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89
3부 4화 분화(分化)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는 황제 이선의 속내는, 물론 전제군주정으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집권한 지 35년이 되니, 개화당도 완전히 기득권 세력이 됐어. 개화당이 보통선거에 동의할 리가 없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사회개혁에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지. 사회 두 글자만 나와도 몸서리를 치고 있으니.’
그게 바로 ‘보수적 근왕파 인사’ 민영환을 총리로 발탁한 이유였다.
분명 민영환은 보수파로 분류되는 인사였지만, 황제의 뜻이라면 어김없이 따랐다. ‘광무 8년의 대역사건’을 내무협판으로서 진두지휘하며 국내 친일세력을 뿌리 뽑은 것도 민영환이었다.
이선이 내심 차기 총리로 염두에 두었던 이는 진보적인 개혁파 인사인 이상설이었지만, 고결한 선비 스타일이라 정치적 모략에 능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민영환은 경찰총수와 내무대신을 오래 역임한 만큼, 확고한 뚝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개화당은 물론이요, 야당조차 민영환의 출신과 공안총수 경력을 껄끄럽게 여겼지만, 이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고, 뚝심 있는 인사가 총리를 맡아 내 뜻을 수행해야 한다.’
어찌 보면 이선의 통치 스타일에 역행하는 인사였지만, 이선은 의도적으로 개화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개화당이 껄끄러워하는 민영환 총리 발탁은 시작에 불과했다. 필요하다면 개화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봉준을 총리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한때 이선이 개화당의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개화당이 이선의 충실한 동지가 되어 함께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개화당을 통제할 수 있겠지만, 만약 내가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진이 어찌 통제할 수 있겠나? 완전히 원훈들 세상이 되고 말걸. 고균이나 구당(유길준)은 건강도 나쁘고 살날도 얼마 안 남았지. 하지만 박영효나 서재필, 윤치호는 다르다. 원래도 80대까지 장수한 인사들이 아닌가.’
원역사에서는 김옥균은 이미 옛날에 암살당했고, 유길준도 1914년에 사망했으나 역사의 변화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 하지만 69세인 김옥균과 64세인 유길준 모두 건강이 나빴다.
59세인 박영효, 55세인 서재필, 54세인 윤치호는 모두 한창이었다. 당대에는 놀랍도록 80대 이상으로 장수한 인사들이었다.
한때 급진개화파였던 이들 모두 지금은 보수적 제국주의자가 되어 변화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내면화한 인사들이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사회민주주의를 경멸하고 혐오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사회의 진리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있어, 약자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개혁이 가당찮게 보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니 ‘약자들의 연대와 반란’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마땅히 파괴해야 할 적이었다.
「빈부격차의 심화는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며, 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종(種)의 자연적 진화를 막는 것과 같다. 가난한 자들에게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도움을 준다는 것은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어리석은 행위다.」
사회진화론을 창시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저작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동양에도 수입이 됐고, 급진개화파의 초기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역사의 박영효나 윤치호가 급진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건, 사상의 궤적을 볼 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매국에 가담한 상당수가 기회주의적 친일파라면, 박영효나 윤치호는 사상적 친일파였다. 한때 조선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철저한 사회진화론 신봉자인 이들에게 있어 ‘강자’인 일본이 ‘약자’인 조선을 병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는 ‘기계와도 같은 근대적 인간’ 이완용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역사가 바뀐 시점에선 어찌 될까?’
이들은 ‘강자’인 대한제국이 ‘약자’인 청국을 병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충실한 대한제국의 애국자이자 제국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선은 지금껏 이들을 등용하고, 적당한 위치의 임무를 맡겼다. 이미 역사가 바뀐 이상, 제국주의 시대에는 필요한 인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균은 낫지. 그는 내 뜻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김옥균은 예외적이었다. 그 자신도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받은 문명개화론자였음에는 틀림없으나, 프랑스 애호가이자 프랑스 공사를 역임하며 ‘자유, 평등, 우애’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했다.
물론 그게 서구 부르주아지의 ‘자유, 평등, 우애’일지라도, 김옥균 자신이 품어 온 불교적 평등주의와 맞물리면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다.
김옥균은 다른 개화당 인사들과 달리 인민에 온정적이었고,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가 주창한 연대주의(Solidarisme) 개념도 수입해 왔다. 사회민주주의에 대응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응답인 연대주의는, 최저임금제도, 사회보험, 소득세, 무상교육 등을 주창했다.
한창 압축적 근대화의 노정에 있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탁상공론이라고 무시당하기 일쑤였으나, 이선은 마침내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대전쟁의 결과, 한국은 열강의 문턱에 들어섰다. 경제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그 부를 모두가 함께 누리냐면 아니지. 바로 지금이야말로 소외된 인민을 진정한 국민으로 만들 때다.’
1916-18년의 이른바 ‘대전경기’ 동안, 한국 경제는 전에 없을 정도로 성장을 이뤄 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공장에서는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나오는 즉시 해외로 수출되어 막대한 판매고를 올렸다. 국부가 증대하고, 소비가 확산됐다.
이제 대한제국은 약소국, 채무국, 농업국에서 마침내 열강, 채권국, 공업국이 되었다. 1919년의 한국은 10년 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다른 나라였다.
공업화의 진전에 따라, 도시에서는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바로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계급의 탄생이었다.
조세개혁, 농지개혁, 의료개선으로 농촌경제가 안정되면서 농촌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무리 농촌경제가 안정되었다 할지라도, 빈약한 농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구압이었다.
자연스럽게 청년층의 이촌향도 현상이 발생했고, 초등교육은 얼추 마쳤으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은 도시에서 임금노동자를 형성했다.
상승일로인 공업은 숙련된 직공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했고, 막대한 임금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빈농들이 최하급 노동자가 되었다.
“그대들은 산업의 역군이다! 대한국과 황제 폐하, 전쟁 승리를 위하여 근로할지어다!”
“근로국민! 산업입국! 충군애국! 제군의 땀방울에 조국의 부흥이 달렸다!”
공업 후발국인 한국의 경쟁력은 저가의 가격경쟁에 맞춰져 있는 만큼, 저임금은 필수였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애국주의를 불어넣었다. 애국주의로 저임금과 형편없는 복지를 극복할 계산이었다.
“쳇, 오늘도 식은 꽁보리밥이냐.”
“임금 밀리지 않고 제때 줬으면 됐지, 뭔 밥 타령이야.”
“한 달 월급 받아서, 고향에 돈 보내고 나면, 겨우 월세랑 식대 남는 정도야. 이래서 언제 돈을 모으나?”
“그러니 밥값 아껴야지 뭐.”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며? 재벌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는데, 막상 일하는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하지?”
“그러게 말이야.”
“흥, 그러니까 아라사에서 혁명이 일어난 거지. 왜 혁명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아.”
“쉿! 말조심하라고. 그 뭐냐, 사회민주주의자로 몰리면 바로 경무청에 끌려간다고. 얼마 전에 옆 공장에서 새 노동조합 조직하던 친구가 끌려가서 치도곤 당하지 않았나.”
“지금 노조라고 있는 건 회사의 앞잡이니, 새 노조 조직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왜 탄압하는 거야?”
“노조가 아라사 혁명의 근원이니까 아무튼 안 된다는 거야.”
대전경기 동안, 한국에도 독점자본이 성장했다. 전시 군수품 생산에서 경공업에 이르기까지 정권과 밀착한 독점자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일본의 자이바츠(財閥)를 그대로 가져온 ‘재벌’ 집단이 형성되었다.
대한광공업주식회사, 대한무역주식회사, 서경기기제작주식회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한국의 4대 재벌이었다.
애초에 국책기관인 만철은 말할 것도 없고, 관립회사로 시작해 민간에 불하된 대한광공이나 대한무역이 정권에 밀착하는 형태인 건 당연했다.
개화당과 재벌집단은 정경유착의 양상을 보였다. 예컨대 이재(理財)에도 밝은 박영효는 총리 퇴임 후에 대한무역과 대한식산은행의 사외이사를 맡아 비호했다. 박영효뿐만 아니라, 개화당 지도부 대부분이 재벌과 관계되어 있었다. 거액의 정치자금이 오고 가는 건 물론이었다.
야당과 언론에서 정경유착관계를 비판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개화당 지도부는 일축했다.
“아니, 우리가 국가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끌었는데, 자본이 국가에 충성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정치를 하면 돈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정치자금은 우리만 받나?”
이승훈을 위시한 평양 자본가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서경기기가 예외적으로, 이들은 야당인 신민당의 정치자금을 담당했다. 즉, 어떻게든 대기업은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각하, 우리 자본가들이 바라는 바는 소박합니다. 그저 지금처럼 생산과 무역이 잘 되게 해 주옵고, 저 아라사처럼 못된 생각을 품은 자들이 득세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암, 당연한 말이오. 우리 개화당이 바로 이 대한에 사유재산권을 도입하고, 산업화를 이룩하지 않았소. 우리가 정권을 잡고 있는 이상, 여러분 자본가들은 마음 놓고 기업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불한당 놈들은 대한에 발도 못 붙일 것이오.”
이러니 개화당이 ‘사회’라는 글자만 들어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점차 사회민주주의자란 말도 쓰기 싫은 듯, ‘불한당’이니 ‘과격파’니 하는 표현을 썼다.
“사회개혁 운운하는 자들은 러시아 과격파들과 다를 바 없는 불한당들이다. 대한의 국민적 단결을 헤치는 자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새로운 공업중심지로 떠오른 원산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개화당 정부는 경찰력을 통해 신속하게 분쇄해 버렸다. 대개 진보당과 연계된 농민운동도 탄압받기 일쑤였다. 노동조합은 인정됐지만, 오직 회사에 종속된 어용노조만이 승인됐다.
개화당은 자본가와 지주의 편이었다. 이들은 ‘우민’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자였다. 한때 급진적 변혁을 꿈꿨던 이들도 이제는 철저한 기득권이었다.
‘내가 구중궁궐에 있다고 세상일을 모르는 줄 아나.’
이선은 한때 누구보다 아꼈던 동지였던 개화당이 변모하는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국가의 존립과 신속한 근대화가 중요했기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현실을 묵인해 왔다.
하지만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달성하고, 열강의 문턱에 들어선 현재는 달랐다. 하층 인민을 계속 소외시키면, 러시아처럼 잠재적 반란의 씨앗이 될 터였다.
이선 재위기에는 황제라는 ‘신성한 범국민적 카리스마’로 단결될지 몰라도, 국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갈등은 폭발하고 말 터였다.
‘무릇 정치가라면 단순히 현재, 혹은 5년 후만을 바라봐선 안 된다. 25년 후, 50년 후를 바라보고 백년대계를 완성해야지.’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이선의 차기 구상은 유기적 공동체국가, 코포라티즘(Corporatism, 협동조합주의)에 가까웠다. 1920년대에 유럽의 대세적 사상으로 떠오를 코포라티즘이었다.
좌익 코포라티즘은 생디칼리즘, 우익 코포라티즘은 파시즘으로 변질되었지만, 중도 코포라티즘(사회 코포라티즘)은 1920년대 스웨덴을 시작으로 좌우갈등을 종식시키고 복지국가의 초석을 닦았다.
코로파티즘 국가를 구상하는 이선과, 사회진화론을 신봉하는 개화당 간에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대한제국은 더 이상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정치적 분화, 경제적 분화, 사회적 계층 분화가 현실이었다.
‘개화당도 낡았어. 35년이면 오래되긴 했지. 고인 물은 썩는 법. 교체되어야 해. 대안세력이 필요한데, 신민당과 진보당이 야당을 넘어 집권세력으로 성장할지는 의문이다. 진정한 현대적 민주정당이 필요한데.’
이선의 눈으로 볼 때, 아직까지 신민당과 진보당은 ‘시끄러운 야당’에 머무르고 있는 단계였다. 대안세력, 집권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인 자신이 야당 건설을 종용할 수는 없으니, 개화당의 세력을 서서히 누르면서 대안세력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원훈 김옥균과 박영효가 알현을 청했다.
알현의 내용은, 얼마 전 개화당이 논의했던 바로 그 사안이었다.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만몽의 세력권을 인정받는다. 흠, 짐 역시 바라던 바요.”
이선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김옥균이 얼른 말을 받았다.
“실로 그렇습니다. 서방 연합국이 대한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작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흠, 서방 연합국이라면 다 같지는 않소. 그들 간에도 의견이 갈라지니까. 의견을 함께할 나라를 딱 하나만 고른다면, 그건 미국이겠지. 윌슨 대통령은 세계 신질서 건립이라는 목표에 열중하고 있소. 우리는 그에 편승해 적당히 비위를 맞춰 줘야지. 미국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고, 영국과 러시아도 견제해야 하오. 민족자결주의의 가면은 쓰되, 대한이 청국의 보호자로서 만몽(滿蒙)만큼은 확실히 확보할 수 있도록.”
1918년 12월 하순, 미국 대통령 윌슨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유럽에 도착했다.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유럽 방문이었다.
윌슨은 제국주의적 구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 했지만, 영국의 로이드조지와 프랑스의 클레망소는 그에 동조할 생각이 없었다.
이선 역시 윌슨의 신질서 구상이 성공하지 않으리라 보았지만,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면서 한국의 국익을 극대화할 생각이었다.
“폐하, 러시아 파병군을 어찌하면 좋을지요?”
분위기가 자못 긍정적으로 흐른다고 생각되자, 박영효가 본론을 꺼냈다.
“외국에 오랫동안 군대를 묶어 두는 건 좋은 일이 아니오. 지금은 독감 때문에 미루고 있지만, 진정되면 철수해야지.”
“하명하심이 지당하십니다. 하오나, 기왕 파병한 이상 국군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세계평화라. 이미 대전은 끝났는데, 무슨 세계평화를 말하는 거요?”
박영효가 마침내 본심을 드러냈다.
“연합국은 혁명을 수출하려고 하는 러시아 과격파들의 망동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 것입니다. 영국의 처칠 장관,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는 러시아 사회주의 정권의 교체 가능성을 주장했지요. 이는 대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가 공공연히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는다는 건, 국경을 접한 나라 입장에서는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러시아 애국자들과 손잡고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해야 합니다. 국군이 선봉에 선다면, 연합국 입장에서는 바라던 바일 것입니다. 만몽의 영유권을 인정받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