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19
3부 34화 국가이성, 국민의 시대
정상회담이 끝난 후 피우수트스키는 최고사령관으로서 벨라루스 전선으로 향했다.
폴란드에서의 외교활동을 마친 이선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얀코프스카 여사와 왕자님과 함께 폴란드의 역사적 도시들을 방문해 주시지요. 주민 모두가 방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열렬히 환영할 겁니다.”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지만, 프라하 방문 후에 파리에서 연합국 지도자들과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폴란드 정부는 가족여행을 제안했으나, 이선은 정중히 거절했다. 이선이라고 해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급박한 시국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간적 여유도 없거니와, 타국 황제가 전쟁 중인 나라를 여행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선은 대신 마르가리타와 이안을 폴란드에서 계속 머무르게 했다.
“안아, 네가 나를 대신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폴란드를 순방하여라.”
“예, 그리 하겠습니다.”
“네 나이 열여덟, 어느덧 성인이다. 여행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대한을 대표해서 행동하여라. 네게 있어서 첫 외교 행보다. 네 숙부 의친왕과 영친왕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외국에서 대한 황실을 대표했으면 하는구나. 널리 견문을 쌓아 장차 네 형, 황태자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 예. 삼가 부황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나는 너를 믿는다.”
이선은 차남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진이 장성하면, 이영처럼 해외로 유학 보내고 왕실 외교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게 이진과 이안 모두에게 편안한 일이었다.
정부든 종친이든, 과거 이영을 꺼려했듯이 이안을 꺼릴 터였다. 이영은 적자라는 정통성이 있어서 그렇다 쳐도, 혼혈에 서자인 이안은 황위 계승 가능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치가와 종친들은 이안이 혼혈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다.
만에 하나라도 오해와 분란이 생기기 전에, 이선이 선을 그어 놔야 했다.
‘나이 먹고 나니 공허하구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좀 더 잘해 주었을 것을.’
이선은 자신을 그토록 숭배하는 장남을 어릴 적에 아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차남에게만 애정을 쏟은 것도 아니었다. 이진은 매일 보기라도 했지, 이안은 1주일에 주말 한 번 정도 만난 정도였다.
지난 30여년, 국정에만 몰두하느라 가족들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한제국 황제이자 ‘국가의 아버지’인 이선은 국가와 국민의 운명에 막중한 의무감을 느끼고 모든 열성을 쏟았지만, 정작 자신의 처자식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하아, 갱년기인가? 나이 쉰을 넘긴 탓인가, 대한이 마침내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인가. 모든 게 다 공허하게 느껴지고, 고독하기 짝이 없구나.’
1919년, 국제적 지도자이자 아시아의 우상으로 떠오른 이선은 그야말로 정치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
하지만 바로 그 절정의 순간에, 이선은 고독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처음 목표는 조선의 생존, 개혁과 자주독립이었다. 다음 목표는 부국강병으로 동양의 균형추가 될 지역강국이었다. 그 다음 목표는 서양 열강과 당당히 동렬에 서서 국제정세를 지도할 수 있는 열강이었다.
마침내 그 모든 목표는 달성했다. 이선에게 지난 40여년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아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가 끝난 건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너무나 많아.’
이선은 완전히 워커홀릭(Workaholic, 일 중독증)이었다.
국가적 과제와 일에 대한 몰두가 없다면, 이선의 삶은 더욱 고독하고 공허할 터였다.
자신과 조선이 제국주의 시대에 살아남아야한다는 강박관념은,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목표 하나를 달성하면 다음 목표를 설정해야 했다.
언제나 심리를 짓누르는 국가에 대한 막중한 의무감,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완벽주의 성향, 그리고 21세기의 기억을 갖고 19-20세기를 살아가는 유일한 인간이라는 고독함.
그 고독함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폐하, 어제 말씀하신…….”
“음?”
“역사의 변화가 만든 거니까, 클리오(역사의 여신)에게 고마워하라고 하셨지요. 혹시 제가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서요.”
마르가리타의 한국어가 아무리 유창해도, 모국어가 아닌 이상 미세한 뉘앙스 차이까지 다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이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 그런 말도 했었지. 그게 말이오, 실은…….”
폴란드 특산 보드카 한 잔을 들이킨 이선은, 술김에 이야기를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실없는 소리였소. 한국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35년 전에 당신을 만나게 된 것도, 개혁의 일원으로서 내가 사절단으로 왔기 때문이지. 뭐 그런 뜻이었소.”
“아, 그런 의미였군요.”
마르가리타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선은 차마, 오랜 동지이자 연인인 마르가리타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나를 진정 가족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임종 시에도 차마 말하지 못했거늘.’
유일하게 이선이 털어놓을 뻔했던 건, 조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임종을 앞둘 때였다.
죽음을 앞둔 조부에게만은 진실을 말하려다가, 결국에는 포기했다.
그 자신도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가끔은 처음부터 21세기의 이선우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선 자신이 미래를 보는 꿈을 꾸고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자신도 믿을 수 없는데, 대체 누구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 시대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나는 이 시대의 과분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나?’
이선은 지난 일을 돌이켜보았다.
인생의 반려자인 황후 아영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대원군이 군주의 반려로 정해 준 혼처였고, 결국 거절할 수 없어 결혼했다.
아영은 황후이자 아내로서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 자신도 황제이자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존중과 존경은 있을지언정, 냉정하게 말하면 사랑은 의문이었다.
마르가리타에 대한 사랑이라면,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리지만 총명하고 애국적인 소녀 시절부터 마음이 쓰였다. 그녀가 정치범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녀를 한국으로 데려온 후에도, 자신의 마음을 읽은 아내의 권유에도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선을 넘어서고 말았다.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도 태어났다.
후궁이나 다름없었고 그 자식들도 서자였지만, 군주인 이상 문제될 건 하나도 없었다.
군주는 후궁을 두는 게 관례였고, 태상황만 해도 후궁이 여럿이었다. 종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이강은 여인이 많았다.
이강은 예외라고 쳐도, 정치가들이라고 다른가. 김옥균은 첩이 셋이었고, 기독교도에 미국인 아내를 둔 서재필 정도만 예외였지, 대신들 중에 첩 안 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종친이나 대신들은 황제가 왜 후궁을 안 두는지를 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볼 때 이선은 기이할 정도로 금욕적이었다. 처첩이 수십 명에 이르는 청 황실은 말할 것도 없고, ‘문명개화’했다는 일본 황실도 후궁을 두지 않는가.
근대적 결혼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국민의 모범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해석하기 마련이었지만, 기실 이선의 속내는 그렇지도 않았다.
‘나로 인해 더 이상 불행해짐을 원치 않는다.’
만약 아영과 혼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 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재능을 펼칠 수 있지 않았을까. 구중궁궐에 갇혀 살지 않고 자유롭게 살지 않았을까.
만약 마르가리타를 구한 후에 자유롭게 해 주었다면,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성과 혼인하여 정상적인 가정을 만들지 않았을까. 한국에 갇혀 살지 않고 의사이자 문필가로서의 재능을 꽃피우지 않았을까.
이선은 절대 후회는 않으려고 했다. 만약 결혼을 후회한다면, 아내는 물론이요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선은 고독감과 동시에 자책감을 느꼈다.
‘결국 내가 진정 사랑하는 건…….’
이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사랑했다. 역사의 변화, 국가, 권력.
결국 자신의 본질은 국가이성, 레종데타(Raison d’État) 그 자체였다.
이선이 대신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었다.
「짐은 언젠가 죽지만, 국가는 불멸이다. 짐보다 국가를 더 중시하라.」
대신들은 황제가 보이는 겸양의 표현이자, 지나친 개인숭배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선은 진심이었다.
그 자신도 결국 역사의 변화에 복무하고, 사회유기체인 국가의 두뇌로서 기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선은 헤겔주의자들의 관점과 유사했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
나폴레옹은 대혁명을 끝냈지만 동시에 그 후계자였고, 헤겔이 보기에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대정신을 체화한 세계정신 그 자체였다.
‘역사의 진보’라는 거대한 추상적 흐름 앞에서, 지도자는 이에 복무하며 진보를 가속해야 했다.
이선은 한국에서 진보와 변혁의 화신이었다. 그는 한국을 극적으로 변혁시키고, 완전히 다른 나라로 바꾸어 버렸다. 단순히 식민지에서 열강으로 변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선은 한국의 역사적 흐름을 영구히 바꾸어 버렸다.
이는 자신을 이 세계로 이끌고 온,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존재 – 역사의 신이 자신에게 준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반드시 의무감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이선은 국가를 지도하고, 역사를 변화하는 것 자체에 희열감을 느꼈고, 역사의 변화와 국가의 운명을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없었다. 군주 중에 이런 사례가 있는가?
자신도 모르게 ‘세계정신’이 되어 버린 나폴레옹도 있지만, 피 흘리는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면서도 한쪽에서는 볼테르와 철학을 탐구했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 정도가 이선과 유사했다.
「통치자는 국가의 첫 번째 종복이다. 통치자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국가의 종복’ 프리드리히는 평생 누군가를 사랑한 흔적도 없었고, 아내에게는 지극히 무관심했으며, 애정을 베푼 대상은 애완견뿐이었다.
근면하고 현명했으나 독선적이고 냉소적이었으며, 평생 고독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열강으로 끌어올리고, 훗날 프로이센에 독일 통일을 이끌어 낼 기틀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독일제국도 1919년에는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으니, 역사의 변화에 거스르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선은 러시아제국과 독일제국의 멸망을 예견했음에도,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이 한때 역사의 변화를 선도했음에도, 영원히 번영할 것처럼 보였음에도, 결국에는 무너진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언젠가 나는 죽겠지만, 국가도 불멸하진 않겠군. 말로는 백년대계를 설계한다고 하지만, 역사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옥죌 것이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이 만든 질서는 파탄에 빠질 거고, 세계대전이 발발하겠지. 세계는 파괴되고 수천만의 인간이 죽어나가겠지. 내가 죽은 후에, 대한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자신이 역사를 바꾸려고 아무리 발버둥 친다한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멸망의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무렵 이선에게는 거대한 암흑과도 같은 공허함과 고독함이 밀려왔으니, 국가이성과 절대정신을 체화한다한들, 결국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폐하,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으신 건가요? 제가 좀 봐 드릴까요?”
마르가리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이선은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하하, 하하하.”
이선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마르가리타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선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소. 그냥 하릴없는 생각을 했을 뿐이니까.”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괜찮다마다요. 당신도 알잖소,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걸.”
“맞아요. 생각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만, 적당히 줄이세요.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의사다운 충고에 이선은 빙긋 웃었다.
“생각을 없앨 수는 없구려. 그래도 노력은 해 보리다.”
이선은 새삼 깨달았다. 모든 게 현실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아니 그의 가족들은 모두 자신을 사랑하고, 걱정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은 영원히 이 시대의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저버리지 못하는가.
어쩌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실제 현실과는 다른, 평행우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단 말인가. 어찌됐건 자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를 사람들은 존경하고 사랑한다.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찾을 수 있는 근대의 여명에서,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로 인해 죽거나 상처받고, 몰락하고 박탈당한 기회는 얼마나 많은가.
이선은 분명히 역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꿨다.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은가. 그리고 새로운 운명을 얻은 수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오만했소. 난 단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인데. 역사는 결국 인간이 바꾸는 겁니다. 역사의 신이니, 국가이성이니, 세계정신이니, 다 관념적인 헛소리에 지나지 않소. 역사는, 현실은, 결국 절대다수의 인간이 만들어 가는 거니까.”
이선의 갑작스러운 말에, 마르가리타는 도통 영문을 몰랐지만, 웃으면서 화답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면, 현명한 폐하답지 않네요. 역사는 절대다수의 인민이 만드는 거죠.”
전직 혁명가다운 답에, 이선은 거듭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맞소. 더 이상 고민할 게 없소. 인민, 국민, 시민, 민중, 대중, 뭐라 호칭하든 간에, 나는 역사를 이끌어 나갈 인간의 힘을 믿소.”
이선은 문득 삶의 활력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국내로 되돌아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답을 찾았다.
당장 귀국하면 손을 봐야 할 일이 산적(山積)했다.
지금까지 열강을 향해 위로부터의 개혁 일변도였다면, 앞으로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나서야 했다.
정치개혁, 민의에 기초한 헌정, 의회제, 대의민주주의, 사회개혁, 성장과 분배, 노동자 보호, 복지제도 확립, 기타 등등…….
자신 혼자 고뇌하고, 지혜를 짜내고, 결단하고, 집행하는 시대는 막을 내려야 했다.
이제 국민이 함께 고뇌하고, 지혜를 짜내고, 결단하고, 집행하는 시대가 오리라.
때는 바야흐로 1919년, 국민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