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41
– 222화에 계속 –
2부 222화 개혁이냐 혁명이냐 (2)
이영은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에 머무르고 있는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강녕하신지요?”
“반갑소, 친왕. 친왕비가 회임했다는 소식은 들었소. 축하하오.”
“폐하께서 친히 축하해 주시니 큰 영광입니다.”
이영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이선의 친서를 전달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친서를 삼가 봉정합니다.”
“고맙소.”
니콜라이는 선 채로 이선의 친서를 읽었다. 냉철한 이선답지않게 비외교적인 문장으로 감정을 호소하는 내용에 놀랐다.
친서는 이선과 니콜라이의 오랜 우의를 상기시키고, 임박한 파국을 경고하고, 차르가 선택해야 할 방책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언했다.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신분과 국적을 막론하고 수없이 진언을 받은 니콜라이였다. 근래 들어서도 영국대사 뷰캐넌, 프랑스대사 팔레올로그, 전 총리 스톨리핀, 두마 의장 미하일 로잔코(Mikhail V. Rodzianko), 심지어 황태후와 황실의 대공들마저 알렉산드라의 섭정 퇴진을 요구했다.
그럴 때마다 귀를 틀어막았지만, 니콜라이의 마음도 흔들렸다. 귀가 얇은 그로선 모두 비판을 하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조언은 고맙지만, 짐은 하느님께 맹세한 전제군주로서의 통치를 저버릴 수 없소.」
언제나 답은 같았다. 자신이 즉위식에서 신에게 한 맹세, 선조들처럼 전제군주로서 러시아를 지키겠다는 맹세에 마치 주술처럼 속박되어 있는 니콜라이였다. 오직 알렉산드라만이 이를 충실히 지지해 줬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이선은 그 모든 걸 이해한다고 했고, 러시아의 군주로서 해야 할 일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과연 내 오랜 친우지. 할아버지의 암살을 막았고, 나 역시 암살에서 구했고, 심지어 내 아들의 병도 낫게 하려고 노력했지. 그는 하느님이 내게 보내 준 사자이시니, 그런 사람이 이렇게까지 호소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니콜라이는 옛일을 떠올리며, 이선의 헌신적인 호소에 감동했다. 다른 이들은 합리적으로 ‘이러이러하면 파국이 임박하니, 국가를 위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접근방식을 택했다면, 이선은 감정에 호소했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니콜라이에겐 더 효과적이었다.
“한국 황제 폐하의 진심 어린 친서에 감사드리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전해 주시오.”
“예, 폐하.”
우유부단한 성품답게, 니콜라이는 당장 결단은 내리지 않았다. 그래도 심리적으로 저울의 추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니콜라이는 알렉산드라에게 말했다.
“알릭스, 아무래도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가는 게 낫겠소.”
“니키, 그 무슨 말씀이신가요? 최고사령관으로서 총사령부에 있으셔야죠.”
“아니, 솔직히 말해서 스타프카에서 나는 별로 할 일도 없고……. 어차피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건 참모총장의 몫이니까. 장군들 보고를 받고 서명해 주는 게 다라오.”
니콜라이도 자신이 스타프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장군들은 차르를 잘 다루고 있었다. 니콜라이는 이름만 최고사령관이지, 전쟁에 무지한 그로선 보고서에 도장 찍어 주는 게 일이었다.
“니키! 당신은 최고사령관인데, 명령을 내리지 않고 보고 받고 서명만 한다고요? 어찌 장군이란 작자들이 이토록 최고사령관을 무시할 수가!”
“그럼 어쩌겠소? 그들이 군사전문가인데. 나도 군사교육을 받긴 했지만, 전쟁을 지휘할 정도는 아니오. 당연히 장군들이 지휘를 맡아야지.”
그 허세 넘치는 카이저도 전쟁 지휘는 장군들에게 맡기는데, 소심한 차르가 직접 지휘를 맡겠다고 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모길료프보다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소. 현재의 내각도 교체해서 좀 더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고.”
“누가 폐하께 그렇게 조언하던가요? 황태후이신가요? 아니면 미하일 대공이나 니콜라이 대공? 두마의 어릿광대 로잔코? 어느 쪽이든 다 폐하를 군에서 몰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폐하께서 최고사령부에서 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지 않으면, 쿠데타를 계획할지도 몰라요!”
알렉산드라는 반대파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실제로 군부 일각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모의를 알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불신한다는 의미였다.
“영국대사와 프랑스대사도 그러길 권했소. 전쟁 승리를 위해 필요한 조치일 뿐이오.”
“그들이 러시아에 대해 뭘 아나요? 영국과 프랑스는 왕의 머리를 자른 적도 있는 나라에요. 지금도 대중에게 굴복하는 나약한 정부죠. 러시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길 원하나요?”
알렉산드라는 전제정을 고수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엄포를 늘어놓았다. 대부분 사람과 정반대 인식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요. 혁명을 막기 위해서 약간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거지.”
“폐하께서는 1906년에 폭도들에게 양보한 걸 두고두고 굴욕이라고 생각하셨잖아요. 그걸 되풀이하잔 말인가요?”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1906년 혁명의 결과로 10월 선언을 발표한 건, 니콜라이에게 있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 게 아니라 폭도에게 굴복한 것이었다.
“하느님께 한 맹세를 잊었어요? 우리 알료샤(알렉세이)에게 흔들림 없는 전제정을 물려줘야죠.”
“바로 알료샤를 위해서요. 내 오랜 친우인 이선도 진정으로 그러길 권합디다.”
니콜라이는 이선의 친서에 대해 설명했다. 알렉산드라도 알렉세이의 치료로 인해 이선을 고맙게 여기고 있던 차라, 이선의 이름을 대면 순순히 응하리라 생각했다.
“분명 그는 우리의 벗이자 은인이지만, 외국의 군주로서 어찌 감히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하나요!”
“비록 타국의 군주지만, 그만큼 로마노프 왕조를 위해 헌신한 사람도 드물지 않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왕조를 위하여 조언하는 거요.”
“아니에요. 그런 순수한 의도만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래요, 그의 정부(情婦)가 폴란드 여자잖아요. 독일이 폴란드 독립을 선포하니까 러시아도 그래 주길 바라는 거겠죠. 사조노프가 한국과 협약을 맺은 직후에 폴란드 자치를 인정하자고 한 것도 이상해요. 분명히 뭔가 밀약이 오고 갔을 거예요.”
한국과 러시아가 밀약을 맺은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만주와 몽골에 대한 것이지 폴란드는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1916년이 되면 야당은 물론이요, 정부 관료들조차 폴란드 독립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러시아의 점령 밖으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폴란드 여자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절대 들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통치를 군주 개인의 심리와 연결짓는 알렉산드라다운 비난이었다. 오히려 ‘독일 여자’가 차르를 조종하고 있다는 광범위한 비난을 받고 있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아내의 말을 들어주는 니콜라이도, 하필이면 ‘외국 여자의 조종’이란 말을 들으니 불쾌감을 느꼈다.
“말이 너무 지나치구려. 그는 진심을 담아 조언했는데, 그렇게 폄하할 이유가 없소. 당신이 나를 조종하고 있지 않듯이, 이선도 그럴 리가 없소.”
“폐하! 어째서 당신의 아내는 믿지 않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조언을 믿소. 하지만 이번만은 내 뜻을 존중해 주시오. 우리의 연합국 모두가 권하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어디까지나 전쟁 승리를 위한 일시적인 양보요.”
니콜라이는 더이상 알렉산드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번만은 자신의 뜻대로 할 생각이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로 복귀한 차르는 일련의 변화를 실시했다.
77세의 늙은 수구파 고레미킨이 총리에서 물러나고, 온건보수파인 교통부대신 알렉산드르 트레포프(Alexandr F. Trepov)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트레포프는 1906년 혁명을 가혹하게 진압한 내무차관 드미트리의 동생이었지만, 그 자신은 개혁을 지지하여 10월 선언에 관여했다.
트레프포는 ‘스톨리핀 추종자’였고, 선제적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전시 교통장관으로서 철도 부설과 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군수품과 식량이 전선과 도시에 제대로 공급되도록 노력했다.
2월 14일(율리우스력 2월 1일), 차르의 명령을 받은 총리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제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공표한다.
1. 전쟁 승리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독일과의 단독강화는 없다.
2. 전후에 선거제도를 개혁하여, 현재보다 많은 민의가 반영되도록 하겠다.
3. 전후에 농업개혁을 완수하며, 농촌 자치단체의 참여를 확대한다.
4. 교육에 대한 국가 및 종교의 제한을 철폐한다.
5. 러시아제국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으나, 소수민족의 권익에 대해 존중한다.
6. 대도시의 식량부족에 대응하여, 3월 1일부터 전시배급을 실시한다. 투기꾼, 사재기, 사보타주는 엄격하게 처벌될 것이다. ……」
이른바 ‘2월 선언’은 개혁을 약속했다. 두마는 황후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정부가 불완전하나마 개혁을 약속한 데에 만족을 표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나?”
“시간벌기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소. 중요한 개혁은 모두 전후로 미루지 않았소? 차르가 언제 또 태도를 바꿀지 압니까?”
그래도 급한 불을 끄는 효과는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이자 민중의 지탄대상이었던 대도시 식량 공급은 내각 교체 이후 나아졌다. 식량 가격 폭등의 원인 중 하나인 일부 자본가와 상인들의 투기는 엄격하게 처벌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차르의 관점에선 이 정도도 놀라운 변화였으나, 개혁조치는 너무 늦었고 너무 약소했다.
1917년 3월 8일(율리우스력 2월 23일), 사회주의 명절인 을 맞이하여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빵!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임금 인상! 8시간 노동제!”
“노동조합 인정하라! 정부는 탄압을 중지하라!”
여성 노동자의 파업에 이어 남성 노동자의 파업도 이어졌다. 경제적 요구는 정치적 요구와 결합되었다.
아직까진 경제적 요구에 머물러 있는 만큼, 노동계급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페트로그라드의 사회민주노동당 지도자들조차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혁명의 순간이 온 게 아닙니까?”
“혁명은 무슨 혁명? 작년 파업이 실패한 거 잊었소?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1파운드의 빵만 안겨 주면 당장 시위는 사그라들 거요.”
수도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에 화들짝 놀란 정부는 해결책을 골몰했다. 군대를 동원하자는 강경론은 총리가 배제했다.
정부는 즉각 식량창고를 열어 3월 14일(1일)로 예정되어 있던 배급제 실시를 앞당겼다. 페트로그라드에는 주민들에게 최소 2주간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다.
빵집의 텅 비어 있던 선반과 끝없이 줄을 서도 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에 질려 있던 주민들에게, 배급제 실시는 가뭄 끝의 단비였다.
“줄 서요! 줄! 넉넉히 있으니까 질서를 지킵시다!”
“좋아, 빵만 받을 수 있다면. 줄 서는거라면 이골이 났지.”
“역시 빵이 있었어. 그동안 자본가와 투기꾼 놈들이 공급을 방해한 거였군.”
“그놈들이야말로 독일 간첩이지.”
“황후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난 다음에 해결된 걸 보니, 역시 그 독일 여자가 간첩 수괴였어.”
“섭정이 아니라 황후에서 끌어내려야 하는데.”
민중의 분노는 배급제 실시로 일시적으로 잠잠해졌지만, 황실과 정부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국제 여성의 날 시위가 폭발적인 혁명으로 번지면서,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끝내 로마노프 왕조도 붕괴했다.
그동안 미세하게 바뀌어 온 역사의 변화는, 당장 혁명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1917년 2월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스위스, 취리히.
중립국인 스위스는 유럽을 휩쓴 전화(戰火)를 피해 갔다. 스위스는 여전히 예전처럼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스위스를 향해 각국의 정치망명자들, 반전주의자, 예술가, 병역기피자가 몰려들었다.
첩보원들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교전국 모두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립국인 스위스를 향해 각국의 첩보원들이 몰려들었다.
“우리 나이 든 사람들은 아마 다가올 혁명의 결전이 벌어질 때까지는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나는 크나큰 확신을 품고 희망을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그토록 훌륭하게 활동하는 젊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싸울 뿐만 아니라 승리를 쟁취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청중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청취자는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이요, 연사는 유창한 독일어로 말했지만 러시아인이었다.
연사는 바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의 동생이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지도자였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웬 동양인 기자가 동지를 찾습니다.”
“동양인 기자? 누군지 짐작은 되는군. 들어오라고 해요.”
‘동양인 기자’는 바로 제국익문사 유럽특파원 조한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헤어(Herr, 독일어 경칭) 울리야노프.”
“반갑소, 헤어 조. 취리히에는 어쩐 일로?”
“스위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취재하러 왔지요.”
“허, 그런 것도 한국에서 기사거리가 됩니까?”
“하하, 제가 쓰기 나름이지요.”
조한민은 1904년 제2인터내셔널 총회 때부터 울리야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이선은 조한민을 종종 스위스로 보내 러시아 국외 혁명조직에 대해 파악하게 했다.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 실제 세계의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이 세계에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국제주의’ 그룹의 리더였다.
“선생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다가올 혁명의 결전까지 살아남지 못하다니, 선생답지 않게 비관적이더군요.”
“글쎄요, 내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혁명의 그 날까지는 살 것 같지가 않소.”
울리야노프의 나이 47세. 1887년 형의 차르 암살 여파로 떠밀리듯 러시아를 떠난 지도 어언 30년이었다.
그 30년 세월 중에 러시아에 체류한 건 1906년 혁명 중의 6개월뿐이었다. 오랫동안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지에서 거주한 울리야노프는 사실상 러시아인이라기보다는 유럽인이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최고 단계고, 자기모순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전쟁으로 붕괴하리라는 게 선생의 지론 아니었습니까?”
조한민은 울리야노프의 저작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언급했다. 근래 스위스에서 독일어로 출판되어 소수의 독자만이 읽은 책이었다.
“허, 그 책을 읽어 보았소?”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독일어 실력이 한계가 있어서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럼 나중에 해설서를 드리지요.”
무표정이던 울리야노프는 문득 씩 웃더니 말했다.
“질문에 답해 주자면, 혁명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단지 내가 그때까지 살지 못할 것 같다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차르는 그렇다 쳐도,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이나 서유럽 연합국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소. 정치개혁만으로 혁명을 잠재울 수 있다고 믿지. 천만에.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경제적 모순이오. 러시아는 사회경제적 혁명을 피할 수가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