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96
3부 11화 급진화의 파도
서구 열강이 러시아에 두려움을 느끼는 건, 과거 제정처럼 압도적인 국토 면적과 병력의 물량에 있지 않았다. 바로 ‘러시아 혁명’ 그 자체를 두려워했다.
1917년 이래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명백히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혁명이었다.
“노동자·농민·병사 동지 여러분! 혁명의 수호자, 러시아 병사의 영웅적인 항전으로 독일 제국주의자들을 격파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열망하는 인민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제 동원을 해제할 것입니다. 군복을 벗은 병사는 곧 노동자요 농민입니다. 승리자인 인민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빵·토지·자유! 공화국 만세! 소비에트 만세! 혁명적 민주주의 만세!”
“빵·토지·자유!”
“만세! 만세! 만세!”
1918년 11월, 독일의 패망과 함께 러시아는 승전국 대열에 합류했다.
200만이라는 전사자, 민간인 150만 사망자, 독일군에 의해 짓밟히고 불타 버린 상당한 국토. 비록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어쨌건 승리는 승리였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 혁명으로 전환할 때다. 반동세력을 제압해야 한다.”
“전쟁도 끝났으니 사회주의자들이 미쳐 날뛰겠지. 이제 적은 독일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다.”
대전쟁 발발과 함께 결성된 영국의 ‘거국내각’이든, 프랑스의 ‘신성한 동맹’이든, 독일의 ‘성내평화’든, 러시아의 ‘통일전선’이든, 일단 당면한 외적에 맞서 국가를 수호하자는 좌우익의 단결이 이뤄졌다.
독일이라는 적에 맞서 가까스로 유지되던 러시아 공화국의 일시적 단결은 종전과 함께 해제되었다.
종전 이후 급속도로 전개되는 급진화는 정부나 특정 세력이 부추기는 게 아니었다. 두마든 소비에트든, 집권 정치세력은 중앙에서 통제 가능한 혁명을 원했다. 사회혁명당이든 사회민주당이든, 정부 당국에서는 무질서를 반혁명 못지않게 혐오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넓고 인구가 많았다. 붕괴되어 가는 중앙의 통제력으로는 도저히 지방을 억제할 수 없었다. 수백 년간의 누적된 분노가 급진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운 건, 결코 차르나 귀족, 자본가나 지주를 위해 싸운 게 아니오! 그 개자식들은 우리를 전쟁터로 내모는 동안 인민을 착취하고, 배후에서 혁명을 뒤엎으려고 했소! 이런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소?”
“용서할 수 없소!”
“혁명의 승리자인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콘스탄티노플 대신에 우리의 토지를!”
“옳소!”
수백만의 병사가 동원해제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넓은 국토와 열악한 철도 사정으로 인해 동원해제는 시일이 소요됐다.
수년간의 파괴적인 전쟁, 수백만 병사들의 죽음,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제정 장교단에 대한 분노, 평화와 토지에 대한 열망, 희생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불만으로 가득 찬 병사들 사이로 급진 선동가들이 속삭였다.
전선에서 귀환하는 병사들이야말로 가장 폭발적인 급진세력이 되었다. 대부분 빈농 출신인 병사들은 토지개혁을 실시한 공화국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가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착취자들에게 죽음을!”
지방, 특히 지주와 농민의 갈등이 심각했던 지역들에서 폭력적인 양상이 빈번히 발생했다. 폭력적 양상은 전통적 곡창지대인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발트해 연안은 독일군의 점령과 착취에 시달렸던 만큼, 독일이 세운 괴뢰정권에 부역해 ‘친독 부역자’로 낙인찍힌 귀족과 자본가, 지주, 독일계와 유대계에 대한 증오가 폭발했다.
“반역자들! 독일에 빌붙은 반역자들을 죽여라!”
“인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들을 죽여라!”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은, 재판 없는 처형이 횡행했다. 귀환병들은 전장의 폭력성을 내면화시켰고, 고향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쟁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다.
모스크바로 이전한 두마와 소비에트는 지방의 급진화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사적인 보복을 금한다는 훈령이 잇달아 발령되었지만, 귀환병들은 독자적으로 노병위원회를 구성해 숙청에 나섰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빨갱이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무력이 없잖소?”
“무력은 없어도 자금력은 있지. 용병을 고용합시다.”
“누가 용병이 되어 준단 말이오?”
“우리와 반대로 무력은 있지만 굶주리고 버림받은 집단이 있소. 바로 독일군 잔당이지.”
1918년 11월, 패전과 함께 동부전선의 독일군도 무장해제와 귀환령이 떨어졌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기고 있었단 말이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리보니아, 쿠를란트, 핀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독일군에 정복됐다! 우리는 페테르부르크 문턱까지 갔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패배자란 말이냐?”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명백히 러시아 영토 깊숙이 들어가 있었으므로, 패배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서부전선보다 훨씬 강했다.
독일군 장병들 대부분은 전쟁에 지쳐 있었으므로 순순히 무장해제와 독일로의 귀환을 받아들였지만, 패전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장병들은 그대로 점령지에 눌러앉아 버렸다.
“이건 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음모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조종을 받은 독일 사회민주당 놈들이 반역해서 패전을 조장했다!”
“반역자 빨갱이들이 지배하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 국제 사회주의 음모의 본산인 러시아 빨갱이들을 먼저 타도해야 한다!”
패전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 인지부조화에 빠진 장교단은 ‘유대-마르크스주의 음모론’에 빠져들었다. 러시아 반혁명 세력과 접촉하며 음모론은 확신이 되어 곧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여러분이 바로 보셨소. 작금의 두마와 소비에트를 주도하는 인사들은 겉보기에는 러시아인이지만, 실상은 유대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오. 그들의 배후에는 러시아와 유럽을 타락시키고 멸망시키려는 유대-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있소. 기독교 문명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을 벌여야 합니다.”
숙청의 위기에 몰려 있던 귀족과 자본가, 지주들은 독일군 잔당과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특히 발트 일대에서 독일계는 ‘자본가·지주’로 인식되는 만큼, 계급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독일군 잔당과 손잡는 길을 택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서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독일군 잔당은 이른바 ‘강철군단’을 결성하여 그들만의 전쟁을 이어 나갔다.
표적은 바로 지방 소비에트, 그리고 러시아 혁명정부였다.
“전쟁이 끝난 줄 알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뭐긴 뭡니까? 내전이란 말이지요. 반혁명 세력이 외세와 결탁하여 공화국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즉각 동원해제를 멈추고, 다시 병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이 판국에 동원령을 다시 내리면 병사들이 퍽이나 듣겠소. 오히려 총부리를 모스크바로 향해 돌리지 않으면 다행이게.”
전쟁이 끝나자마자 전면적인 동원해제를 실시한 러시아 공화국은 당황했다. 당장 투입시킬 수 있는 병력은 겨우 수 개 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방위에 필요한 병력이었다. 그렇다고 동원해제를 중단했다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열망하는 병사들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더 큰 문제는 식량입니다. 전쟁으로 올해 작황이 최악인데, 식량 수매와 철도 사정마저 좋지 못해 도시에 식량이 공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지만, 예전처럼 연합국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요?”
“퍽이나 도와주겠습니다. 설령 도와준다 한들, 저들이 지원의 대가로 뭘 요구할지 압니까?”
사회민주노동당의 반대에도, 사회혁명당은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철수를 시작한 연합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과 영국군, 프랑스군과 체코군은 무르만스크와 아르한켈스크를 통해 철수하는 중이었고, 한국군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극동으로 철수 중이었다.
러시아의 요청에 연합국 최고위원회는 거부했다.
“이미 우리도 동원해제를 내렸고, 병사들은 본국으로의 귀환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정간섭을 원치 않습니다. 식량 상황은 우리 역시 원활하지 못하는데, 귀국을 지원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러시아 국내의 일은 러시아가 해결하십시오.”
연합국은 종전과 동원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내심 혁명정부가 국내 문제로 곤란을 겪어 외부 문제에 개입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독일군 잔당이 러시아 혁명을 견제한다면, 그야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서방 부르주아 놈들, 독일과 우리가 공멸하길 바라는 모양이군.”
“기아가 문제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국내 반혁명 세력의 준동, 독일군 잔당의 개입, 연합국의 거부, 도시의 식량위기는 러시아 중앙정치도 급속도로 좌경화시켰다.
“농촌이 반혁명세력의 온상이 되었는가? 우리는 토지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어찌 혁명을 이토록 외면하고 있단 말인가!”
“농촌의 식량상황도 심각하다. 그런데도 도시에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의무라도 있는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는 혁명의 수도다! 혁명을 이끄는 전위계급이 사라지면, 대체 어찌할 셈인가?”
도시와 노동자를 대변하는 사회민주노동당(RSDLP)과, 농촌과 농민을 대변하는 사회혁명당(SR) 간에 분열이 발생했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다지만,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노동당과 인민주의 사회혁명당 간에는 뿌리 깊은 상호불신이 존재했고,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는 순간 마침내 간극이 드러났다.
“기아와 내전을 막으려면, 강력한 지도력으로 지방을 통제하고 반혁명을 제압해야 한다.”
“공안위원회가 필요하다. 자코뱅의 선례를 두려워하지 말라. 누군가는 혁명의 로베스피에르가 되어야 한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프리즘으로 현 상황을 비추어 보았다.
지금의 위기는 1793년의 혁명 프랑스와 비슷했다. 기아 위기, 지방 반란, 반동 확산, 외세 개입, 포위된 국가, 거대한 공포.
1793년에 급진파 자코뱅이 집권했듯이, 1918년 러시아에서도 급진파가 권력으로 나아갔다.
“공화국 정부는 반혁명으로부터 혁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단행한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 인민위원협의회로 집중된다.”
1919년 1월, 공교롭게도 제헌의회에서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이 선포된 지 1주년이 될 무렵, 연립정부가 붕괴했다.
두마 의장 체르노프와 사회혁명당 우파는 실정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 좌파가 손을 잡아 신정부를 구성했다.
인민위원협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울리야노프(RSDLP 중도파), 부의장 마리야 스피리도노바(SR 좌파), 외무인민위원 레프 트로츠키(RSDLP 좌파), 내무인민위원 이라클리 체레텔리(RSDLP 우파), 국방인민위원 세르게이 카메네프 장군(SR 중도파)이 일종의 공안위원회를 구성했다.
두마와 소비에트에서 가까스로 다수를 확보한 신정부는, 자신들을 이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Bolsheviks)’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소비에트의 볼셰비키 동지 여러분,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수호와 세계혁명을 위하여 투쟁할 것입니다. 혁명을 파괴하려는 세력의 준동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피에는 피로, 강철에는 강철로 타격할 것입니다!”
“와아아아아!”
원역사에서 레닌이 자처한 ‘볼셰비키’ 분파와는 다른,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의 다수파를 상징하는 볼셰비키가 등장했다.
이들은 원역사의 볼셰비키보다는 좀 더 온건했고, 대중친화적이고, 의회제 민주주의를 용인했으며, 유혈투쟁보다는 무혈투쟁을 선호했다.
하지만 급진화는 피할 길이 없었다.
이미 대중은 좌우익 모두 급진화되고 있었으며, 세상을 뒤엎길 원했다. 정치세력은 이를 뒤따라 가는 것에 가까웠다. 그동안 지방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안을 중앙이 사후 승인하기 급급했다.
지방의 통제력을 되찾고, 인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길 원하는 볼셰비키 정부는 온갖 급진적인 포고령을 반포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서방 연합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우려스럽게도, 러시아를 넘어 독일과 중부유럽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우려스러운 일이었지만, 독일과 중부유럽의 우익과 지배계급에는 현실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동부전선의 독일군 잔당, 이른바 ‘강철군단’이 반혁명 성전(聖戰)의 선봉에 섰다.
“독일기사단의 후예인 프로이센의 장병들이여! 우리 선조들이 이교도에 맞서 동방을 개척하고 유럽 문명을 확장했듯이, 우리는 유대인과 무신론자에 맞서 성전을 개시해야 한다!”
중세 십자군 전쟁은 성지 예루살렘을 놓고서 이슬람 세력과만 싸운 게 아니었다. 이른바 북방십자군, 발트해 일대를 침략해 다신교를 믿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복속시키고 개종시킨 독일기사단도 있었다.
독일기사단의 후예가 바로 프로이센 공국이고, 프로이센 공국의 후예가 곧 독일제국이었다.
13세기로 되돌아가 ‘동방의 야만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여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전쟁이 개시되었다.
그 야만성과 폭력성은 중세 못지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유대-마르크스주의를 타도하자!”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슬라브인에 대한 인종적 우월의식이 있었고, 러시아를 상대로 한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왔다.
그런데 돌아온 건 굴욕적인 패전이었다. 이들은 패전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고, 패전이 진실로 ‘유대인-마르크스주의자’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빨갱이, 유대인, 무신론자는 모조리 죽여라!”
독일군 잔당은 러시아 귀환병들에 비해 숫자는 적어도, 경험과 조직력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강철군단은 순식간에 빌뉴스, 리가, 레발(탈린), 렘베르크(리비우) 등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4년간의 전쟁으로 폭력성이 극에 달해 있었다. 특히 폭력은 유대인에게 집중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좌익에게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자이자 착취자로 인식되었고, 우익에게 유대인은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혁명의 배후조종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일부 그런 인사들이 있을지라도, 대부분의 동유럽 유대인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하층민이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의 해묵은 분노는 유대인에게 집중되었고, 좌익에 이어 우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끝나지 않은 강철 폭풍 속에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있었다.
위대한 독일, 총력전과 영원한 전쟁, 자유주의를 향한 경멸, ‘유대-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증오.
지난 4년간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복무하고 살아남아,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강철군단에 합류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상병의 새로운 자아가 깨어나고 있었다.
1919년 겨울. 세계혁명의 전망 속에서, 추위와 기아, 내전과 학살이 러시아 서부에서 불길한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대전쟁 못지않은 거대한 파도가 러시아를 덮쳤다.
비단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급진화의 파도는 이윽고 유럽을 넘어 세계로 확산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