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94
3부 9화 동양의 대표자
광무 23년 1월 25일. 이선과 수행원들은 인천항에서 순양함 ≪문무대왕(文武大王)≫호를 타고 유럽행 장도(長途)에 올랐다.
한국 해군의 군함은 주로 고대의 전쟁영웅들, 즉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신라 문무왕의 시호를 딴 문무대왕호는 장기간 원양항해가 가능한 쾌속순양함이었다.
이선으로선 1896년 니콜라이 2세 즉위식 참석 이래 23년 만의 유럽행 항해였다. 당초에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용을 고려했으나, 러시아 국내의 혼란상과 철도 병목화, 만연해진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포기했다.
배를 타면 파리까지 가는 데 5주의 시간이 필요로 했지만, 이선은 시간을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3월에도 결론은 안 난다. 회의가 교착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도착하면 된다.’
강화회의의 조속한 진행을 다짐한 연합국 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각국 간에 얽힌 이해관계는 회의를 장기화했다. 윌슨도 장기간의 회의를 가공한 듯, 국제연맹에 부정적인 상원과 공화당을 설득하고자 2월에 미국으로 일시 귀국할 예정이었다.
“태자, 짐이 부재하는 동안 정무를 잘 부탁한다. 짐은 태자의 현명함을 믿는다.”
이선의 당부에 이진이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부황을 거울로 삼고, 중요사안은 반드시 부황께 전보를 보내 재가를 받겠습니다.”
통신의 발달은 이선이 원거리에서도 재가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907년 유럽 방문 시에도 이선은 내각에 국내정치를 위임했지만, 중요사안은 이선의 재가를 받았다.
대리청정의 전례를 살펴보아도, 인사나 군사 등의 중요사안은 모두 대조(大朝, 임금)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내각이 태자를 잘 보좌해 주길 바라오.”
“예, 폐하. 성심(誠心)을 다해 황태자 전하를 받들겠습니다.”
내각총리대신 민영환과 각료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태자의 보좌를 다짐했다. 대리청정에도 실질적으로 정무수행은 내각에서 수행할 터였다. 이선은 자신의 재가가 반드시 필요한 중요사안 외에는 내각에 맡기기로 했다.
“경들은 짐의 원훈이오. 태자를 잘 부탁하겠소.”
원훈 김옥균과 박영효가 고개를 조아렸다. 유길준은 지병으로 누워 있는 상황이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원훈은 이 두 사람이었다.
“고균. 근래 중국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경은 짐을 대리해 주변국 외교에 만반을 기해 주시오. 산동 문제를 놓고 중국에 민족주의 여론이 폭발할 가능성이 크오. 필요하다면 언제든 남경이나 성경(봉천), 혹은 동경을 방문해 외교적 논의를 해도 좋소.”
“예, 폐하.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훈이자 이선의 대리인으로서 주로 외교적 사안에 관여하고 있는 김옥균이니만큼, 이선은 김옥균에게 대중·대일 외교를 맡겼다.
“금릉위. 국가의 원훈이자 황실의 일원으로서 태자를 잘 부탁하오.”
박영효에게는 별다른 지침 없이 태자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했다.
“예, 폐하. 성상을 모시듯 삼가 태자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박영효는 김옥균에게는 외교를 맡겼으니, 자신에게는 내정을 맡긴다고 내심 지레짐작했다.
“좋소. 짐은 경들을 믿고, 유럽에서 외교를 수행하고 오겠소. 조약 체결 시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늦어도 가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이오. 그동안 국내를 잘 부탁하겠소.”
“예, 폐하! 신등은 삼가 지엄한 명을 받듭니다!”
“대한국 만세! 대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성수무강하소서!”
이선은 대신들과 도열한 근위사단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문무대왕호에 올랐다.
* * *
도착지인 프랑스 마르세유까지는 기나긴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하여, 기항하는 항구는 최소화하여 갈 예정이었다. 문무대왕호가 기항을 통보한 항구에서는 대한제국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문무대왕호는 가장 먼저 상해를 들렸다.
‘1919년의 상해라. 특별한 기분이군.’
원역사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언되는 바로 그곳이었다.
상해에 망명 중이던 여운형이 미국 특사 크레인을 접촉,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독려한다. 특사로 선발되어 파리로 떠나게 된 김규식은 독립의 대의를 알리기 위해 국내의 독립선언을 당부한다. 독립선언은 국내외의 호응을 받아 김규식의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일어났으니, 바로 전국적인 3.1운동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외교활동에 뛰어들었으나, 열강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홀대를 예상하고 있던 김규식은 정치인, 언론인, 예술인,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식민지 운동가들과 접촉하며 한국 독립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했다.
하지만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일부 진보적인 인사들을 제외하면 한국 독립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노력의 결과 만국사회당대회(인터내셔널)에서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열강 정부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승전국의 식민지는 모두 외면받았다. 약소국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여기선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이란 말이지.’
주프랑스 대한제국 대사 김규식은 전권대표단의 일원으로, 윌슨을 의장으로 하는 국제연맹 규약위원회 23인 중의 한 명이었다. 김규식은 유창한 언어능력과 외교력으로 당당히 한국을 대표했다.
역사의 놀라운 변화는, 한국인들의 가능성을 만발하게 하고 있었다. 본래 역사에 기록된 이들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상해에서 남경정부(북양정부) 외무총장과 회견한 이선은, 곧바로 영국령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에서는 이선의 도착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바로 중화민국 대총통이자 호법정부 대원수인 손문이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 동아(東亞)의 영웅을 마침내 뵙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중화민국 대총통 손문입니다.”
“대총통 각하, 짐 역시 중국 혁명의 지도자인 각하와 회견하여 기쁩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한중 우호의 새로운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선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손문은 정중한 태도로 악수를 받았다.
명목상 이선과 손문 모두 국가원수였으므로 동등했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대한제국 황제인 이선과, 광동·광서·사천·운남·귀주·호남 6개성의 수장으로 추대되어 중국 일부만을 통치하고 있는 손문의 처지가 같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영국은 공식적으로 북양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손문의 홍콩 방문은 호법정부 대원수가 아닌 개인자격으로서의 방문이었다.
그럼에도 이선이 손문을 동등한 국가원수로 대우하여 맞이하니, 손문과 국민당 인사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중국 혁명은 한국과 폐하께 큰 빚을 졌습니다. 이 손문은 진작부터 감읍하고 있었던바, 이 자리를 빌려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해혁명 이전부터, 이선은 김옥균과 익문사를 내세워 손문과 혁명파를 후원해 왔다.
1916년 호국전쟁 에서도 원세개 정권을 부정해 손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 주었다.
대한제국도 공식적으로는 북양정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광주(광저우) 영사관을 통해 호법정부에 거듭 자금과 무기를 지원해 왔다.
손문과 국민당으로서는 한국의 호의, 즉 이선의 호의가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짐은 왕도가 패도를 누르고 승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웃나라의 지도자로서, 중국 인민의 대표자이자 왕도를 따르는 대총통을 지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거듭 감격할 따름입니다. 황제 폐하야말로 왕도정치의 구현자이시며, 귀국은 중국의 가장 소중한 이웃입니다.”
손문은 진정으로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열혈 혁명가이나, 정치가로서는 지나치게 순수한 손문으로서는 ‘한국 황제’가 ‘중국 혁명’에 이토록 호의적이라는 사실에 놀랍고 기쁠 따름이었다.
‘어차피 손문에게 중국 전체를 통일하여 지배할 능력은 없다. 그래도 손문에게는 힘은 없어도 명분은 있으니까. 북양군벌 중심으로 중국을 통일하려는 단기서를 견제하려면 손문이 버텨 줘야지.’
이선의 손문 지지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인 외교 방략의 일환이었다.
손문은 실로 ‘걸어 다니는 대의명분’이나, 능력이 뒤따라 주지 못했다. 중국 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는 받고 있으나,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군벌들에게는 눈엣가시 혹은 이용대상일 뿐이었다.
손문이 호법정부 대원수로 6성을 지배하며 20만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고는 하나, 이 역시 군벌 연립정권인 건 매한가지였다.
사천군벌 채악, 광동군벌 진형명, 광서군벌 육영정, 운남군벌 당계요가 대륙 최강인 북양군벌에 맞서 연합한 형태였다. 이들은 프로이센식 통일과 중앙집권을 밀어붙이고 있는 단기서에 맞서 연성자치를 지지했고, 손문을 추대하여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에 가까웠다.
「중화민국 약법 수호! 매국적 북양정권 타도! 중화혁명! 북벌!」
손문이 열성적으로 북벌과 북양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남방의 군벌들이 호응, 호남과 복건으로 진격을 단행하여 북양정부를 위협하는 효과를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선이 교착되자, 한차례 크게 무력시위를 한 남방 군벌들은 북양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무력으로 남방을 제압하는 데 실패한 단기서도 타협의 여지를 보였다.
대전쟁의 종전으로 열강이 다시 중국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한국 등 연합국은 공동으로 화평을 권고했다.
1918년 12월, 결국 정전과 남북화의가 합의되었다. 1919년 3월에 상해에서 남북화의가 개최되어, 남북 간에 당면한 중요문제들을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파리강화회의에는 북양정부가 임명한 대표단이 파견되었고, 호법정부도 승인했다.
“매국적인 단기서 정권은 중국의 적입니다. 단기서가 일본의 앞잡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귀국에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단기서는 대전 기간 동안 일본과 결탁했고, 일본에서 막대한 차관을 들여오는 대가로 중국의 이권을 넘겨주었다. 단기서 본인은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중국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지만, 반대파에게는 친일파로 단단히 찍힌 상황이었다.
“일단 남북화의가 결정되었으니, 평화적인 해결책을 논의해보시지요. 짐이 보기에 지금은 단기서보다 일본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정권 교체로 대중 정책이 바뀐 게 아니었습니까?”
단기서를 밀어주었던 대외강경파 고토 내각이 ‘쌀 소동’으로 실각하고 온건파 하라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의 대중 정책도 변화가 있었다. 일본의 지지를 상실한 단기서는 타협적으로 나왔고, 정전과 남북화의에 동의했다.
마침내 손문에게는 단기서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이선을 찾아와 지지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근본이 바뀌는 건 아니지요. 일본은 이미 영국으로부터 독일령 산동을 넘겨받기로 합의했습니다. 귀국 대표단이 결사반대하겠지만, 일본은 어떻게든 관철시킬 겁니다.”
손문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산동은 명백히 중국 영토입니다. 단지 독일이 압박하여 빼앗아 갔을 뿐이지요. 독일제국이 몰락한 지금, 어찌 일본이 이를 가로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안될 일이지요. 대한제국은 약속한 바와 같이, 현재 관할 중인 연대(옌타이)에서 철수하고 귀국에 돌려드릴 것입니다.”
한국은 이미 대련과 요동반도가 있으니, 중국의 격렬한 민족주의 여론을 촉발시킬 산동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선의 속내를 모르는 손문은 다시금 감격했다.
“역시 중국의 진정한 벗은 귀국뿐입니다!”
“짐은 파리에서, 일본이 산동을 귀국에 돌려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총통께서는 단기서가 일본과 다시 결탁하여 산동을 넘겨주지 않도록 확실히 견제해 주십시오.”
이선의 약속은 공수표나 다름없었다. 일본이 산동 점령을 고수한다면, 한국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확고한 대의명분은 얻을 수 있었다.
단기서도 결코 산동을 일본에 넘겨줄 생각이 없었지만, 이선은 교묘하게 이간질을 했다.
군벌에 대한 분노와 이선의 교묘한 말에 넘어간 손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진정으로 중국의 벗이자, 동양의 대표자이십니다! 4억 중화 인민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인민이 동양을 대표하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폐하를 희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디 서양 열강에 맞서, 동양의 주권과 존엄을 지켜 주십시오.”
과도한 찬사에 이선은 낯간지러울 지경이었지만, 손문의 어조가 열정적이고 진지했으므로 짐짓 겸손한 태도로 받았다.
“짐이 어찌 동양을 대표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동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시아의 주권과 존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선은 ‘아시아의 주권과 존엄’이라는 추상적인 이상을 위해 파리에 가는 게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한 세계 신질서 구축을 확립하고자 가는 것이었다.
‘물론 언젠가 한국이 아시아를 대표하여 서양 열강과 당당히 맞설 수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수십 년은 이르다. 서양 열강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시기다.’
이선은 당대에 유행하던 아시아주의를 경계했다.
‘서양 열강에 맞선 아시아의 단결이라는 이상은 그럴싸했지만, 귀결은 대동아경영권이 아니었던가. 대한이 아시아주의에 동참했다가는 일본처럼 대동아경영권을 부르짖을 수도 있다.’
아시아주의 자체에 내포된 이상은 좋을지라도, 일본 우익이 신봉하는 이념이자, 한국에서도 팽창주의 세력이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추상적 이념이 정치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됐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냉철한 정세인식과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숙련된 솜씨를 보여 줄 때였다. 36년 외교 경력의 노련한 외교관 이선의 최대 최고의 무대가, 파리에 마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