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71
– 252화에 계속 –
2부 252화 페트로그라드 전투
페트로그라드 방어는 한국군의 사명이 되었다.
군부 일각에서는 놀라운 기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에 맞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는 러시아군과 함께 페트로그라드를 지키는 게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원수부는 항전을 명령했다. 먼 타국에서의 전쟁이지만, 실질적인 국익의 문제였다.
「페트로그라드 함락은 곧 러시아의 패전과 동부전선 종식을 의미한다. 그리되면 국군의 러시아 파병은 의미가 퇴색된다. 서부전선의 총공세 이전까지만 버텨 내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라. 국군의 동부전선 승리는 독일의 패망 이후, 국제질서의 새로운 정립을 결정할 강화회의에서 중대한 명분이 될 것이다. 대한국군의 분투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다!」
독일 패망을 예상하고 있는 이선으로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노리는 게 목표였다. 한국군의 존재로 러시아의 동부전선 탈락을 막아 낸다면, 연합국이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명, 정부와 원수부의 명령은 모두 확고하오. 이 전쟁을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남의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대한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예! 사령관 각하!”
대한제국군 러시아 파병군의 규모는 2개 근위사단, 4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1개 해병여단 총 11만여 명으로, 국군 상비 병력의 절반에 달했다.
작전이 100만 단위로 전개되는 세계대전의 규모에 비하면 적은 병력이었지만, 지금의 러시아처럼 병사 하나가 중요한 시기에는 큰 전력임에 틀림없었다.
“북서전선군 외에도, 한국군, 미군, 체코군단이 페트로그라드 방위 작전에 합류할 예정입니다.”
러시아 주둔 연합군이 모두 페트로그라드 주위로 몰려드는 이유는, 물론 수도의 중요성도 있지만, 서방 연합국과 소통할 수 있는 해상보급로인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에서 그나마 가깝기 때문이었다.
“좋아.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연락이 없나?”
“서부전선에서 최대한 빨리 공세를 해서 독일군의 주의를 돌리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빌어먹을, 매번 그래 봐야 진격이 막혀 도움도 안 되지 않았나. 병력과 무기를 보내 달란 말이야!”
러시아의 거듭된 요청에 영국과 프랑스도 응답했다.
총력전으로 서부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프랑스는 지상군을 파병할 여유가 없지만, 대신 러시아 파병군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제정 시절에 러시아가 프랑스에 파병한 병력은 2개 사단 규모였고, 이들은 프랑스제 무기로 무장하여 잘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도 기꺼이 조국 방위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영국군은 수송선과 해군호위함대, 보병 1개 사단을 파병하기로 답을 보냈다.
미군도 서부전선에 보낸 1개 연대를 차출하여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여기에 서방 연합국은 자금, 무기, 식량을 추가로 더 지원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최고 우방인 프랑스는 ‘비밀무기’도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고맙기는 한데,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로 몰려오기 전까지 도착할지나 의문이군.”
발트해가 독일 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황이라, 연합국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돌아 바렌츠해와 백해를 지나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에 병력과 보급품을 전달했다.
그에 비하면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확연히 빨랐다.
“최대한 지연전에 들어간다. 독일군의 진격로로 예상되는 나르바-페트로그라드 철도를 파괴하라.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선 뭐든 해도 좋다! 필요하다면 영토를 얼마든 적의 미끼로 내줘라!”
스타프카는 지연전을 명령했다. 공간을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귀중한 시간을 벌어 볼 생각이었다.
“이거 참, 지난 3년간의 고생이 뭐인가 싶을 정도로 우스운 전쟁이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독일군 동부전선 사령부는 하루가 다르게 동쪽으로 진격해 나가는 군대를 보고 만족감을 표명했다.
독일군은 북부, 중부, 남부에서 모두 진격을 계속해나갔다. 지도에서 독일군의 색으로 표시되는 영역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독일군의 새로운 ‘돌격대(Sturmtruppen)’는 전선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미 지리멸렬한 상태였던 러시아군은 막강한 포격 이후 이어지는 돌격대의 전진에 혼비백산하며 퇴각했다.
“특히 남부군의 성과가 대단하군.”
“팔켄하인 장군이 절치부심한 결과로 보입니다.”
“심지어 그 오스트리아군과 터키군조차 이기고 있으니.”
팔켄하인 대장이 지휘하는 독일 남부군은 공세 개시 2주 만에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드네프르 강을 넘어 동부 우크라이나까지 공세를 이어 나갔다.
공세에 반대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오데사를 점령하고, 크림반도로 진격했다.
때를 맞춰 오스만군도 캅카스 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목표는 유전이 있는 바쿠였다.
그야말로 남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의 일방적인 승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승전보입니다! 예카테리노슬라프가 함락됐습니다!”
“오오! 희소식이군!”
“드니프로 강의 요충지를 점령했으니, 돈바스와 하리코프로 가는 길이 열리겠군.”
교통의 요지인 예카테리노슬라프(드니프로)의 점령은 독일군의 진격로를 활짝 열게 해주었다.
5월 17일, 하리코프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됐다. 10일 후에는 치열한 전투 끝에 유조프카(도네츠크)가 함락됐다.
한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대파했던 러시아 남서전선군은 완전히 붕괴했다.
우크라이나의 최대 석탄 산지이자 중공업지대인 돈바스 분지의 함락은 독일군에게 개가를 울리기에 충분했다.
“승리! 개전 이래 최대의 성과!”
“좋다! 목표대로 3개월 이내에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 내고,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겠군.”
5월 말, 공세 개시 10주 만에 남부군은 목표를 달성했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전역(全域)이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우크라이나 라다(자치정부)는 러시아 정부의 무능함을 원망하며 지하로 숨어들었다.
독일이 세운 우크라이나 친독 괴뢰정권은 ‘독립조약’을 체결하고, 밀 100만 톤의 ‘수출’에 동의했다.
이로써 우크라이나 전역(戰域)은 독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빨갱이 놈들을 굶겨 죽일 것이다.”
우크라이나 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된 노장 아이히호른(Hermann von Eichhorn) 원수는 가혹한 점령정책을 수행했다.
말이 좋아 ‘독립’과 ‘수출’이지, 실질적으로는 점령과 수탈이었다.
우크라이나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반감은 커져 갔고, 반독 게릴라전을 선동하는 러시아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라다 선전요원들의 목소리가 확산됐다.
“우리의 조국, 우리의 고향, 우리의 토지, 우리의 가정을 지키자!”
무수한 희생을 낳았던 공세와 참호전에는 학을 떼며 거부하고, 독일군의 대공세에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던 러시아군 병사들도,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는 데에는 동참했다.
러시아 신정부의 토지개혁 선언은 농민이 절대다수인 러시아군 병사들에게 희망을 안겨 줬고, 그들은 자신의 몫이 될 토지를 독일과 그 부역자들에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독일 침략자를 몰아내자!”
사회민주노동당의 선동을 받은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게릴라전과 테러라면 전문가의 영역인 사회혁명당은 독일군을 계속 괴롭혔다.
패퇴한 병사와 분노한 농민은 파르티잔이 되었다. 무기를 들고 독일군의 후방에서 교란을 이어 나갔다.
독일군은 반대파와 파르티잔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저항의 불길은 꺾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분명 목표대로 우크라이나를 점령했지만, 계획한 대로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돌릴 수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자원 공출과 수송, 치안유지에 공세 못지않은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독일군의 귀중한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 * *
남부군과 중부군이 표면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동안, 에스토니아 점령 이후 북부군의 공세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북부군은 뭘 하고 있는 건가? 남부군이 750km를 전진하는 동안, 북부군은 왜 아직도 페트로그라드에 접근하지 못하는 건가?”
총사령부의 질책을 받은 북부군 참모장 막시밀리안 호프만(Maximilian Hoffmann) 소장은 억울했다.
“남부군처럼 오합지졸 군대만 상대하면 우리도 훨씬 쉽게 진격하지! 우리 앞에는 러시아군에서도 최고 정예인 부대, 그리고 연합군이 왔단 말이다!”
나르바와 프스코프 동쪽 선상에서, 러시아군의 저항은 전에 없이 강해졌다. 여기에 철도까지 끊어 버렸으니 복구하고 진격을 재개하는 데에만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다.
여기에 새로이 충원된 미군과 한국군, 체코군단의 합류는 방어 전략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애초에 페트로그라드에만 집중하게 하든가! 동시에 레발(탈린)과 겔싱포르스(헬싱키)를 모두 얻길 원한 건 총사령부가 아닌가!”
뿐만 아니라, 최고사령부는 북부군 병력 일부를 떼서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발트해 건너 핀란드에도 개입했다.
핀란드는 1월에 공화국을 선포하고, 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다. 핀란드 신정권은 독립 이후에도 러시아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에 돌입했다.
이에 반감을 느낀 핀란드 지주와 우익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연히 러시아가 핀란드 사회민주당 정부를 돕자, 독일이 개입했다.
카이저는 그 어떤 곳이라도 ‘빨갱이’들이 지배하는 정부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4월에 독일 군단병력이 핀란드에 진입하자, 신생 핀란드 정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독일은 가볍게 헬싱키를 제압하고, 핀란드에도 친독 괴뢰정권을 세웠다.
「독일은 러시아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국가들의 자결권을 존중하여 독립을 승인하고,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영구히 보호해 줄 것이다.」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독립’을 승인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발트연합(라트비아-에스토니아)·우크라이나·핀란드 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그들의 위에 독일군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고, 말로만 독립을 내세울 뿐인 강압적인 점령정책은 현지인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쫓기는 와중에도 북부군은 카이저와 총사령부의 요구로 이곳저곳에 개입을 해야 했고, 본래의 목표인 페트로그라드 공세는 5월 중순에야 재개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한 달 내로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한다!”
독일군은 페트로그라드로 향하는 통로인 얌부르그와 루가를 점령하고, 가치나와 크라스노예 셀로를 위협했다. 여기서부터 페트로그라드는 불과 5-60km 정도였다.
5월 말, 독일군이 페트로그라드에서 가까워지고, 비행기가 페트로그라드를 폭격하는 순간까지 오자, 러시아 정부는 부득이하게 모스크바로 수도를 임시 이전했다.
페트로그라드 함락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일군은 강력한 반격에 부딪히고 말았다.
독일군이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에 개입하여 괴뢰정권을 세우는 데 소비한 한 달이라는 시간은, 방어 측에 천금과도 같은 시간을 벌게 해 주었다.
“동지들! 혁명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자신감, 열정, 영웅적 행위를 결집시키는 장엄한 광경을 다시 한번 우리 앞에 펼치고 있습니다. 위험에 용감하게 맞선 도시, 결코 희생을 아끼지 않는 도시, 이 아름다운 붉은 페트로그라드는 영원히 혁명의 횃불로 기억될 것입니다!”
페트로그라드 방위의 책임을 진 혁명군사위원장 겸 북서부전선위원 트로츠키는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지지를 끌어모았다.
말로 두각을 드러내는 혁명가 중에서도 트로츠키는 최고의 연설가였다. 트로츠키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도를 방위하자! 전쟁에 꼭 필수적인 직장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방위군에 자원하라!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면 노동부대로 지원하여 참호를 파라! 겁쟁이, 비겁자에게는 도망칠 곳은 없다!”
트로츠키는 말로만 떠들지 않았다. 채찍도 가차 없이 휘둘렀다. 강압적인 징병제가 재도입됐다. 사회주의자들의 반대에도 군대에서 사형제가 복원됐다. 지휘관과 전선위원에게는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다.
이는 모두 진작부터 러시아 장교단이 임시정부에 요구했던 사안인데, 막상 급진좌파인 트로츠키가 이를 실천하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해 줍니다. 페트로그라드 방어에 혁명의 운명과 내 운명도 모두 걸었습니다. 반드시 승리만 하십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모두 돕겠습니다.”
트로츠키는 총사령관 브루실로프의 전선위원으로서 할 수 있는 정치적 조치를 모두 집행해 주었다.
1917년 4월 혁명 이후로, 군대와 정치가 사이에 이토록 긍정적인 관계가 형성된 건 처음이었다.
“군대가 계속 증원되고, 연합군의 지원도 속속 들어오고 있다. 이제 충분히 수도를 방위할 수 있다.”
러시아군과 연합군은 북에서 남으로, 크론시타트-오라니엔바움(로모노소프)-크라스노예 셀로-가치나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크론시타트에는 러시아 발트함대, 오라니엔바움에 미군-영국군-체코군이, 크라스노예 셀로에는 한국군이, 가치나에는 러시아 북서전선군이 배치됐다.
방위군의 총병력은 약 35만이었다. 러시아군 15만, 한국군 10만 5천, 체코군 4만, 미군 3만, 영국군 1만 5천, 프랑스군 5천 등이었다.
페트로그라드 교외 남서쪽 크라스노예 셀로(Krasnoye Selo).
러시아어로 ‘붉은 마을’, 혹은 ‘아름다운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크라스노예 셀로는, 러시아 제국의 여름 군사수도였다.
차르와 고위 장성들은 매년 여름 이곳에서 대규모 기동훈련을 참관했고, 가장 많을 때는 12만 명이 동시에 훈련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군사단지가 형성됐다.
1914년 여름의 발칸위기에, 니콜라이 2세가 군사훈련을 참관하며 개전 여부를 고민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된 장소도 차르가 군사훈련을 참관하던 궁전이었다.
“친애하는 대한국군 장병 제군! 신군 창설 이래 어언 30여 년. 국군은 절차탁마하며 힘을 키웠고, 마침내 자주독립을 쟁취했다. 고토를 수복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했다. 이제 우리에게 중대한 도전의 순간이 왔다. 세계지배의 야욕을 지닌 독일 군국주의에 맞서 우방의 수도를 지켜 내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싸우는 길이다. 이 전투는 대한국과 세계의 운명을 가를 역사적인 전투가 될 것이다. 장병 제군의 용전분투를 기원한다!”
파병군 사령관 홍범도 정장이 황제 이선의 칙서를 대독하자, 일제히 만세가 터져 나왔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원수 폐하 만세!”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러시아군이 차르를 향해 만세를 외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태극기를 든 한국군이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대규모 훈련장이었던 이곳에 실전이 예고되어 있었다. 러시아제국 건국 이래 한 번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곳에서, 러시아군은 물론 한국군도 경험해지 못한 격렬한 전투가 예정되어 있었다.
“반드시 승리합시다. 군대, 아니 국가의 운명이 걸렸소.”
“어쩌면, 세계의 운명이겠지요.”
홍범도의 말을 이동휘가 받았다. 노백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뿐인 과장이 아니었다.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를, 페트로그라드 전투가 임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