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21
3부 36화 전쟁 책임과 배상
1919년 6월 하순, 파리강화회의는 종막에 이르렀다.
그 무렵, 이선은 파리를 떠나 유럽 각국을 방문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이선은, 미리 영국 정부와 대책을 논의했다.
폴란드에 도착하기 전 영국 왕실의 초청을 받아 조지 5세와 회견하고, 대영제국 최고위 훈장인 가터 훈장(Order of the Garter)을 수여받았다. 답례로 이선은 조지 5세에게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 대수장을 수여했다.
“대영제국과 대한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연합국의 승리와 세계평화에 기여한 양국의 동맹이 앞으로도 영구하길 위하여!”
이선과 조지 5세는 한영동맹의 영구함을 기원하며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기원과 달리, 동맹이 영원할 수는 없겠지.’
대한제국의 상승에 상당한 기여를 한 한영동맹이 영구할 수는 없었다. 원역사에서 영일동맹이 곧 종료되었듯, 한영동맹의 수명도 다해 가고 있었다.
물론 독일에 이어 지금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맞서 협력과 동맹이 지속되고는 있으나, 외교에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었다. 영국이 한국을 영원히 체스판의 말로만 쓰길 원한다면 판을 깨는 날도 올 수 있었다.
“짐이 권유한 바가 잘 이행되었으면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이선은 육군부장관 겸 항공부장관 윈스턴 처칠과 모종의 밀약을 재합의했다. 영국이 한국을 이용하려 하듯, 이선도 영국으로부터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할 생각이었다.
“윈스턴 경, 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예, 말씀하십시오.”
“경은 왜 그토록 소비에트 러시아를 혐오합니까? 그들의 이념과 행태를 혐오하는 겁니까, 그레이트 게임의 라이벌이었던 러시아제국의 연장선이라서 혐오하는 겁니까?”
이선의 물음에 처칠이 씩 웃더니, 위스키를 들이켜고 시가에 불을 붙였다.
“둘 다입니다, 폐하. 대영제국은 자유를 사랑하며, 독재를 거부합니다. 볼셰비키 독재는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독재 중에 최악의 형태입니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지식인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민들을 선동해 유산계급과 자유세계에 증오를 심고 있지요. 저들은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염병을 풀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소비에트에 대한 혐오는 영국 정계가 공유하는 바였지만, 처칠은 그중에서도 유독 극도의 반소주의자였다. 로이드조지는 러시아 개입에 소극적이었지만, 처칠은 클레망소와 손잡고 개입을 성사시켰다.
‘진짜 최악의 나치즘 독재를 아직 보지 못해서 그런가. 원역사에서는 훗날 히틀러에게 맞서 스탈린과 손잡게 되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군.’
“또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의 안보에서 러시아는 언제나 위협적인 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중해에서, 흑해에서, 페르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충돌했지요. 러시아 봉쇄는 영국 대외정책의 핵심입니다. 그렇기에 영국과 한국도 동맹을 맺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한 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크림전쟁과 러일전쟁은 모두 영국의 러시아 봉쇄전략의 연장선에 있었다.
“물론 카이저의 독일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차리즘과 동맹을 맺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볼셰비키에 의해 동맹이 무너졌습니다. 독일이라는 사자를 쓰러트린 후에 볼셰비키라는 비비원숭이에게 굴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질적인 체제 문제가 되었건, 전통적인 대외정책의 이유가 되었건, 루소포비아가 되었건, 처칠은 결코 소비에트 러시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처칠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동쪽에서 견제할 수 있는 육군대국인 한국을 원했다.
“뭐,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독일에 지나친 굴욕을 안겨 주는 길은 피해야 합니다. 독일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동맹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급적 독일에 유화적인 조약을 맺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론이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100만이나 되는 청년들이 독일군과 싸우다 죽었으니,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만.”
이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청했다. 처칠은 정중한 태도로 손을 잡았다.
“귀국의 행운을 빕니다. 우리의 합의는 반드시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이선이 영국의 대외정책에 관여할 수는 없었지만, 정책을 분석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영국이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나가려고 하는 건, 한국 입장에서 나쁜 일이 아니었다.
* * *
「독일 최후의 전쟁 시도가 무산으로 돌아가다! 대영제국 해군, 카이저의 함대 자침 시도를 막다!」
6월 23일자 ≪더 타임스≫는 스캐파플로(Scapa Flow)에 억류되어 있는 독일 대양함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완전히 제압되었다는 속보가 실렸다.
영국 해군에 이어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패전 직후 휴전조약에 따라 북해 영국함대 모항이 있는 스캐파플로에 억류되었다.
그 수는 드레트노트급 전함 11척, 순양전함 5척, 순양함 8척, 구축함 50척 등 무려 74척에 달했다.
카이저의 자랑이었던 독일 대양함대는, 배상금의 일부로 연합국의 전리품이 될 예정이었다. 특히 해군력이 취약한 프랑스가 대양함대 몰수와 분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독일이 프랑스에 입힌 막대한 피해의 일부는 전함으로 배상되어야 합니다!”
이탈리아와 일본도 이를 지지했지만, 영국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독일 함대의 분배는 영국 해군력의 증대에는 미미한 영향을 미칠 것이나, 프랑스와 이탈리아 해군에게는 결정적인 발전이 될 수 있다.”
영국은 독일 대양함대를 계륵 취급했다. 하지만 정전조약 31조에 따르면 독일은 함대를 자침할 수 없고, 강화조약에서 분배를 결정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만약 정부가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여 제국해군을 해체한다면, 우리는 불명예스럽게 함대를 적에게 넘겨줄 수 없다.”
마지막 대양함대 사령관 루트비히 폰 로이터 제독은 자침을 결심했다.
정보가 엄격히 통제되는 스캐파플로에 최후통첩이 전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이터는 23일에 자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영국의 대처가 한발 빨랐다. 이미 주기적인 철수단행으로 인해 독일 해군은 배를 운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력만 남은 상황이었다.
6월 22일 일요일 오전, 영국군은 기습적으로 스캐파플로에 잔류한 독일 해군 지휘부를 제압하고, 함대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대양함대의 자침 계획이 밝혀졌고, 로이터 제독과 지휘부는 정전조약 위반으로 구금되었다.
“처칠이 해냈군. 갈리폴리의 실패를 스캐파플로에서 갚는구만.”
바르샤바에서 타임스의 속보를 집어 든 이선은 씩 웃었다.
처칠에게 독일 함대의 자침 계획을 넌지시 일러준 장본인이 바로 이선이었다.
연합국에 분배하느니 차라리 자침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영국 해군 지도부와 달리, 처칠은 자침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해군장관으로 추진한 갈리폴리 상륙작전 실패는 처칠에게 있어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다. 처칠은 독일 대양함대를 몰수해 영국의 몫을 확보해야, 갈리폴리의 실패를 조금이나마 갚는다고 판단했다.
육군부장관 겸 항공부장관인 처칠은 항공기를 동원해 스캐파플로를 감시했고, 자침하기 전에 해군부를 압박해 대양함대 지휘부를 제압했다.
‘아깝게 자침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분배되는 게 낫지.’
대양함대를 제압하면, 한국도 전함을 분배받기로 합의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각 25%씩을 차지하고, 미국·이탈리아·일본·한국이 나머지 50%를 차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국도 카이저급 전함 1척, 몰트케급 순양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을 분배받을 예정이었다.
그동안 착실히 쌓아 동양 최강으로 떠오른 육군에 비하면, 빈약한 해군력이었던 대한제국에는 엄청난 선물이었다.
더욱이 러시아 개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영국은 한국에 건함기술을 넘겨주기로 했다.
1920년대에 본격적인 함대 건설을 기약하고 있는 한국 해군으로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기실 전함 배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핵심은 배상금에 있었다.
윌슨은 관대한 조건을 희망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120만의 전사자, 즉 프랑스 청년 인구의 4분의 1을 잃고, 4년간 점령당하고 전장이 되어 국토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는 반드시 독일에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얻기를 원하는 국민 여론에 맞서, 만약 미국이 영국의 빚을 탕감해준다면 관대하게 나설 수도 있겠지만, 미국 유권자의 압박을 받고 있는 윌슨은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카이저를 전범재판에 회부하라!」
「수백만 청년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라!」
「짓밟힌 국토와 빼앗긴 재산을 보상하라!」
「우리의 정당한 고토를 수복하자!」
「우리를 동등한 열강으로 대우해 달라!」
「단 1달러의 손해도 용인할 수 없다!」
각국 정부는 모두 여론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보복주의, 이탈리아의 고토 수복주의, 미국의 고립주의, 일본의 팽창주의 모두 여론의 산물이었다. 전 국민을 동원한 총력전이 낳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직 전쟁 승리만을 위해 기아를 감내해 가며 막대한 피를 흘리고 무수한 땀을 흘렸다. 그런데 전승의 과실을 따낼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피를 흘렸단 말인가?」
정책 결정은 냉정한 국가이성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국민감정이란 요소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4년간의 전쟁으로 수백만의 청년이 죽고, 더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고, 훨씬 많은 이들이 가족의 부재와 전쟁의 참화를 감내해야 했다.
연합국 국민이 보기에 이는 독일 카이저와 군부가 저지른 만행이었고, 그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작 대가를 치르는 이들은, 네덜란드로 망명한 카이저와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고 있는 군부가 아니라, 혁명으로 새로 집권한 민간정부와 평범한 독일 국민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전쟁을 지지한 원죄’가 있었다.
“독일은 4년간 벨기에를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능욕당한 벨기에의 치욕을 잊지 않습니다!”
전쟁 초기 국토의 90%를 독일에 빼앗기고, 4년간 가혹한 군정에 시달렸던 ‘벨기에 강간(Rape of Belgium)’이 연합국의 대독 보복을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전 국토가 전장이 된 벨기에는 국가 규모에 비해 막대한 배상금을 얻을 예정이었다.
기실 벨기에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가혹한 보복을 당했던 세르비아, 독일의 격렬한 침략을 당했던 동부전선의 국가들이 인구 대비 손실은 더 컸지만, 이들이 파리에서 외칠 수 있는 소리는 작았다.
동부전선을 대표하는 러시아가 강화회의에서 이탈했고, 신생국 폴란드의 발언권은 작았으며,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우크라이나·벨라루스·발트 3국· 캅카스 3국은 국가로 인정조차 못 받는 상황이었다.
전쟁 초기 동부전선의 주전장이 되었던 폴란드도 러시아군과 독일군 양쪽에게 시달렸다. 독립을 쟁취하여 파리에 정식으로 대표단을 파견한 이들도, 배상과 영토 문제에 있어서는 연합국의 호의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폴란드는 반소비에트 전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영토 문제에 있어 연합국의 지지를 받았지만, 독립조차 인정받지 못한 국가의 처지는 달랐다.
“독일군은 식량을 수탈하고,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하고, 여인들을 능욕하고, 저항하는 주민은 총살시키고,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 우리는 독일의 만행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강화회의에서 이탈한 러시아를 대신하여, 자국을 대표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사절단이 정의를 호소했다.
식량위기에 시달리던 독일과 중부동맹국은 1916-18년 대공세로 ‘유럽의 빵바구니’인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여 가혹한 수탈을 벌였다.
“이제 독일을 대신하여 소비에트 적군과 대러시아 백군이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자유를 짓밟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호소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동부전선 최대 피해국인 우크라이나의 호소는 연합국 대표단의 동정을 샀으나,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그들의 호소는 결국 무시되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유일한 정부로 인정되지 않았고, 대표단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연합국이 러시아 백군을 반소비에트 전선의 가장 유용한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백군은 ‘하나이자 분열할 수 없는 러시아’를 내세웠고, 분리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군을 지원하는 연합국도 폴란드와 핀란드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의 독립 승인은 유보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독립 열망을 무시당한 아시아의 식민지 인민들처럼, 동정은 얻었으나 끝내 연합국의 외면을 받았다.
“배상금액은 연합국 최고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산정하되, 최소 1200억 금 마르크가 되어야 합니다. 200억 마르크는 즉시 이양되어 프랑스와 벨기에의 전후 복구를 위해 쓰일 겁니다.”
전쟁책임위원회는 배상금액과 분배액을 대략적으로 결정했다.
독일의 선례에 따라 패전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불가리아도 피해를 입은 국가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나, 이들 국가는 지불할 재원이 없음을 인정하고 추후 현물로 지급하기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배상금액은 최소 1,200억 금 마르크(240억 달러)였다. 산정에 따라 배상금은 더 늘어날 수 있었다. 독일은 즉각 200억 마르크를 프랑스와 벨기에에 배상하고, 나머지 1,000억 마르크는 10년에서 20년이 걸치는 기간 동안 분할 납부되어야 했다. 만약 배상하지 못한다면 석탄이나 철강과 같은 현물로 배상되어야 했다.
“프랑스 50%, 영국 20%, 이탈리아 10%, 벨기에 8%, 폴란드 4%, 기타 국가 8%로 잠정 합의한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인 프랑스가 주장대로 배상액의 50%를, 국토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고 전사자를 낸 영국이 20%를 받기로 잠정 합의했다.
주요 참전국인 이탈리아, 규모 대비 큰 피해를 입은 벨기에, 역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영토로 보상을 받기로 한 폴란드가 그다음 순위를 이었다.
강화회의에서 이탈한 러시아는 부정되었다. 서방은 러시아의 탈퇴를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러시아도 적극적인 배상을 요구했다면, 프랑스와 영국이 차지할 몫이 크게 줄어들었을 터였다.
배상금 대상에는 오직 연합국만 포함될 뿐이었다.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 등은 독일군에 의한 손실을 보상받을 수 없었다.
추후 독립이 인정되면 국제연맹을 통하여 제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기는 했으나, 이는 현재로서 까마득한 일이었다.
‘기타 국가’는 곧 나머지 연합국이었다. 독일에 의해 손실은 전혀 입지 않았으나, 수만의 전상자를 내고 군비를 소모했던 대한제국도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전체 비율에서 2.5%에 지나지 않았으나, 현재 산정금액만으로도 50억 금 마르크(10억 달러)에 해당되는, 신흥국 한국 입장에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파리강화회의의 최대 논쟁거리였던 전쟁 책임과 배상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연합국은 6월 25일까지 조약 체결 여부를 응답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제 독일이 선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