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7
– 57화에 계속 –
57화 호랑이 같은 위세
[…… 대원군은 이 폐단을 통렬히 개혁했으니, 통쾌하게 근절했다고 할 만하였다.그러나 그가 그 폐단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다가 쓴 것이 애석하다.
비록 그러하나, 만약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위세가 아니라면 개화를 막고 완고를 보호하지도 못할 것이요, 뒷날에 또한 완고를 변해서 개화로 나아가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 박제경(朴齊絅),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1886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대원군은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성리학자들과 달랐다. 기존의 조선 정치가들과 다른 패도 정치가였다.
대원군이 추구했던 건 실리였고,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을 위해선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정파를 막론하고 당대 조선인들은 대원군의 과단성을 높이 평가했고, 대원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급진 개화파 박제경이나 개신 유학파 박은식도 다르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위세’와도 같은 대원군은 무자비한 철퇴를 가해서 무능하고 부패한 양반들을 숨죽이게 했고, 그 결과 대원군은 여러 실정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보호자로 여겨졌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를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정치적 관점이 반대편에 있던 개화파들에게도 그의 단호한 지도력을 희구했다.
임오군란에도 갑신정변에도, 동학 농민 운동에도, 기존 정치를 뒤바꾸길 원하는 세력은 늘 대원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원군에게 이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원군은 사상적 신념에서 서양 문물의 수용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권력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입장을 바꿀 수 있는 패도 정치가였다.
‘완고를 변해서 개화로 나아가는’ 건 대원군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대원군은 임오군란 직후와 갑오개혁 시기에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시세(時勢)에 따라 권력을 잡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생각하는 왕실의 존엄과 조선의 부강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원군은 즉시 이선이 청나라에서 싣고 온 식량을 한양에 무상으로 풀고, 완화군의 덕행을 칭송하게 했다.
“완화군 선은 그동안 청국에서 은인자중하며 힘을 모았다. 완화군이 조선 백성을 긍휼하기 위하여 돌아왔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만민은 완화군의 귀국을 함께 축하하라!”
급히 나눠 주느라 20만 한양 백성이 다 혜택을 받을 순 없지만, 이선의 귀국 선물로 이보다 더 확실하게 조야에 각인되는 건 없었다.
“아니, 이 쌀을 정말 그냥 주는 거요?”
“그렇다니까. 이는 국태공과 완화군 대감께서 특별히 하사하시는 것이오.”
“나라에서 뺏어가지 않고 나눠 주다니,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그려!”
“나라에서 무슨 경사라도 있다던가?”
“완화군 대감이 청국에서 돌아오셨다는군. 이 많은 쌀도 다 청국에서 가져온 거래.”
“완화군이 누구여?”
“예끼, 이런 무식한 치를 봤나. 임금님의 맏아들 계시지 않는가.”
“세자 말고 왕자가 또 있어?”
“있다마다. 왜, 운현궁에서 특별히 총애하던 맏아들 있지 않나. 국태공께서 늘 데리고 다니던.”
“아아, 그 인물 좋은 왕자!”
“맞아. 그동안 청국에 계셨다는군. 청국에서 큰 부를 얻었는데, 굶주리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 쌀을 가득 싣고 돌아오셨다는군.”
“세상에, 그런 좋은 분이 다 있나.”
“민씨놈들은 세자 결혼한답시고 나라 곳간 다 털었는데, 국태공과 완화군 대감은 백성들을 위해 오히려 사재를 풀었네. 정말 비교가 되는군.”
“이제 국태공께서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해 주실 거야. 암, 그렇고말고.”
대원군의 민생 안정 조치는 쌀만 나눠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민폐의 근원인 각종 진상 물품을 금하라고 호조와 선혜청에 분부하라.”
대원군은 신속히 서정 개혁 조치에 들어갔다.
“돈을 주조하는 일은 모두 철폐하라.”
조선 조정에서 재정 적자를 막기 위해 빈번하게 하는 게 화폐 주조였다. 이미 집권기에 당백전으로 물가 폭등과 재정 파탄의 쓴맛을 본 대원군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도고(都賈)는 민폐가 심하니 일체 혁파하라. 악질적인 자는 즉시 참하라!”
도고는 상품을 매점매석해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노리던 상행위로, 근래 민씨 척족과 결탁한 시전상인들이 쌀을 매점매석해 물가 폭등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대원군은 그중에서도 악질적인 자들을 체포해 처형하게 했다.
매점매석을 저지른 시전상인들이 처형당하니, 순식간에 물가가 안정되었다. 살인으로 살인적인 물가고를 잡은 셈이었다.
“무명잡세(無名雜稅) 또한 너무 많다. 원래 규정 외에 근래에 와서 잡다하게 생겨난 것들은 일체 통렬히 혁파하여, 백성들이 각기 그 생업에 편안할 수 있도록 하라!”
그야말로 과감한, 호랑이와 같은 위세였다.
척족과 결탁하여 온갖 특혜를 누려오던 기득권의 불평불만이 빤히 보였지만, 서슬 퍼런 ‘대원위분부’를 거역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일체의 서정 개혁 조치에 백성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백성들을 생각해 주는 건 역시 국태공밖에 없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조선에 대원군만 한 분이 없지.”
“암, 역시 세상은 바뀌고 볼 일이야! 우리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켜 탐관오리 놈들을 다 쳐 죽인 덕에 대원군이 집정하신 거 아닌가?”
“맞네, 맞아. 하하하!”
‘이제 민심이 지지하는 대원군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이 호랑이를 보호하고 다루는 건 앞으로의 내 몫이다. 지금은 질주할 때다.’
이선은 호랑이 등에 올라 거침없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민심을 반영하듯, 대원군과 완화군을 태운 교자가 나타나자 백성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국태공 천세!”
“완화군 천세!”
“인물이 아주 훤칠하시군.”
“이런 왕자님이 계시는데, 나라가 어찌 망하랴!”
이선은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돌아온 이상, 절대 망할 수 없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환호성에 내심 기쁘면서도,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꼈다.
‘민심은 천심이라. 지금은 민중이 대원군을 지지하니 권력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건 틀림없다. 조선은 명분이 중요한 성리학적 사회니, 실리 못지않게 명분을 확보해야 할 터.’
이선의 걱정거리는 또 있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외세의 개입 여부다. 청과 일본의 개입을 막기 위해 손은 써놨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이선은 자신이 보낸 밀서들이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마침내 한양으로 돌아온 이선은 임금을 알현하려 창덕궁으로 향했다.
“선이 돌아왔다고?”
이재면으로부터 완화군의 귀국 소식을 전해 들은 임금은,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기쁨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기쁨이요, 씁쓸함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대원군이 왕위를 교체할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었다.
여전히 모든 정령(政令)은 임금의 이름으로 반포되고 있었지만, 실권은 대원군에게 있었다. 임금은 사실상 도장 찍는 기계나 다름없었다.
임금은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폐위되리라고 여기진 않았다.
아무리 대원군이 무지막지하다지만, 한번 정해진 왕을 멋대로 교체할 순 없었다. 이는 사대부에 대한 선전포고요, 제후를 책봉한 황제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임금은 소낙비를 피해가듯 잠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전하, 완화군 입시옵니다.”
“들라 하라.”
이선은 편전에 들어선 후, 임금을 향해 절했다.
“신 이선, 삼가 주상 전하를 뵙사옵니다.”
3년 만의 재회에, 부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선은 먼저 대죄(待罪)했다.
“신 이선, 군부(君父)의 허락을 받지 않고 외람되이 외국으로 나갔으니, 신의 죄가 실로 큽니다. 성상의 처결을 바랄 뿐입니다.”
임금이 말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서 오라, 완화군.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랐구나.”
“전하께서도 무탈하셨는지요? 신의 불충과 불효가 큽니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지, 어찌 어린 네가 불충불효한 것이겠느냐?”
임금은 이선이 해외로 도피한 이유를 대략 알고 있었다. 중전이 완화군을 죽이려 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고, 대원군이 이재면을 통해 임금에게 전한 바 있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한 일이오나, 완화군 선이 사라진 데에는, 중궁전의…….”
“그 무슨 말입니까, 형님?”
“중궁전에서 마마를 앓은 환자의 옷을 완화궁에 보냈으나, 천행으로 완화군 대신에 노복이 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완화군은 왕실에 분란을 일으킬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피해 청국으로 향했습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어찌 형님께서 세간의 하찮은 소문을 믿고 전하십니까?”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는 완화군이 아버님께 전한 서찰에 적혀 있는 내용이옵니다.”
“……이 일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이니, 불문에 부치도록 합시다.”
임금은 일단 부정했지만, 완화군과 영보당에 대한 중전의 질시와 증오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일이 있을 법하다 싶었다.
하지만 중전이 입을 딱 봉하고 있고, 대원군에 맞서기 위해선 중전과 민씨의 힘이 필요했기에 임금은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신이 실로 큰 죄임을 알면서도 조선을 떠난 것은, 저의 존재로 인해 중궁전과 세자궁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흉흉한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신이 어찌 중궁전을 원망하겠나이까? 세자궁을 지극히 아끼시는 중궁전의 사랑을 어떤 간신배가 곡해한 것이었겠지요. 신은 왕실과 전하의 성덕에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았나이다. 하여 스스로 물러나 떠난 것입니다.”
이선이 은유적으로 중전의 암살 시도를 고발하면서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니, 임금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실로 너의 말이 옳다. 대행왕비(大行王妃)는 그럴 이가 아니다. 어떤 간교한 자가 있어, 대행왕비의 뜻을 곡해하였으리라.”
중전은 공식적으로 ‘승하’하였으므로, 호칭도 대행왕비로 바뀐 상황이었다.
“민겸호는 운현궁을 증오하여 근래에도 역모 사건도 조작하려고 했나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 민겸호의 무리가 꾸민 일이 아닐까 싶사옵니다.”
“듣고 보니 그러하다. 민겸호는 간악한 자라, 어떤 흉계를 꾸몄을지도 모른다.”
죽은 민겸호에게 책임을 떠넘기긴 했으나, 사실상 임금이 완화군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고 공인한 셈이 되었다.
“신이 처벌을 무릅쓰고 성조로 돌아온 것은, 전하의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전하를 뵙사오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신의 죄를 벌하시옵소서!”
이선의 한바탕 연기에 곁에 있던 궁인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무슨 말인가? 너는 나의 아들이요, 왕실의 일원이다. 네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족하다. 이 일은 재론하지 말라.”
‘원래 죽여주시옵소서, 하면 절대 죽이지 못하는 법이지.’
임금의 ‘사면’을 받은 이선은 고개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신이 돌아온 것은 전하의 치세에 보탬이 되기 위함이옵니다.”
“네가 배를 곯는 백성들을 위해 청국에서 들여온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들었다. 기특한 일이다.”
“이는 작은 일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청국에 나아가 넓은 세상을 보니, 서양의 무리가 이미 대국을 범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조선도 이 위기를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옵니다.”
“이는 과인 역시 걱정하는 바이다. 그렇기에 미국, 영국, 덕국과 조약을 맺게 한 것이다.”
“서양과의 수교는 전하의 탁월하신 성단이시옵니다. 하여 신은 전하께 바치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임금의 물음에 이선이 서한을 전달했다. 서한을 읽는 임금의 표정은 점차 놀라워졌다.
‘왕과의 알현은 여러모로 성공적이군.’
임금을 알현하고 나오는데, 대행왕비의 곡을 하라는 대원군의 권유가 있었다.
대원군의 권유는 그야말로 악어의 눈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선은 그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대행왕비의 영전에 곡을 하라는 할아버님의 명은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의외의 말에 대원군이 황당해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아무리 중전에 대한 원망이 깊다 하여도 그럼 안 된다. 중전은 네게도 어머니가 되니, 마땅히 예를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이선의 답은 전혀 달랐다.
“중전의 옥체를 찾지 못했는데, 어찌 장례를 치른단 말입니까? 그 어떤 자가 승하했다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는 전반적인 조정 신료와 사대부의 여론이기도 했다.
국장 절차를 강행하려는 대원군의 명에, 보수파 신료들조차 반발했다.
시원임대신과 승정원, 조정 신료들은 중전의 유해를 찾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격렬히 저항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행왕비의 유해는 찾을 수가 없다.”
대원군도 중전이 살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례를 강행해서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중전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장례를 치를 수 없지요.”
“그럼 뭐 어쩌자는 것이냐? 다시 모셔서 중궁전에 앉히잔 말이냐?”
대원군이 벌컥 화를 내는데, 이선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진정하십시오. 조정 신료와 사대부의 여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취하셔야지요. 중전의 죄악은 전례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 죄악을 낱낱이 공개해, 공론을 거쳐 폐서인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