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17
3부 32화 동양의 폴란드, 서양의 한국
대한제국 정친왕 이안은 폴란드에서 머물며 최상의 환대를 받았다.
6월 10일 이안의 18세 생일에는 폴란드 정부가 주최하는 만찬과 무도회까지 열렸다. 이안으로선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외교적인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참석했다.
“전하, 생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하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예, 기꺼이.”
이안을 향한 폴란드 소녀들의 관심과 접근이 이어졌다.
“전하, 저희 가문의 저택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수락해 주시면 무한한 영광이 될 거예요.”
“전하, 저희 지역도 방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민들이 열렬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안은 자신을 향한 과도한 관심과 호의에 당황했다. 짧은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나이대의 소년답게 우쭐해질 법도 한데, 이안은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했다.
‘나를 향해 열광하는 게 아니라, 소설이 만들어 낸 환상을 보고 열광하는 거겠지.’
물론 이안 자신의 매력과 후광이 모두 작용했다.
혼혈인 이안의 외모에는 동서양의 형질이 모두 드러났고, 체격도 나이보다 훤칠했다. 무엇보다 소설에 등장할 법한 ‘이국의 왕자’라는 후광이 작용했다. 하물며 소설 속 주인공인 동양 황제와 폴란드 여인이 맺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던가!
“어머니, 이런 상황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이안의 푸념에 마르가리타는 빙긋 웃었다.
“즐기려무나, 아들아. 저들이 설령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너는 왕족으로서 환상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니.”
이안은 마르가리타의 통찰력에 새삼 놀랐다. ‘환상’이라는 걸 꿰뚫어 보면서도, 사람들의 환상에 부응하는 게 왕족의 의무라고 답했다.
사실 동양에서 왕족이라면 일반인은 고개를 숙이고 우러러야 할 대상이었지만, 20세기 서양에서는 훨씬 친근한 대상이었다.
“이 나라는 공화국이고, 집정자는 사회주의자 아닌가요?”
“너도 피우수트스키 원수가 하는 말을 들었잖니? 사회주의라는 붉은 기차를 탔지만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고.”
하물며 폴란드는 왕국이 무너진 지 수백 년이라 왕족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적 전통은 존재하는 나라였다. 당장 최고 권력자인 피우수트스키도 슐라흐타(귀족) 출신이고, 마르가리타도 따지고 보면 귀족 출신이었다.
제2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집권당인 ‘사회당’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의 특권은 박탈되고 토지개혁 등의 평등주의적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여전히 귀족적 특성은 남아 있었다.
“예, 그건 들었습니다만……. 어머니께서 그 이후로는 원수와 폴란드어로 대화를 나누셔서 소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이안은 영어와 프랑스어는 할 줄 알았지만, 폴란드어는 인사만 하는 정도였다. 마르가리타도 딱히 아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진 않았다.
로마노프 5남매에게 러시아어를 약간 배워서 같은 슬라브어 계통인 폴란드어 단어 정도는 이해했지만,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비밀이란다. 여자에게는 언제나 비밀이 있는 법이지.”
“네?”
어머니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이안은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농담이란다. 그런 표정 지으니까 귀엽구나.”
“어머니…….”
“옛 동지끼리 나눈 한담이야.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나는 피우수트스키 원수의 지도를 받는 당원이었거든. 그저 옛 추억을 상기시킨 거란다.”
이안은 어머니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현명한 사람이었으므로, 만약 그렇다면 그럴 이유가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확실히 어머니께선 대한에 있을 때하곤 다르셔. 고대하던 조국에 돌아와서 그런가. 하긴, 대한에선 언제서나 조심스러워해야 할 처지지만, 폴란드에서는 오히려 환영받는 존재니…….’
이안은 새삼 폴란드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처신을 조심스러워하며 사람들의 이목에 띄지 않으려고 했던 어머니와 자신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토록 환영을 받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 * *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가 최종장에 이르는 동안, 이선은 파리를 떠나 있었다.
공식 대표단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참석해야 할 의무도 없었고, 배후에서 열강의 주요 권력자와 회담을 갖고 합의도 이룬 상황이었다.
이선은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아 런던을 방문했다.
조지 5세와 회견하고 영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이선은, 이윽고 폴란드로 향했다. 폴란드 정부의 공식 초청을 받은 국빈방문이었다.
폴란드가 독립한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국가원수급 지도자의 방문은 주변 신생국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하물며 군주의 방문은 최초였다.
이선은 영국에서 해로를 통해 독일령인 단치히(그단스크)에 도착했다. 단치히 귀속 여부는 파리강화회의 막판의 중요쟁점이었다.
독일은 인구의 절대다수가 독일인인 단치히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 연방이 지배했던 역사적 연고권을 내세웠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과연 세계대전의 전초가 될 것인가.’
원역사에서 단치히는 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다. 꼭 나치가 아니더라도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결코 단치히의 할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반대로 신생 폴란드가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는 단치히였으므로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불안한 평화는 결국 국제질서 수정주의 세력에 의해 깨지게 되어 있다.’
피우메(리예카) 문제가 이탈리아에게 유리하게 해결됨으로써, ‘불구의 승리’라는 구호를 차단해 파시즘의 집권 가능성을 줄였다. 파시즘이 파쇼국가의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치즘의 집권도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쟁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패전국에서 강화조약의 질서를 부정하는 수정주의 세력은 결국 득세할 터이고, 전쟁으로 국제질서를 타파하려고 할 것이었다.
결국 문제는 세계제국의 지위를 되찾길 원하는 독일, 그리고 세계혁명을 외치는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그래서 피우수트스키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확고한 균형추가 될 연방국가의 수립을 주장하는 것인데. 글쎄, 그게 가능할지…….’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재건을 넘어 ‘바다에서 바다까지(Intermarium)’, 즉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국가 연합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연방을 재건하겠다는 회고적 망상이 아니라, 독일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가 단결하여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19년 6월, 폴란드는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했다.
이선이 바르샤바에 도착한 6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가톨릭 축일인 성체성혈대축일(聖體聖血大祝日)이었다. 유럽에서 가톨릭 신앙이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폴란드인답게 성대한 종교행사가 열렸다.
이날, 때마침 빌나(빌뉴스)에서 들어온 승전보가 폴란드인들을 열광시켰다.
“빌나 재탈환! 피우수트스키 원수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리투아니아를 해방시켰다!”
“폴란드 만세! 원수 만세!”
“주님이 폴란드와 함께 하신다!”
폴란드군이 강철군단을 무찌르고 빌뉴스에서 철수한 후, 소비에트 적군(赤軍)이 신생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빌뉴스를 점령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카우나스로 이전했다.
민스크도 적군에 함락되어 자칭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이 멸망하고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6월 2일에는 적군이 키예프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서부 빈니차로 퇴각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해 백군이 돈바스를 향해 진격함으로써, 우크라이나는 간신히 생존할 수 있었다. 적군도 주요 공업지대인 돈바스를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분리주의 독립파 입장에서는 적군보다 백군이 더 위험한 적이었다. 최소한 연방 내의 자치를 약속한 소비에트와 달리, 백군은 ‘불가분의 러시아’를 내세우며 자치조차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독립파의 시선은 폴란드로 향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라는 폴란드의 야망도 만만치 않았으나,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폴란드 공화국은 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서 적군에 의해 수립된 소비에트 정부를 모스크바의 괴뢰라고 간주한다. 폴란드의 안보, 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보호를 위하여, 폴란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6월 14일, 폴란드군이 네만 강을 넘어 공세를 개시했다. 폴란드군은 벨라루스에서 소비에트 적군을 격파하고, 민스크를 향해 진격했다.
며칠 뒤에는 빌뉴스에서 적군을 몰아내고, 피우수트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재건을 선언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침략과 독재에 맞서 주변국을 보호할 것입니다. 모든 폴란드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연방국가 안에서 동등한 국민이 될 것이며,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이 확립될 것입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재건 선언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리투아니아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피우수트스키 자신이 빌뉴스에서 태어난 폴란드인이었다. 그가 보기에 리투아니아는 단독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없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동등한 자격으로 하나의 국가로 단단히 묶여야 했다.
연방 재건 선언은 리투아니아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폴란드 국내의 반대에 부딪혔다.
“빌나는 인구의 다수가 폴란드인이 거주하는 도시인데, 무슨 케케묵은 연방 타령인가? 폴란드에 병합해야지! 피우수트스키는 일방적으로 리투아니아의 편을 들고 있는 반역자다!”
“헛소리! 당신들의 배타적인 태도가 폴란드를 취약하게 만들고 있으니, 민족민주당이야말로 반역자 아닌가!”
제1야당이자 파리강화회의에서 사절단을 맡고 있는 드모프스키의 민족민주당(ND)은 연방 재건이 아닌 폴란드 민족국가 수립을 외쳤다.
민족민주당은 극렬한 폴란드 민족주의로 악명이 높았고, 특히 드모프스키는 지독한 반유대주의로 파리의 연합국 대표단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인종평등 규약에서도 폴란드를 대표하는 드모프스키는 반대표를 던지려고 했는데, 이선이 파데레프스키를 설득해 가까스로 찬성하게 만들었다.
그에 비하면 피우수트스키와 사회당은 훨씬 진보적이었고, 정책도 유연했다.
이선은 당연히 드모프스키의 배타성에 반감을 느꼈고, 피우수트스키만을 외교 상대로 간주했다.
‘정말이지 환상적인 타이밍에 폴란드를 방문했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발발, 폴란드군의 빌뉴스 점령 소식,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재건 선언, 사회당과 민족민주당의 격렬한 정쟁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이선은 폴란드에 도착했다.
이선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폴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에 들어선 시점에서, 한국에게 폴란드는 멀리 떨어진 유럽의 신생국에서 손을 잡아야 할 국가가 되었으니.
“한국 황제 폐하 만세!”
“폴란드의 벗, 한국 만세!”
대한제국 황제를 맞이하는 공식행사에서, 폴란드인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단순히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환상을 넘어서,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현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국과 소비에트 간의 대립관계는 분명해졌고,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이르렀다.
단지 모스크바의 우선순위가 유럽, 특히 우크라이나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시베리아를 일시적으로 방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들이 소비에트에 맞선 십자군의 선봉에 섰다고 생각하는 폴란드인으로서는, 한국이 동방의 십자군 동료, 사제왕 요한(프레스터 존)이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이선을 사제왕 요한에 빗대는 폴란드 언론도 있었고, 이선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 동양의 나폴레옹, 아시아 해방의 상징도 해 봤는데 프레스터 존이라고 못 해 보겠나. 하여튼 다채로운 인생이야.’
이선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다양하게 포장되는 현실을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이선의 본질은 한국의 생존과 확장을 노리는 현실주의 정치가였다. 물론 그러한 이미지가 형성되도록 이선 스스로 대의명분과 미사여구를 달고 다녔지만, 그 본질은 현실주의자였다.
이선이 폴란드를 방문한 이유는 분명했다. 물론 피우수트스키의 초청을 받았고, 마르가리타를 배려해서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폴란드가 유럽에서 러시아의 발목을 계속 붙잡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격을 최대한 막아 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폴란드에게 어떠한 미사여구를 바치든, 필요한 지원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폴란드 국민 여러분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라는 3대 제국주의 열강에 맞서서 123년간 치열한 독립투쟁을 이어 왔습니다. 이는 중국·일본·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강대한 적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해낸 폴란드에 존경심을 느낍니다.”
“와아아아! 폴란드의 벗, 한국 만세!”
미사여구로 가득한 이선의 연설에 폴란드인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우리 폴란드인들은 주변 강대국들에 맞서 독립을 지켜내고, 개혁을 완수하고, 마침내 오늘날 동양의 강국으로 떠오른 한국에서 깊은 영감을 받습니다. 한국은 동양의 폴란드요, 폴란드는 서양의 한국입니다. 한국이 오늘날 동양 평화의 균형추가 되었듯이, 폴란드도 장차 서양 평화의 균형추가 될 것입니다!”
“와아아아! 폴란드 만세! 한국 만세!”
피우수트스키의 답사에 폴란드인들은 열광했다. 민족민주당이 반역자라고 비난하건 말건, 폴란드인들은 수십 년간 독립을 위해 싸워 온 지도자이자 ‘빌나의 해방자’인 피우수트스키를 지지했다.
“한국이 동양의 폴란드고 폴란드가 서양의 한국이라.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원역사에서 한국이 ‘동양의 아일랜드’ 혹은 ‘동양의 폴란드’라고 불렸다지만, 변화한 역사에서 한국은 ‘동양의 프랑스’를 자처해 왔다. 혹은 일본을 대신해 ‘동양의 프로이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국을 향한 폴란드의 경의이자, 폐하를 향한 저의 존경심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한국도 폴란드에 경의를 표합니다. 짐 역시 각하께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한국을 신생 폴란드의 모델로 여기듯, 이선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과거 시베리아 유형수, 테러리스트,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서 군사령관, 현실정치가, 국가지도자가 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이선과 피우수트스키는 만 51세로 나이가 같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달랐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의 생존과 팽창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고상한 대의명분과 미사여구로 가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신생국의 지도자라 그런가, 강대국의 제국주의자들하고는 다른 면이 있어. 어째 이 사내하고는 진심으로 잘 통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