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597
3부 12화 유럽, 혁명의 시대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볼셰비키’ 집권 후, 전쟁으로 인해 미뤄졌던 ≪평화에 대한 포고≫,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과 ≪노동자 피착취 인민의 권리선언≫이 잇달아 선포되었다.
민족 권리선언에 따라 이미 독립한 폴란드·핀란드의 완전한 독립이 재차 승인되었고, 우크라이나·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자캅카스(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연방 내 자치도 승인되었다.
‘민족들의 감옥’이었던 러시아의 놀라운 유화적 조치에, 소수민족들은 기꺼이 민주연방공화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나이되 분리할 수 없는’ 대(大)러시아를 지지하는 우익은 독립과 자치 승인에 격렬히 비판했지만, 인민위원협의회는 두마와 소비에트의 다수를 유지해 승인을 받았다.
이는 울리야노프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의 대의에 동감했지만, 동시에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 혁명이 유럽을 넘어 세계로 확산된다면, 현재의 국경은 무의미해진다.”
“다민족제국의 사회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민족문제를 배제할 수 없다.”
“식민지는 제국주의 국가의 약한 고리다. 러시아 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약소민족의 혁명적 민족주의자와 진보적 부르주아지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혁명 러시아의 대외전략은 울리야노프의 말처럼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였다.
원역사와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빈에서 교육을 받고 정치활동을 한 울리야노프는 민족 문제를 중시한 ‘오스트리아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계급 문제만 중시하고 민족 문제를 등한시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민족 문제를 혁명의 중대 사안이라고 여겼다.
혁명 러시아는 ‘식민지와 약소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독립과 자치 승인으로 선례를 보였다.
강대국, 특히 서방 제국주의 국가의 핍박을 받는 약소국 민족주의자는 연합대상이었다. 해방을 원하는 식민지 독립투사들은 러시아를 후원자로 인식하게 될 터였다.
트로츠키가 파리강화회의에서 식민지 해방의 수호자를 자처한 이유도, 이러한 정세 판단 위에서 세계혁명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즉각적으로 실시할 것을 선포한다.”
이윽고 제헌의회에서 합의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시행이 미뤄진 8시간 노동, 15세 이하 미성년자 노동 금지, 질병과 상해로 인한 노동력 상실에 대한 국가보험 실시, 모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연금 실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더 나아가 주택과 토지 분배, 토지개혁의 완수, 기간산업에 대한 국유화 등이 선포되었다.
정부가 당장 실시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급진적인 선언적 조치만으로도 신정부는 다수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와아아아!”
“혁명 만세!”
“공화국 만세!”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인 사회혁명이 시작되었다.
완전한 국유화를 제시한 정통 마르크스주의 강령과 달리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도 허용되었다. 시장경제와 사유재산도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중산층의 소기업 경영과 농민의 토지 경영은 장려되었다. 일단 기아와 경제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실용적인 판단에서였다. 그 형태는 원역사의 신경제정책(NEP)과 비슷했다.
도로, 철도, 항만, 통신, 탄광, 전력 등 각종 인프라와 기간산업은 국유화대상이었다. 대공장과 주요 대기업, 대자본과 거대은행은 국유화되었다. 공장주는 국가의 급료를 받는 공무원이 되었고,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했다.
지방의 대토지가 지주에게서 몰수되어 농민에게 분배되었듯이, 도시의 귀족과 부르주아 저택이 몰수되어 노동자에게 분배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황궁은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완전히 미친 세상이로구나. 저 미치광이 사회주의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잘한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이들이 이렇게 우대받던 나라가 존재했던가? 러시아 민주주의 연방공화국 만세!”
러시아의 개혁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회의 출현이었다. 전례 없는 실험에 유산계급은 공포를 느꼈지만, 무산계급은 환호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전쟁을 겪은 모든 국가는 변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패전국에서는, 분노에 찬 국민에 의해 변혁에 대한 압박이 훨씬 강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카우츠키와 베벨을 배출한 사회민주주의 종주국, 독일이 새로운 변혁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자유와 평화를 열망하는 독일 국민의 염원은 민주적 선거로 확고히 드러났습니다! 독일 공화국 만세!”
독일 전 국민이 최초로 민주선거를 집행한 1919년 1월 제헌의회 선거.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당대에서 가장 민주적 선거였다. 3천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1916년 미국 대선에 투표한 인원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
“사회민주당 133석, 독립사회민주당 82석, 중앙당 81석, 민주당 75석, 국가인민당 44석…….”
총선 결과는 좌익의 압도적 우세였다. 사회민주당이 무난히 승리를 거두어 제1당이 되었다.
독일 공화국을 주도한 다수파 사회민주당(MSPD)의 승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한 급진적 분파 독립사회민주당(USPD)이 제2당으로 올라선 건 놀라운 결과였다. 독립사민당은 러시아 혁명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급진좌파였다.
중도 우파 중앙당은 프로이센의 억압을 받던 가톨릭교도들의 몰표를 받는 당이기에 다른 우익과 색채가 달랐고, 중도 좌파 민주당은 프로이센 독재에 반대한 세력의 후신인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독일을 지배했던 프로이센 융커와 부르주아지는 침묵했다. 유의미한 우익정당은 국가인민당뿐이었는데, 이들은 전체 의석수의 10%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건 황실, 융커, 군부, 부르주아지의 야욕이다. 이들은 파멸적인 전쟁을 도발했으며, 국가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독일 본토에서는 아직 음모론이 지배적이지 않았다. 독일 국민을 지배하는 감정은 전쟁에 대한 분노였다. 국민의 분노는 대전쟁을 촉발한 프로이센 군부와 융커를 향했다. 군복을 입은 장교들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적의에 찬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현 단계는 프로이센 봉건 과두제를 혁파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이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선거 결과에 만족했다. 이들은 독일을 변혁할 기회였던 1848년 혁명이 프로이센의 군홧발에 짓밟힌 바로 그 지점이 70년 만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다수파 사민당은 사회혁명을 원치 않았고,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방식은 더욱 사양이었다.
사민당은 프로이센을 혐오하고 공화국을 확고히 지지하는 가톨릭 중앙당 및 자유주의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 민주개혁에 돌입했다.
대통령으로는 마지막 제국총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선출되었고, 총리에는 11월 혁명 당시 의사당에서 공화국을 선포했던 필리프 샤이데만이 선출되었다.
“우리는 연립정부가 반동과 손을 잡지 않고, 민주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감시하는 혁명적 야당으로 남을 것이다.”
독립사민당은 연립정부에서 이탈하여 제1야당이 되었다. 본래 사회민주당에서 전쟁 지속 문제로 갈라져 나온 정당이니만큼,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독립사민당의 가장 급진적 분파, 스파르타쿠스단(Spartakusbund)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사회주의 혁명을 원했지만, 무력 봉기를 요구하는 단원들의 요구를 누르고 제헌의회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권좌로 나아갈 때가 아니다. 독립사민당은 야당으로 남아야 한다. 기만적이고 타협적인 에베르트-샤이데만 정권은 인민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소수의 음모적 봉기가 아닌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아 권좌로 나아가야 한다.”
원역사에서 베를린은 사민당과 스파르타쿠스단 간에 격렬한 내전의 양상을 보였고, 사민당 정부에 고용된 우익 자유군단에 의해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러시아 역사의 변화는, 독일에서도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게 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민주개혁에 동의했다.
“급진적 혁명을 막으려면 선제적 개혁이 필요한 법입니다.”
사민당 정부는 러시아처럼 국유화에 돌입하지는 않았으나, 사회개혁에 나섰다. 대자본을 압박해 8시간 노동과 노동조합의 경영 감시를 비롯한 노동자 권익 상승에 동의하게 했다. 주택공급과 식량공급을 약속하고, 비스마르크가 혁명을 막기 위해 도입했던 각종 사회보험과 공공부조의 적용대상을 대거 확대했다.
사회혁명의 공포를 느끼고 있던 독일 부르주아지는 개혁에 순순히 동조했다.
“러시아 꼴 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나마 사민당은 말이 통하는 작자들이니까.”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공포’와, 제헌의회 선거결과는 우익을 당혹스럽게 하고 당분간 침묵시켰다.
독일 역사상 군부-융커-부르주아지의 동맹이 이렇게까지 허약하고, 비스마르크에 의해 억압받던 노동자-가톨릭-자유주의 연합이 이렇게까지 강한 적이 없었다.
우익의 기반인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에 대한 공포보다 오히려 서방에 대해 더욱 분노를 느꼈다.
“어째서 서방은 해상봉쇄를 풀지 않는 건가? 정녕 독일 국민을 모조리 굶겨 죽일 생각인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영국이 주도하는 해상봉쇄는 해제되지 않았다. 연합국은 강화회의의 결과를 독일이 무조건 받아들일 지렛대로 해상봉쇄를 연장했다.
그 결과 독일과 중부동맹국의 식량난은 악화되었다. 국제무역에서 배제되고, 기존처럼 동유럽에서 수탈도 못 하는 상황이니, 식량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중부유럽에서는 기아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다. 베를린과 빈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봉쇄를 풀지 않았다.
“연합국이 독일에 전쟁배상금으로 2,200억 마르크를 요구하고 있다는군. 그것도 금으로 말이야.”
“뭐라고? 전쟁은 독일 혼자서 도발했나?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배상금을?”
“영원히 독일을 빚의 노예로 만들 생각이겠지.”
윌슨이 요구한 민주개혁을 착실히 이행하면, ‘15개조 요구’에 근거한 관대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독일인들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참여가 배제된 파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흉흉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신정부를 주도하는 독일 정치가들도 연합국 영토를 점령하고 수탈한 것에 배상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연합국이 요구하는 액수는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대표로 파견된 트로츠키가 배상금 철회를 요구했다는군. 독일 제국주의가 저지른 범죄를 전체 독일 인민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이야.”
“즉각적인 해상봉쇄 해제도 요구했다더군. 패전국 인민을 인질로 잡아서는 안 된다고.”
“허어, 그나마 파리에서 우리를 옹호하는 게 러시아뿐이라니! 미치광이 급진좌파들이 지배하는 줄 알았는데, 러시아를 다시 봐야겠네.”
“독일을 갈라 먹을 궁리만 하는 서방보다, 차라리 러시아가 낫다! 러시아 만세!”
‘어차피 배상금 받아봐야 서방으로 갚아야 할 빚, 안 받고 독일인들의 환심을 사는 게 낫다.’라고 판단한 러시아 공화국의 계산이 먹혀들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제 패전국 독일보다 승전국 서방이 더 혁명에 위협적이라 판단했고, 오히려 독일을 끌어들여 ‘혁명 블록’을 결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패전국 국민의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자극하는 러시아의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은 베를린만 지배하지 않았다. 기아 위기에 직면한 빈과 부다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경봉쇄 해제하라! 식량을 공급하라!”
“대전쟁 발발이 빈과 베를린만의 책임이라고? 베오그라드와 페테르부르크의 책임도 그에 못지않다! 파리와 런던은 아무런 책임도 없나?”
“설령 책임이 있다 해도, 이는 합스부르크와 호엔촐레른의 야욕 때문이다! 왜 모든 인민에게 책임전가를 하는 거냐?”
도나우 연방으로 재편한 옛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도 혁명의 기치가 솟아올랐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어찌 됐건 황제이자 최고사령관으로서 패전 책임을 지고 퇴위하여 스위스로 망명했다. 후계자로는 조카인 카를 대공이 지목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이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카로이 4세로 즉위하자마자, 카를은 혁명의 파도에 대면해야 했다.
“짐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겠소. 국민의 대표자인 그대들이 짐을 대신해 통치권을 행사하기를 바라오. 어떻게든 제국의 해체만은 막아 주시오.”
카를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뜻을 계승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SDAPO)의 카를 레너(Karl Renner)를 오스트리아 총리로 임명하고, 헝가리 자유당의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 백작을 헝가리 총리에 임명하여 연방의 결속을 당부했다.
민족 문제를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레너는 완전히 자유로운 민족들인 도나우 연방으로의 개편을 통해 제국을 보전하려 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울리야노프의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역으로 오스트리아에도 중대한 참고사례가 되었다.
레너와 사회민주노동당 정부는 어떻게든 연방을 보전하려고 했다. 이미 연합국에 의해 승인받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연방은 민족구성원에 따라 완전한 자치를 승인했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봉건주의 철폐! 토지개혁 실시! 기간산업 국유화! 공공주택 보급!”
민족자결의 목소리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큰 게 사회개혁의 요구였다. 빈과 부다페스트에도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빈에는 제국 전역의 독일계 피난민들이 몰려와 인구가 급증하는데, 식량은 당장 비축분도 없었다. 지금처럼 기아로 분노가 지속된다면, 분리주의 요구와 결합되어 급진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선제적 개혁에 나섰다.
러시아의 선례를 따라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의 국유화, 주택 공유화와 분배 조치가 잇달았다. 이른바 ‘붉은 빈(Rotes Wien)’’이라고 불리게 될 개혁 조치였다.
카를 1세는 기득권의 반대에도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이 조치를 모두 승인했으니, 합스부르크 왕조와 연방과 사회민주주의 개혁이 공존하는 기이한 ‘붉은 연방 제국’의 형태를 보였다.
1918-19년, 유럽은 혁명의 격랑에 휘말렸다. 이는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1848-49년 혁명에 비견될 상황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급진화의 파도는 그 어느 때보다 거셌다.
4년간의 파멸적인 전쟁, 수백만의 사상자와 폐허가 된 농토, 셀 수 없이 많은 고아와 미망인, 붕괴한 경제, 기아와 전염병.
그 숱한 희생에도, 전쟁의 결과로 돌아온 건 패전과 끔찍한 궁핍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낡은 구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급진적 혁명에 대한 열광을 낳았다.
승전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파업과 충돌이 급증했다.
‘장기 19세기’를 지배했던 자유주의-자본주의-부르주아 세계의 운명이 이토록 위태로웠던 적이 없었다.
1919년 봄, 이선이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의 유럽 정세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