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80
2부 262화 외전. 왕자와 공주 (1)
광무 22년(1918) 12월, 대청국령 대련(다롄).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끊임없는 부침을 겪었던 곳이었다. 1895년 청조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할양받았으나, 곧 삼국간섭으로 내놓아야 했다. 3년 뒤에는 러시아가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 끄트머리를 조차 받아, ‘달니이’로 명명하고 항구개발과 동청철도 부설에 나섰다.
이에 분노한 일본이 러시아에 앙심을 품고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대련과 여순(뤼순) 요새 공방전에서 일본은 승리하긴 했으나 재앙과도 같은 인적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는 위신에 큰 타격을 입었다.
어찌 보면 양국 모두에게 상처뿐인 결말만 남겨 놓은 채, 대련과 여순은 다시 청국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배권은 한미일 3국이 공동출자한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만철)에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대련과 여순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대한제국이었다.
대전쟁 발발 이후 대한제국의 참전과 동부전선 파병은 한국의 발언권을 높였고, 청국 영토의 군사적 이용을 내세웠다. 한국은 연합국의 동의를 얻어, 청국을 압박해 대련과 여순의 ‘군사적 이용’을 얻어 냈다. 한국 육군이 대련에 주둔했고, 함대가 여순항에 기항했다.
엄밀히 말하면 종전으로 인해 ‘군사적 이용’은 종결되어야 했으나, 한청보호조약 체결은 한국군의 주둔 연장을 정당화했다.
즉, 대련과 여순은 명목상 청국령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한국의 통제를 받는 지역이었다.
“당분간 러시아 황태자 전하……, 아니지, 대공 전하와 여대공 전하들께서 머무실 숙소입니다.”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 청국으로 ‘망명’한 전 황태자 알렉세이, 여대공 올가·타티야나·마리야·아나스타샤는 이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와, 완전히 러시아풍 저택이네요.”
“당연하지요. 여긴 전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의 부인이 거주하던 사저였습니다.”
그들이 머물게 된 숙소는 공교롭게도, 러시아가 대련을 지배하던 시절의 총독 알렉세예프의 부인이 거주하던 사저였다. 다분히 러시아 귀족의 취향에 맞게 설계된 이 저택은, 러일전쟁 이후 만철의 소유가 되었다가 근래 한국 황실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선이 굳이 이 저택을 사들였던 건, 물론 러시아 황실의 망명에 대비해서였다.
망명지로 한국 국내를 생각했다가, 러시아 민주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하여 청국령 대련으로 결정했다. 러시아 정부는 황실의 망명을 묵인했을 뿐, 승인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모셔와야 했는데…….”
아나스타샤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황제의 자녀들이 망명한 이후,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들이 멋대로 거주지를 이탈하여 해외로 도주’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이르쿠츠크에 잔류한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부부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졌다.
이는 표면적인 발표였을 뿐, 내밀하게는 한국과 러시아 정부 간 외교적 거래의 산물이었다. 한국과 러시아는 다가오는 전후처리회의, 파리강화회의에서 아시아 문제에 대해 이해관계를 함께 하기로 논의 중이었다. 그 중요성에 비하면, 전 황제 자녀들의 탈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내밀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5남매는 자신들의 불확실한 망명자 신세와,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곳에 남은 부모님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친왕 전하, 우리 부모님은 괜찮으신가요? 국경을 넘은 이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유감스럽지만 저도 알지 못합니다.”
올가의 물음에, 그들의 망명과 정착을 도운 정친왕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소식이 들어오면 꼭 전해 주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이안은 빈말이라도, ‘별일 없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니거니와, 굳이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차르 부부의 근황은 정말로 알지 못했고, 설령 안다고 해도 상황을 사실대로 전해 줄 수 없었다.
‘스스로 망명을 거부하고 남겠다고 택한 결정은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압제자 차르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진심으로 니콜라이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 이진과 달리, 이안은 극히 냉소적이었다. 이진처럼 니콜라이와 교류한 일도 없었고, 폴란드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 마르가리타의 영향을 받은 이안에게 있어 러시아 차르는 곧 악의 화신이었다.
물론, 부황이 니콜라이와 오랜 벗이고, 그를 구하려고 한 부황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이안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정체성은 대한제국 황제의 아들이었다. 어머니의 영향보다 아버지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부황의 명은 이들을 잘 돌보라는 것이었으니까, 충실히 수행해야지.’
의도적으로 심리적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이안도 5남매의 운명에 동정심을 느꼈다.
대제국의 왕위계승자와 공주들로 태어나,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인민의 적’이 되어 버렸다. 이는 차르의 책임이었지만, 자식들에게도 굴레가 씌워졌다. 이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의 급전직하였다. 황궁에 유폐되고, 이르쿠츠크에 유배되었다가, 끝내는 부모를 두고 낯선 타국으로 망명을 가야 했다. 앞으로 어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안도 왕자였다. 그 또래인 왕자와 공주들이 겪는 가혹한 운명의 부침에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달니이……. 말 그대로 정말 먼 곳까지 왔네.”
타티야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련은 ‘달니이(Дальний)’의 음차였다. 러시아어로 ‘머나먼 곳’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러시아가 처음 이 도시를 건설했을 때 명명한 이름이었다.
머나먼 극동까지 오게 된 5남매에 있어 이보다 더 와닿는 이름이 없었다.
“자,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을 거야? 빨리 여장을 풀자. 여긴 이제 우리의 새 보금자리니까.”
남매 중에서도 유독 긍정적인 성격으로, 유배 생활에도 곧잘 적응했던 마리야가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마리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러시아 전 황태자와 여대공들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혈우병 환자인 알렉세이를 제외하고, 네 공주는 나름대로 활기를 되찾았다.
특히 활달한 성격의 마리야와 아나스타샤는 이안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어 대련까지 오는 망명 여정을 함께하면서, 말수는 적어도 이런저런 배려를 해 주던 이안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이다.
“친왕 전하, 도시를 산책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실 거죠?”
“안 됩니다.”
이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왜 안 되는 거죠? 우리가 여기에 유폐된 것도 아닌데?”
“안전을 위하여 당분간 저택을 벗어나지 말라는 명입니다. 산책은 정원에서도 할 수 있잖습니까.”
“그치만, 정원은 너무 작고 지루한걸요. 온 지 벌써 1주일이 넘었는데도 도시 구경도 못 하고 있잖아요.”
공주들의 호소에도, 이안은 냉정하게 거듭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새로운 명령이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아, 너무해요! 대체 누구의 명령인데요?”
“여러분의 보호자이신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그 말에 공주들도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여러 나라에서 망명을 거부당한 그들을 받아 준 건 대한제국 황제였다.
딱히 이안도 심술을 부리려고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저택 경비와 망명자 보호를 책임지고 있는 제국익문사에서 당분간 조용히 지낼 것을 권고했다.
“전하, 불확실한 정보이긴 합니다만, 러시아 망명자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 모의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러시아 망명자라면, 그들을 말하는 겁니까?”
제국익문사 독리 이회영이 직접 대련을 찾아 이안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정치적 의미도 사라진 사람들인데, 굳이 테러를 가하겠다는 자들은 대체 누굽니까?”
“테러리즘으로 유명한 사회혁명당 극단파들이지요. 이들은 황족 모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망명자는 법적인 처벌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테러로 심판하자고.”
러시아 사회혁명당(SR)은 현재 러시아 공화국의 연립여당이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민주의 테러조직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지도부는 온건해져 민주적 절차를 선호했지만, 일부 극단주의자는 여전히 무력으로 ‘인민의 적’을 처벌하길 원했다.
“그렇다면 저택의 경비를 더욱 엄중히 해야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위험은 피해야 하니까요.”
“예,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익문사가 철저히 경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하여 격렬한 반감을 느끼는 이진과 달리, 이안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반동적 차리즘을 대신하여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건 명백한 역사의 진보였다. 하지만, 지나친 폭력은 혁명의 대의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황제의 아들이면서도 주위와 동떨어진 혼혈아인 아웃사이더로서, 이안의 사고방식은 남달랐다. 그는 17세의 왕자라는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저 다섯 남매는 황태자도 공주도 아닌 일개 인민에 지나지 않는다.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단을 당해야 한다면, 그게 무슨 혁명이냐? 분풀이에 지나지 않지.’
이안은 반드시 5남매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망명자의 처지가 된 이들에게서 무언가 동질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안은 자신도 한국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일종의 정신적 망명자라고 느꼈다. 혼혈의 역사가 극히 드문 한국에서, 동서양이 섞인 이안의 독특한 외모는 자연스럽게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왕실에서 외국인 혼혈이 태어난 건, 저 멀리 고려 충선왕 때까지 거슬러가야 하는 일이었다. 충렬왕의 적자이자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왕장-이지르부카(충선왕)와 달리, 이안은 애매한 신분의 서자였다.
물론 황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고귀했기에 친왕 작위를 받기는 했지만, 일부 종친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꺼려 했다. 이안 역시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으므로, 서로 경멸감을 품고 쳐다보기 마련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남 험담밖에 없으면서, 태어나면서 거저 주어진 신분이 제 능력인 줄 아는 머저리들.’
취학연령이 되면서, 이안은 황실 종친과 칙임관 이상의 고위직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광무학교(光武學校)에 들어갔다. 이진과 똑같은 길이었다.
하지만 동급생들의 숭상을 받았던 황태자 이진과 달리, 이안은 고독했다. 다들 친왕인 이안을 겉으로는 존중하는 척했지만, 내심 따돌리고 있었다.
종친이든 칙임관 자제든 혼혈아를 보긴 처음이었고, 철없는 10대 소년들에게 ‘다름’은 곧 ‘틀림’처럼 보이는 시기였다.
어릴 적부터 눈치라고는 타고났던 이안이,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들과 어울릴 생각도 없었다. 홀로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독서를 하며 폭넓은 사고를 했다.
유전자가 타고난 것인지, 어릴 적부터 받은 교육이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이안의 학업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우수했다.
이진도 수석을 도맡아 했다지만, 황태자로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학업에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언제나 성적은 최우등이었다. 올해 학업을 마칠 때도 수석 졸업이었다.
‘친왕이라고 점수 막 퍼주는 거 아닌가?’
이안은 나이에 맞지 않게 퍽 냉소적이었으므로, 자신의 우수한 성적에 도취되기는커녕 ‘친왕 프리미엄’이라고 생각했다.
“친왕 전하께서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갖고 계십니다. 마치 5년 전의 황태자 전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실로 난형난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
어떤 눈치 없는 교수가 이안의 답안지에 감탄하여 이렇게 말했다가, 학장의 질책을 받고 시말서를 썼다는 소문이 돌았다. 형제라고는 해도, 황태자와 친왕은 동렬에 설 수 없는 신분이었다. 이안 역시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안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동급생들도 꺼렸고, 그도 꺼렸다. 이안의 고귀한 신분, 서구적인 빼어난 외모, 우수한 성적에 감탄하여 그 주위를 맴도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이안은 딱히 친분을 맺지 않았다. 벌써부터 파벌을 형성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딱히 친교를 맺음으로써 얻는 기쁨도 없다고 여겨서였다.
‘숙부들이 했던 대로 그대로 하면 되는 거겠지.’
황실에서 겉도는 이안을, 유독 좋게 봐주었던 이들이 바로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이영이었다.
“안이 내 조카인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구구히 뭘 더 따진단 말인가?”
이강은 서자로서 겉돌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안과 동질감을 느꼈다. 애초에 자유분방한 성격에다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이강으로선 종친들이 혼혈이라는 이유로 이안을 꺼리는 걸 경멸했다. 이강은 거리낌 없이 조카와 교류하며 아꼈다.
이영은 좀 더 조심스럽긴 했지만, 워낙 성품이 진중하고 선량한지라 이안에게 진심으로 동정심을 느꼈다. ‘왕위계승자의 태생적 경쟁자’인 처지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는, 이영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선과 이영은 나이 차도 많이 나고, 이선은 이영을 후계자로 염두에 둘지언정 경쟁자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어린 이안을 바라보는 어린 이진의 심리는 분명 본능적인 경쟁자였다. 이영은 그게 적잖게 우려가 되었다.
“조카님, 부디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이 헐뜯거나 이용하려 들려 한들, 조카님이 중도(中道)를 지킨다면 무탈할 것입니다.”
이영이 러시아로 떠나며 했던 말을 이안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자신도 이강처럼 아예 ‘미국물 먹고 자유분방한 파락호’처럼 처신하거나, 이영처럼 조심스럽게 처신하다가 해외로 떠나야 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안의 성격상 전자는 어울리지 않고, 결국 후자가 답이었다. 그리 생각되니 이안은 새삼 짜증이 났다.
‘혼혈아에 서자로 태어난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가 그래야 하지?’
이안은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왕위 같은 건 더더욱 관심도 없었다.
친구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대화를 나눌 이는 현명한 어머니와 귀여운 여동생이면 충분했다. 마르가리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라도 오라비를 잘 따랐다. 존경해마지 않는 부황도 그를 아꼈다.
대한제국의 혼혈왕자 이안은 고독을 즐겼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 여기로 와 봐요! 빨리요!”
‘이번엔 또 뭔데?’
러시아에서 온 망명자들, 번갈아 가며 자신을 불러대는 네 공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