.”
군무대신 박유굉도 파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로이센 육군대학 유학파인 박유굉은 호전적인 군국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전쟁을 마다할 생각도 없었다.
“군무대신, 만약 파병한다면 얼마나 파병할 수 있겠소?”
“1개 사단에서 3개 사단은 무리 없습니다, 폐하.”
광무 20년 현재, 대한제국군의 상비군은 2개 근위사단, 13개 보병사단, 4개 기병여단, 1개 해병여단 총 24만 명이었다. 지난 2년 사이에 평양의 4사단이 근위 2사단으로 승격되고, 상비사단이 2개 더 창설되었다. 총동원령이 떨어지면 최대 70만 명까지 동원이 가능했다.
세계대전의 주요 열강들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최대급 육군이었다. 일본이 해주육종 정책에 따라 육군을 감축함에 따라, 이미 육군의 규모는 한국이 일본을 앞질렀다.
“흠. 어차피 사단을 보내나 군단을 보내나 전황에 당장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연합국에 생색을 내고 외교적인 명분을 얻기 위해선 군단급 파병은 되어야 할 거요.”
“러시아 전선의 특수성을 고려해, 보병 2개 사단에 기병 1개 사단 정도로 군단을 구성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생각이군.”
이선에게 참전으로 전황을 뒤집겠다는 환상 같은 건 없었다.
정치적이자 외교적인 목적의 파병이었다. 전후질서를 고려해 연합국에 생색을 내기 위해, 러시아와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그리고 유사시 러시아의 정치변동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역사처럼 볼셰비키 혁명은 없을 것 같지만, 제정이 무너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유사시 러시아 내에 개입할 병력이 있다는 건 유용하지. 연합국이 요청할지도 모르고.’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대한은 이미 군수물자 수출로 충분히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당장 텅스텐 수출만 끊어져도 연합국에 타격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파병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파병에 따른 지출도 적지 않을 터인데…….”
탁지대신 이용익이 조심스럽게 파병 반대론을 제기했다. 순전히 경제적 이익만 보는 관점이었다.
한국은 러시아에 군수품을 수출하는 외에도, 서방 연합국을 상대로도 군수물자를 판매했다. 특히 텅스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텅스텐은 무기, 특히 탄약의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군사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전쟁으로 인해 사용량이 급증하여,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국영기업인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약칭 대한중석(大韓重石, Korea Tungsten Co.)이 보유한 영월의 상동광산(上東鑛山)은 단일규모로는 세계 최대였다. ‘한국의 텅스텐 정광(Tungsten concentrates)의 품질은 세계시장의 표준이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수했다.
한국은 풍부한 텅스텐 광산을 보유했고, 전시에 대대적으로 채굴하여 텅스텐 생산량이 연합국 공급량의 20%에 달했다. 한국은 텅스텐만으로 대외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세상에 공짜란 없소. 파병에 상응하는 대가는 분명히 받아 내야지. 러시아의 프랑스 파병 선례에 따라, 비용은 파병 요청국이 부담해야겠지.”
이선에게 그런 자잘한 비용은 아무래도 좋고, 보다 중요한 대가를 생각했다.
바로 만주였다.
이선의 훈령을 받은 주러시아 대사 이완용은 러시아 외무대신 사조노프와 회견하였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부는 러시아에 군단급 병력을 파병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오오! 귀국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조노프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단순히 파병이 아니라, 대한제국과 러시아제국 간에 정식으로 군사동맹을 체결하길 바랍니다.”
“이미 연합국의 일원으로 동맹 상태 아닙니까?”
“전쟁이 끝나면 해체될 수도 있는 일시적 동맹이 아니라, 양국 간의 정식 군사동맹을 희망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지요.”
외교의 실무는 외무대신이 맡았지만, 국가원수인 차르의 재가가 필요했다.
「친애하는 짐의 형제 황제 폐하! 잔악한 독일의 공세로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러시아 국민이 받는 고통에 짐과 대한국민 역시 가슴이 아픕니다.
폐하와 러시아 국민의 상심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자, 대한제국 육군을 파병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겠습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제국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하나의 깃발 아래 함께 싸울 것입니다.
다만 한국에 장거리 파병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중국 내란이 끝났다고는 하나 동양의 정세가 완전히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에 짐은 폐하께 요청하오니…….」
이선은 친서를 써서 파병 소식을 알렸고, 거듭 나쁜 소식만 들어 침울해 있던 차르는 모처럼 좋은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역시 이선은 짐의 벗이요, 한국은 러시아의 우방이다. 그가 당연히 짐을 도우리라 생각했다. 짐이 어찌 그의 호의에 보답하지 않겠는가?”
동맹에 대한 체면치레라면 누구보다 확실한 니콜라이였다. 그는 한국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차르의 재가가 떨어짐에 따라, 한국과 러시아 간에 파병의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빠른 협의가 이루어졌다.
즉, 한국이 러시아에 보내는 청구서였다.
1. 러시아제국과 대한제국은 적대하는 국가에 맞서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제3국과 교전할 때에는 단독강화하지 않는다.
2. 극동지역의 영토와 특수 이익에 위협이 될 경우, 양국은 공동으로 방어책을 협의한다.
3. 일방(一方)이 국가안보의 근본적인 위협을 느껴 동맹에 파병을 요청할 경우, 동맹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여기까지는 공개된 조약이고, 이하에는 비공개로 밀약을 맺었다.
4. 1907년과 1912년에 2차에 걸쳐 체결한 기존의 협약을 준수한다.
5. 러시아와 한국에 적대적인 제3국이 중국에 정치적 지배력을 확립하려고 할 경우, 양국은 이를 막기 위해 공동으로 조치한다.
6. 5항의 조치에 따라 일방이 제3국과 전쟁으로 확대될 경우, 동맹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7. 한국은 러시아가 몽골에 특수한 이해관계와 권익이 있음을 인정하며, 러시아가 몽골 자치정부에 대하여 외교적인 권고를 할 권리를 존중한다.
8. 러시아는 한국이 만주에 특수한 이해관계와 권익이 있음을 인정하며, 한국이 만주의 청국 정부에 대하여 외교적인 권고를 할 권리를 존중한다.
9. 조약의 기한은 5년이며, 5년 후의 정세에 따라 내용을 상호 동의하에 변경할 수 있다.
1916년 7월 21일(율리우스력), 광무 20년 8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제국 외무대신 세르게이 사조노프
대한제국 주러시아 특명전권대사 이완용
조약의 공개된 부분은 현재 직면한 세계대전에 대응하여 군사동맹 체결과 파병을 알렸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비공개된 부분에 있었다.
4항은 한국과 러시아가 2차에 걸쳐 합의한 만주-몽골 세력권 분할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5항과 6항은 제3국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만약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또다시 무리수를 벌일 경우, 한러 양국이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암시했다.
7항과 8항은 기존의 만주-몽골 세력권 분할을 재확인한 것처럼 보였지만, 핵심적인 단서가 들어있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완전히 한국의 세력권으로 넘겨준 건 아니었지만, ‘한국이 만주의 청국 정부에 대하여 외교적인 권고를 할 권리’를 러시아가 존중한다는 건, 사실상 만주에서의 한국의 자유행동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러시아의 동의는 받았으니, 차후에 다른 열강들의 동의도 받으면 완벽하다.’
밀약문을 읽은 이선은 만족감을 느꼈다.
대한제국이 북위 44도 이남의 남만주를 넘어, 만주 전역의 세력권을 장악할 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