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02
3부 17화 유럽의 호랑이, 아시아의 호랑이
3월 하순 윌슨의 파리강화회의 복귀를 앞두고, 강화회의의 주최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접촉했다.
일전에 클레망소가 김규식을 통해 전한 질문의 답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폐하께서 프랑스에 친히 방문해 주시니 깊은 영광입니다. 파리 생활은 어떠신지요. 혹시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귀국 정부와 국민의 환대로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각하의 부상은 괜찮으신지요?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우려가 되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에 다행히도 괜찮습니다. 이 늙은 호랑이를 미치광이의 총알 따위가 막을 순 없지요.”
클레망소를 노린 아나키스트는 배후조직이 없는 단독범으로 드러났다. 좌익을 탄압할 공안사건으로 확대할 수도 있었으나, 당장 강화회의가 중요했던 클레망소는 일축했다. 요양이 끝나는 대로 즉시 회의에 복귀했다.
“폐하, 폐하께서 한국의 외교를 대표한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하하, 짐은 단지 비공식적으로 파리를 방문한 겁니다. 파리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구경해야 할 곳도 많고요. 강화회의에 관한 논의는 전권대표단이 맡고 있습니다.”
이선은 일부러 한발 물러서 상대의 속을 태웠다.
“황제께서 대한제국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지요. 전권대표단도 폐하의 위임을 받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얼마나 숙련된 외교관인지 세상이 아는데, 강화회의에 맞춰 파리에 유람을 오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클레망소의 단호한 말에 이선은 선선히 웃었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다 보니, 도저히 지켜만 볼 수 없더군요.”
“그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회의의 핵심 사안은 4인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습니다. 물밑협상에서 결정되는 것이지요.”
4인위원회란 곧, 윌슨, 로이드조지, 클레망소, 오를란도를 의미했다. 이들이 바로 4대 거두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국력이 미영프 3국에 미치지 못할뿐더러, 오를란도는 달마티아 할양을 승인해주지 않으면 탈퇴하겠다고 압박하고 있어서, 사실상 3대 거두가 모든 걸 주도하는 장이었다.
“흠, 이러니 약소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과 한국도 배제되고 있는 상황이군요.”
“러시아는 당연히 배제시켜야지요. 러시아하고는 도저히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클레망소가 열을 올렸다. 77세인 노정치가의 숙적은 언제나 독일이었다. 독일에 맞선 프랑스의 동맹인 러시아가 이렇게 골칫덩어리가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일본과 한국은, 유럽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기에 그런 것이지, 결코 배제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두 나라는 유럽 문제의 국외자니까요. 그래도 발언권은 행사할 여지가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4인위원회도 일본과 한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합니다.”
클레망소로서도 한국이 필요했다.
7대 승전국 중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서방 연합국’으로 묶인다고는 하지만, 이해관계는 달랐다. 미국은 유럽 전체를 낡은 구세계로 규정한 고고한 승리자였고, 영국은 프랑스를 은근히 견제했으며, 이탈리아는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나머지는 어떤가? 러시아는 밀약 공개로도 모자라 채무불이행까지 하는 최악의 밉상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하위파트너로 기능했다. 프랑스는 한국을 붙잡을 필요가 있었다.
“혹시 제가 김규식 대사를 통해 전달한 제안의 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클레망소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선은 되물었다.
“외교적 보이콧의 기준이 어디까지입니까?
“러시아의 채무불이행과 비밀외교문서 공개를 규탄하여, 연합국 최고위원회에서 축출하고, 강화회의에서 배제하는 겁니다.”
“그런 조치로 러시아가 채무이행을 하리라고 보십니까?”
클레망소는 웃음을 흘렸다.
“허허, 물론 아니지요.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러시아가 끝내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경제제재가 뒤따를 겁니다. 단계적으로 대사관 철수, 러시아 해외자산 몰수, 러시아와의 무역 금지, 국경봉쇄…….”
연합국이 독일에 취하고 있는 조치였다. 즉, 러시아를 패전국과 다름없는 취급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심각하다고 들었는데, 제재가 러시아를 더욱 강경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못 버티고 손을 들게 만들어야지요.”
“짐의 생각으로는, 러시아 정부가 그 정도 예상을 못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궁핍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두었을 겁니다. 굶었으면 굶었지, 굴복하진 않을 겁니다. 나폴레옹의 진격에 맞서 모스크바도 스스로 불태운 러시아인들 아닙니까?”
이선은 프랑스의 아픈 과거를 상기시켰다.
러시아는 단순히 ‘배 째라’를 외치며 채무불이행을 한 게 아니었다. 서방과 단절할 각오를 하고, 베를린-빈-부다페스트를 향해 혁명을 전파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요.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에 맞서 단결해 있었지만, 지금은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러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소수민족들, 혁명의 광기에 반감을 느끼는 우익세력. 이들이 볼셰비키와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오, 언제든지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클레망소는 경제제재를 넘어 군사적 개입을 암시했다.
“짐이 듣기로 각하의 숙적은 독일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이야기만 들으면 러시아로 바뀐 것 같습니다.”
“저의 적은 프랑스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입니다. 지난 50년간은 독일이었지요. 앞으로도 독일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 독일의 힘을 최대한 빼놓으려는 것이지요. 지금 모스크바는 베를린을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게 그들의 혁명 전략이겠지요. 결단코 안 됩니다. 사전에 뿌리 뽑아야 합니다.”
‘호랑이’ 클레망소의 단호한 태도에, 이선은 미소를 지었다.
“각하의 애국심은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타협할 길은 없겠습니까? 작금 한국과 일본이 우방이 되었듯이, 독일이 장차 프랑스의 우방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독일과 싸우다 죽어 간 120만 프랑스 청년들의 가족들은 결코 독일을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결국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이선은 다음 주제로 들어갔다.
“그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강화하려는 프랑스의 복안은, 독일과 러시아 모두를 견제하기 위함이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러시아의 힘과 독일의 두뇌가 하나로 합쳐지는 겁니다. 폴란드와 체코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방벽이 되어 줄 겁니다.”
“신생국으로선 쉬운 일이 아니군요.”
“지금의 독일과 러시아도 신생국이나 마찬가집니다. 독일은 서방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으니,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러시아에 맞서는 선봉이 되어야겠지요. 특히 폴란드는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23년을 지배한 러시아에 대한 오랜 원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재건하려는 야망, 프랑스의 부추김. 빠르게 군대를 건설하고 있는 신생 폴란드는 러시아와 운명의 일전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한국군이 러시아 극동과 만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예, 아직 철군을 완료하지 않았으니까요.”
약 10만의 한국 파병군은 종전 이후 철수를 단행했으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병목 현상, 스페인 독감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이동이 지체되고 있었다. 3월 현재 병력의 대부분은 북만주에 도달했고, 일부는 극동러시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볼셰비키가 문서를 공개한 덕에, 한국이 만주를 얻으려고 러시아제국과 협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한러밀약이 공개된 바람에, 한국의 만주 야욕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세계 분할계획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프랑스가 알자스로렌과 자를란트, 시리아와 레바논을 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지요.”
“하하,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야망을 실천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씀해 주시지요.”
“알겠습니다. 서로는 폴란드와 체코가 우크라이나에서 공세를 개시할 때, 동으로는 한국군과 일본군이 함께 공격한다면, 러시아는 결코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선이 짐작하던 제안이 나왔다. 결국 프랑스는 이 제안을 하려고 그토록 한국과 이선에게 환대를 보내왔던 것이었다.
“한국군이 현재 러시아 극동과 만주에 주둔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시베리아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단숨에 우랄 산맥까지도 뚫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말처럼 쉽나……. 보급은 누가 해 줄 건데?’
이선은 헛웃음을 흘렸다.
“미국과 영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영국은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미국은 계속 설득할 생각입니다.”
윌슨은 러시아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로이드조지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였지만, 1919년 1월에 육군부장관 겸 항공부장관으로 보직을 옮긴 처칠은 적극적으로 러시아 개입을 부르짖었다.
두 호랑이, 클레망소와 처칠은 한마음으로 러시아 개입을 합의했다. 처칠은 노골적으로 볼셰비키를 서구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를 외쳤다.
‘지금의 러시아가 그렇게 위험한 나라인가?’
이선의 생각으로는, 러시아 민주연방공화국은 원역사의 소비에트 러시아와 비교하면 굉장히 온건한 나라였다.
아직 볼셰비키 독재도, 내전도, 적색테러도, 백색테러도, 코민테른 성립도, 세계혁명 선동도 없었다. 급진적 변혁에 나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만, 아직 러시아 국내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러시아의 정치체제, 서구의 고질적인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증), 혁명에 대한 과도한 공포, 채무불이행에 대한 분노, 독일과 러시아가 힘을 합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결합되어 극단적인 조치를 준비하게 만들었다.
“일본하고도 이야기가 된 겁니까?”
“일본 육군은 지난 전쟁에서 얻은 게 하나도 없으니, 언제든지 칼을 빼 들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한국의 선전을 보고 전쟁 막판에 부랴부랴 8만 병력을 파병했던 일본은, 종전 때까지 동부전선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릴없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만 서로 갔다 동으로 갔다 하면서 돌아가는 과정에서 스페인 독감만 감염되어 버렸으니, 육군은 인력과 예산의 낭비라고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육군에게 개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하고 덤벼들 터였다.
“그럼 일본에 맡기십시오. 한국은 개입 안 합니다.”
이선의 거부에 클레망소가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한국이 만주와 극동을 지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폐하도 이럴 때를 대비하여 러시아 황족들을 망명시킨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 도박에, 전선에서 분투한 장병들의 목숨을 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클레망소는 난처했다. 만주를 향한 한국의 야망은 이미 확인한 바고, 일본에 대한 경쟁 심리를 부추기면 한국이 동의하리라 계산했었다.
“La guerre! C’est une chose trop grave pour la confier à des militaires. (전쟁이란 너무나 중요한 것이어서 군인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
이선은 클레망소의 격언을 읊었다.
“다름 아닌 각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토록 문민통제를 중시하는 분이, 군부를 부추겨 전쟁을 조장한다니요.”
1887년 프랑스 군부 과격파가 독일과의 전쟁을 선동했던 이른바 ‘불랑제 사건’ 당시, 클레망소는 군부의 정치개입을 비판하며 문민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Ma formule est la même partout. Politique intérieure? Je fais la guerre. Politique étrangère? Je fais la guerre. Je fais toujours la guerre. (내 공식은 어딜 가나 똑같다. 국내 정책? 나는 전쟁을 한다. 외교? 나는 전쟁을 한다. 나는 항상 전쟁 중이다.)”
클레망소는 ‘la guerre(전쟁)’에 특히 힘을 주며 말했다.
“제가 총리 취임 후에 하원에서 한 연설입니다. 거듭된 공세 실패로 프랑스의 전의가 떨어지고, 탈영이 속출하고, 사회당이 강화를 외치던 시기였지요. 저는 단호히 진압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의 독재에 맞서고, 군부와 우익의 모함에 맞서 간첩으로 몰린 드레퓌스를 열정적으로 변호했던 급진주의자 클레망소는 사라지고, 노회한 전쟁광만이 남아 있었다.
“위대한 프랑스의 승리를, 러시아가 도적질하려고 합니다. 베를린과 빈을 모스크바로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와 체코를 총알받이로 내세울 생각은 아닙니다. 비록 프랑스인들이 4년간의 전쟁으로 지쳤다지만, 필요하다면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보낼 겁니다.”
늙은 호랑이는 아직도 전쟁 중이었다. 이선은 문득 데자뷔를 느꼈다.
‘어디서 많이 봤던 느낌이었더니, 할아버지였군. 늙은 호랑이, 대원군과 닮았어. 국익이라고 판단되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고, 항복하느니 최후의 1인까지 싸울 사람.’
바로 자신의 조부 흥선대원군과 닮았다. 올해 만 77세인 클레망소는 21년 전 대원군이 별세했을 나이와 같았다.
이선이 유일하게 당해 내지 못했던 사람이 대원군이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클레망소는 문득 화제를 전환했다.
“폐하,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한국군의 별명이 호랑이라지요?”
“그렇습니다. 호랑이는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 늙은이의 별명도 호랑이입니다. 승리할 때까지 오직 전쟁뿐이라고 외치니 언론에서 붙인 별명이지요.”
“짐도 각하를 호랑이에 빗댄 삽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어울리시더군요.”
늙은 호랑이는 껄껄 웃었다.
“하하, 이제는 늙은 호랑이입니다. 그에 비하면 폐하는 젊은 호랑이지요. 제가 유럽의 호랑이라면, 폐하는 아시아의 호랑이입니다.”
이선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미묘한 표정이었다.
“12년 전, 폐하께서 파리에 왔을 때는 먼저 동맹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때는 한국이 절박했지요. 이제는 프랑스가 절박합니다. 12년 사이에, 한국의 국력은 크게 성장했지만, 프랑스는 120만의 청년을 잃고 국토는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엄살이로군. 그래 봐야 아직은 프랑스 국력이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러시아도 마찬가지. 우린 신흥국이지만, 너희들은 전통의 강대국 아니냐.’
“세상을 파괴하려고 드는 불곰을 사냥해야 합니다. 동토에서 용맹을 드높인 젊은 호랑이가 나설 때입니다. 막대한 전리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유의 말은 그럴싸했다.
러시아가 내전과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동방에서 기습을 해 연해주와 극동을 탈취하여 완충국을 세운다.
그 대가로 프랑스와 영국은 한국의 만주 지배를 공인하고, 아시아의 열강으로 존중한다.
‘너무 유혹적인 제안이라 넘어가겠군그래.’
이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유혹을 뿌리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도 중요한 사안이라, 즉답을 내릴 순 없습니다. 논의 후에 전해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