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00
3부 15화 대의명분과 야욕
이선은 대표단을 존중해 옵서버를 자처했지만, 대한제국 황제를 향한 청원과 회견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이선이 사실상 대한제국 대표단의 단장이나 다름없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군주제 국가, 특히 군주의 권한이 비교적 강한 국가에서는 왕족을 비공식 사절로 파견했다.
예컨대 루마니아는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부인이자 조지 5세의 사촌인 마리 왕비를, 그리스는 왕태자 요르요스와 왕태자비 엘리자베스를, 세르비아는 섭정왕태자인 알렉산다르와 약혼자인 마리아를 파리에 파견했다.
엘리자베스와 마리아는 모두 페르디난트 1세와 마리의 딸이었으니, 즉 그리스 왕태자와 세르비아 섭정왕태자는 루마니아 국왕의 사위였다.
“한국 황제 폐하를 뵙게 되어 저희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짐 역시 루마니아 왕후 폐하, 그리스 왕태자비 전하, 세르비아 왕태자비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선은 정중한 태도로 세 모녀에게 인사했다. 이들의 거처 또한 리츠 호텔이었으므로, 이선은 그들과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마리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불가리아령 도브루자, 러시아령 몰도바와 베사라비아를 포괄하는 대(大)루마니아 캠페인을 홍보하기 위해 파리에 왔다.
요르요스와 엘리자베스는 오스만령 트라키아와 스미르나 등을 포괄하는 대(大)그리스를, 알렉산다르와 마리아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비고나를 포괄하는 남슬라브 통일국가, ‘유고슬라비아’를 요구하기 위해 왔다.
요르요스와 알렉산다르는 국내 사정으로 곧 귀국했지만, 여인들은 계속 파리에 남아 각국 대표단과 접촉하며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루마니아는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및 대한제국과 함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는 데 앞장섰습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루마니아 민족이 사는 모든 영토는 루마니아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동부전선의 전우였던 한국 대표단도 지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루마니아가 참전한 지 4개월 만에 패전하는 바람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발목을 잡기는커녕 물자만 대줬잖아. 루마니아가 패하면서 우크라이나 방어도 위험해졌는데. 독립국도 아니었던 체코군단이 훨씬 잘 싸웠지.’
이선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루마니아는 섣부른 참전으로 독일에게 대파당하고, 중부동맹국에게 완전히 정복되어 항복한 유일한 나라였다. 루마니아가 연합국의 승전에 기여한 바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동맹국이 버티는 데 필요한 자원만 퍼준 셈이었다.
세르비아라면 이선은 더욱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유고슬라비아에 동의할 리가 없었다.
속내는 그럴지라도, 이선은 물론 웃으면서 외교적으로 화답했다.
“한국과는 워낙 거리가 멀고 복잡한 사안이라, 쉽게 답변드릴 수 없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강화회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최대한 존중해서 체결될 겁니다. 대한제국 대표단 역시 민족자결의 원칙이 반영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이들도 딱히 정말로 한국이 개입해 주길 바라고 지지를 호소하는 게 아니었다. 루마니아와 세르비아는 프랑스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갖고 있었다.
윌슨과 로이드조지는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의 확대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클레망소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약화시켜 발칸에 친불 국가들을 강화하고자 했다. 루마니아는 원래 열렬한 친불 국가였고, 세르비아는 유명한 친러 국가였지만 혁명 이후에는 후원자를 프랑스로 갈아탔다.
‘패전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는 건 막아야겠지만, 한국이 발칸 문제까지 나서긴 어렵지.’
이선은 세력 균형을 위해 패전국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냉정히 말해서 한국 입장에선 어차피 남의 일이었다.
그리스-루마니아-세르비아는 이른바 동유럽 ‘소(小)’ 협상국의 일원으로, 불가리아·오스만·오스트리아-헝가리를 희생시켜 영토를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는 않았으니, 그리스 전권대표단을 이끄는 총리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는 세르비아가 요구하는 성립을 경계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2의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다를 바 없고, 발칸의 세력균형을 깰 수 있습니다.”
베니젤로스는 약소국의 대표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수완과 능력을 발휘해서, 3대 거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심지어 윌슨은 30개국 대표단 중에서 베니젤로스가 개인적으로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했다.
이선도 그리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된 것도, 베니젤로스의 화술과 외교력에 감탄해서였다.
“한국이 옛 종주국인 중국을 무찌르고 고토를 수복했듯이, 그리스도 옛 압제자인 터키를 제압하고 고토를 되찾고자 합니다. 요동과 만주가 귀국이 수복해야 할 고토이자 핵심 지역이라면, 콘스탄티노플과 아나톨리아는 그리스가 수복해야 할 고토이자 핵심 지역입니다.”
이선을 찾아온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와 한국의 유사성을 언급하며, 동로마제국의 재건을 꿈꾸는 ‘위대한 이상(Megali Idea)’을 홍보했다.
오스만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와 보스포루스 해협은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국의 군정으로 들어갔다.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한국 역시 군정의 일원으로 초청되어, 해군 부장 안중근이 연합국 해협통제위원회의 위원으로 이스탄불에 부임했다.
해협통제위원회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일본, 한국 ‘7대 승전국’에 그리스까지 8개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 그리스가 한국에도 접촉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요. 그리스야말로 비잔티움의 정통 후계자지요.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귀국의 열망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스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민족자결의 원칙이 존중되어야겠지요. 유고슬라비아 국가는 제2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만드는 격이고, 발칸의 세력 균형을 깰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합니다.”
이선은 그리스에 우호적인 언사를 했다. 윌슨과 로이드조지가 베니젤로스를 강력히 지지하는 이상, 이선도 손을 들어 줄 생각이었다.
“오오, 역시 폐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강력한 그리스는 발칸과 지중해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아무쪼록 한국 대표단의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예, 대표단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베니젤로스는 만족감을 표명하며 이선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선은 베니젤로스의 열정적인 외교, 즉 약소국이지만 탁월한 화술과 설득력으로 열강을 움직여 국익을 최대화하려는 시도를 높이 평가했다. 청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었던 자신의 옛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선은 국익과 관계되지 않은 일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리스야말로 한국과 정말 이해관계가 없지. 그리고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오스만은 망했지만 터키는 무시할 나라가 아니다. 결국 터키의 저항이 그리스를 무찌를 터이니.’
이미 터키에서는 점령과 분할에 맞서 국민적 저항이 조직되고 있었다. 원 역사의 터키는 가장 효과적인 군사적 저항에 성공하여, 패전국 중 유일하게 강화조약을 수정한 나라였다. 별다른 역사적 변화가 없는 이상, 마찬가지일 터였다.
비록 도나우 연방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못 했지만, 비공식 루트를 통해 생존을 호소했다.
“우리는 과거의 제국과 다릅니다. 미합중국과 러시아 연방을 모범으로 삼아 민족자결, 민주주의, 사회개혁을 존중하는 연방국가입니다. 부디 새로운 연방을 위해 관용을 베풀어 주기를 바랍니다.”
윌슨은 미합중국을 모범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도나우 연방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빈에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울리야노프와 트로츠키도 옛 동지 레너와 사회민주노동당이 집권한 연방을 옹호했다.
과거 러시아제국이 범슬라브주의를 부르짖으며 세르비아를 옹호하여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것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지만, 제정을 혐오하는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패전국에도 공정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강화회의가 승전국의 야욕을 위한 영토 분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러시아는 패전국의 옹호자, 약소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그 시도가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를 잇는 사회민주주의 블록을 건설하려는 계획이라고 간파한 영국과 프랑스는 결코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민족들의 감옥이었소!”
“이제 와서 자치를 운운해 봤자, 때는 늦었소.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해체되어야 하오.”
독립과 민족 문제를 놓고 국가 간의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중동부 유럽의 지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그리려는 시도이니만큼,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민족자결의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강대국의 세력권 다툼, 이권 야욕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 * *
이선은 유럽 문제에도 손을 뻗고 있었지만, 결국 한국에는 동아시아 문제의 해결이 가장 중요했다.
3월 2일, 사이온지 긴모치 후작이 이끄는 일본 대표단 후속 인원이 파리에 도착했다. 거리의 한계로 인해 주요 승전국 중에서는 가장 늦은 도착이었다. 그동안은 외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가 일본을 대표하고 있었다.
사이온지는 리츠 호텔을 찾아 이선과 회동했다.
“강녕하시옵니까, 폐하. 외신(外臣) 긴모치가 인사드립니다.”
“원로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작. 그 연세에 기나긴 항해를 했는데도 정정하십니다.”
“원, 송구하지만 아닙니다. 늙은이다 보니 몸이 예전만 못합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원로 사이온지는 이미 나이가 70세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석대표를 맡은 건, 사이온지가 어언 50년 전 프랑스 유학 시절에 클레망소와 친구가 되어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건 차석대표인 마키노였다. 마키노는 사쓰마 파벌로, 그 말은 곧 북수남진파를 의미했다. 동시에 서방과의 친선을 중시하는 외교관이었다.
“이번 회의에서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서양만의 잔치로 만들어 줘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우리 두 나라, 일본과 한국이 합심하여 아시아의 이익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마키노의 말에 이선이 내심 냉소를 흘렸다. 당장 산동을 먹기 위해 중국과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일본이었다. 그런데 아시아의 대표자를 자처하니 냉소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옳은 말입니다. 한일 두 나라는 7대 승전국의 일원이요, 아시아를 대표해 이 자리에 오게 된 만큼,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이선 역시 속내를 감추고 맞장구를 쳐 줬다.
본시 외교란, 뒤로는 칼을 꽂을 준비가 되어 있어도 앞에서는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 법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와 모든 유색인종을 대표해, 인종평등법안을 국제연맹 규약위원회에 상정하였습니다. 반드시 이를 성사시켜, 인종차별을 철폐해야 합니다. 귀국도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일본은 국제연맹 규약 초안 제21조, 모든 종교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 항목에 수정안을 제시했다. 바로 모든 인종과 민족의 완전한 평등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전쟁 중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연합군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공감과 감사의 공동 유대가 형성됐습니다. 국제연맹은 불화의 씨앗인 인종과 민족의 차별을 철폐해야 합니다.」
일본의 제안에 규약위원회의 한국 대표단뿐만 아니라, 산동 문제를 놓고 대립 중인 중국 대표단도 박수를 보냈다. 모처럼 한중일이 하나의 의견으로 힘을 합치는 순간이었다.
“이르다 뿐입니까? 귀국의 제안은 진정 국제연맹의 이상에 부합합니다. 대한국 역시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우리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선은 한국이 인종평등 조항에 적극적인 찬성을 보내리라 확언했다.
‘아직도 인종차별이라니, 미개하다 미개해. 이 제국주의자들은 언제 진정한 문명인이 될꼬?’
20세기 초는 아직 인종차별이 만연한 시대였다.
아무리 한국 외교관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관일지라도, ‘황인’이라는 걸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서양 주재 외교관이나 유학생치고 인종차별을 겪지 않은 이들이 드물었다. 서양을 동경하는 이들도 수모를 당하고 나면 자연히 양가적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서양이 지금은 앞서 있어 배우지만, 언젠가 서양을 뛰어넘고 말겠다는.
근대화된 서양인들은 ‘전근대적’ 비서양인을 여전히 업신여겼지만, 모던을 넘어 포스트모던을 체험한 이선은 20세기의 서양인들을 비웃었다.
많은 이들은 이선이 맹목적으로 서양을 동경하고 추종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이선이 추구하는 건 진정한 의미의 현대화지 서구화가 아니었다. 단지 서구가 먼저 근대에 도달했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선이 추구하는 건 20세기 초의 서구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류큐인, 아이누, 대만인, 중국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일본이 인종 평등을 제안하는 이유가 뭐겠나?’
이선으로선 일본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사실에 박장대소를 터뜨릴 뻔했다. 한쪽에서는 독일령 태평양과 산동 점령을 압박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인종과 민족의 평등을 운운하니 가관이었다.
일본이 식민지 주민들, 이웃 민족들을 얼마나 업신여기는지는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변화한 역사에서는 한국의 힘이 강해졌기에 일본이 한국을 존중하는 것이지, 원 역사의 일본은 조선인 대량학살을 벌일 시기였다. 일본은 철저히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했다.
‘아시아주의에 근거해서? 천만에. 러시아처럼 식민제국의 아픈 점을 찔러 식민지의 호감을 사려는 것도 있겠지만, 일본은 러시아와 달리 서방과 대립을 각오할 용기는 없다. 내부적으로 국제연맹에 회의적인 군부와 여론을 달래려는 거겠지.’
호주와 남아프리카 대표단의 결사반대에 영국도 반대하고, 남부 민주당의 반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미국도 반대할 터였다. 결국 서방을 향한 외교적 수단일 가능성이 컸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선은 일단 인종 평등 문제는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선 자신이 인종차별을 경멸하고 완전한 평등에 동의하는 건 차치하고, 대의명분을 확보해 둬서 나쁠 게 없었다.
이를 지렛대로 삼아, ‘국제연맹은 창설해도 인종 평등은 거부하는 위선적인 서방’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얻어 낼 생각이었다.
세계의 항구적 평화라는 고상한 대의명분을 갖고 시작된 파리강화회의는, 점차 승전국의 야욕을 펼치는 아수라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선과 대한제국은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