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2
– 62화에 계속 –
62화 담판(談判)
임오년 7월 1일, 1882년 8월 12일, 인천 제물포.
이선은 전권대신의 자격으로, 부관 김홍집을 대동하고 아침 일찍 제물포에 도착했다.
월미도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청국 군함 초용(超勇)과 양위(揚威)호에서 하선한 마건충과 청국 사신단이 제물포로 들어와 있었다.
‘이홍장은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가 들어가 있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마건충은 그나마 상대하기 쉬울 터.’
“조선국 영종정경부사 이선과 예조참판 김홍집이 마 대인을 뵙길 청한다고 전하라.”
이선은 즉시 마건충에게 회견을 청했다. 마건충은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하고 회견에 응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인. 먼 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선이 중국식으로 읍을 하니 마건충도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완화군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건충은 이선과 천진에서 본 적이 있었고, 김홍집과는 서양과의 외교 협상을 한 적이 있으니 이미 구면이었다.
“김윤식 공에게 이미 간략히 이야기는 들었지만, 대체 조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필담이 시작되었다. 마건충의 질문에 김홍집이 답했다.
“소방(小邦)은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 근래에 군비가 부족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심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난리를 일으킨 병사들이 먼저 대신을 살해하고 집 몇 채를 훼손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왕궁으로 향하여 난리를 부려 손을 댈 수 없는 가운데, 대원군이 소식을 듣고 무마하고 안정시켜 해산하였습니다.”
“그럼 일본과는 왜 갈등을 빚은 것입니까?”
“일부 일본인들이 한양에서 행패를 부려 민심이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먼저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비밀리에 연락하여 재앙을 피하는 준비를 하여, 공사와 수행원을 호위하여 화를 피하게 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선이 나섰다. 마건충은 프랑스 유학파라 프랑스어와 영어에 두루 능했다. 이선은 한문 필담보다 영어로 말하길 원했다.
“대인.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바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꼭 총리아문에 보고해 주십시오.”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북양 대신께 보내는 문서로 첨부했지만, 중전 민씨와 그 일당이 변란을 도모했습니다. 병조판서 민겸호가 별기군이라는 무리를 동원해 대원군과 저를 모해해서 죽이려 했습니다. 이에 충성스러운 우리 군민이 나서서 역적을 제압하고, 민겸호를 처형했습니다. 또한 배후에서 이를 조종한 중전 민씨는 이미 폐출하였습니다.”
“왕비가 폐출당했다고요?”
마건충은 깜짝 놀랐다.
“일본 교관 호리모토 소위는 우리 군민과 교전 중에 전사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별기군은 일본 교관이 훈련했습니다. 결코 일본의 주장대로 무결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청나라에게 있어 왕비의 폐출 여부보다는 일본의 정변 개입 여부가 더 중요한 사항이었다. 만약 이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외척과 손을 잡고 조선의 정변을 도모했다는 뜻이 되었다.
“병자년에 청국에 알리지 않고 일본과 조약을 맺게 한 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중전입니다. 이 조약은 매국적이기 그지없어서, 무관세로 조선의 장벽을 열어젖혔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부가 일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민씨는 일본과 결탁하여 사복을 채웠습니다.”
이선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이 무지의 소치가 아니라, 중전과 외척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맺은 조약이라고 둔갑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 서양과 수교를 하기 위해 앞장선 것도 민씨 아닙니까?”
“아니, 그건 오해입니다. 여기 계신 예조참판 김홍집 공이 성상을 설득해서 이뤄낸 일이지요.”
김홍집은 영어는 몰랐지만, 자신을 지칭한다는 건 알았다. 김홍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마 대인과 같이 실무를 맡은 건 김홍집 공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대인께서 우리 국왕 전하와 북양 대신의 뜻을 잘 받들어, 조선이 서양 3개국과 조약을 맺게 도와주셨습니다. 관세도 조선에게 유리하게 맺게 되었지요.”
조미, 조영, 조독 조약은 관세 최저 10%, 최고 30%의 조건으로 체결되었다.
이는 청나라나 일본이 서양과 맺은 조약에 비해서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일본이 서양과 맺은 조약도 관세율은 최고 5%까지 가능했고, 일본은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고 싶어 했다.
“일본도 더 이상 조선에 무관세를 강요하진 못할 겁니다. 이는 대인의 공로입니다. 참으로 감사드릴 일입니다.”
실제로 조선은 조미 조약을 내세워 일본에게 관세 조약을 다시 맺자고 압박하던 상황에, 군란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어, 어흠! 나야 어디까지나 조선을 아끼는 황제 폐하의 뜻을 대신하여…….”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마건충은 기꺼운 기색이었다.
“아, 그렇고말고요. 조선을 아끼는 대국의 황은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선은 거듭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니 말씀 잘 전해 주십시오. 조선은 변란을 진압해 평안한데, 단지 일본이 문제일 뿐이라고.”
“알겠습니다. 총리아문과 북양 대신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지요.”
일단 첫 담판은 이선이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한편, 일본 도쿄.
일본에서는 하나부사 공사를 통해 조선의 소식을 듣고,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급히 시모노세키로 왔다. 곧이어 육군경 대리 겸 참모본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합류했다.
일본은 1881년, 이른바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의회 개설을 주도하던 히젠의 오쿠마 시게노부가 실각했다.
조슈의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모토, 사쓰마의 구로다 기요다카(黒田清隆)와 마쓰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가 연합한 조슈-사쓰마 번벌 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일본 권력의 핵심인 이토가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나 있고, 정국을 이노우에와 야마가타가 주도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번벌 정권의 권력 독점을 규탄하는 자유민권운동이 한창이었고, 일본 정부로서는 국내의 정치적인 불만을 해외로 돌릴 필요도 있었다.
관제 언론은 조선에서의 정변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선동적인 삽화를 곁들인 호외가 나돌았다.
“조선의 흉도(凶徒)들은 공사관을 습격하여 대일본제국의 국기를 짓밟고, 국체를 모욕하였다.”
“호리모토 레이조 소위와 순사 3인은 흉도에게 맞서 싸우다 중과부적을 이기지 못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감히 대일본제국을 모욕한 조선을 정벌하자!”
“야만국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조선을 일본의 힘으로 문명화시켜야 한다!”
일본 태정관(내각) 회의.
“여론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조선의 배후에는 청국이 있으니, 쉽사리 위협하면 안 됩니다.”
“그 무슨 말입니까? 조선으로부터 이권을 받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이노우에는 온건론, 야마가타는 강경론을 대표했다. 사태를 직접 목도한 공사 하나부사가 설명했다.
“비록 군란은 있었지만, 대원군과 그 손자 완화군은 난의 격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실제 일본인의 피해가 적을 수 있었던 건 완화군의 공이 큽니다. 의외로 대원군과는 대화가 가능할 듯하니 협상해야 합니다.”
“그 완화군이란 왕족은 대원군이 총애하는 손자요, 북양 대신 이홍장이나 러시아 황제와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소. 그럼 이대로 조선을 청이나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넘겨줘야 한단 말이오?”
이노우에가 타협책을 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조선에 대해 국제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일본인 사망에 대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하지만 조선에게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면 호의적인 고려를 한다.”
“천황 폐하의 육군 장교가 죽었소. 절대 그 정도로 넘어갈 수는 없소.”
이노우에의 온건론에, 군부의 강경론을 대표하는 야마가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하나부사는 강경론과 온건론이 뒤섞인 훈령을 들고 다시 인천으로 향했다.
군부의 강경론에 따라, 일본 군함과 보병 1개 대대가 파병을 준비하였다.
8월 12일 오후, 일본 해군 4척의 수송선과 300명의 육군 병력이 제물포로 입항했다.
하나부사가 탄 배에는 일본에 수신사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조선에서의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한 김옥균과 서광범이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파병해서 조선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청군은 대원군을 납치해 한양으로 진입하고, 일본은 조선에 제물포 조약을 강요한다.
조선은 양쪽의 굴레를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조선에는, 이선이 있었다.
이선은 즉각 하나부사와의 회견을 요청했다.
하나부사는 이선이 아니라 한양으로 가 임금이나 대원군을 만나 일본 정부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겠다고 억지를 부렸으나, 이선은 예비교섭은 반드시 인천에서 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인천에서 하루 동안 상황을 파악한 하나부사는, 결국 8월 13일 저녁 이선에게 일본 정부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1. 조선 정부는 태만의 책임으로 우리나라에 향해 문서로써 사죄의 뜻을 표할 것.
2. 우리의 요구를 받은 이후부터 15일 안에 흉도 일당을 체포하고, 우리 정부가 만족할 엄중한 처분을 행할 것.
3. 조난자를 위해 보상할 것.
4. 조약 위반에 대한 책임으로 배상금을 지불할 것.
5. 장래의 보증으로 조선 정부는 지금부터 5년 동안 호위 병력을 두어 공사관을 보호할 것.
6. 양화진, 대구, 함흥, 안변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할 것.
7. 공사와 영사관원의 내지 여행을 허락할 것.
8. 통상 조약에 관한 양보를 받을 것.
“……설마하니 조선에서 이 조건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고 요구하는 건 아닐 테지요, 공사?”
이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실제 역사보다 일본이 입은 피해가 훨씬 적은데 이 지랄이네. 이거 피해 보상은 명분이고 기회 잡아서 뜯어내겠다는 심보구만. 어림도 없다.’
하나부사 본인도 불가능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군부에서는 정말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 건가? 이미 정권은 대원군의 손에 완전히 들어갔고, 민씨들은 모두 배제됐다. 더군다나 청군이 먼저 들어왔으니 군사력으로 위협을 가한다는 것도 난망하다. 어떻게든 협상의 주도권이라도 잡아야…….’
하나부사가 뭐라 말하기 전, 이선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공사. 대원군과 나는 군민의 일본 공사관 공격을 막고, 공사와 외교관들이 무사히 피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귀국은 이런 부당한 요구를 한단 말입니까?”
“대원군과 왕자께서 보여 주신 호의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국의 장교와 순사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일본국의 장교는 육해군 대원수이신 천황 폐하의 직속 신하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쉽게 묵과할 수 없습니다.”
천황을 운운하는 말에 이선은 냉소했다.
“말 나왔으니까 이야기를 해 보지요. 이번 변란의 주된 책임자는 민씨와 그 일당들입니다. 대원군께서는 변란을 진압하신 분입니다. 애초에 별기군의 패악질이 아니었더라면 변란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조선인에 의해 일본군 장교가 살해당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선 정부는 마땅히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조선 정부는 명확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부사는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100년에 걸쳐 사죄와 배상을 싫어하는 나라가 조선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다니 정말 재미있군.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있나.’
“호리모토 소위는 봉기군과 싸우던 중에 전사했습니다. 살해와 전사는 다르지 않습니까? 심지어 항복을 권유하는데도, 대일본제국의 군인은 항복할 수 없다며 싸우다 죽었다는군요. 그게 귀국의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참으로 장렬한 최후입니다.”
이선은 겉으로는 호리모토의 죽음에 찬사를 보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빈정거리는 태도였다.
“명백히 다릅니다. 정식으로 교전 중에 전사한 게 아니라, 흉도의 습격을 받아 죽은 게 아닙니까?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본인은 이번 사건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지만, 필요하다면 조선국의 전권 대표로서 유감을 표하지요.”
이선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인은 참으로 통석의 염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통석의 염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선은 ‘통석의 염(痛惜の念)’을 일본어로 적었다.
“아니, 일본에선 이게 최고의 유감 표현 아닙니까?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