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86
3부 1화 국민의 시대, 개막
광무 22년(1918) 12월 31일 밤, 부산 동래행궁.
“영광스러운 해였던 광무 22년을 보내며, 광무 23년에도 대한국에 무궁한 영광이 깃들기를 기원하옵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원훈(元勳) 박영효의 선창에, 착석해 있던 황족과 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만세 삼창이 끝나자, 이선도 왕좌에서 일어나 답례했다.
“마침내 세계에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함을 기쁘게 생각하오. 광무 23년에는 세계에 평화의 신질서가 수립되기를 기원하는 바이오.”
1918년 11월, 세계를 전화(戰火)로 물들게 했던 대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대한제국은 당당한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강화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박영효가 좌중(座中)을 대표해 황제에게 찬사를 보냈다.
“성상의 탁월하신 영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사옵니까?”
“그렇지 않소. 짐이 한 일이 무엇이 있겠소? 대한국 정부와 국군, 국민이 하나 되어 대전쟁이라는 험난한 시기를 승전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소. 짐은 진심으로 국민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소.”
황제가 좌중을 둘러보며 겸허히 승전의 공을 돌리자, 모두 기뻐하는 낯빛이었다.
“자, 간만의 기회니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 해 둡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오늘은 기쁘게 마시며 취하도록 합시다. 건배합시다!”
“황제 폐하, 성수무강하소서!”
이선이 건배를 제안하자, 좌중은 거듭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술잔이 돌면서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는 상황에서도, 이선의 신경은 1919년 1월에 파리에서 개최될 강화회담에 몰려 있었다.
“고균, 송재(서재필)가 파리에서 잘 해낼 수 있겠소?”
“송재의 외교 경력도 수십 년이 아니옵니까. 특히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데, 대한에 송재만 한 미국 전문가는 없지요.”
종전 직후인 12월, 대한제국에서는 개각(改閣)이 있었다. 서재필이 총리에서 물러나고, 참정대신 민영환이 총리서리(署理)가 되었다.
서재필의 사임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외교적인 선택이었다. 미국은 윌슨 대통령, 영국은 로이드조지 총리, 프랑스는 클레망소 총리, 이탈리아는 오를란도 총리 등 최고 권력자가 전권대표였다.
한국도 주요 승전국의 일원으로서, 총리급 인사를 강화회담의 전권사절로 임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주미, 주영대사 등을 역임하며 외교 경력이 풍부한 서재필이 임명되었다.
다만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왕복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현직 총리가 내정을 포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도 원훈이자 전직 총리인 사이온지 긴모치가 전권대표를 맡았다. 같은 이유로 서재필은 총리에서 사임했다.
“더욱이 유능한 인재들이 송재를 보좌하고 있사오니 심려 마시옵소서.”
김옥균은 거듭 이선을 향해 심려 말라 권했다.
전 총리 서재필이 전권대표, 전 외무대신 이상설이 차석대표, 보좌진으로는 주미국대사 이승만, 주영국대사 이영, 주프랑스대사 김규식, 주러시아대사 이위종 등이었다. 이외에도 국제법과 외교를 전문으로 하는 실무인사들을 대거 파견하여, 대한제국 최고의 외교사절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절단이 못 미더워서 걱정하는 바가 아니오. 파리에서 상대해야 할 윌슨, 로이드조지, 클레망소 같은 이들은 국제외교에서 닳고 닳은 인사들이오. 그들 밑에 있는 실무자들도 보통 인사들이 아니지. 좋게 말하면 외교의 달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세계의 운명을 그들 멋대로 결정하는 협잡꾼들이지. 이들을 상대하려면…….”
파리강화회의는 전례 없는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고, 향후 수십 년의 세계사를 결정할 중대한 자리였다.
분명히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회담’이었건만, 여기서 내린 치명적으로 잘못된 결정들이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이선은 그동안 역사를 바꿔 온 사람으로서, 이 중대한 회담을 멀리서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유럽까지 가고, 회담 참석하고, 돌아오려면 한 반년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동안 국내 통치는 내각에 맡기고, 국가원수로의 의전은 태자에게 대리를 맡기면…….’
이선은 종친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태자 이진을 바라보았다. 이진의 나이 스물둘, 대리를 맡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슬슬 진을 군주로서 준비를 시킬 때가 됐다.’
이선은 어느덧 재위 22년에 이르고, 나이는 만으로도 쉰을 넘겼다. 평균수명이 짧은 이 시대에는 영락없는 노인의 반열이 들어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50대에 접어들면서, 이선의 건강과 체력은 쇠락해 가고 있었다. 희끗희끗하던 머리는 어느덧 완연히 은빛으로 변했고, 눈은 더욱 침침해져 안경을 상시 착용해야 했다. 한때 강건하던 육체도 예전만 못하여, 근육은 잃고 살은 늘어났다. 거듭된 체력저하에 쉽게 피로감을 느꼈다.
이선은 문득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아, 어느새 이렇게 늙어 버렸단 말이냐. 당연하면서도 서글픈 일이로구나.’
태종, 세종, 정조와 같이 만기친람(萬機親覽)으로 유명한 군주들이 왜 나이 50을 넘기면 선위를 고려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됐다.
실제 태종은 52세에 세종에게 선위했고, 세종은 이미 40대에 문종에게 선위하려다 신하들의 반대로 대리청정으로 타협했고, 정조도 53세가 되면 순조에게 선위하려다가 서거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조 선황제께서도 그러셨다지. 대신들은 늙어서도 소년 같은데, 자신은 오십도 안 되어 머리가 백발이 되고 이도 빠지고 팍삭 늙어 버렸으니 기이한 일이라고.’
정조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만기친람으로 거듭된 격무, 술과 담배, 울화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으니 노쇠가 빠른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와 달리 이선은 건강과 미용에 신경을 써, 동년배의 대신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젊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 쉰을 넘기면서 자질구레한 잔병들이 늘어났다. 과거에는 온종일 일해도 별 탈이 없었건만, 이제는 그랬다가는 엄청난 피로감이 육체를 엄습했다. 스스로 업무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몸이 감당을 못했다.
이는 이선의 자업자득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반복해오던 격무는 육체를 빨리 노쇠하게 했다. 운동과 체력단련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지만, 50대가 되면서 이조차도 노쇠한 육체가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젊음과 건강을 바쳐 국가를 지켜 냈다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었다.
1882년 귀국으로부터 따져도 어언 36년, 이선은 자신의 삶을 오롯이 조선과 대한제국에 바쳤다.
그 결과 조선은 망국의 운명을 피했으며, 1918년에 이르러서는 승전국이자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 식민지의 비참한 운명에 빠질 뻔했던 한민족은 새로운 세상에서 가능성을 꽃피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이선 한 사람의 공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가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경작함으로부터 비로소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늙은이들은 시대의 전면에서 비켜설 때가 되었구나.’
이선은 순행에 동반한 원훈들, 즉 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을 쳐다보았다.
모두 늙었다.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 김옥균은 말할 것도 없고, 박영효도 환갑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다. 새로 원훈 반열에 선 서재필은 55세로 그나마 젊은 축에 속했지만, 한때 미국 유학파로 가장 극렬한 급진주의자였던 그도 이제는 노회한 제국주의자였다.
36년 전, 국가를 개혁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 맹세했던 개화당 동지들, 그들은 이제 모두 죽거나 노쇠했다. 이제 시대의 뒤안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콜록, 콜록!”
“괜찮소, 고균?”
김옥균이 갑자기 기침 소리를 냈다. 그는 재빨리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황송해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어디 편찮은 것 아니오?”
김옥균이 근래 부쩍 노쇠한 데다, 기침 소리가 유독 차갑고 날카롭게 들려 이선은 걱정이 됐다.
“황공하옵니다. 노둔(老鈍)한 몸이 겨울만 되면 이 모양입니다. 성상께서 심려하실 일은 아니옵니다.”
“음, 경의 나이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두고 있구려. 아무쪼록 건강관리를 잘하기를 바라오. 노인은 감기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오.”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좋소. 동래까지 온 김에 온천에서 휴양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갑시다. 고균도 온천을 좋아하잖소.”
조선 개국 이래, 온천은 군주의 주된 휴양지였다. 특히 온양온천은 태조부터 자주 찾던 곳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던 세종은 아예 행궁을 세워 휴양과 정무를 겸했다. 이후 온양행궁은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군주의 휴양지로 애용되었고, 근래에도 흥선대원군이 별장을 짓고 사용했다.
이선이 선호하는 곳은 경상남도 동래온천이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과거에는 군주가 온행을 떠나려면 많은 시일과 경비가 소요됐지만, 철도가 부설된 작금에는 그런 제약이 확연히 적었다. 최초로 개항한 항구이자 가장 먼저 부설된 경부선 덕에 부산-동래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선은 동래온천에 행궁을 짓고, 궁내부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양경(兩京)으로 격상된 서경(평양)을 방문하는 것처럼 연례행사는 아니었지만, 겨울이 되면 종종 들려 피한처(避寒)로 애용했다.
‘후, 조용히 온천에서 쉬어 가고 싶은데, 이런저런 행사가 너무 많군.’
물론 군주의 행보는 휴가조차 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선의 순행이 시작되면, 도처마다 황제를 열렬히 환영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특급열차 ‘광무호’를 타고 경부선의 역을 지나갈 때마다, 열차가 멈추지 않음에도 도열해 있던 군중들은 만세를 외쳤다. 특히 종착역인 부산역에 도착하면,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있어 황제의 방문은 경사이자 대행사였다.
이선은 도착하자마자 경상남도 관찰사가 준비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부산 주재 외국 영사들과 회견하고, 부산항을 방문해 전시(戰時) 수출입 현황을 살피고, 해군 사령부를 친견하여 함대를 사열했다.
“지극한 성은 덕에 동래까지 와서 호사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노신(老臣)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온천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요.”
황제의 행궁 방문은 드문 일이었으므로, 평상시에는 황실 전용공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일반에 개방되었다. 남녀노소 내외국민을 가리지 않고 원하는 이는 모두가 온천을 방문할 수 있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에게는 겨울철에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 하하.”
“신은 진실로 늙었으나, 성상께서는 아직 보령(寶齡) 한창이십니다.”
늙은이를 자처하는 이선의 말에 김옥균이 정색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짐도 많이 늙었소. 정말이지 몸이 예전만 못하다오. 몸이 말을 듣지를 않으니, 원. 예전에는 굳이 온천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이젠 어서 뜨뜻한 온천수에 몸을 뉘고 싶구려.”
이선의 말은 절반의 진담, 절반의 농담이었다. 다분히 엄살이 섞인 말이었으나,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성상의 강건하심에 대한의 국운이 달렸습니다. 부디 옥체 보중(保重)하소서.”
“허허, 고맙소. 고균도 만수무강하길 바라오.”
이선은 김옥균의 말을 덕담으로 여겨 화답했다. 하지만 김옥균은 심각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움켜쥐고 있는 손수건을 흘긋 쳐다봤다. 황제에게 보이지 않도록 재빨리 감췄지만,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이 신경 쓰였다.
김옥균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체감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예로부터 칠십을 넘기는 건 드문 일이라 하였지. 위대한 군주를 섬겨 국가를 재조(再造)하고 새 시대를 여는 데 일조했으니, 어찌 여한이 있겠는가.’
철모르던 청년 시절, 능력은 부족해도 포부만 가득해 조선을 동양의 프랑스로 만들고 싶다 떠들었다. 그 자신이 청년들을 결집해 개화당 지도자가 되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몰랐다. 막연히 서양의 사례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혁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완화군 이선이 나타났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모르는 게 없었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로 지척에서 경험한 일이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마는, 성상께서는 앞으로 10년, 아니 20년은 강건히 이 나라를 이끌어주셔야 한다.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면 현명한 후진에게 물려주고 싶다 하셨지만, 그 어느 누가 성상을 대체할 수 있겠는가?’
김옥균은 문득, 완화군을 군주로 추대하기로 결심했을 때를 떠올렸다. 왕위를 거부하다가 끝내 받아들인 이선은, 자신의 40년 국가 구상을 밝혔다.
「4기 10년에 이르러 진정한 국민의 시대가 꽃을 피울 것이오. 그때쯤 되면, 보통선거권과 의회제를 통한 민주정치를 실현할 수가 있겠지.」
대략 1910년대 후반에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1920년대에는 진정한 국민국가를 완성한다는 구상.
바로 그 4기 10년이 목전에 와 있었다.
‘3기까지는 놀랍게도 성상의 예측대로 되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조차도 정말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진정한 국민의 시대가?’
김옥균은 새삼 이선의 장기구상에 감탄하며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궁극적인 변화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 그는 자유와 평등, 기본권, 근대적 헌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이지만, 선별된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선별은 국민의 선거가 아니라 유능한 지도자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바로 대한제국 광무황제, 이선과 같은.
뎅, 뎅, 뎅!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에, 김옥균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광무 23년 원단(元旦)입니다!”
“근하신년!”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조선은 전통적으로 음력을 써 왔기에, 양력 1월 1일이 되는 순간을 기념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음력설을 중시했지만, 황실과 정부에서는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출발로 보았다.
‘광무 23년, 1919년이라. 바야흐로 국민의 시대가 도래했구나.’
김옥균이 궁금해하는 이선의 생각은, 문득 1919년이란 새해에 꽂혀 있었다.
원역사에서는 전국민적인 3.1운동이 발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바로 그해. 한민족이 ‘신민’에서 ‘국민’이 되었던 바로 그해.
이미 역사는 크게 뒤틀려 있었지만, 이선은 새삼 1919년이란 해가 신경 쓰였다.
‘러시아 혁명, 독일 혁명,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식민지 독립혁명. 전 세계에 혁명의 기세가 가득하다. 새로운 시대에는 민중의 여망(輿望)을 대표하는 정부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때는 광무 23년, 1919년.
인민의 시대, 국민의 시대가 목전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