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59
– 240화에 계속 –
2부 240화 민주주의 기획
동부전선의 하계공세는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의 8월 공세는 독일의 9월 반격으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러시아군의 약화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였다.
임시정부와 군부의 프로파간다조차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군은 용맹히 분전하여 적에게 다대한 타격을 입혔으나, 중과부적으로 공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실패했다.」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6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전 공세에서 입었던 손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적은 수였지만, 러시아군은 이 정도 손실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오히려 포로가 20만 이상 발생했다. 전의를 잃고 백기를 든 병사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못지않게 러시아군도 전의 상실 상태였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이 있어서 버텨 주고 있지만, 동부전선을 홀로 싸우다시피하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버팀목이 없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은 루마니아군의 섣부른 공세는, 약체화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도 참패를 당할 지경이었다. 북쪽의 독일군, 서쪽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남쪽의 불가리아군이 삼 방면에서 공세를 퍼붓자 루마니아군은 공세는커녕 국토방위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지!”
“임시정부와 군부가 무리한 공세를 추진한 끝에 이 파국이 발생했으니, 마땅히 정부와 군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소비에트가 반전 선동을 하고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결과, 군의 권위가 무너지고 전의가 약화된 게 아닌가? 마땅히 소비에트가 책임을 져야 한다!”
러시아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볼썽사나운 책임 공방전이 벌어졌다.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서는 좌익과 우익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서로를 구제불능의 반동 혹은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격렬한 책임공방 끝에, 결국 총리 르보프 공이 사임했다.
신임 총리로는 케렌스키가 선출됐다. 그 역시 육해군장관으로서 공세 실패에 책임이 있었지만, 현재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의 연결고리를 하는 유일한 존재라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적에 맞서서 반드시 혁명과 조국을 수호할 것이다!”
케렌스키는 이른바 ‘조국방위정부’를 선포하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여전히 온건파가 지배하고 있는 소비에트도 임시정부의 항전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조국방위정부 선포도 무색하게, 10월 6일 라트비아 리가가 독일군에 함락됐다. 카이저는 친히 리가로 와서 엄숙하게 승전 열병식을 개최했다.
발트해에서 페트로그라드 다음가는 항구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리가의 함락에 페트로그라드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다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까지 밀어닥치는 거 아닌가?”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겨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국의 수도이자 혁명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포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임시정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리가와 페트로그라드 사이에는 600km의 거리가 존재했지만, 문제는 믿을 만한 군대가 있냐는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해야 합니다. 연합국에서 동부전선으로 파병을 해 주십시오.”
“유감입니다만, 그럴 수 있으면 이미 그렇게 했지요.”
영국과 프랑스는 동부전선에 파병할 여유가 없었고, 이탈리아나 발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병력의 여유가 있는 건 미국이었지만, 전쟁준비의 미비로 인해 빨라야 1918년 봄에 투입 가능했다.
우크라이나 전선.
한국군이 입은 피해는 러시아군에 비하면 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장군, 적 진격 속도가 예상보다 빠릅니다! 사령부도 퇴각해야 합니다!”
“적 포격으로 통신선이 차단된 상황인데 사령부가 후방에 있으면 어떻게 원활한 지휘를 하겠나? 나는 사단장으로서 사단 병력을 모두 완전히 퇴각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콰앙! 콰앙!
“장군!”
“사단장님!”
“으윽……. 퇴, 퇴각을 지휘…….”
몸소 퇴각의 후위를 맡아 지휘하던 9사단 사령부에 포격이 떨어져, 사단장 이갑 참장이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실려 나갈 정도였다. 첫 장성급 사상자였다.
후위를 맡은 9사단의 분전으로 한국군은 큰 손실 없이 후퇴에 성공했으나, 장병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망할 러시아 놈들! 싸울 의지도 없이 항명하고 탈영하고, 이게 군대냐?”
퇴각 과정에서 소대원의 3분의 1을 잃은 신익희 참위는 분노를 터뜨렸다.
“저놈들이 국군이었으면 소관이 모조리 잡아서 총살시켰을 겁니다!”
박대붕 정교는 더욱 분노했다. 헌병 출신인 박대붕은 탈영병 단속과 체포도 수행한 바 있었다. 그의 생각에 한국군이었다면 저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거니와, 만약 그랬더라도 처단했을 터였다.
“한국군은 사단장도 몸소 지휘하다 중상을 입는 상황인데, 러시아군은 장군부터 병사까지 내빼느라 정신이 없구나.”
동부전선의 관찰자들도 개탄할 지경이었다.
러시아군의 전의 상실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절대 다수가 농민, 소작농 출신인 병사들은 전쟁을 마치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토지를 경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들은 왜 계속 전쟁을 해야 하는지, 공세를 벌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연합국은 귀국이 병력을 증파해 주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군은 이미 전선에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임시정부와 연합국은 한국에 증파(增派)를 요청했다.
“증파 여부는 본국 정부와 상의할 일입니다만, 적 공세가 중단되면 군단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렸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임시정부도 한국군의 페트로그라드 주둔에 동의했다. 신뢰할 만한 군대가 거의 없어진 현재, 외국군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군대가 필요했다.
* * *
대한제국 서경 평양부.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이선은 평양 흥경궁에 원수부를 설치하고 전황을 보고 받았다.
“내가 이래서 섣부른 공세는 위험하다고 했건만! 이미 엎어진 물이로군.”
이선은 분전하다 중상을 입은 이갑 참장에게, 훈일등 태극대수장을 수여하고 육군 부장으로 특진시켰다. 이외에도 군단장 홍범도가 보고하고 청원한 기준에 따라 무공을 세운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특진시켰다.
“폐하, 러시아 정부에서 증파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한에는 증파할 병력은 있지만, 이래서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닙니까? 러시아의 무능한 작전이 반복되면, 아군의 희생만 늘어날 겁니다.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총리 서재필이 증파에 반대했다. 친미파인 서재필은 미국 참전에 열렬한 환영의사를 밝혔다. 그는 미국의 대규모 파병을 기다렸다가 미군과 함께 싸우기를 원했다.
“증파를 해야 한다면, 할 수는 있소. 연합국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있다면 말이지.”
비록 머나먼 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긴 하지만, 전후질서를 고려하고 있는 이선으로선 증파를 해서 연합국에 생색을 낼 용의가 있었다.
이선 역시 그 과정에서 발생할 장병의 희생이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황제에 즉위한 지 어언 20년이 된 그로선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더 중시했다.
“충분한 대가라 하오시면?”
“러시아가 작년에 인정한 대한의 만주 행동 자유화, 이걸 영국과 미국도 승인하는 거요.”
1916년 파병을 앞두고 체결된 제3차 한러협약은, 만주에서의 한국의 자유행동을 러시아가 사실상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북만주를 관할하던 러시아가 1917년 혁명으로 극동까지 신경 쓸 상황이 못 되자, 자연스럽게 한국은 만주에 독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이 협약은 밀약이었으므로, 아직 러시아에만 인정받은 조약이었다. 다른 열강의 동의도 얻어야만 만주를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본래 제국주의 국가에다, 지금 전쟁에 국운을 모두 건 상황이라, 우리가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기여한다면 만주를 지배하건 말건 신경 쓸 여유가 없지.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다른 질서를 계획하고 있으니.’
전통적인 고립주의 국가였던 미국은, 1917년 참전을 계기로 세계 신질서를 재편하려고 했다.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시절부터 중국의 문호개방을 천명했고, 만주에도 관심을 보여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주주가 되었다.
즉, 만주 문제에 있어 미국의 양해도 구해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 역사의 일본이 만주 문제를 놓고 폭주하여 미국과 대립하다 끝내 전쟁까지 갔던 걸 감안하면, 미리 안전망을 만들어 놔야 했다.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는 윌슨이 만주 병합을 용인할 리 없다. 중화민족주의로부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동양의 신질서를 구축해야지.’
이선이 1916년에 친미 자유주의자인 서재필을 총리로 임명하고, 윌슨의 제자인 이승만을 주미대사로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국의 ‘전후 신질서’와 한국의 ‘동양 신질서’가 대립하지 않고, 하나로 수렴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윌슨 행정부는 참전 명분이 된 세계의 민주화, 특히 전제군주국이었던 러시아의 민주화라는 기획을 결코 포기할 수 없소. 우리가 그들의 기획에 충실히 따라 준다는 걸 보여 줍시다.”
미합중국, 워싱턴.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령님.”
“귀국은 합중국의 우방이자 중요한 연합국 일원인데, 당연히 초대에 응해야지요.”
“대통령 각하의 최측근인 대령님이 바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시간을 내서 저를 만나 주시니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그렇게 따지면 닥터 리는 대통령 각하의 제자가 아닙니까, 하하하.”
주미한국대사 이승만과 윌슨의 외교안보 보좌관인 에드워드 하우스(Edward M. House)는 반갑게 악수했다.
윌슨이 흉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 ‘하우스 대령’. 실제로는 군인이 아닌 기업가 출신이지만, 대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윌슨의 최측근 고문으로서 미국 전시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말하자면 하우스는 미국의 비선실세였다.
「독일의 무릎을 꿇리는 것보다, 러시아가 굳건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러시아 내부의 혼란이 독일이 개입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면, 조만간 독일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진보의 시계는 거꾸로 돌게 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하계공세가 실패한 이후, 하우스는 윌슨에게 편지를 보내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긴급한 조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주의가 러시아에 견고하게 확립된다면, 독일의 군사정권은 가까운 시일 내에 대의제 정부에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계는 역사상 유례없는 중대한 위기이자 기회에 봉착했습니다. 각하께서는 결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우스는 민족자결주의의 확산과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기획에 이끌렸고,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러시아의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을 지원했다.
한국군 또한 체코군단과 더불어 실패로 끝난 하계공세에서 분전한 군대이니만큼, 하우스는 자연히 한국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임시정부가 한국에 정식으로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그렇다면 귀국은 수락할 용의가 있습니까?”
이승만의 말에 하우스가 반색하며 물었다.
“서재필 총리는 파병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전의를 상실하는 현시점에서 증파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귀국 군대가 본격적으로 참전할 때가 되면, 함께 파병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안 됩니다. 그러면 늦습니다. 합중국은 파병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규모 병력이 파병하려면 내년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군사적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모병제를 유지하며 상비군이 10만에 불과했던 미국군은 급격히 덩치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욱이 군부에서는 서부전선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군부는 동부전선을 부차적으로 보고 있는데, 나는 이 상황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우려에 동의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러시아에선 급진좌익이 혁명을 선동해 소비에트정권을 세우거나, 반동우익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을 세우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내 의견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막 싹을 튼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이대로 짓밟히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켜 내는 것입니다.”
하우스와 이승만은 의기투합하여 현재의 전황과 미래 질서에 대해 논했다.
“대령께서도 아시다시피, 한국이 러시아까지 파병하려면 철도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국군 병력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수품도 부산항에서 철도로 적재되어 한국과 만주, 시베리아를 횡단하지요. 그런데 지금 철도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러시아에 긴급 차관을 지원하고, 기관차와 철도 전문가들을 파견했지요.”
“문제는 만주입니다. 남만주철도는 한국에 있어 러시아와 유럽으로 향하는 사활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 중국에 중화민족주의가 득세하면서, 만주 수복을 부르짖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면서 산동을 조건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큽니다만,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넘어 만주와 몽골까지 외치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전망에 하우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과거엔 한 나라였을지라도, 이제 중화민국과 청국은 분리된 국가가 아닙니까.”
“대령님, 중국인들의 통일의식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물론 현재 중국이 군벌들로 산산조각 난 점을 감안하면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중국인이 만주를 계속 미수복 영토로 여긴다면 만주의 청조로서는 현실적인 위험이지요.”
이승만이 동양인이자 정치학 박사로서 ‘중국의 정서’에 대해 설명하자,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 비전문가인 하우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청국의 형제국가로서, 만주인, 몽골인, 티베트인, 신장 무슬림(위구르)이 민족자결을 누리길 바랍니다. 민족자결의 수호자인 미합중국이 이를 보증해 주었으면 합니다.”
“음, 좋습니다. 대통령 각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윌슨이 내세운 명분이었으므로, 동양에서 이를 실현하겠다는 한국의 제안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었다.
“한국과 미국은 남만주철도를 공동으로 경영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동아시아도 함께 지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동양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권 쟁탈전이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는 문호 개방의 장이 될 겁니다.”
하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한국은 일본보다 합리적이었고, 이념적으로도 미국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했다.
“귀국이 러시아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되려 한다면, 미합중국은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한국인이 바라던 바입니다. 한국은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증파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위하여 함께 싸우길 바랍니다.”
이승만과 하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세계의 민주화’라는 미국의 기획에, 한국이 동참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