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79
– 260화에 계속 –
2부 260화 제국의 시대, 종결
1918년 11월, 러시아 이르쿠츠크.
이안은 생전 처음 보는 타이가 숲과 바이칼 호수의 광대한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잊지 말자. 나는 여행을 온 게 아니라 부황이 명하신 임무를 수행하러 온 거다.’
지금까지는 순탄한 여정이었다. 부황의 말처럼, 어려운 일은 이회영과 제국익문사 요원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했다. 이들 일행은 이르쿠츠크 주둔 대한제국군을 관리하는 외교관 일행으로 위장했다. 페트로그라드 전투 승리로 한국의 위상이 크게 올라간 상황이었으므로, 러시아인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한국 동지들! 페트로그라드의 전우들이여!”
“환대 고맙습니다.”
차르 일가가 거주하는 볼콘스키 저택은 엄중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
1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만 이르쿠츠크 주둔 한국군 경비대가 파견되어 러시아 경비대와 교체했다. 요원들은 이때를 노려 저택에 들어섰다.
11월 10일 일요일이었다.
“근래 경비가 굉장히 엄격해졌더군요. 탈출을 막으려는 목적입니까?”
“명목상 이유는 암살을 막기 위함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이 황제 일가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전설적인 테러리스트인 사빈코프가 차르의 암살을 노리고 동쪽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연루되어 사회혁명당에서 제명당했지만, 신정부가 처치 곤란해하는 차르를 암살하여 당의 신뢰를 되찾으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딱히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정 시절 차르의 숙부인 세르게이 대공을 비롯한 무수한 고관대작들을 암살한 사빈코프니만큼, 테러리스트의 본능을 되살려 테러를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사전에 통보한 대로, 오늘 일을 성사시킬 겁니다. 여러분은 그저 눈만 감고 있으면 됩니다.”
“예,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안과 이회영은 한국군 경비대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저택에 들어섰다. 사실상 러시아 당국이 탈출을 묵인한 만큼, 일은 어렵지 않을 예정이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폐하, 저희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왔습니다. 망명을 준비했사오니 어서 떠날 준비를 하시지요.”
“오, 역시 내 친우 이선은 우리를 잊지 않고 있었군!”
이회영이 목적을 밝히며 고개를 숙이자, 니콜라이는 반갑게 맞이했다.
“망명지는 어디요?”
“일단 청국령 하르빈을 거쳐 포트 아르투르로 모실 예정입니다. 옛 총독관저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차후에 한국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포트 아르투르(뤼순)란 지명을 듣자, 니콜라이는 문득 옛일이 떠올랐다. 한때 러시아가 차지하여 건설했던 요동반도의 항구이자, 러일전쟁의 개전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곳.
‘돌이켜보면 포트 아르투르 점령에서부터 위기가 시작된 것인가.’
러일전쟁의 주전장이었다가, 종전 이후 청국에 반환되었다. 지금은 한국이 청국과 조약을 맺어 ‘임시로 군사적 사용’을 하는 중이었다.
“그대는 러시아 사람인가?”
니콜라이는 이안을 보고 한국 정보부 러시아 현지요원이려니 생각했다. 극동 일대에는 러시아인과 퉁구스계 현지 원주민의 혼혈이 많았다.
“황제 폐하의 차남인 정친왕 전하이십니다.”
“이안입니다.”
니콜라이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과 폴란드 여인의 자식이라는 걸 깨닫고는, 더 묻지 않았다.
“애들아. 빨리 짐을 싸라.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어디로 가나요, 아버지?”
“포트 아르투르로. 내 친구인 한국 황제가 우리에게 망명지를 알선해 줬다.”
“와아!”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네 공주는 기뻐하며 즉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이르쿠츠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언제 테러를 당하거나 재판에 끌려 나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존재했다. 이제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전 황태자 알렉세이는 자리에 앉아 모처럼 활기를 찾은 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들의 건강이 썩 좋지 못하오. 병이 악화되어 잘 걷지도 못하니. 각별히 신경 써 주시오.”
“예, 물론입니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알렉세이가 가장 걱정이었다. 혈우병 환자는 대개 성인이 되기 이전에 죽었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침 신문을 읽던 중이었소. 저택에 고립되어 있으니 바깥세상 돌아가는 걸 파악하려면 신문밖에 없는데, 당국에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신문만 주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항복에 이어 독일에서도 인민의 봉기로 왕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게 사실이오?”
니콜라이는 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인 를 들고 있었다. 프라우다는 ‘진리, 진실’이란 의미였지만, 니콜라이는 진실이라 믿지 않았다.
“10월 15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연합국에 정전을 요청하고 항복한 건 맞습니다. 정보가 극도로 혼선입니다만, 불확실하나마 근래 며칠 동안 독일 전역에 혁명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베를린도 혁명세력에 넘어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미 어제 11월 9일에 베를린에 공화국이 선포되고, 오늘 10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머나먼 이르쿠츠크까진 아직 정보가 닿지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 전쟁은 끝난 건가?”
“며칠 내로 끝날 것 같습니다.”
니콜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기뻐했다.
“그래, 독일이 전쟁에서 졌단 말이군! 그 말은 곧 러시아가 이겼다는 말이겠지?”
“예,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래, 그러면 된 거야. 비록 내가 승리의 지도자가 되진 못했지만, 러시아가 승리한 것만으로 만족하오.”
어찌 됐든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만큼은 확실한 니콜라이에게 일단 러시아가 승리했다는 게 중요했다.
“그럼 빌헬름과 프란츠 페르디난트도 곧 내 신세가 되겠군.”
니콜라이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대전쟁은 유럽의 오랜 왕조와 제국을 모두 무너트리고 있었다.
유서 깊은 왕조를 대신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유럽이라니, 전쟁이 만들어 낸 역설이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이는 전쟁을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음, 나도 준비할 게 있으니 잠시 서재에 들어가겠소.”
“예, 폐하. 준비가 끝나면 알려 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주들이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버지, 여행가방 다 준비했어요.”
“그래, 그럼 떠날 준비를 하자.”
알렉산드라,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는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니콜라이는 여전히 실내복 차림이었다.
“아버지, 옷 안 갈아입으세요?”
“음……. 얘들아, 잘 들어라. 너희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떠나라. 나는 러시아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뜻밖의 말에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어째서요, 아버지!”
“지난 1년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망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찌 선택할지를. 결론은 내려졌다. 내겐 아직 책무가 남아 있다. 러시아를 떠날 순 없다.”
“안 돼요, 아버지! 함께 가야 해요. 가지 않으면 돌아가실지도 몰라요!”
“그래요, 니키! 저 무지막지한 노동자들이 당신을 재판에 세우면 어쩌려고 그래요? 러시아를 떠나야 해요!”
니콜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표트르 대제의 후예이자, 전 러시아의 황제였소. 즉위식에서 러시아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바이니, 이렇게 러시아를 버리고 도망칠 순 없소.”
“니키, 저들은 루이 16세처럼 군주였단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을 처벌하려고 들 거라고요!”
“저들이 재판을 원하면 하라지. 나는 재판정에서 로마노프 왕조와 나의 명예를 지킬 거요.”
니콜라이는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무능하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 몰락을 자초했을지언정, 니콜라이는 러시아에 대한 막중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러시아를 옛 모습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그 의무감이 니콜라이를 몰락시킨 것이었다.
“만약 제정이 존속했고 미하일이 황제 자리에 있다면 나는 떠나는 게 맞소. 하지만 제국은 망했소. 그러니 더욱 떠날 수 없게 됐소. 내가 떠나면 미하일에게 책임을 물릴지도 모르잖소. 겨우 황위에 몇 달 앉아 있던 미하일이 정치적 책임을 질 순 없소.”
작년에는 망명을 타진했던 니콜라이였지만, 막상 망명의 기회가 주어지자 떠나길 거부했다.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그는 가족이 아닌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에 책무를 다하는 길을 택했다.
‘비록 루이 16세는 처형당했지만, 20년 뒤에 부르봉 왕조는 복고되지 않았나.’
니콜라이는 아직도 왕정복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순교자’가 되면, 국내외적으로 제정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켜 여론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나도 남겠어요.”
“알릭스! 당신은 애들과 함께 떠나시오.”
“나 역시 전시에 섭정으로서 통치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부부는 일심동체 아닌가요?”
알렉산드라는 언제나 잘못된 조언으로 니콜라이의 통치가 무너지는 방향으로 이끌었지만, 남편에 대한 사랑만은 진심이었다. 남편을 사지에 홀로 놔두고 떠날 순 없었다.
“그럼 저희도 남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두고 도망갈 순 없어요!”
장녀 올가의 외침에 형제자매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인 대부분은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를 미워하고 증오했지만, 그들에게만은 소중한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아니, 너희들은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없다. 오히려 너희에겐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지. 도망가라는 게 아니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거라. 그러면 언젠가 돌아올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니콜라이는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친우의 아들이여, 내 자식들을 잘 부탁하네. 안전히 피신시켜 주게나.”
이안은 부황의 말을 떠올렸다.
「니콜라이가 망명을 거부하고 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굳이 강권하지 말고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라.」
‘부황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단 말인가.’
이안은 어머니를 통해 차르와 제정에 대해 반감을 물려받았으므로, 처음에는 꽤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최소한 니콜라이의 왕조에 대한 의무감, 가족에 대한 헌신만큼은 진심으로 보였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네. 잘 부탁하지.”
니콜라이는 이안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이안의 손에 편지가 쥐어졌다.
“자네 부친, 내 친우 이선에게 보내는 편지일세.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떠나길 거부하는 자식들을, 겨우 설득해 떠나보냈다.
“우리가 영원히 다시 못 만나진 않을 거다. 재회의 그 날까지, 하느님께서 너희를 보호해 주실 거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와 어머니도 보호해 주실 거예요!”
다섯 남매는 눈물을 흘리며 부모와 작별했다.
담담하게 보내려 했던 니콜라이도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어쩌면 지금이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보는 순간이리라.
1918년 11월.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다섯 남매는 이안의 손에 이끌려, 모국 러시아를 벗어나 망명길을 떠났다.
* * *
“그래, 그렇단 말인가…….”
이안은 다섯 남매를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한 후, 니콜라이의 편지를 들고 황성으로 복귀해 임무 완수를 보고했다.
“수고했다. 며칠 쉬고 다시 여순으로 가거라. 당분간 러시아 황제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일은 네게 맡기도록 하겠다.”
“예, 폐하.”
아들이 물러난 후, 이선은 니콜라이가 남긴 편지를 읽었다.
「친애하는 나의 벗이여. 모두가 나를 저버렸을 때, 그대만은 나를 잊지 않고 살 기회를 열어 주었네.
돌이켜 보면, 27년 전 일본에서 암살자의 칼을 피했을 때부터 쭉 그대의 도움을 받았던 것 같군. 아니, 37년 전 조부께서 암살을 피했을 때부터인가.
생각해 보니, 나와 태어난 해와 달까지 같은 그대를, 나는 부러워하고 또 시기했던 것 같네. 그대는 내가 가지지 못한 능력과 결단력을 갖고 있었지.
동시에, 나는 대제국을 물려받을 황손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작은 나라의 왕자인 그대에게 우월감을 느꼈다네. 결국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나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리라고.
하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오늘날 나는 시대를 읽지 못해 몰락한 군주가 되었지만, 가난하고 약했던 그대의 나라는 강국의 반열에 들어섰으니. 나는 역사에 나라를 망친 암군으로 기록되겠지만, 그대는 국위를 떨친 명군으로 기록되겠지. 나는 제2의 표트르 대제가 되길 원했으나, 그 칭호로 불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대겠지.
언제나 그대는 내게 도움을 주고자 조언했건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네. 내 열등감과 시기심 때문이었네. 이렇게 처지가 전락한 다음에야, 그대의 말이 다 옳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 위대한 제국이 나로 인해 망했으니, 죽어서도 선조를 뵐 낯이 없네. 나는 이제 내 목숨을 걸고 마지막 도박을 하려 하네. 제국을 되살릴 수 있다면 불쏘시개가 된들 어떻겠는가.
그대의 친우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일세. 부디 내 아이들은 잘 부탁하네. 이제 그대가 그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 보호해 주길 바라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그대의 승리를 염원하겠네!
그대의 친우, 니콜라이.」
이선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을 불쏘시개로 삼아 왕정복고의 가능성을 열겠다는 생각은 숭고해 보였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니콜라이는 ‘영광스럽게 죽을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망국의 군주에게 죽음은 도피처이자 안식처였다. 동양권에선 망국의 지도자가 자결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상 자살은 엄금되는 일이니, 정교회의 보호자였던 차르가 자살을 택할 수는 없었다. 즉, 죽음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결국 혁명과 몰락은 피할 수 없었나. 하지만 자식들만은 살릴 수 있었군. 벗이여, 내가 책임지고 그들을 보호하겠네.’
일가족이 모두 총살당했던 원 역사와 비교한다면, 니콜라이는 자식들만은 살릴 수 있었다.
군주로서는 부적격이었으나 가장으로서는 훌륭했던 니콜라이에게 이는 만족스러운 결말이리라.
이선은 술잔을 들어 서쪽을 향했다.
아무도 보는 이는 없었지만, 오랜 친우에게 보내는 우애의 인사였다.
“안이 아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차르의 자식들을 데리고 오는 임무를 수행한 거죠?”
“어찌 알았소?”
“신문에 보도됐더군요. 차르의 자식들이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고. 비슷한 시기에 안은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고. 왜 내겐 아무 말도 안 한 거죠?”
마르가리타는 힐난하듯이 이선을 쳐다보았다.
“국가의 일이오. 반드시 말해야 할 의무는 없소.”
“하여튼.”
마르가리타는 빙긋 웃었다.
“뭐, 나도 자식들을 둔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죄는 차르에게 있지 자식들에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들도 새로운 삶을 살 권리가 있지요. 그리고 안이 임무를 수행했다면,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었겠죠.”
“이해해 주니 고맙소.”
마르가리타는 더 따지지 않았다. 마침내 숙원이 이뤄졌으니, 그녀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폴란드 독립을 축하하오. 당신의 오랜 소원이 이뤄졌군.”
1918년 11월 10일, 폴란드는 123년간의 외세 지배를 끝내고 독립을 선포했다. 독일 점령군은 통치권을 이양하고 물러났다. 바르샤바 시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수십 년간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고마워요. 안과 라를 데리고, 독립된 내 조국 폴란드를 방문하고 싶어요.”
마르가리타는 마침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지금 당장은 전쟁의 여파로 혼란스러우니 무리겠지만, 내년에 추진해 봅시다.”
“정말이죠?”
“물론. 당신의 오랜 소원인데.”
마치 아이처럼 기뻐하는 마르가리타를 보면서, 이선은 빙긋 웃었다.
‘독립을 꿈꾸던 이에게 독립의 순간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제국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명백한 ‘역사의 진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구려.”
이선의 중얼거림에, 김옥균이 희미하게 웃었다.
“대한의 국위가 이보다 더 강성한 적이 없거늘, 폐하께서는 쉴 틈을 모르십니다.”
김옥균의 말처럼, 한국의 국력이 이토록 강해진 적이 없었다. 한국은 주요 승전국의 일원이었고, 이제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국이었다.
“대내외적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니까. 뭐, 동양은 중국과 일본만 적절히 단속하면 되오.”
“너무 심려 마시옵소서. 그들이 대한의 국익을 침해하려 들진 않을 겁니다.”
“음, 중국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처지고. 일본도 하라는 일본 정치가 중에선 그나마 낫지. 대화도 통하는 인물이고.”
‘일본에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확립이 된다면 폭주할 가능성은 작아지고.’
한국으로선 고토도 상대하기 나쁘지 않았지만, 하라가 좀 더 대화하기 편했다. 하라는 김옥균과도 오랜 친분이 있었고, 합리적인 인사였다.
‘일본은 반면교사야. 쌀소동과도 같은 상황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다.’
이선은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설 필요성을 느꼈다.
한국의 급격한 자본주의 발전은 호황을 누렸지만, 빈부격차도 발생시켰다. 경제적 불평등 문제, 정치적 참정권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역사의 진보는 결코 멈추지 않소. 끊임없이 전진할 뿐.”
이선이 하는 말은 꼭 김옥균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자신에게, 역사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11월 하순의 어느 날, 이선은 장남과 함께 경운궁을 산책했다. 이미 낙엽도 다 져서 풍경이 스산했지만, 이선은 문득 바람을 느꼈다.
“진아.”
“예, 아바마마.”
“바람이 느껴지는구나.”
“아, 날이 좀 춥지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선은 빙긋 웃었다.
“아니, 너도 느끼지 않느냐? 새로운 시대의 바람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아아.”
1918년은 세계사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세계의 운명을 가를 대전쟁이 끝났다.
러시아제국에 이어 독일제국이 무너졌고, 아직까진 버티고 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운명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제국의 시대, 군주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해였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가 떠오르고 있다. 대한도 거듭 변화해야지. 내 나이 어느덧 쉰하나, 은퇴가 가까워질 나이다. 내가 예순이 되면 진도 서른이니, 그때까지 탄탄대로를 만들어 놓자. 새로운 세대에게 대한국이라는 배의 키를 넘겨줄 때가 왔다.’
이선은 내년, 1919년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확신했다.
세계적으로 국민국가와 인민주권의 해가 떠오르고 있으니, 때는 바야흐로 국민의 시대였다.
– 2부 완결, 작가님의 후기가 이어집니다 –
2부 261화 2부 후기
안녕하세요. 태사령입니다.
2부 ‘대한, 제국의 시대’가 260화로 완결되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2부 연재를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1주년이 되는 날에 완결하게 되었군요. (의도한 건 아닙니다. 원래 계획은 250화 완결이었으므로)
본래 2부를 시작했을 당시, 세계대전을 끝으로 ‘제국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국민국가의 시대를 조망하면서 작품 전체를 완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까, 여기서 완결하는 건 글을 쓰는 작가도 읽는 독자도 아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진보는 이제 한창 진행 중이니까요.
그래서 고민 끝에 2부는 세계대전 종결로 끝내고, 3부를 새로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2부를 끝낸 건 제 현실적인 문제도 있는데, 제가 웹소설과 별개의 책 출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판 국가지원금을 받게 돼서, 반드시 정해진 기일내에 예산을 집행해야 합니다. (제가 7월에 몇 번 휴재했던 사유이기도 합니다)
기한이 12월 10일까지이므로 당분간은 출판에 집중해야할듯합니다.
그러므로 3부는 12월 중순 경에 시작하는 걸 목표로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2부 전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대한제국의 발전과 세계사의 변화라는 거시적인 측면에만 집중하다 보니, 주인공과 캐릭터들을 미시적으로 보는 측면이 너무 줄어들었습니다.
1부의 목표가 조선의 생존과 자주적인 근대화였다면, 2부는 생존을 넘어 열강의 반열에 서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이제 그 목표를 달성했으니, 3부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선과 그 가족들, 그리고 역사적 인물들이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기대해주세요.
부제는 아직 미정이지만, ‘대한, 국민의 시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 있으시면 얼마든지 댓글로 알려주세요.)
정말이지, 처음 집필할 때는 580화까지 연재할지 몰랐습니다. 2부 연재할 때만 해도 3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독자님들의 과분한 성원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독자 여러분의 덕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래저래 어려운 시기이지만, 제 글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현실을 벗어나 상상 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작가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태사령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