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91
3부 6화 미래의 권력
때마침 새로운 정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변혁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동지들! 마침내 세계에 평화가 되돌아왔습니다. 신민당은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연합국 전우들을 위해 찬사를 보내며, 자유의 승리에 혁혁한 기여를 한 대한국군의 용전분투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1야당 신민당 전당대회. 사무총장 도산 안창호는 연합국과 국군에 대한 경의로 연설을 시작했다.
“동지들! 러시아 전제정권에 이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몰락은 세계사적 변화, 역사의 진보를 의미합니다.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를 천명했습니다. 민족자결과 자주독립,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입니다. 대한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이 위대한 역사적 변혁에 함께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안창호와 신민당은 당대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윌슨의 국제연맹 기획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친애하는 동지들!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미국에서, 독일에서, 러시아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바로 전 인민의 정치참여, 보통선거와 인민권력의 선출입니다. 이제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저 위대한 링컨이 말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가 마침내 현실로 도래했습니다. 우리 신민당은, 대한에서 이를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입니다!”
“옳소!”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
“개화당 독재 끝장내자!”
“신민당! 도산! 신민당! 도산!”
“와아아아아!”
신민당원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일부 연로한 보수적 지도부는 안창호의 연설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다수는 안창호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안창호는 러시아 특사단의 일원으로 다녀온 후,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된 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신민당은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일대에서 제1당으로 떠올랐다. 경기지방의 개혁적 지식인과 삼남지방의 개신유림과도 손을 잡았지만, 여전히 지역정당이자 부르주아 정당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를 뛰어넘는 국민정당을 추구했다.
안창호는 보통선거권 쟁취와 사회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신민당-진보당의 연합을 추구했다. 지역적으로 보면 조선 시대에 소외받던 서북과 삼남의 연합이고, 계층적으로 보면 신흥 상공인과 농민의 연합이었다.
보수적인 신민당 우파는 진보당과의 연계를 영 껄끄러워했다.
“보통선거권이 주어지면,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이 진보당에 몰표를 던질 수도 있잖소? 지금이야 농민들이 투표권이 없으니 진보당이 18석에 머물러 있지만, 보통선거권이면 과반을 넘길 수도 있소.”
“그럼 이대로 개화당 독재를 지켜만 보는 만년 야당으로 남겠습니까? 우리가 더욱더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지요. 민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안창호와 신민당 좌파는 러시아 인민주의의 구호, ‘브 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을 내세웠다. 안창호 본인이 진작부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거니와, 농본주의 정당인 진보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행보였다.
“우리는 지역정당, 일부 계층의 정당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국민정당이 되어야 합니다!”
신민당 황해도당을 이끄는 해주 선거구 민의원 김창수는 안창호의 국민정당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김창수는 독립전쟁 유공자인 예비역 하사관으로, 본래 민족주의 우파에 더 가까웠다.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하던 그는 점차 사회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안창호와 손잡고 신민당 황해도당을 맡았다.
어느덧 해서(海西, 황해도) 일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4대 총선에는 민의원에 진출했다.
김창수는 진보당과의 연합을 통한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안창호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우리는 한민족, 모두 단군의 후손이자 대황제 폐하의 신하입니다! 성상께서 만민평등의 갑신경장을 선포하신 지 어언 35년. 일군만민의 대의가 과연 이뤄지고 있습니까? 나, 백범 김창수는 가장 미천하고 무식하다 여겨지는 백성조차도 애국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민족 3천만 동포 사이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김창수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았다.
만민평등 선언 후에도 가장 미천하고 무식하다고 사회적 차별을 받는 백정조차도 국민의 일원으로서 존중받고, 그에 맞는 애국심과 지식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저 강대한 아라사가 왜 무너졌습니까? 귀족이 평민을, 공장주가 직공을, 지주가 농민을, 장교가 사병을 무시하고 천대했기에 무너진 것입니다. 진정 아라사가 하나이되 분열할 수 없는 단결된 국민의 나라였다면, 어찌 유혈혁명이 일어났겠습니까? 차별과 불평등은 민족의 단결을 막는 악입니다. 3천만 동포가 하나 되어 단결하려면, 단결을 가로막는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합니다!”
“옳소!”
“대한국 만세!”
“백범! 백범!”
김창수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전 민족의 평등과 단결을 추구했다.
김창수와 그의 지지자들은 소박한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코포라티즘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의 대단결을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 병사들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 주기를 희망한다. 보통선거권 도입! 노동기준법 확립! 농촌경제 보호!”
“3천만 민족이여, 하나로 단결하라!”
‘민족의 단결’을 위하여 보통선거권과 사회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야 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대한 차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민족은 모두 단군의 후손이자 황제의 신하이며, 평등한 일원이었다.
민족주의 우파에서 기원한 코포라티즘은 이탈리아에서 갓 발흥하고 있는 파시즘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파시즘처럼 타민족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김창수는 타민족이라 할지라도 후천적인 교육으로 한민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동화주의자였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라기보다는 클레망소가 이끄는 프랑스 급진당에 더 가까웠다.
민족의 단결을 부르짖는 김창수 분파는 신민당의 지지세 확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개화당도 ‘국체를 부정하는 급진주의자’ 딱지를 붙일 수는 없었다.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자 안창호는 김창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신민당의 세력 확산에 만족감을 느끼며 김창수에게 지지를 보냈다.
“진보당은 대한국 유일의 농민과 직공을 대표하는 정당입니다! 농민운동과 농지개혁을 이끌며 일관되게 농민의 편에 섰던 유일한 정치가, 전봉준 의원을 모시겠습니다!”
“친애하는 동지들! 전봉준이올시다. 이 사람은 아라사의 혁명을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며, 마침내 세계에 개벽(開闢)의 세상이 도래했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무 23년은 전에 없는 개벽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바로 농민과 직공의 선봉에 서서, 개벽세상을 열어야 합니다!”
“와아아아!”
전봉준의 나이 어느덧 65세. 머리는 하얗게 물들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의 가슴은 여전히 뜨겁게 뛰고 있었다.
진보당을 대표하여 러시아 사절단을 다녀온 후, 전봉준의 시야는 더욱 넓고 깊어졌다. 그는 사회개혁이 필연이라고 확신했다. 본질적으로 유학자이자 충실한 신하로서 대한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정은 여전했지만, 개화당 중심의 엘리트 관료제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진보당은 불평등한 선거권 제도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다면 약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전봉준은 그동안 진보당의 최대 지지기반, 삼남의 농촌과 천도교 중심의 신영토를 넘어서는 전국적·전 계층적 지지를 확대하기 위한 수단에 골몰했다.
“노동자 직공이 소외되고 있다. 이들도 우리 진보당이 품을 수 있어야 해.”
전봉준은 현재 러시아의 집권정당인 인민주의 사회혁명당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농민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노동자를 대표하는 사회민주노동당 연립정부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맹아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진보당이 이를 끌어안아 노동자의 대표 정당도 되길 희망했다.
대한제국에 공업화로 임금 노동자가 유의미한 숫자로 증가하고, 세계에 노동자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작금, 노동자 계급의 성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확산은 이제 현실이었다.
전봉준의 관심은 자연히 사회민주주의로 향하고 있었다.
“대전쟁이 끝난 지금, 작금 세계의 최대 문제는 군비와 영토가 아닙니다. 바로 노동문제입니다. 러시아에서 혁명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독일에서조차 붉은 깃발이 휘날립니다. 승전국이라는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은 진보적인 청년 지식인을 중심으로, 서양의 선진적 사상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신한청년단을 이끌고 있는 이는 전직 관료이자 현 황성대학 강사인 30대의 여운형이었다.
“노동계급은 더 이상 과거의 피지배계급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입니다!”
본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였던 여운형이지만, 러시아 혁명을 직접 참관한 이후로 사회민주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여운형은 러시아행에 동행했던 망명자 부하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혁명의 총아’라 불리는 젊은 사상가 부하린과 주고받은 대화와 논쟁은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부하린은 자신이 영어로 직접 쓴 사회주의 입문서를 여운형에게 선물했고, 여운형은 국내로 돌아와 번역을 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넘어, 러시아의 놀라운 변혁을 직접 체험한 여운형의 심리를 변화시켰다.
‘역사의 진보라는 거대한 조류가 밀려오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무지한 인민을 선동하는 사악한 이념이 아니라 역사 변혁을 추동하는 거대한 사상이다.’
여운형과 그의 동지들은 사회민주주의 연구에 나섰다. 사교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여운형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특히 청년 지식인들이 많았다.
동생 여운홍(呂運弘)을 비롯하여, 여운형의 후배들인 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이광수(李光洙)·정인보(鄭寅普) 등이 신한청년단에 동참했다. 모두 수재로 이름난 2-30대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모두 여운형처럼 사회민주주의에 공명한 건 아니었으나, 서양의 신사상과 변혁에 목마른 이들이었다.
“만국의 직공이여, 단결하라?”
“일본어 번역에는 직공이란 단어를 썼는데, 직공보다는 노동자가 광의의 의미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려면 노동자를 씁시다.”
“좋습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들은 공동으로 ≪공산당 선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이래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때가 최초의 한국어 번역이었다.
공산당 선언은 전시체제 하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8년 12월 학무부의 허가를 받아 출판되었다.
황성대학-고등문관시험 합격-학무부 관료-국비유학생-해외사절단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여운형은 ‘불순한 사상’으로 의심받지 않았다.
“그대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아무도 걷지 못했던 길을 걸으려고 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소.”
“아닙니다. 의원님이야말로 누구도 하지 못했던 농지개혁을 현실로 만든 분이시지요.”
전봉준은 직접 신한청년단을 찾아, 여운형과 회견했다. 두 사람은 30년의 나이 차가 존재했지만, 러시아 사절단을 통해 친분을 맺어 둔 터였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에 접목하지 않고 이론에만 머문다면, 그건 지식인의 고담준론에 지나지 않을 거요. 어떻소, 몽양.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볼 생각이 없소?”
전봉준은 여운형에게 정계 입문을 제안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백면서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면서생이라니요, 학무부 실무자로서 국민교육의 확대에 기여하신 분이. 진보당은 과거의 경험은 풍부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족하오. 반대로 몽양과 청년들은 경험은 부족하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이 충만하지. 노동대중의 권익을 위하여, 함께 일해 봅시다.”
전봉준은 아들뻘인 여운형을 높이 평가했다. 여운형은 뛰어난 두뇌와 탁월한 연설력,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교력을 지니고 있어,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의원님,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여운형은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에서 귀국 후,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을 개화당 정부가 전시계엄 운운하며 가혹하게 분쇄하는 걸 보면서, 여운형은 가슴 깊이 분개했다.
소론계 양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노비 출신 소작인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평등 정신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강했던 여운형이었다. 그는 한때 개화당 정부에 몸을 담았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대신의 만류에도 즉각 사직하고 학문의 길로 나섰다.
여운형이 설립한 신한청년단은 지식인 모임의 단계였다. 언젠가 정당을 염두에 두고는 있지만, 아직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국가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개화당은, 이제 낡은 교리에 붙잡혀 인민의 자유를 가로막는 적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민당이나 진보당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여운형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전봉준을 높이 평가했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여운형에게 진보당은 유학적 농본주의와 종교적 유토피아 열정으로 뭉친 전근대적 정당으로 느껴졌다.
‘전봉준 선생이 대단한 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농본주의를 지향하는 유자다. 진보당의 주류분파인 천도교의 종교적 유토피아도 전근대적이고. 좀 더 현대적인 대중정당이 필요해.’
여운형은 현실정치의 참여 필요성을 느꼈고, 정계입문을 결심했다. 하지만 진보당 입당이 답은 아니었다.
근래 공업지대와 무역항으로 떠오른 지역들, 서울·평양·원산·인천·부산 등지에서 노동계급이 성장했다. 특히 북방과 가까운 평양과 원산 일대에서는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맹아가 보였다.
신한청년단을 정당 조직으로 개편하고, 노동운동과 결합하여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창당을 계획했다. 그 후에, 진보당이나 신민당과 정책연대를 구상하는 방식으로 세력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청년 여운형은 결심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내 삶을 바치리라.’
여운형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사회적 연대가 이뤄지는 세상, 계급해방의 이름으로 잔혹한 폭력이 벌어지는 걸 거부하고 평화롭게 사회개혁을 이루는 세상을 꿈꿨다.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한국의 미래를 바꿀 정치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