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67
– 248화에 계속 –
2부 248화 민주주의의 병기창
1918년. 전쟁은 어느새 5년 차에 접어들었다. 교전국 국민의 분투와 인내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겨울이 되면서 전투는 일시적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독일은 전해 가을에 플랑드르에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 냈고,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이탈리아군을 붕괴 직전까지 내몰았으며, 루마니아 전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루마니아는 참전 4개월 만에 독일에 굴복하고 말았다.
독일의 힘은 아직도 무적처럼 보였다.
“오늘 식사는 뭐야?”
“순무빵입니다.”
“제길, 또 순무냐!”
하지만 내부사정은 달랐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식량 고갈이 현실로 다가왔다.
1917년부터는 밀은 물론이요 감자조차 고갈되어, 이른바 ‘순무의 겨울(Steckrübenwinter)’이라 불리는 기근의 계절이 도래했다. 독일인들은 순무와 유사한 루타바가(rutabaga)만 먹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독일군이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점령하고 식량을 공출한다고 해도, 이런 강압적인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간에서는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독일 제국의회의 여러 정당은 ‘평화 블록’을 결성, 조속히 강화를 추진하라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연합국은 거듭된 패전에도, 전의(戰意)를 떨어트리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1917년 가을공세가 실패한 이후, 프랑스에서는 76세의 ‘호랑이’ 클레망소가 총리에 취임했다.
“전쟁, 모든 힘을 다해 오로지 전쟁! 프랑스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프랑스 만세! 공화국 만세!”
전직 급진주의자, 군부와 우익에 맞서 드레퓌스의 명예를 옹호했던 클레망소는, 강경한 태도로 총력전을 벌일 각오를 보였다.
1917년에 러시아군 못지않게 붕괴 위기에 놓였던 프랑스군은 총리 클레망소와 참모총장 페탱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기사회생했다.
1917년 12월, 연합국은 마침내 소통에 한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연합국 최고작전회의(Supreme War Council)를 구성해 지휘권의 일원화에 나섰다. 영국과 프랑스의 병사들은 단일한 최고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며 싸우게 됐다.
“이탈리아 국민이여! 칸나이의 처절한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한니발로부터 승리를 쟁취한 로마 공화정을 본받읍시다!”
카포레토 전투의 참담한 패배 이후 혼돈에 빠졌던 이탈리아도, 비토리오 오를란도(Vittorio Orlando)가 거국내각을 이끌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우리는 싸운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
거듭된 군사적 참패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중부동맹국과 달리 빠르게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해상권을 장악해 전략적 유리함을 지켜 내고, 식량 수급이 상대적으로 원활한 요인도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군부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여 체제가 동맥경화에 빠져 있는 독일과 달리, 서방 연합국은 관군민의 협력구조였다.
“우리는 어디에나 자유를 주어야 한다. 캐나다에,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웨일스와 아일랜드에, 남아프리카와 인도에도 자유를 주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영국 총리 로이드조지는 자유의 확대에 대해 천명했다.
이 ‘자유’가 설령 제국주의의 가면을 가리기 위한 위선적 기만이라 할지라도, 승리를 위해 분투하는 국민들에게 자유의 확산을 약속했다.
연합국의 정치인들은 국내 민주주의 확산과 식민지 참정권 확대를 약속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극복했고,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동맹국은 그러질 못했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대외적 요인이 있었으나, 바로 미합중국의 존재였다.
* * *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 새로운 세계의 확립.”
명분은 그럴싸해도, 서유럽 연합국의 전쟁 목표가 독일의 붕괴와 제국주의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면, 미국의 윌슨 행정부는 진지하게 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기획에 도전했다.
윌슨은 보편적 민주주의자라기보다는, 미국과 서유럽의 민주주의가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국주의와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신음하는 중동부유럽의 인민들’이 당장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즉, 힘으로 강제해야 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힘이란 군사력을 의미하는가?
“1918년 말까지 미군 200만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진다.”
연합국 최고작전회의는 그렇게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유럽 열강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부족했다. 1억 인구에 상비군이 10만에 불과했고, 1917년부터 전시 체제를 가동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연합국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선전포고 반년이 지난 1918년 초까지도 겨우 15만 명을 서부전선으로 보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훈련도가 턱없이 부족하여 프랑스군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도대체 양키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100만 대군은 대체 언제 오냐고?”
미국 공업의 위용은 이미 전설적이었지만, 아직 세계적 표준은 아니었다. 미국의 생산력은 압도적이지만, 군수공업이 압도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미국이 유럽에 전쟁 물자를 엄청나게 공급하고 있기는 했지만, 연합국의 주문은 원료와 폭약, 화약, 탄약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쓰이는 전쟁 무기는 여전히 유럽인들이 설계하고 제작했다.
프랑스군이 미국 무기를 쓰는 게 아니라, 1918년에는 미군이 프랑스 무기를 쓰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돈, 많은 돈, 더 많은 돈.”
바로 미국 자본주의의 풍요였다.
1917년 연합국의 금보유고는 한계에 도달했고, 화폐가치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괴롭혔다. 결국 채무불이행 상태에 근접했다.
파산 위기에 처한 연합국을 구제한 건 미국 자본이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러시아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했다.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민간 자본시장의 한계를 넘어 연방 정부가 공적 자금을 직접 투입했고, 이는 연합국이 독일에 대해 결정적인 우세를 점하는 부분이었다.
“자유공채! 세계의 자유를 위하여!”
미국의 전쟁채권인 자유공채는 자국을 넘어 연합국을 위해 쓰였다. 초기 자금 50억 달러 중 30억 달러가 연합국의 차관으로 할당되었다.
느려터진 미군의 상륙과 달리, 미국의 자금은 신속히 전달되었다. 미국은 1917년에만 30억 달러를 풀었고, 1919년까지 100억 달러를 연합국에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돈이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달러가 풍부하게 공급되자, 화폐가치가 떨어진 파운드와 프랑을 빠르게 대체했다. 구매와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대서양 항로가 번영했다. 1917년부터 연합국은 미국의 달러에 의존하여 전쟁을 치렀다.
다른 합동기관과 달리, ‘연합국 병참협의회(Inter Allied supply council)’는 미국 재무부의 엄격한 감독과 통제를 받았다.
“윌슨 행정부는 영국과 유럽을 재정적으로 종속시키는 걸 진정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촉망받는 청년 경제학자이자 영국 재무부의 관료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연합국 병참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케인스는 즉각 현실을 꿰뚫었다. 미국과 서유럽의 연합은, 단순히 민주주의 동맹이라는 수사학에 의존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럽을 대신해, 달러 경제의 지배라는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영국과 프랑스도 미국의 채무자로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뭐, 그렇더라도 일단 전쟁은 이기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합국 병참협의회에 참석한 주미한국대사 이승만은 강 건너 불구경을 즐기고 있었다. 미국의 힘이 유럽을 압도하는 건, 한국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한국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전쟁 전까지 열강에 차관을 빚지고 있는 채무국이었으나, 전쟁기간 동안 채권국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마침내 주변부의 빈국에서 신흥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동맹이면서 차관이나 투자에 까다롭게 굴었던 영국과 달리, 미국 자본은 돈만 되면 어디든 간다.’
한국은 미국의 충실한 대(對) 아시아 창구로 자처했고, 달러의 은총은 태평양 너머 한국에도 들어왔다. 호황을 맞이한 미국 자본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신흥 공업국이자 우방인 한국에 아낌없는 투자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은 대부분 러시아로 수출되고, 각종 소비재는 만주와 화북으로 수출되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아낌없이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지원 없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미국은 연합국의 병기창입니다.”
“연합국의 병기창이라, 좋은 말이군요. 그렇다면 미국이 곧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아니겠습니까.”
이승만이 해군부차관보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에게 경의를 표하자, 프랭클린은 자부심을 담아 미국을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라 칭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먼 친척이지만 민주당을 택한 프랭클린은, 해군부의 실무자로서 대서양의 제해권을 수호하고 연합국의 승리를 위한 해군력 확대에 돌입했다. 미국이 참전한 후 6개월 만에 해군은 4배로 확장되었다.
이선은 이승만에게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특별히 돈독한 친분을 맺으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황제의 훈령이니 따랐다.
‘흠, 해군부의 실무자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대한과 손을 잡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먼 친척이기 때문인가?’
미국의 참전을 열렬히 주장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여전히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받으며 3선에 도전하기 위해 1920년 대선을 노리고 있었다.
‘아니, 그건 상관없을 텐데. 어차피 프랭클린은 민주당이니까. 하긴, 프랭클린은 민주당에서도 촉망받는 인재고, 차기 부통령을 노린다는 말이 있지. 꼭 대한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친분을 맺어 둬야겠다.’
이 무렵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30대의 젊은 엘리트로, 민주당의 총아였다. 앞으로 미국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리라는 예상은 있었다.
물론, 그 누구도 이선만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1918년 초, 미국이 서부전선에 합류할 의사는 분명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은 아직 불투명했다.
“내가 러시아에 개입하자고 하는 이유는, 물론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만, 그만큼 내가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직 민주주의적 러시아만이 독일의 위협을 막을 수 있는 진정한 완충지대가 될 겁니다.”
로이드조지는 동부전선 개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윌슨은 로이드조지의 말은 믿지 않았다. 영국의 개입 의도가 불순하고 반동적인 목적이라 의심했다.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부정했지만, 실패한 코르닐로프 쿠데타의 배후에 영국 정보부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과 영국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민주주의 러시아가 군사강국으로 다시 설 수 없다면, 아시아 대부분은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인도 국경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영국은 러시아가 독일에 굴복하여, 독일이 유라시아의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에 나서는 미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미국 없이는 동부전선에 개입할 수 없었다. 당장 영국과 프랑스는 서부전선, 지중해전선, 중동전선에 전력을 쏟아붓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러시아가 패배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러시아의 패배는 민주주의의 패배이자, 독일의 유라시아 지배를 현실로 만들 겁니다.”
한국도 미국의 개입을 원했다. 이선은 서재필과 이승만의 입을 빌어 미국에 강력히 요청했다. ‘독일의 유라시아 지배’라는 미래는 지나친 과장이라 해도, 러시아의 패배는 충분히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러시아는 현재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군부 독재라는 양극단의 진공 사이에 있습니다. 여기에 독일이라는 외부의 위협이 가해진다면, 민주주의 러시아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만약 민주주의 러시아가 이대로 굴복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적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러시아의 정치적 성격이 전후 질서를 규정하게 될 겁니다.”
러시아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녹아내리기 직전의 빙하와 다름없었다. 1918년에 역사와 달리 ‘볼셰비키’가 집권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현재의 혼란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급진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만약 러시아가 이대로 항복한다면, 동부전선 파병이 헛짓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민주화 여부는 명분이고, 한국을 위해서라도 러시아의 전열 이탈을 용인할 수 없었다.
물론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한 이후 극도의 혼란에 빠져 내전이라도 벌어진다면, 한국의 활동범위가 더 넓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향이었다.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한 후에는 한국의 입장이 붕 떠 버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러시아에 군대를 파견해야 하겠소?”
“단 1개 사단만이라도 파견한다면, 러시아의 사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윌슨도 개입 쪽으로 기울어졌다. 불과 작년까지 전제국가였던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지켜 내겠다는 기획은 그의 구미에 맞았고, 미국의 영향력을 태평양 너머 러시아까지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18년 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척을 진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1867년 알래스카 매매조약으로 상징되듯이, 양국의 관계는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차리즘의 러시아를 미국이 내심 경멸하긴 했지만, 이조차도 ‘민주주의 혁명’으로 대체되었다. 러시아는 이제 미국의 벗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좋소. 미군을 러시아에 파병합시다. 우방인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여 러시아에 투입하도록 하시오.”
“예. 그렇다면 캘리포니아에 새로 창설된 제8사단을 투입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혹은 부산에 상륙한 후, 한국의 협력을 받아 만주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유럽 러시아로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미 육군부는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 창설된 제8보병사단과,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제27보병연대와 제31보병연대를 러시아 파병군으로 배치했다.
약 2만 5천명 규모의 러시아 파병군 사령관은 전 참모총장 레너드 우드(Leonard Wood) 소장, 8사단장에는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Graves) 준장, 참모장에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대령이 임명되어 사령부를 구성했다.
‘민주주의의 병기창’ 미국이 러시아에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적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