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93
3부 8화 파리 강화회의
“강화회의 개최를 선언하는 바입니다!”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강화회의 본회의가 개최되었다.
공교롭게도, 1월 18일은 1871년 독일이 프랑스를 무찌르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국을 선포한 날이었다. 프랑스에는 굴욕의 날이었고, 일부러 이날에 맞춰 회의를 개최했다. 독일제국에 대한 보복을 상징하는 택일(擇日)이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 많은 국가의 대표단이 강화회의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이는 평화를 향한 인류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30개 주권국과 영연방에 속하는 6개 자치령을 포함해, 총 36개국에서 사절단을 파리에 파견했다.
파리에 모인 인원은 전권대표단 80인에 수행원은 8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과 중부동맹국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각국은 국력과 전쟁기여도에 따라 1인에서 5인의 전권대표단을 파견할 권리를 받았는데, 5인의 전권대표단을 파견한 국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한국 7개국이었다.
즉, 이들이 바로 연합국 최고전쟁위원회를 구성하는 이른바 ‘7대 승전국’이었다. 7대 승전국은 각국 대표들로 구성된 이른바 ‘7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최고전쟁위원회를 계승했다.
“당면한 목표는 세계의 항구적 평화, 이를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국제연맹의 성립입니다.”
1월 25일, 우드로 윌슨을 의장으로 하는 국제연맹 규약위원회(League of Nation’s commission)가 구성되었다. 규약위원회는 강화회의와 국제연맹의 기초를 논의하는 최고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일본, 한국 ‘7대 승전국’의 대표 각 2인으로 구성되었다.
“강화회의가 강대국만의 잔치란 말입니까?”
7대 강국에 속하지 못하는 국가들의 항의가 촉발되었다. 결국 중국, 브라질, 포르투갈, 벨기에,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 신생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 각 1인이 위원회에 추가되었다.
“쯧, 회의 참석자가 스무 명이 넘다니. 이래서야 회의 진행이 신속하게 될 수가 있나.”
하지만 회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건 ‘3대 거물(Big 3)’, 즉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총리 로이드조지,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였다. 이들의 손에 유럽, 아니 세계의 운명이 좌지우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빅3은 표면적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해관계까지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7대 승전국으로 시야를 확대하면, 더욱 충돌할 여지가 많았다.
“우리는 보복자로 유럽에 온 게 아니다. 군국주의와 함께 최후를 맞이한 낡은 질서를 무너트리고, 평화와 진보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왔다. 15개조 원칙이 지켜지는 정의로운 평화가 이뤄져야 한다. 승전국이 독일에서 모든 걸 빼내려는 시도는 용인하지 않겠다.”
1918년 12월 유럽에 도착한 윌슨은 유럽에서 ‘평화의 사도’로 높이 칭송받았다.
윌슨에 대한 유럽의 기대와 환호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윌슨이 런던, 파리,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각국 정상들은 최상의 환대로 맞이했고, 시민들은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평화의 사도, 윌슨 대통령 만세!”
유럽인들은 미국과 윌슨에게 낙관적인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을 무찌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건 사실이라지만, 윌슨이 세계에 영구적인 평화를 선물하리라는 과도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만큼 윌슨의 ‘15개조 평화안’과 국제연맹 제안이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이 파괴되고 심신이 지쳐 버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환상이었다. 윌슨은 분명 항구적 평화를 목표로 15개조와 국제연맹을 들고 유럽으로 왔지만, 그 수단까지 이상주의적인 샌님은 아니었다.
“이 전쟁의 책임은 독일 군국주의에 있지만,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탐욕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 국가가 진 빚은 단 한 푼도 탕감해 줄 수 없다.”
4년간의 총력전은 인력 못지않게 막대한 비용을 소모했다. 미국에 영국은 40억 달러, 프랑스는 30억 달러, 이탈리아는 16억 달러, 러시아는 4억 달러의 차관을 빌렸다. 여기에 민간 투자자의 전쟁 공채 구매까지 합치면, 빚은 쉽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윌슨과 미국 대표단은 유럽 국가들이 진 빚을 탕감해줄 용의가 전혀 없었다. 빚은 이들을 옭아매는 동시에, 미국의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이었다.
“윌슨은 프랑스의 현실을 아는가? 미국은 침략받지 않았기에 모르겠지. 독일의 침략으로 120만의 청년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국토가 짓밟히고 산업능력이 붕괴했다. 군축과 국제기구의 중재는 평화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프랑스는 독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클레망소는 윌슨의 구상에 반발했다.
프랑스는 대전쟁의 핵심 공로자이자 서방 연합국 중 최대 피해자였다. 4천만 인구 중에 120만의 전사자를 냈는데, 18세-27세 청년 4분의 1에 달하는 치명적인 수치였다.
독일이 점령하고 폐허로 만들었던 지역은 프랑스의 공업 중심지였다. 독일은 점령지에서 4년간 생산물을 모조리 약탈했고, 전선을 철수하면서 생산수단을 파괴하고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제국의 완전한 해체, 알자스-로렌 반환, 배상금 지불, 군비 축소, 자르 탄광 통제, 라인란트 비무장화, 독일 동부에 견제할 우방국들의 성립.”
클레망소는 민족주의자였으므로, ‘게르만 민족’에게도 통일된 국민국가를 유지할 기회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독일은 프랑스에 피해 보상을 하고, 두 번 다시 전쟁을 벌이지 못하게 해야 했다.
프랑스 혼자 이 결정을 내릴 수는 없기에, 클레망소는 윌슨이 원하는 대로 국제연맹이든 세계질서의 재편이든 다해 줄 용의가 있었다. 다만 독일에 대한 보복만은 프랑스의 뜻이 관철되어야 했다.
“영국은 늘 그래왔듯이, 대륙의 균형을 지켜야 한다. 독일의 완전한 몰락은 프랑스만 이로운 일이다. 독일 함대와 상선을 모조리 몰수해 해상으로의 진출을 막고, 적절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면 된다.”
프랑스보다는 피해가 적은 영국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다. 독일의 몰락은 영국이 선호하는 대륙의 세력균형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조지도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12월 총선에서 로이드조지는 승리했지만, 영국 여론이 독일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이라는 걸 재확인했다.
영국 국토는 손실을 보지 않았지만, 100만에 달하는 청년이 흘린 피의 대가를 받기를 원했다. 막대한 배상금과 더불어, 전범재판을 실시하여 카이저 빌헬름을 법정에 세우고 처형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여론을 만족시키고, 재정을 회복하려면 독일로부터 최대한 많은 배상금을 받아 내야 한다.”
막대한 손실을 입은 프랑스가 배상액의 상당수를 요구하고 있었다. 연합국은 프랑스의 손실과 재건 금액으로 대략 600억 금 마르크(140억 달러)로 산정했다.
프랑스는 50% 이상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배상금 총액을 900억 금 마르크(210억 달러)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용인했는데, 정작 영국이 독자적인 산출에 나서 총액 200억 파운드(1,000억 달러)라는 숨 막히는 금액을 제시했다.
영국은 배상액의 25%를 가져간다는 계산을 세웠으므로, 액수는 크면 클수록 좋았다.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요인은, 영국의 강경한 여론이 전상자 연금까지 독일이 책임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240억 파운드는 영국이 4년간 쓴 전비 총비용에 가까웠고, 전쟁 전 독일 국민소득의 다섯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전쟁으로 파산한 독일의 현시점에선 불가능한 액수였다.
“아니, 지금 농담합니까? 이게 독일이 지불 가능한 금액이라고 생각합니까? 독일을 영원히 구제 불가능한 파산상태로 만들잔 말이오?”
윌슨과 미국 대표단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터뜨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영국의 요구는 황당했다.
“나는 영국 국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귀국도 알다시피, 우리가 독일로부터 받는 배상금의 상당 부분은 미국의 차관을 변제하는 데 쓰일 겁니다. 만약 귀국이 차관을 탕감해 준다면, 우리가 독일에 요구하는 배상금도 줄어들 겁니다.”
로이드조지도 무턱대고 비현실적인 배상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빚을 탕감해 준다는 전제하에, 배상금을 깎아 줄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물론 윌슨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인의 세금이 들어간 차관을 내가 멋대로 탕감해 줬다가는, 분노한 여론에 의해 내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질 겁니다.”
“마찬가집니다. 독일에 대해 정당한 배상을 원하는 영국 국민의 요구를 무시했다가는, 내 정치생명이 끝장입니다.”
그러자 클레망소가 끼어들었다.
“윌슨 대통령은 관대한 평화를 제안하는데, 프랑스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독일에 대해 강경한 보복을 원합니다. 그 여론을 무시하고 관대한 조건을 내건다면, 정치생명은 고사하고 내 목숨까지 위태로울 겁니다.”
로이드조지와 클레망소는 국제적 거물로, 정치 경력이 수십 년이었다. 복수에 눈이 멀어 독일을 영구히 박살 내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주국가의 지도자였고, 4년간의 총력전으로 극한으로 내몰린 국민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윌슨 역시 미국의 고립주의 여론을 무시하고 이상대로만 움직일 수 없었다.
민주국가의 딜레마였다. 국민을 총동원하여 마침내 승전을 이끌었으니, 국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러시아 민주주의연방공화국은 무배상, 무병합, 민족자결의 평화원칙을 존중합니다.”
“아니, 그럼 러시아는 정말로 배상금을 받지 않겠다는 겁니까?”
“러시아 역시 200만 병사들의 피를 흘렸고, 점령지의 막대한 자산을 빼앗겼습니다. 어찌 독일의 죄악을 잊겠습니까? 하지만 그 죄악은 독일 황실, 프로이센 군부, 자본가, 융커에게 있습니다. 그 죄악을 인민 전체에 되돌리는 건 가혹한 조치입니다.”
뜻밖에도 러시아가 패전국의 구원자로 등장했다. 혁명 러시아는 윌슨이 초기에 주장했던 ‘배상 없고 병합 없는’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러시아는 이를 혁명의 이상과 국제연대로 포장했지만, 속내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어차피 파산 직전의 독일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건 불가능하다. 독일로부터 억지로 배상금을 쥐어짜 내 봤자, 서방 제국주의 국가의 배만 불려 주는 일이지.”
제정 러시아는 본래 외채를 기반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는데, 전쟁으로 인해 부채와 이자는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제정은 신생 공화국에 170억 달러에 달하는 빚을 떠넘겼다. 이중 프랑스가 120억 달러, 영국이 28억 달러, 벨기에가 5억 달러, 미국이 4억 달러였다. 일본에 1억 5천만 달러, 한국에도 현물을 포함하여 5천만 달러의 미상환금이 있었다.
1918년 12월, 종전 이후 러시아 정부는 일방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전쟁으로 러시아 군인이 200만, 민간인을 포함하면 350만 명이 죽었습니다! 프랑스는 국토가 독일에 짓밟혔다고 하지요. 러시아는 훨씬 넓은 국토가 적의 군홧발에 짓밟혔습니다! 러시아 인민의 피와 땀으로 충분히 대가를 치렀으니, 차르 정권이 무분별하게 진 빚을 인민에게 전가할 수 없습니다!”
최대 채권국인 프랑스는 러시아를 어르고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독일에 배상금을 받아서 분배합시다.”
“프랑스와 영국이 요구하는 금액이 어마어마한데, 독일 인민을 영원히 노예화하려는 강도짓에 혁명 러시아까지 동참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는 배상금 문제뿐만 아니라, 영토 문제에 있어서도 서방 국가들의 계획을 부정했다. 러시아 대표로 참석한 외무인민위원 트로츠키는 서방을 대놓고 비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진정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을 지킬 용의가 있는 겁니까? 민족자결의 원칙이 패전국에만 적용된다면, 그건 세력을 확대하겠다는 욕망을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와 인도에서 독립을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자결을 희망하는 모든 민족은 독립을 쟁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식민제국의 아픈 곳을 잇달아 찌르니,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이보다 더 밉상일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는 런던조약을 이행 받길 원합니다. 이탈리아인은 달마티아와 피우메(리예카)를 요구합니다!”
이탈리아와 일본도 자기 몫을 요구하고 나섰다. 근거는 모두 참전과 파병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남발한 공수표였다.
이탈리아는 1915년 참전의 대가로 ‘미수복 이탈리아’, 즉,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약속받았다.
이는 유고슬라비아를 부르짖는 세르비아, 도나우 연방으로 개편되어 살아남은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와도 충돌했다.
그런데 빅3 중에서 클레망소는 세르비아를 지지했고, 윌슨은 은근히 도나우 연방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민족주의 여론의 강경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일본은 파병조건을 이행 받길 원합니다. 독일령 태평양 군도와 산동 이권을 요구합니다.”
일본 역시 1915년 함대의 지중해 파병을 대가로, 영국으로부터 독일령 태평양 군도와 산동의 이권을 넘겨받기로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밀약에 대해 몰랐던 윌슨은 난색을 표했다.
“산동 문제는 결코 중국 정부를 배제하고 논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중국 대표단도 함께 논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윌슨이 7인위원회에서 일본 견제에 나서자, 미국에 협조적인 하라 정권과 일본 대표단은 당황했다.
윌슨은 미국 서부의 일본인 이민 문제, 태평양과 중국 이권 문제를 놓고 다투는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고, 순순히 이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한국은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싸웠으며, 항구적인 평화의 국제질서를 희망합니다. 강화회의를 전리품 분배의 장으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제국 대표단을 대리하고 있는 이승만과 김규식은 원론적인 평화 이야기만 했다.
이는 반복되는 이권다툼에 질려 있던 윌슨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정 한국은 국제사회의 모범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귀국을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한국이라고 요구사항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단지 때를 가늠하며 속내를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선은 자신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까지, 일단 회의를 관망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으라고 훈령을 보냈다. 도착할 때까지 결론이 날 리가 만무했다.
1919년 1월과 2월, 강화회의는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 속에 공전(空轉)을 반복했다.
회의가 교착 상태에 이를 즈음, 이선이 새로운 플레이어로 파리에 나타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