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1
– 61화에 계속 –
61화 조선책략(朝鮮策略)
“너의 말이 참으로 나의 심금을 울린다. 바야흐로 지금은 서양의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일 때이다.”
이선의 청에, 임금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결단을 내렸다.
“고려대대라 하였는가? 저들 모두를 조선의 친군(親軍)으로 받아들이고, 외적에 맞서 조선을 지킬 힘을 키워 나가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마침내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군대가 편제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는 동상이몽의 결과였다.
이선은 고려대를 근대적 군대의 시발점으로 삼으려 했고, 대원군은 정권과 안보를 지키는 부대로 쓰려 했다. 임금은 임금대로, 고려대대가 친군영에 편입되면 명목상 임금에게 충성을 바쳐야 했다.
어떤 쪽이든, 이선의 가치가 상승하는 건 당연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군사 사열과 무기 시연 이후 이선의 정치적 주가가 폭등했다.
대원군, 임금, 개화파, 보수파 막론할 것 없이 이선이 현재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청나라 천진.
조선에서 일어난 변란의 소식이 청나라로 전해진 건 7월 28일이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전신이 없으므로, 역사대로라면 주일 청국 공사관이 하나부사 공사를 통해 정보를 확보해 북경으로 전문을 보냈을 터였다. 원래 그 시기는 8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선이 재빠르게 손을 쓴 덕에, 이선의 밀서를 든 송금덕이 먼저 천진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온 급보이옵니다!”
송금덕은 이선이 명한 대로 북양 대신서리 장수성, 통령북양 수사 정여창에게 전달하고, 이윽고 조선의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에게도 밀서를 전달했다.
이선이 대원군의 명의로 보낸 밀서에는, 실제 상황과 다른 정보가 적혀 있었다.
장수성과 정여창은 고민에 빠졌다.
대원군, 실질적으로는 이선의 말에 따르면 조선은 이미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별다른 정보가 추가로 들어온 게 없으니 이들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일단 장수성과 정여창은 조선의 변란 소식에 대해 즉시 총리아문에 보고했다. 또한 모친상을 당해 100일 휴가를 받아 안휘성 합비에 있는 이홍장에게 사람을 보냈다.
천진과 상해 사이에는 전신이 가설되어 있었지만, 내륙의 합비에는 아직 전신이 없어 상해에서 사람을 보내야 했다.
합비의 이홍장 저택에 먼저 도착한 이는 청국 관리가 아니라, 이선이 보낸 장여원이었다.
“그대가 여기까진 어인 일인가? 홍삼의 일은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홍장은 장여원을 이선의 홍삼 대리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완화군께서 보내는 급보이옵니다.”
서한을 읽던 이홍장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즉시 상해로 가자!”
[외신(外臣) 이하응이 대청국에 삼가 아룁니다.며칠 전 조선에서 군사의 변란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척족의 실정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신이 나서서 변란을 진압하고, 임금을 안전히 모시고 나라를 평안히 했습니다. 지금의 한성은 평온하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은 근일 미국·영국·덕국과 맺은 수호 통상 조약을 그대로 비준하며, 이를 중재해 준 대청국의 은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본은 그 행태가 불손하고 무도하기 짝이 없으므로, 변란을 트집 잡아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조선은 스스로 일본에 대처할 수 있으니, 대청국에서는 안심하고 정세를 지켜봐 주길 바랍니다.
조선국 흥선 대원군 이하응]
별도 첨부.
[완화군 이선이 대청국 총리아문과 북양 대신께 아룁니다.지금껏 조정을 주도하던 민씨 척족이 실정을 거듭한 것도 모자라, 일본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조선의 부를 모두 일본에게 팔아먹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더욱이 일본 교관이 훈련하던 별기군이란 무리는 바로 민씨의 사병들로, 우리 군민은 왜별기라고 불렀습니다.
마침내 민씨의 무리는 교만이 극에 달해, 별기군과 변란을 일으키려 했으므로 부득이하게 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군민이 이에 분노하여 무도한 역적을 죽이고, 대원군께서 정사를 바로잡으셨습니다. 만백성이 이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역모의 공모자인 일본은 반드시 피해자를 자처하며, 청국에 조선을 모함할 것입니다. 이를 결코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바야흐로 조선은 대청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본받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조선은 대청의 튼튼한 동쪽 울타리가 되려 하니, 조선의 부강함은 곧 대청국에도 홍복이 될 것입니다.
부디 대청국에서는 바르게 살피어 주시옵소서.
조선국 영종정경부사 완화군 이선]
조선의 정세에 대해 잘 모르는 장수성과 정여창이 결정을 못 하고,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을 통해 정보를 구하려고 했다. 이들은 통역을 배제하고 필담을 나누었다.
“조선 조정이 난당을 색출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김윤식도 대원군의 명의로 된 이선의 밀서를 받아 든 상황이었다.
“대원군이 일본과 손을 잡을 염려는 없는가?”
“대원군은 강력한 반일 척화론자로,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만 우려하는 건 일본이 장차 조선에 간섭하는 것입니다. 조선은 일본을 막을 군대가 부족하니 실로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귀공은 천병(天兵)의 파병을 원하는가?”
순간 김윤식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이런 사안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선의 밀서에서 무엇보다 강조된 건 청군 파병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세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겨집니다. 한성과 천진 사이에 전신이 없어 빠른 소통을 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먼저 기선 한 척을 파견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소서. 천병의 파병은 그 후에 조선 조정과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8월 1일부터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을 통해 정보가 쏟아졌다. 이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본 사태의 전말로,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반란군을 선동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죄 없는 일본인들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청국 공사 여서창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이 군대를 파병하는 것이었다.
“저 간악한 일본의 무리는 유구(流求)의 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신뢰할 수가 없나이다. 민씨가 일본과 공모하여 변란을 일으키려 한 건 쉽게 믿기 어렵사오나,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본을 공격하려 했다는 건 더 믿기 어렵습니다. 조선이 먼저 일본인을 습격해 죽였다는 건 분명 대청과 조선을 이간하려는 행태일 것이옵니다.”
8월 4일, 상해에 도착한 이홍장은 즉시 천진과 북경을 향해 전보를 날렸다. 그는 이선의 말을 상당 부분 신뢰했다. 하지만 조선의 힘은 신뢰하지 않았다.
“조선이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말하나, 만약 일본이 유구의 선례를 따라 조선을 치면 어찌하옵니까? 일본은 필히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위협하려 할 것입니다. 이미 병자년(1876)에 일본은 병선을 보내 조선을 위협하여 원하는 조약을 얻어냈습니다. 일본이 주도권을 잡아 조선에 일본에 의존하는 세력이 늘어난다면, 정세는 크게 곤란해질 것입니다.”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파병을 요구했다.
“조선은 대청의 외번(外蕃)으로, 그 중요성은 유구와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서리북양 대신 장수성과 통령북양 수사 정여창에게 명해 군함과 육군을 조선으로 보내어, 먼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게 하소서. 그리고 유사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소서.”
8월 6일, 총리아문은 파병을 결정하고 천진에 통보했다. 다음 날, 장수성은 정여창에게 북양 수사 군함 3척과 회군(淮軍) 1개 영을 파견하게 했다.
8월 10일, 정여창은 외교관 마건충(馬建忠)을 대동하고 제물포에 도착했다. 마건충은 조선과 미국·영국·독일과의 조약에서 조선 측 업무를 대행한 인물로, 총리아문으로부터 가급적 사태의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라는 명을 받았다.
조선의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도 이들의 배에 타고 있었다.
“결국 청군이 파병을 했단 말인가?”
8월 10일, 청의 군함과 병력이 제물포에 도착했다는 말에 이선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본은 무조건 파병하리라 예상했지만, 청도 마찬가지군.’
“규모는?”
“1개 영, 500여 명이라는군요.”
‘실제 역사에서는 3천 명이니 훨씬 줄었군. 500 명 가지고 정권을 엎으려 하진 않겠지. 그나마 대원군 납치가 목적이 아닐 테니 다행이려나…….’
“알겠소. 내가 직접 제물포로 가야겠군.”
“청군이 결국 들어왔군. 한데 이들이 일본을 막아낼 수 있을까?”
대원군이 경계하는 건 역시 청보다 일본이었다. 일본 공사관 방화는 막았다지만, 일본 교관과 순사 살해를 명분으로 일본이 무리한 요구를 할까 걱정이었다.
“제가 청국 사신, 그리고 곧 오게 될 일본 사신과 담판을 짓겠습니다. 청이든 일본이든, 감히 조선 땅을 범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네가 할 수 있겠느냐?”
“신명을 다할 뿐입니다.”
이선이 이날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대원군도 모를 터였다.
“좋다. 네게 맡기겠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거라.”
“전 이조참판 김홍집을 속히 복직시켜서 청국 사신을 맞이하게 하고, 외교 협상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지.”
“또한 홍문관 교리 김옥균이 일본에서 돌아올 예정이니, 제 수원(隨員)으로 쓰게 해 주십시오.”
“수원 인선은 네 편할 대로 하거라.”
이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은 예조참판 겸 반접관(伴接官)으로 김홍집을 임명했다.
김홍집은 조미, 조영, 조독 조약에서 마건충과 협력해서 실질적으로 조약을 이끌었다.
‘이 시대의 실무 관료로 김홍집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다.’
김홍집 본인은 ‘대원군 정권’하에서 다시 중용되자 내심 놀란 눈치였다. 김홍집은 사양의 뜻을 밝혔다.
“신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사신의 임명을 잘못 받았으니, 어찌 다시 중책을 맡겠습니까?”
김홍집은 1880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와 청국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임금에게 헌상했다.
조선책략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것이니, 결국 서양과 외교를 맺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임금은 김홍집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실제 서양과 수교를 맺을 때 김홍집이 실무를 맡았다.
이로 인해 김홍집은 위정척사파의 집중적인 탄핵과 공세를 받게 되었다. 김홍집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서양에 나라를 팔아먹을 위인이라는 극언까지 나왔다.
본래 유학을 익힌 사대부 출신인 김홍집은 이와 같은 비방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을 청하길 여러 번이다. 그때마다 임금이 신뢰를 표해 사직을 반려했다.
대원군 본인도 조선책략을 비판한 바 있어서, 김홍집은 대원군 정권에서 관직을 유지하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김홍집과 친분이 두터운 김윤식은 심지어 김홍집이 서양과의 외교를 주도했다 하여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걱정할 정도였다.
“김 공. 세간의 구구한 비난 따위는 개의치 마십시오. 서양과의 수교는 조선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서양과 외교를 한 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목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라사 황제와 친분을 맺은 것이 어찌 아라사를 위한 일이었겠습니까? 조선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선이 직접 김홍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김 공의 뜻도 그러할 것입니다. 작금의 조선에는 김 공의 경륜과 역량이 필요합니다. 부디 대원위 대감을, 아니 이 나라 조선을 위해 도와주십시오.”
고귀한 왕의 장자가 직접 자신을 찾아와 간곡히 설득하니, 김홍집은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나라를 위해 언제든지 이 한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습니다. 대감의 뜻을 삼가 받들도록 하겠나이다.”
김홍집의 말이 비유적으로 하는 표현이 아님을, 이선은 알고 있었다.
갑오개혁을 주도하며 친일파로 숱한 지탄을 받은 김홍집이었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 을미사변은 김홍집과 무관한 일이었음에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은 백성들에게 ‘국모 시해’의 책임자이자 매국노로 각인되었다.
아관파천으로 세상이 뒤바뀌자, 친일 성향의 관료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김홍집은 충분히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죽는 길을 선택했다.
–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백성의 손에 죽는 게 떳떳하다. 그게 천명이다.
‘이 시대 조선의 관료 중에서 이만한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 몇이나 되었는가?’
조선의 고관들이 친청, 친미, 친러, 친일로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는 가운데, 김홍집은 중도를 지키며 개혁에 최선을 다한 몇 안 되는 관리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나와 함께 인천으로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