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74
– 255화에 계속 –
2부 255화 대소동
“좋습니다. 이쪽을 향해 보세요. 찍습니다.”
“허허, 이거 참 멋쩍게.”
“자, 외칩시다!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연합군 종군기자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한국군을 사진에 담았다. 홍범도, 이동휘, 노백린 이하 한국군 사령부의 사진과, 일선에서 활약한 근위사단과 기동대의 사진 등이 신문에 나왔다.
「동부전선의 승리! 한국군의 저항, 페트로그라드 전투 승리의 기초가 되다!」
「한국의 기적! 누가 한국군이 독일군을 격파하리라고 예상했겠는가? 불과 35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 작은 나라에 군대라고 부를 만한 조직이 없었다. 한국 황제는 고든 장군을 군사고문관으로 초빙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신식 군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겨우 3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서방 언론은 ‘한국의 기적’이란 표현을 써가며 한국군을 극찬했다.
1906년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 당시 일본군에 보낸 찬사보다 더 강렬한 표현을 썼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일본이 러시아를 무찔렀다는 건 놀라운 일이긴 했지만, 서양의 관심이 덜한 극동에서의 전쟁을 중립국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세계적 운명이 걸린 세계대전이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싸운 전투였다. 관심과 주목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아무 것도 없었던 이 나라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고, 훈족의 야욕을 격퇴했다. 칭기즈칸 이래, 이렇게 유럽을 누비는 강력한 동양 군대가 또 있었던가? 700년 전 몽골 전사들이 러시아 초원을 누볐듯이, 이제는 한국 군인들이 그러고 있다.」
한국군의 분전은 페트로그라드 함락과 동부전선의 종식을 막아 냈고, 독일군의 대전략에 치명적인 실패도 안겨 주었다.
주목받지 않는 존재였던 한국군이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독일군도 예상 못했지만, 연합군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기적’이란 표현이 나올 만 했다.
연합국 언론은 한국군을 향해 ‘훈족(독일군의 멸칭)’을 격파한 동양의 군대라고 묘사했다.
몽골제국 이래 최초로 유럽에 영향을 미친 군대이자, 가장 강력한 동양의 군대로.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담긴 표현이었지만, 동양 국가에 보내는 찬탄이라 할 수 있었다.
* * *
광무 22년 7월, 대한제국.
“호외요! 호외! 구주파병군 대승!”
“대한국군, 최강의 강군 독일군을 격파!”
승전보가 한국에 전해졌다.
연합국 언론의 보도가 페트로그라드 전역 전체를 다뤘다면, 한국 언론의 보도는 다분히 한국군의 활약상에만 맞춰져 있었다.
원수부는 ‘광무 22년 홍도(크라스노예 셀로) 전투’라고 명명하고, 관보를 통해 승리 소식을 발표했다.
「충용무쌍한 우리 대한국군은, 광무 22년 6월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는 독일군에 맞서 용전분투하였다. …… 홍도 전선에서 보인 국군의 놀라운 분투의 결과, 연합군은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국군과 연합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니, 천하의 독일군도 패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분히 과장이 섞인 발표였지만, 전쟁 중인 어떤 나라간 전시 프로파간다가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었다.
대놓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한국 내에서도 ‘대체 저 머나먼 타국까지 대군을 파병해서 피를 흘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비판적 시각이 상당했다.
그러니 한국 정부와 군부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선전거리가 없었다.
승리를 이끈 홍범도 이하 지휘관들이 전쟁영웅으로 표상되었다.
“그러니까 국군이 독일군을 무찌르고 러시아를 구원했다, 이런 말이지?”
“과연 홍범도 장군이 천하명장일세! 홍도의 승리자 홍범도. 외우기도 쉽구만.”
“독일군이 천하제일 강군이라더니, 우리 국군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구만!”
“예끼, 고양이가 뭔가? 우리 국군은 호랑이지!”
“그래, 맞아! 호랑이지! 영어로 하면 뭐가 되나?”
“국군이 호랑이라, 아미타이거?”
“좋네, 아미타이거! 육군, 우리 육군 만세!”
한국의 여론도 열광했다. 관보의 전시 프로파간다에 이어 민간 언론도 호외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과 한국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외신 보도는 모조리 번역되어 신문에 실렸다.
한국군의 늠름한 모습을 담은 사진, 러시아 군인과 민간인들이 한국군을 향해 만세를 외치는 사진, 서방 언론의 찬사 등은 한국인들의 국가적 자존감을 채우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캬, 대한국 만세다! 주모! 오늘은 마음껏 취하려하니, 여기 있는 손님들 술은 다 내가 사겠소!”
“오오! 고맙소, 어르신!”
“내가 아니라 황제 폐하와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감사드리시오. 하하하!”
“원, 저 양반도 전쟁으로 돈 좀 번 모양이구만.”
한국에 축제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국민적 희생을 감내하며 총력전을 치르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거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전쟁을 치렀다.
오히려 유럽의 전쟁은 호황을 불러일으켰고, 생산과 수출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1916년경부터 시작된 호황은 1918년에 절정에 달해 있었으니, 한국인들은 호황에 이은 승리에 도취되어 버렸다.
평양 흥경궁, 원수부.
“사상자 숫자는?”
“대략 2만 5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전사자는?”
“정확한 집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7천여 명가량입니다.”
이선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전사자 명단이 확보되면, 전사자 유족에게 황실과 정부의 이름으로 조의를 표하고 조의금을 보내도록. 부상자에게도 상응하는 조처를 하고.”
“예, 폐하!”
전상자에 대한 보상으로 보훈연금이란 개념이 서양에서도 드물던 시절이었지만, 이선은 이번 기회에 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들은 마땅히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7천이라면, 이 지옥 같은 전쟁에서 최소한의 희생이다.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대가를 얻어 낸다.’
이선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가는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국익이라는 가치를 상위에 올릴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국가의 명령을 받아 싸우다 죽었으니 당연히 보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정부 입장에서 병사의 죽음은 숫자상의 통계에 불과했다.
연합국이든 동맹국이든 수십, 수백만의 전사를 감내해 가며 승전을 향해 미친 듯이 싸웠다.
안보와 국익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병사와 국민의 눈에 보이는 희생보다 훨씬 중시되는 시대였다.
이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추구할지언정, 희생 자체를 꺼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선은 제국주의 시대를 충실히 살아가는 정치가였다.
* * *
국익을 위해서라면 병사와 국민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나라, 동양에서 그런 나라라면 단연코 일본제국이었다.
이미 러일전쟁을 통해 드러냈듯이, 일본은 수십만을 희생시킨 전력(前歷)이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국민은 세계대전에 휘말려 피를 흘리는 걸 꺼렸다. 지상군 파병은 1914년 산동 전역이 마지막이었다.
“결국 한국이 모든 공을 다 누리게 됐군! 내가 이래서 진작 파병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총리 고토 신페이는 페트로그라드 전투 소식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러시아와 서방 언론이 한국에 찬사를 보내고, 한국이 전후 국제질서에서 과실을 따 먹을 걸 생각하니 더욱 배알이 꼴렸다.
영국은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일본에 거듭 파병 요청을 했고, 미국이 참전한 이후에는 미국의 요청도 들어왔다.
고토는 적극적인 파병론자였으나,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제국의회는 정부의 파병안을 거듭 부결했다.
“일로전쟁의 상흔을 채 벗어나지 못했소. 국민은 머나먼 타국의 전쟁에서 피를 흘리길 원치 않습니다.”
제국의회를 대표하는 입헌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는 파병 반대론을 이끌었다. 제1당 입헌정우회와 보통선거를 주장하는 제3당 입헌국민당이 여당을 자처했지만, 정작 파병에는 반대했다. 오히려 오쿠마 내각의 후신으로 야당인 제2당 헌정회가 파병을 찬성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파벌싸움이지. 하라와 이누카이가 나를 총리에서 끌어내리고 싶은 거 아닌가.”
입헌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와 입헌국민당 총재 이누카이 쓰요시가 ‘정당정치 책임내각제 실현’을 목표로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열풍은 보통선거권 요구로 확대되었고, 이누카이는 보통선거권을 주장했다.
하라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지만, 영국식 정당정치 책임내각제는 구현하겠다고 약조했다. 헌정회를 이끄는 전 외무대신 가토 다키아키도 여기에는 동조했다.
그야말로 정파 간의 복잡한 이합집산이었다.
“이미 제국해군이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맹활약하고 있는데, 굳이 육군을 파병하여 피를 흘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질적인 육해군대립도 걸림돌이었다.
해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함대를 유럽으로 파견했다. 영국해군의 북해 봉쇄에 동참하고, 지중해 작전에 참여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 개시 후에는 대잠(對潛) 작전에서도 성과를 보였다. 해군은 충분히 제몫을 다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의 해주육종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육군은 파병에 매달렸다.
“연합국이 저토록 많은 희생을 내는데, 피를 흘리지 않으면 서방에서 일본의 공로를 인정해 주겠소? 전후의 이익을 생각하면 무조건 파병해야 합니다!”
고토는 러일전쟁의 실패를 이끈 육군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육군이 부르짖는 파병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해군, 정당, 여론이 모두 반대하니 실현을 하지 못할 뿐이었다.
“한국이 거둔 성과를 보았지요? 독일이 패망하는 데 기여를 해야 전후에 보답을 받지. 지금 이 순간에도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파병을 원하고 있소. 더 늦기 전에 파병을 해야 하오!”
고토 내각은 미국과 영국의 파병 요청을 명분으로 삼아, 정당들을 포섭해 파병안을 가결시켰다. 병력은 8만 명 규모, 한국군처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러시아로 파병할 계획이었다.
그야말로 뒷북이었지만, 연합국의 승전에 기여해서 생색을 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18년 중국에서는, 세계대전 참전을 놓고 시작된 분열이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북벌하여 간적 단기서를 치고, 남경을 수복하여 민주와 민권을 회복한다!”
“끊임없이 중국에 분열과 혼란만을 만드는 손문과 국민당을 해외로 추방하고, 중국을 재통일하자!”
호법정부와 북양정부는 사천과 호남 전역에서 충돌하기 시작했고, 분열의 원인이 된 대독 선전포고는 아무래도 상관없게 된 일이었다.
병력 대신에 단기서는 노동자 30만 명을 프랑스와 러시아에 보내 후방 인력으로 쓸 것을 약속했고, 연합국은 단기서가 원하는 대로 차관을 제공해 줬다. 특히 일본이 차관 제공에 적극적이었다.
“손문과 국민당은 민족주의 정서가 너무 강하다. 이들이 중국의 권력을 잡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은 순순히 복건이 일본의 세력권이라고 인정한 단기서가 손문보다 더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기서의 속내는 달랐다.
‘먼저 중국을 재통일하고, 그 다음에 옛 청국의 강역을 수복한다. 그리 되면 러시아나 한국과의 충돌은 필연적일 터. 일본과 손을 잡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다.’
프로이센을 지향하는 군국주의자 단기서의 야망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본이 단기서 정권을 지원하는 건, 제국주의 야욕 못지않은 현실적 문제도 있었다.
바로 쌀, 동양인의 주식인 쌀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 승전 이후 일본의 공업화는 본격적으로 발전에 들어갔다.
1918년에 이르면 공업 생산액이 농업 생산액을 앞지르고, 중화학공업의 비율이 30%에 이르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농촌의 인구는 도시로 유출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쌀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공업 발전은 노동자의 저임금으로 유지됐고, 이들의 불만을 막으려면 미곡가를 저가로 유지해야 했다.
일본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생산량 증대에 골몰했다. 식민지 대만에 쌀 생산량을 늘리고, 적극적으로 수입을 했다. 특히 한국은 일본의 주된 쌀 수입처였다.
“아니, 갑자기 수출량을 이렇게 줄이면 어떡합니까?”
“올해 생산량은 국내 수요를 감당하기도 힘듭니다. 정부에서 모두 수매(收買)를 해 둔 상황입니다.”
1910년대 이후 한국의 인구 증가와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쌀의 대일 수출량이 급감했다.
일본의 수출 요청에도 한국은 단호했다. 1916년 이후 전시 호황을 맞이하여 도시 노동자의 인구가 급증했다. 한국 역시 일본과 같은 이유로 도시에 저가로 쌀을 공급해야 했다.
원 역사라면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는 길을 택하겠지만, 변화한 역사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일본은 중국으로 눈을 돌려야 했다. 일본 정부는 중국산 쌀의 대량수입에 나섰다.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복건과 절강 일대에서는 일본으로 향하는 쌀이 매년 증가했다.
부패한 현지 군벌과 관료, 지주와 상인들은 돈을 벌었지만, 빈농들은 일본을 저주했다.
이런 식으로 1918년 상반기까지는 미곡가가 평시를 유지하고 있었다.
“뭐야, 쌀 1되에 30전 하던 게 왜 지금은 60전이오?”
“사재기요, 사재기. 상인들이 죄다 매점매석하고 있소.”
당시 일본은 전시 호황으로 떼돈을 버는 벼락부자들, ‘나리킨(成金)’의 전성기였다. 이 신흥부자들은 거침없이 돈을 썼다. 호황이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은 넘치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는데, 실질임금은 증가하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의 징조였다.
여기에 유럽 파병이 가결되자, 자본가와 유통업자들이 결탁하여 전쟁특수를 노리고 매점매석을 가속화하는 상황을 발생시켰다.
“쌀 폭등의 원인이 부자놈들의 사재기라고?”
“빌어먹을 놈들, 그놈들은 이익을 남길 목적일지 몰라도 우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인데!”
“어떤 졸부 놈은 요정(料亭)에서 신발을 찾는다고, 100엔 지폐를 불쏘시개로 썼다는구만. 그보다 많은 돈을 게이샤들에게 돈을 꽂아 주고.”
“죽일 놈들. 100엔이면 쌀값으로 얼마야?”
급격히 팽창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를 낳았고, 일본처럼 저임금으로 유지되는 나라는 더욱 심했다.
이미 노동자와 농민의 반감이 크게 이른 상태였지만,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7월 초에 1되에 30전 하던 쌀값이, 러시아 파병안이 통과된 8월 1일에 40전으로 오르더니, 8월 중순이 되자 60전까지 치솟았다.
삶의 근원인 쌀값이 하루가 다르게 폭등하는 이유가 매점매석으로 밝혀지자,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
“여러분! 참는 데도 한계가 있소. 저 탐욕스러운 정상배(政商輩) 무리는 국민을 사람 취급도 안하는 거요!”
“저 러시아에서도 빵이 도시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났고, 황제가 쫓겨났소!”
“쌀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을 죽입시다!”
“와아아아아!”
8월 15일, 나고야에 수만의 군중이 몰려들어 항의시위를 열었다.
시위는 점차 폭동으로 격화되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미곡상과 유통 회사를 불태우고, 심지어 파출소를 향해 돌을 던졌다.
폭동은 단시간 내로 교토와 오사카, 도쿄까지 번졌다. 도시를 넘어 농촌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른바 ‘쌀 소동’은 일본 전역을 뒤흔드는 대소동으로 번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