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39
– 220화에 계속 –
2부 220화 지도부 교체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16년 겨울.
11월 2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서거했다. 재위 68년, 향년 86세.
「모든 군주국의 신민들에게 비통한 소식을 알린다. 어제,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시었다. ……」
당대로는 놀라울 정도로 장수하고 오랫동안 재위한 황제라, 수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신민들에게 황제는 불멸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1848년 혁명이라는 까마득한 옛날에 즉위한 이래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금까지 황제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엄청난 성실함으로 늘 새벽에 일어나 하루 12시간 이상 정무를 보았고, 마지막 날까지도 정무를 보다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하지만 성실함이 꼭 성공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프란츠 요제프의 재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는 번번이 패배했고, 유럽 5대 열강이라는 지위에서도 탈락하고 마침내 독일의 종속국과도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프란츠 요제프 자신도 신하들에게 ‘나는 운이 없는 놈’이라고 자조했다.
가족사는 더욱 비극적이었으니, 황태자 루돌프는 부황과의 갈등 끝에 자살했고, 평생 사랑했던 황후 엘리자베트도 무정부주의자의 표적이 되어 암살당했다. 조카이자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도 불화를 거듭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시자, 헝가리의 사도왕,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일리리아, 예루살렘의 왕이시며, 오스트리아, 토스카나, 크라쿠프, 로트링겐의 대공이시고, …… 세르비아의 대군주이신 프란츠 요제프 1세 폐하!”
황제의 장례식은 전통적인 예식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필두로 카를 대공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족들, 독일의 수많은 왕공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저 무수한 작위의 향연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란츠 요제프는 근대국민국가의 군주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전통적인 영지들을 계승한 황제였다. 이 다양한 영지,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제국의 2대 다수민족인 헝가리와 이중제국을 결성하였으나, 이조차도 50년이 지나자 한계에 도달했다.
“우리의 새로운 군주이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제께서는, 군주로서의 신성한 책무와 주권을 행사하시기 위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모든 육군과 해군을 지휘하실 것이다.”
실제 역사와 달리 암살을 피하고 황제에 오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전쟁 중임을 감안하여 즉위식 의식 없이 바로 정무에 돌입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첫 조치는 명목상 총사령관이었던 테셴의 프리드리히 대공을 대신하여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는 니콜라이 2세가 스스로 총사령관이 된 것과 유사한 조치로, 패전 시에는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이와는 이유가 달랐는데,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전쟁으로 과도해진 군사 엘리트의 힘을 빼고 민간정부의 권위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참모총장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남작을 야전원수로 승진시키고, 남티롤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숙적이자 개전의 최대 원흉이었던 회첸도르프는, 야전원수라는 명예로운 지위로 영전했지만 동시에 참모총장에서 경질되었다. 분노한 회첸도르프는 퇴역을 요청했지만, 여전히 군부의 신망이 높은 점을 감안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남티롤군(이탈리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빈을 떠났다.
“혁명보다는 개혁이 낫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1917년은 이중제국 수립 50주년이 되는 해이자, 10년 단위로 이뤄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 행정 및 예산 재조정이 예정된 해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이중제국을 다민족 연방으로 개편할 목표를 갖고 있었고, 기득권을 빼앗길 걸 두려워한 독일계와 헝가리계 엘리트들은 이미 프란츠 요제프의 생전에 1917년 합의를 마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연방 개편을 ‘전쟁 승리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명분을 들고 나왔다.
니콜라이가 승전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개혁조차 거부하는 것과 비교하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제국의 절반이나 되는 슬라브계 주민들이 이탈하면 제국은 끝장이다. 우크라이나 전선의 재앙은 제국이 슬라브계 민족들을 무시한 대가다. 전쟁 승리와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엘리트들은 물론이고, 독일도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치에 불안감을 느꼈다. 평화주의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단독강화를 추구할지 우려했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종속되어 있는 처지라 단독강화는 어불성설이었다. 독일은 결코 오스트리아의 이탈을 용납할 수 없었다.
「짐의 친애하는 형제이신 황제 폐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승리하겠다는 맹세를 결단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짐도 황제 폐하와의 오랜 우의를 결단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종승리를 위하여 함께 나아갈 것입니다. ……」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카이저 빌헬름의 성미를 잘 알고 있었고, 승리를 위해 함께 분투하자고 맹세했다.
다만 승리를 위하여 여러 조정이 필요하다고 양해를 구했고, 카이저도 전쟁 승리에 도움이 된다면 용인할 의사가 있었다.
“팔켄하인 장군으로는 더 이상 안됩니다. 심판 작전은 우크라이나를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서부전선에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미 국민에게 팔켄하인은 승리의 상징이 아닙니다. 국민적 신망을 얻는 장군에게 총사령부를 맡겨야 합니다.”
독일 내에서도 팔켄하인을 끌어내리려는 공작이 진행됐다. 특히 팔켄하인의 전략에 불신을 품게 된 루덴도르프가 배후공작에 나섰다. 오스트리아가 총사령관과 참모총장을 교체하였듯이 독일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암시했다.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도 우크라이나 점령에 실패하는 바람에, 곡창지대를 확보하지 못해 식량 위기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베를린과 빈에는 식량이 고갈될 위기가 현실로 닥쳐왔고, 더욱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힌덴부르크 원수를 신임 참모총장으로, 루덴도르프 대장을 참모차장 겸 병참감으로 임명한다. 팔켄하인 대장에게는 우크라이나 전선을 맡긴다.”
결국, 루덴도르프의 공작이 승리했다. 동부전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고, 팔켄하인은 경질되어 힌덴부르크가 맡았던 동부전선의 남부군 사령관으로 보내졌다.
참모총장이 된 건 70세의 노장 힌덴부르크였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는 건 기민한 전략가 루덴도르프였다.
“국가의 존립은 전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국력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최종승리를 이끈다.”
루덴도르프는 팔켄하인을 능가하는 군국주의자, 전쟁지상주의자였다. 이제 독일은 최후의 힘까지 쥐어짜 내어 전쟁을 지속할 터였다.
“정부의 지도력 변화 없이, 이 전쟁은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솜 전투는 재앙과도 같은 귀결이었습니다. 이는 정부와 군부에 확고한 지도력이 없었던 탓이며,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1916년 12월, 동맹국에 이어 연합국에서도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서부전선에서는 피에 젖은 솜 전투로 독일군 60만, 프랑스군 30만, 영국군 40만의 사상자를 냈다.
지상전의 대규모 피해를 입은 경험이 드문 영국은 40만이라는 사상자에 경악했고, 재무장관에 이어 전시 군수장관을 역임하며 군수물자의 생산 및 보급에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한 로이드조지가 통렬한 비판의 선봉에 섰다.
정부 내의 파워게임 끝에, 결국 총리 애스퀴스와 육군장관 키치너 원수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보어전쟁을 비판하며 군축을 제창했던 왕년의 반(反)제국주의자 로이드조지가 전시 수상이 되어 전쟁 지속을 천명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의 야욕을 완전히 분쇄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영국이 총리를 교체할 무렵, 프랑스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취약한 제3공화국의 내각 교체는 빈번한 일이라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고, 중요한 건 군부의 변화였다.
프랑스 총리 아리스타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은 참모총장 조프르의 지도력에 회의감을 품었고, 변화를 추구했다.
“조프르 대장을 공화국 원수로 진급하고, 대통령의 군사고문이자 전쟁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임명한다.”
회첸도르프와 팔켄하인이 교체됐듯이, 조프르도 명목상 영예로운 원수로 영전했지만 참모총장에서 해임됐다. 신임 참모총장에는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 대장이 임명되었다.
“1917년 봄에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재개한다.”
로이드조지와 브리앙은 1917년 서부전선 춘계 대공세를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재정도 고갈 직전이고, 국민도 지쳐 가고 있었지만, 제해권 덕에 아직 자원은 충분했다. 연합국은 물적 우세를 승리의 밑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 * *
1916년 12월, 공교롭게도 연합국과 동맹국 모두에 지도부 교체와 변화가 있었다.
참전국 중에서 가장 변화가 시급한 나라, 러시아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하면-.
놀랍게도 차르와 정부 당국자들은 복지부동(伏地不動)하고 있었다.
총리 고레미킨은 자신의 정치철학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나에게 있어 폐하는 신의 이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정당한 주권자입니다. 차르는 러시아 전체를 한 몸으로 의인화합니다. 폐하의 나이 이미 48세, 러시아 신민의 운명을 통치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닙니다. 그런 분께서 결단을 내리고 행로를 정하셨으므로, 충실한 신하들은 어떠한 결과가 있더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께서 차르를 보우하시길!”
차르는 모길료프의 최고사령부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있고, 총리는 시대착오적인 왕권신수설이나 읊어 대는 동안, 황후는 섭정으로서 전횡을 이어 나갔다.
“예카테리나 대제 이래, 여성의 몸으로 국무를 맡아 대신들을 지휘하는 건 내가 최초야.”
알렉산드라는 완전히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독일 출신 황후에서 쿠데타로 황제가 되어 34년간 재위한 예카테리나 2세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독일 출신 황후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대제’라고 추앙된 예카테리나와 알렉산드라는 능력 면에서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예카테리나와 달리 알렉산드라는 부부애가 좋았고, 황제의 자리를 넘보지도 않았지만, ‘착하고 마음 약한’ 남편을 대신해 러시아에 철권(鐵拳)을 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라 꼴 정말 잘 돌아간다!”
황후의 전횡은 두마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두마는 스톨리핀의 선거권 개정 이후 굉장히 협소한 투표권을 반영했음에도, 의원들 3분의 2가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 블록’을 결성했다. 군주정에 충실한 우파 인사들조차도 차르의 무능에 학을 뗐다.
12월 14일(율리우스력 1일), 우크라이나 전선이 안정되어 모처럼 두마가 재개되자, 진보 블록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성향의 입헌민주당 당수 파벨 밀류코프(Pavel Milyukov)는 정부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정부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잃었습니다. …… 이것은 우매함인가, 반역인가?”
밀류코프는 정부의 실책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매번 ‘우매함 혹은 반역’이라 후렴구를 달았고, 두마 의원들은 그럴 때마다 화답했다.
“옳소! 우매하다!”
“옳소! 반역이나 다름없다!”
“그렇습니다. 우매함이든 반역이든, 결과는 동일하므로 선택할 필요도 없습니다.”
변호사 출신의 젊은 급진파 의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는 더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총리와 대신들은 황후의 청부업자에 겁쟁이에 불과합니다. 러시아는 미신과 무지에 의해 인도받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노예의 나라입니까? 이 나라에도 구국의 일념으로 카이사르를 찌른 브루투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정숙! 정숙! 그 무슨 말인가? 암살이라도 하잔 말인가? 전시에 정부를 전복할 생각인가?”
비난과 탄핵이 쏟아지자, 총리는 두마를 정회(停會)시킴으로써 간단히 해결했다. 두마는 재개 하루 만에 다시 무기한 정회에 들어갔다.
황후는 자신을 겨냥한 비난에 분노했다.
“이런 자들은 다 반역자들일 뿐이죠! 밀류코프는 시베리아에 보내고, 케렌스키는 교수대에 매달아야 해요! 러시아인들은 채찍을 맞아야 하는 게 본성입니다. 폐하의 강력한 철권을 보여 주세요!”
황후는 차르에게 두마 의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위협을 느낀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는 영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정부는 두마 의원들의 연설이 언론에 보도되는 걸 금지했지만, 이미 소문은 광범위하게 돌고 있었다. 밀류코프와 케렌스키는 전제와 ‘반역’에 맞선 자유의 투사로 포장되었다.
“맞아. 우매함이 아니라 반역이지.”
“바로 그 독일 여자가 반역자라고!”
연설이 몰고 온 파장은 컸다. 밀류코프는 군주정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황후와 정부의 반역을 폭로한 투사가 되었다. 밀류코프의 의도야 ‘우매함’을 비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대중들은 반역이 기정사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16년 말이 되면서 전선의 군인들, 후방의 시민들 모두 극도로 지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파업이 빈발하게 일어났고, 불복종이 확산되었다.
연전연패, 늘어나는 희생, 부족한 식량, 엉망진창인 정치는 음모론이 싹트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황후가 군사기밀을 조국인 독일에 넘겨주고 있다더라. 그래서 러시아가 연패하고 있는 거야.”
“군대에 포탄과 의료품이 부족한 것도, 황후가 주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농토에서는 충분히 생산되고 있는데, 왜 도시와 군대에서는 식량이 부족한지 알아? 황후와 정부가 독일에 몰래 팔아넘겨서 기근으로 몰아넣는 거야.”
“그럼 대체 차르는 뭘 하고 있는 거지?”
“황제는 황후의 노예야. 황후가 독일에 항복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더라.”
“사실 이 전쟁 자체가 짜고 치는 판이야. 러시아를 독일의 노예로 만들려는 왕조 간의 음모라고. 이미 이 나라는 독일에 먹혔어.”
“독일에 다 먹혀 버렸다면, 대체 싸운들 무슨 소용이지?”
“그러니 혁명을 일으켜 독일의 앞잡이들을 타도해야지!”
후방과 전선에 치명적인 음모론이 전파되었다.
왜 독일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고, 왜 독일인 황후가 섭정을 맡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왜 독일에 연전연패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군수품이 이토록 부족한지도 모르겠는 병사들에게, 이게 다 독일의 앞잡이들이 꾸민 음모라는 소문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큰일 났군. 이대로 가다간 노동자가 일으키는 반란에 군대가 가담하는 날이 올 거야.”
“더 늦기 전에 어떻게든 변화가 있어야 하오. 나라의 해악을 제거해야지!”
“좋소! 황후를 끌어내립시다!”
“황후만으로 되겠소? 최고사령관이 교체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
정치인, 관료, 군인, 귀족, 심지어 황족의 일부까지 은밀히 결속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혁명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변을 모의했다.
1916년이 끝날 무렵, 각국에서는 지도부를 교체해 새로운 전열을 갖췄다.
그리고 1917년이 시작될 무렵, 참전국의 후방에서는 별도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