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37
– 218화에 계속 –
2부 218화 시베리아 횡단철도
1916년 가을, 우크라이나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독일 남부군의 양익(兩翼)인 오스트리아군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8군이 북쪽에서, 9군이 남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한다. 양익이 흔들리면, 독일군을 역포위한다.”
브루실로프는 남서전선군의 전의를 되찾는 데 성공했고, 9월 4일(율리우스력 8월 23일) 역습을 감행했다.
돈 카자크 출신의 8군 사령관 칼레딘(Alexey Kaledin) 대장과 러일전쟁의 공훈자인 9군 사령관 브론스키 대장은 브루실로프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남부전선의 양익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향해 맹렬한 역공이 쏟아졌다.
“Казаки, атака(카자크, 돌격)!”
“Ура(만세)!!”
서부전선은 일진일퇴의 참호전을 반복했지만, 광활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동부전선은 기동전의 양상을 보였다. 서부전선에서는 점차 무용지물이 되어 가고 있는 기병대도, 동부전선에서는 여전히 귀중한 전력이었다.
러시아군이 패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병 전력에서만은 우위를 보였다. 탁 트인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카자크 기병대가 돌격할 때마다 오스트리아군은 혼비백산했다.
“우리만 목표대로 진격하고 있지 않나! 도대체 오스트리아군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독일 남부군 참모장 루덴도르프는 분통을 터뜨렸다. 독일군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남북에서 조공(助攻) 역할을 맡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군의 역공에 패퇴하기 일쑤였다.
독일군만 전선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자, 역포위를 우려한 독일군도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졸전을 더이상 못 봐 주겠다. 동부전선을 통째로 우리가 지휘권을 행사해야지!”
독일군은 동부전선 전체의 지휘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오스트리아 군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졸전을 거듭했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총사령부에 지원군 요청해! 서부전선에서 20개, 아니 10개 사단만 더 증원되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남부군 사령관 힌덴부르크 원수의 명의로 지원군을 요청하는 전보가 독일군 총사령부에 전해졌다. 팔켄하인도 분통을 터뜨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조공 역할도 못 해 주나? 서부전선에서 영불 연합군이 총공세를 펼치고 있는데, 10개 사단이나 빼 올 여유가 어디에 있나? 동부전선 내에서 조율하라고 해!”
영불 연합군은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도,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특히 필리프 페탱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공세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두터워 연합군도 손쉽게 뚫지 못했지만, 서부전선의 독일군에 병력을 빼낼 여유는 없었다.
결국, 동부전선의 기만작전이었던 북부전선에서 독일군 15개 사단을 빼서 우크라이나로 보냈다.
그런데 그건 러시아도 마찬가지였으니, 북부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의 병력을 빼서 남서전선군으로 보냈다.
수백만 대군이 충돌했다. 우크라이나 초원에서는 끝없는 혈전이 벌어졌다.
* * *
대한제국군 유럽파병군단은 1916년 10월부터 12월까지 순차적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유럽 러시아로 집결했다.
1차 목적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인 모스크바였다. 평양부터 모스크바까지 10,000KM의 여정은, 해외행이 생전 처음인 절대다수의 장병들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하르빈에서 러시아 열차로 갈아타고 만주리에서 러시아 영토로 진입, 치타와 바이칼 호수에 접한 이르쿠츠크를 경유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니콜라옙스크(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를 지나 마침내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지리적 경계인 우랄산맥에 도달했다.
“러시아가 넓긴 진짜 오지게 넓구만.”
9사단 25연대 소속 헌병 박대붕 정교는 창밖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의 풍경에 감탄사를 흘렸다.
본래 국가헌병대 소속인 박대붕은 참전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파병 소식이 전해지자, 박대붕은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근위 2사단과 9사단의 파병이 정해졌지만, 군부는 별도로 자원도 받았다.
“대원수 폐하의 지극한 황은에 보답하고, 대한건아로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자원병은 군부의 예상보다 많았고, 선별하여 각 부대에 배치했다. 북벌전쟁 참전용사이자 황제로부터 친히 훈장을 받은 박대붕은 당연히 선발되어 9사단 25연대에 배속되었다.
“여어, 지 참령. 간만일세.”
“오, 김 참령. 그쪽 부대는 어때?”
“뭐 똑같지. 다들 지겨워해. 언제 도착하냐고.”
9사단 군수참모 지대형(지청천) 참령과 기병 1사단 3연대 2대대장 김광서(김경천) 참령은, 무관학교와 육군대학 동기이자 산동 전역의 전우였다.
소속부대가 달랐으므로 따로 출발했지만, 중간 기착지인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대거 정차함에 따라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우랄산맥의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는 수만 명의 한국군 병사들로 북적였다. 이 당시만 해도 예카테린부르크의 인구는 7만 남짓이었으니, 도시 남성 인구보다 많은 병사가 나타난 셈이었다.
“아직도 2,000KM는 남았다.”
“젠장, 그렇게 오래 왔는데도 아직도 그만큼 남았나. 정말 엄청나게 넓은 나라야. 말 달리고 싶어서 근질근질해. 이 넓은 초원을 놔두고.”
“흠, 그나마 철도 덕에 빨리 가는 거지. 말 타던 시절에는 어떻게 다녔나 몰라.”
“이미 17세기에 카자크는 말 타고 시베리아까지 왔다고 하지 않나.”
“이러니 나폴레옹이 진 거지. 이 넓은 땅에서 철도 없이 인력으로 어떻게 진격과 보급을 하나.”
“동의하네. 지금은 철도 덕에 전쟁 양상이 달라졌으니.”
기병대장인 김광서와 군수참모인 지대형은 관심사가 달랐지만, 김광서는 원수부 병참감 김정우 부장의 아들이었으므로 군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부친께서 파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셨다네. 러시아 철도수송체계의 과부하가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야.”
“직접 겪어 보니 알겠군. 춘부장(春府丈)께서도 설마 이 정도 일 거라곤 생각 못 하셨을 텐데.”
화물열차를 개조한 군용열차는 끝없이 펼쳐진 철로를 따라 서쪽으로 달렸다.
분명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업이었다. 하지만 단선(單線)이고, 군대의 이동과 군용품의 수송이 겹치면서 철로는 쉽게 과부하에 빠졌다. 한 지점만 멈춰서도 막혀 버리기 때문에, 도중에 멈춰서 지체되는 건 비일비재했다.
군수품만 운송할 때에도 적체(積滯)는 심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물자가 들어와 쌓이는 속도에 비하여, 유럽으로 운송되는 건 너무나 느렸다. 화물차가 부족하고, 행정도 엉망인 탓이었다.
“아, 미안하지만 안 사요, 안 사.”
한국군 장교인 걸 알아보고, 아낙네들이 잡화 따위를 팔려고 접근했다. 후방에서도 식량 부족이 현실로 닥쳐오고 있는 상황이라, 뭐든 팔아서 식량으로 바꾸려고 했다.
사람들 처지가 딱하기는 했지만, 군수참모 입장에서는 장병들에게 민간인과의 상거래를 지양하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물건을 팔려고 하는 건 괜찮네. 하지만 젊은 여자들 같은 경우엔 취직도 안 되고, 당장 먹을 건 없고, 갑자기 대규모로 군대가 나타났으니 어쩌겠나?”
“설마 매춘을 시도한단 말인가?”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는 바람에 돈이 아니라 먹을 거 좀만 줘도 되거든. 이미 장교 중에 군용품 빼돌려서 성매매하다 징계 먹은 자들이 여럿이야. 군수참모인 나로선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지.”
“가관이구만. 러시아에 놀러 왔나? 전선에 가기 전부터 이따위 짓이나 벌이는 놈들은 대체 뭐야?”
김광서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무인가문에서 태어나, 명예로운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김광서에게, 장교 중에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게 믿겨 지지 않았다.
“놀러 온 놈들이지. 적발된 놈들은 사령부에서 모조리 귀국시켜 버렸네. 군부에서 적당한 처벌을 내리겠지.”
지대형은 혀를 차면서 냉정한 평가를 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린 대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 산동 전역에서 너무 쉽게 이겼어.”
현실적으로, 한국군은 1900년 북벌전쟁 이후로 실전경험이 없다시피 했다. 북벌전쟁도 오합지졸인 의화단을 신속히 무찌르고 승리한 소규모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을 참관하면서 일본군을 반면교사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실전경험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근래 산동 전역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뒀다고는 하지만, 이는 압도적인 병력 우세로 기인한 승리였다.
정예로 이름난 근위 2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전방 국경부대인 9사단이나 기병 1사단도 정예로 선발했다고 하지만, 대부분 생전 처음 가는 ‘해외’에 소풍처럼 마음이 들떠 버린 상태였다.
“강대국이라는 러시아도 이럴 진데, 앞으로가 걱정일세.”
“러시아 식량 사정이 그렇게 안 좋나?”
“상당 부분 군량으로 전용되고, 무엇보다 도시에는 공급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야.”
“솔직히 말해서, 기대했던 러시아의 모습이 아닐세. 그 거대하고 강력해 보였던 러시아가 이렇게 속으로 곪아 가고 있었다니.”
김광서도 혀를 찼다. 그의 부친 세대만 해도, 러시아라고 하면 두려울 정도로 무서운 강국이었다. 1857년생인 김정우 장군은 ‘러시아 공포증’에 대해 아들에게 익히 설명해 준 바 있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군사력도 세계최강. 병력은 수백만에 이르며, 동원 시에는 1천만이 넘는다. 러시아 증기롤러가 한 번 움직이고 나면, 전 세계가 진동할 것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었으나, 막상 전쟁 중인 러시아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러일전쟁에서 보인 추태는 머나먼 극동에서 벌어진 전쟁이니 그렇다 쳐도,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대전쟁에서도 러시아군은 연전연패하고 후방의 사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아무튼, 모스크바에 가면 해결될 문제지. 잠시 군기가 흔들린 것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목이 묶인 탓이라고 믿고 싶네.”
“당연하지. 우리 대한국군의 명예가 달린 문제일세.”
지대형의 말에 김광서는 정색했다. 국군은 싸우러 온 거지,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정예로 이름난 부대들이었다. 지금은 잠시 흔들려도, 전선에 도착하는 순간 태극기 아래 용맹함을 보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이노오오오오옴!! 대원수 폐하의 군인이자 대한국군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박대붕 정교는 이국땅에서 헌병으로서의 본분을 여지없이 다하고 있었다.
사령부에서 ‘성매매 금지’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장병들의 일탈은 끊이지 않았다.
단순히 군기의 문제를 넘어서, 성병이 전염될 수 있으므로 사령부는 엄격하게 대응했다.
헌병 완장을 찬 박대붕은 러시아 현지경찰들과 협력하여 성매매 현장을 덮쳤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다는 특무정교(특무상사)가 군용품 횡령 및 성매매 혐의자인 걸 본 박대붕은 더욱 분노했다.
“네놈은 위아래도 모르나? 정교 따위가 특무정교한테 그 무슨 말버릇이냐?”
“사령부에서 횡령 및 성매매 혐의자는 계급장 떼라고 포고령을 내렸다! 네놈이 그러고도 대원수 폐하의 군인이냐!”
“야, 박대붕이. 네가 왜 결혼을 안 하나 했더니, 고자였냐? 이게 왜 횡령 및 성매매냐? 나는 그저 이국의 여인과 만나 사랑을 나눈 것뿐이라고. 로맨스 모르나, 로맨스?”
“결혼까지 한 놈이 그러고 있으면 그게 불륜이지, 로맨스냐! 네놈은 포고령 위반이다!”
분노한 박대붕은 곤봉으로 특무정교를 내리쳤다. 엄밀히 말하면 ‘혐의’ 단계였으므로 폭행은 과도한 행위였지만, 박대붕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 경찰들이 간신히 말려 떼어 내야 할 정도였다.
“이 망할 놈, 부끄러운 줄 알아라! 반드시 네놈 군복은 벗기고야 말겠다!”
박대붕은 ‘대원수 폐하의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맹세한 터였다. 설령 과도하다고 비난을 받을지라도, 그게 바로 지극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가자, 모스크바로!”
“마침내 뜨는구만.”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한동안 미적거린 끝에, 한국군은 마침내 다시 모스크바를 향해 장도에 올랐다.
우랄산맥을 넘어 카잔, 니즈니노브고로드,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군용열차의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한동안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지체된 이유는 뒤늦게 밝혀졌다.
“러시아령 투르키스탄과 스텝 총독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단선이다 보니 동쪽으로 진압병력이 투입되느라 서쪽으로 가는 행렬이 지체됐다고 하는군요.”
러시아 정부는 1916년 7월, 당시까지 군역을 면제받은 소수민족에 대해서도 대규모 징집명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과 스텝 총독령의 이슬람교도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50만 명을 비전투 병력으로 징집하라는 일괄적인 할당량이 정해졌다.
이러한 명령은 그동안 2등신민 취급받던 무슬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봉기를 유발했고, 사태는 연말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입장에선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후방 병력을 빼내 중앙아시아에 투입시켜야 했다.
“러시아의 후방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데 걱정이군.”
“듣던 것보다 더 나쁘군요.”
한국군 장교들은 우려를 느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러시아의 후방 상황은 더 나빴고, 대규모 반란까지 일어났다. 아직까진 변방인 중앙아시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유럽 러시아의 대도시에서도 파업과 반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우리의 우방이여, 어서 오십시오!”
한국군 사령부와 선발부대가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에 진입하자, 모스크바 주지사와 주의회 의원들이 역에 환영행렬을 이끌고 맞이했다.
러시아 전통복장을 입은 여인들이 환대의 뜻인 빵과 소금을 건네고, 보드카 잔을 내밀었다.
사령관 홍범도가 원샷으로 보드카를 비우자,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먼 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우리 러시아 국민은 함께 싸우기 위해 온 대한제국군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대한제국 만세! 연합국 만세!”
열렬한 환호와 함께 만세가 쏟아졌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차르와 러시아 정부가 그토록 고대했던 ‘정치적 효과’를 위한 선전의 장이 열렸다.
대한제국군은 를 개설하고, 러시아 군부와 교섭에 나섰다.
“한국군은 독일군을 상대하는 전선에는 투입하지 않기로 합시다.”
러시아군도 기피하는 독일군 전선을 한국군이 맡을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정부와 스타프카도 한국군에게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기대했으므로,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혹한인 러시아의 동절기에는 자연히 공세가 잦아들었으므로, 한국군은 1917년 봄 해빙기 이후부터 전선에 투입되기로 합의했다.
그때까지 한국군은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분산해서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하도록 했다.
운명의 해, 1917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