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82
2부 264화 외전. 왕자와 공주 (3)
본의 아니게 두 소녀를 울리고 있는, 이안의 심경도 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올가에 이어 타티야나도 사건의 전말을 조심스럽게 이안에게 전해 주었다.
이안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마리야와 아나스타샤 두 자매가 자신을 놓고 싸우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부황의 명을 수행했을 뿐, 이성적인 호감을 주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열일곱 살 이안은 지금껏 이성에 대한 사랑이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이성에게 사랑받아 본 적도 없었다. 그가 아는 여인이라곤 어머니와 여동생이 다였다.
이럴 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가 읽었던 동서고금 유수의 책에도 안 나와 있었다. 하다못해 주위에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서양 문화에서는 연애가 자유롭다고 했던가? 왕실에서도 그런 건가? 뭐, 공주들 주위에 또래 남자라곤 나밖에 없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런데 이럴 땐 어떻게 처신해야 하지?’
이안이 고민이 있을 때 상담을 할 수 있는 건 어머니뿐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여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래, 맏누이가 딱 공주들하고 또래로구나.’
이안은 문득 누나 이희가 공주들과 동년배라는 걸 떠올렸다. 황태자 이진은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이희는 이복동생 이안을 퍽 아꼈으므로 이안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고민하던 이안은 황성을 향해 전보를 보냈다.
12월 13일, 성 안드레이 축일은 아나스타샤의 뜻대로 이뤄졌다. 여전히 망명자들의 외부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필요한 물품은 저택의 하인들이 대신 구해다 주었다. 공주들은 부랴부랴 축연 준비를 했다.
그렇게 간소하나마 명명일 축연이 열렸다.
“신의 은총에 의해, 전 러시아제국의 황태자인 나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는, 성 안드레이 축일을 맞이하여 로마노프 황실의 은인이자 벗인 대한제국 친왕 이안의 노고를 기리며, 사도 성 안드레이 제국훈장을 수여하는 바입니다.”
병색이 완연한 알렉세이였지만, 황태자의 위엄을 갖춘 태도로 말했다. ‘사도 성 안드레이 제국훈장’은 제정 러시아 최고 훈격의 훈장으로, 그야말로 최고 공훈자만이 받을 수 있는 훈장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이선이 수훈을 받은 바 있었다. 이선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에 이어 1891년 니콜라이 황태자의 암살을 막은 공로로, 성 안드레이 훈장을 수훈받았다.
차르는 정교회의 보호자였으므로 자동 수훈 대상자였다. 알렉세이는 아직 수훈을 받은 바가 없었으나, 이 훈장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즉, 니콜라이 2세가 패용했던 훈장이 이안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와아아!”
“만세!”
알렉세이가 훈장을 이안의 목과 가슴에 걸어 주었다. 그 순간 공주들이 옆에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훈장 수여식’의 아이디어도 아나스타샤에게서 나왔다. 혈우병과 망명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알렉세이에게 옛 추억을 떠올려 주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나스타샤의 생각대로, 알렉세이는 퍽 즐거워했다. 알렉세이는 더 이상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주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훈장 수여식에 특별한 감명을 받은 듯했다.
만약 남매들이 생각했던 대로 역사가 전개되었다면, 알렉세이는 미래의 왕위계승자로서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서 훈장을 공훈자에게 수훈했을 터였다. 하지만 ‘머나먼 곳(달니이)’ 대련에서, 관객도 없이, 그야말로 궁정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대공 전하.”
이안은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평시의 그라면 궁정 놀이에는 관심 없다고 냉소적으로 거부했겠지만, 병자인 알렉세이의 기운을 북돋게 하려는 누이들의 뜻임을 눈치챘다.
이안도 병약한 알렉세이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고, 서로를 아끼는 남매의 마음에도 감명을 받았기에 기꺼이 그 장단에 맞춰 주었다.
“자, 그럼 축연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오늘의 주빈은 친왕 전하니까, 마음껏 즐기도록 하세요.”
엄밀히 말하면 ‘손님’은 망명객인 그들이었지만, 마치 겨울궁전에 있는 것처럼 이안을 맞이했다. 식당에는 간소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 남매가 인지 부조화에 걸려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들이 몰락했으며, 다시는 겨울궁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가혹한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추억 속에 잠겨 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안은 그들의 추억으로 기꺼이 함께 들어갔다.
러시아식으로 만찬이 진행됐다. 마리야, 아나스타샤, 이안, 알렉세이는 아직 10대였으므로 이들은 차를 마시고, 올가와 타티야나만 가볍게 샴페인을 마셨다.
끊임없이 대화가 이뤄졌다. 음울한 기색을 지우려는 듯, 일부러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이안은 5남매와 좀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자매들이 이야기하고, 이안과 알렉세이는 듣는 쪽이었다. 이안이 말을 하지 않고 거의 듣기만 하자, 올가가 물었다.
“안 왕자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열일곱 살입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이안은 키도 크고 말이나 행동거지도 조숙해 보여서, 다들 스물은 되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세이가 병약하고 어려 보여서 더 비교가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오, 그럼 나랑 나이가 같네요! 나도 17세예요.”
아나스타샤가 공통점을 찾았다는 듯 좋아했다. 그러자 이안은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아, 동양식 나이로 열일곱이에요. 서양식 나이로는 16세.”
오히려 한 살이 더 줄어들자, 아나스타샤는 더욱 놀라워했다.
“그럼 내가 연상이라고? 믿기지 않는데요.”
“뭐, 동양에선 16세면 이미 관례를 치르고 성인 대접을 받아요. 그리고 서양 문화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렇죠.”
이안은 하루라도 빨리 성년이 되고 싶었으므로, 어린아이 취급받는 걸 안 좋아했다. 그런 점에서 아나스타샤도 같았다.
“그럼 생일은 언제예요?”
“광무 6년, 그러니까 1902년 6월 10일.”
“어디 보자, 그레고리력 6월 10일이면, 아, 타냐랑 생일이 같네요!”
“그렇네. 정확히 5년 차이네.”
“나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6월 18일이에요. 마리야는 26일이고. 우리 모두 6월생이네요. 생일을 함께 기념하면 좋겠다!”
아나스타샤는 새로운 공통점을 찾은 게 반갑다는 듯이 외쳤다. 타티야나와 마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6월에도 이곳에 있을 거죠?”
“글쎄요, 그건 부황의 명에 달려 있는지라.”
“꼭 있어야 해요. 아니면 우리를 한국으로 초대하든지. 약속하는 거예요.”
아나스타샤는 강권하듯 말했다. 6개월 후는커녕 당장 다음 달에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이안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와 다과를 마치고, 간이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오직 여섯 사람뿐이었지만, 자매들은 진지했다.
건강, 특히 다리가 좋지 못한 알렉세이는 앉아있었다. 자연히 이안이 네 자매와 번갈아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춰야 했다.
“저와 함께 추시겠어요, 전하?”
“예, 기꺼이.”
이안은 엘리트학교인 광무학교에서 사교용 서양식 춤을 배웠으므로, 왈츠도 곧잘 출 줄 알았다.
하지만 무도회 같은 건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고 여겨 왔기에, 실전 경험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제국 최고의 무도회 파트너였던 타티야나와 춤을 추게 되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타티야나는 175cm로 당대 여성으로선 상당히 큰 키였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이안이 살짝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무도회 실전 경험이 없는 이안으로선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올가랑 춤을 출 때는 어떻게든 무사히 넘겼지만, 타티야나와 춤을 추던 중 발을 밟자, 냉철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붉게 물들었다.
“미, 미안합니다. 무도회는 처음이라서.”
“에, 정말 처음이에요? 그렇다면 처음치고는 잘하고 있는 거예요.”
“그, 그런가요.”
이안은 빨리 이 자리를 탈출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아직 두 사람이 더 남아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전하.”
“아뇨, 저야말로.”
이안은 마리야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거듭 엇박자에 엉망진창이었다. 이안은 음악이 끝날 때까지 천만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리야에게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지적이고 믿음직한 오라비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3살 연하라는 걸 알게 되자 귀여운 면모를 찾게 되었다.
“실수해도 괜찮아요. 나도 춤 잘 못 추니까. 그냥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나 해요.”
“아, 그러시죠.”
아나스타샤는 원래 병약했다. 엄지발가락 관절이 휘는 무지외반증에 허리도 좋지 못해 자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아나스타샤가 자매 중에서 알렉세이의 심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병약함의 반동으로 말괄량이가 됐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다 못해 질시했다. 잔병치레도 없을 정도로 자매 중 가장 건강한 마리야는 아나스타샤의 질투 대상이었다.
“사실 난 무도회 별로 안 좋아했어요. 바보짓 같았거든요.”
“나도 그렇습니다.”
“동양에선 이런 바보짓 안 하죠?”
“서양인들과의 사교 목적이 아니면 안 하죠. 사실 동양인들은 무도회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잘됐다. 난 이제 앞으로 동양에서 살게 됐으니까.”
아나스타샤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러시아에는 영영 못 돌아가겠죠. 우린 인민의 적이니까.”
이안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빈말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새로운 러시아는 더 이상 그들을 원치 않았다.
“만주나 한국에서도 영원히 살 수는 없겠죠?”
“…….”
“아, 여기 남자랑 결혼하면 정착할 수 있으려나.”
이안이 놀란 듯 쳐다보자, 아나스타샤는 배시시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언니들도 아직 결혼 안 했는데 내가 무슨 결혼을.”
아나스타샤는 문득 마리야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 안드레아스 축일 전날 밤은,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 문화권에선 미혼의 여성에게 특별한 밤이었다. 관습에 따르면, 미혼 여성은 축일 전날 밤에 마법적 의식을 치른다.
침대 밑에 물 한 그릇을 놓고, 그 주위에 거울과 칼을 두고, 베개 밑에 좋아하는 남자의 물건을 두고, 흙 냄비에 아마 씨를 뿌린 다음, 아홉 번 무릎을 꿇었다 섰다가 하면서 성 안드레아스를 향해 기도한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미래의 구혼자를 알고 결속시킬 수 있으니, 그 증거로 그날 밤의 꿈에서 구혼자의 얼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화해한 마리야와 아나스타사는 몰래 이안의 장갑을 확보해 각자 한 짝씩 베개 밑에 두었다. 남사스럽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어때? 꿈에 나왔어?”
“응, 정말로 꿈에 나왔어!”
“그래? 잘됐네!”
“성 안드레이는 정말 영험하신 것 같아!”
마리야는 꿈에서 ‘그의 모습’이 나왔다고 좋아했다. 사실 ‘성인의 영험’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무의식에 반영되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마리야는 정말로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아나스타샤는 실망했다. 그녀의 꿈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성 안드레이는 왜 내가 아니라 마샤를 선택한 걸까? 그게 바로 주님의 뜻인 걸까?’
당사자인 이안이 들으면 기가 찰 일이었다. 그는 괴력난신 같은 건 믿지 않았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코웃음을 칠 터였다.
물론 이안은 의식에 대해 알지 못했고, 장갑이 어디로 갔나 찾다가 결국 끼는 걸 포기했다.
‘그래, 주님의 뜻이 그렇다면 뭐 어쩌겠어.’
아나스타샤는 실망스러웠지만, 승복하기로 했다. 건장한 이안에게는 병약한 자신보다 건강한 마리야가 더 잘 어울릴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번에도 마샤가 이겼구나.’
아나스타샤는 문득 우울해졌다.
왜 언니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더 많은 걸 가졌는지, 운명이 원망스러웠다. 올가의 총명과 기품이, 타티야나의 아름다움과 침착함이, 마리야의 건강함과 상냥함이 부러웠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 같았다.
알렉세이만큼은 아니겠지만, 자신도 병약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좌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 아버지 말씀대로 동양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거야. 이번에는 내가 가장 빠르게 적응해야지.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도 공부할 거야. 안이 영어랑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지만,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알면 달리 보일걸?’
아나스타샤는 우울함 속에 갇힐 생각이 없었다. 이번만은, 가장 빠르게 적응해서 이길 생각이었다.
* * *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알렉세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누이들과 이안의 춤을 지켜보고 있었다.
명명일 행사가 모두 끝난 후, 알렉세이는 이안을 홀로 만나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전하. 나와 누이들의 억지를 다 받아 줘서.”
“억지라니요, 별말씀을.”
“계속 전하께 너무 많은 폐를 끼치고 있어서 송구합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남매에게 친절하게 대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이안의 전보를 받은 이희는 즉시 장문의 답신을 보냈다. 남녀상열지사를 모르는 건 엄격한 궁중 예법에서 자라난 공주인 이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또래 공주들의 심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희는 이안에게, 부모를 두고 고국을 떠나 불안한 심경의 공주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성으로서의 처신은, 대한 황실의 법도와 친왕의 명예에 어긋나지 않은 선에서, 네가 스스로 잘 하리라 믿는다.」
요컨대 최대한 친절을 베풀되, 오해를 사거나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누나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그게 현재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처신 같았다.
“아뇨, 내 몸 자체가 모두에게 폐가 되고 있지요. 당장 여기까지 오는데, 내가 폐가 된 게 여러 번이었으니까요.”
“폐라니, 그렇게 생각 마십시오.”
알렉세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혈우병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특히 다리가 좋지 못해 이동조차 제한적이라, 특수제작한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 보니 이동이 지체되고 어려워졌다.
“그래도 한국 황제 폐하께는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렉세이는 10년 전 이선이 처방한 비타민K 요법으로 상당히 효과를 봤기 때문에, 이선을 은인처럼 여겼다.
하지만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식이요법과 심리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오고 말았다. 이 역시 일시적으로 상태를 호전시킬 뿐, 혈우병을 낫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마 앞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겁니다. 짧으면 1년, 길어야 5년이겠지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안은 정색했다. 14세 소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알렉세이는 운명에 순응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혈우병 환자들이 20대까지 사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도 알지요. 혈우병에 걸린 내 친척들도 대부분 스물을 넘기지 못했어요.”
이안은 격려할 말을 찾으려다가, 포기했다. 그 어떤 말로도 격려가 되지 않을 터였다.
“아무튼,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알렉세이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린 모두에게 버림받은 망명자입니다. 믿고 의지할 곳은 전하, 전하의 부황뿐입니다. 부디 전하께서 힘이 되어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이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전하, 부탁드리는 김에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전하가 나를 대신해서 누이들의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이안이 이번엔 바로 답을 하지 않자, 알렉세이가 더욱 필사적인 어조로 말했다.
“언제나 누이들은 병약한 나를 보호하려고 노력해 왔지요. 하지만 나는 누이들을 위해 해 준 게 없습니다. 유일한 아들로서 역할을 한 것도 없고요. 누이들에게 나를 대신할 믿음직한 남자 형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전하. 우린 사촌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이안은 고심했다. 형제가 되어 달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일 테다. 가족처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관계가 되어 달라는.
알렉세이는 이안의 왼쪽 가슴에 달린 훈장을 바라보며, 손을 꽉 잡았다.
“성 안드레이는 러시아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훈장을 드렸다고 해서, 러시아를 수호해 달라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 우리 누이들의 수호자가 되어 주십시오. 제정의 부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누군가는 이들의 망명을 받아 준 이유가, 러시아 국내 정세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은 알렉세이의 진정 어린 말을 이해했다. 반혁명 운동의 구심점이 될 생각도 없으며,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
그 순간 이안은, 그들 남매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도록,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분들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고맙습니다, 전하.”
알렉세이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눈물을 흘렸다. 이안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벽 너머에서 올가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생을 데리러 왔다가, 이야기를 모두 듣고 말았다.
언제나 어리기만 했던 막둥이 알로샤가 저렇게 성장하다니. 그런데 저 아이가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니.
이안에 대한 고마움과, 알렉세이에 대한 애처로운 감정으로, 올가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