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23
3부 38화 독일 내전
베르사유 조약은 이선이 아는 범위 내에서 큰 틀의 변화 없이 체결되었다.
이선이 일정 부분 개입을 했다고는 하지만, 열강과 타협을 한 부분은 주로 만주나 시베리아와 관계된 사항이었으므로 베르사유 조약과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었다.
이선은 유럽에서 외교적 성과를 거둔 데 만족감을 느끼고 대표단을 치하했다.
“경들, 모두 수고 많았소. 대한의 국익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회의였소.”
“황공하옵니다. 폐하의 신묘한 혜안 덕입니다.”
“모두가 합심한 덕이지. 남은 일은 경들에게 맡기고 짐은 귀국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직 도나우연방(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불가리아와의 조약 체결이 남아 있었다. 이선은 남은 회의는 대표단에 맡기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국내를 오래 비워 둘 수는 없었다.
3대 거두 중에서 윌슨도 미국 대표단에 남은 회의를 맡기고 귀국했다. 베르사유 조약 비준과 국제연맹 가입을 위해 국민과 상원을 설득해야 했다. 상원에서 민주당이 가까스로 다수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조약을 비준하려면 3분의 2 동의가 필요했으므로 공화당을 설득해야 했다.
“국제연맹의 안정을 위해서 미국이 꼭 가입해야 합니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한국도 아시아의 균형추가 되어 세계평화에 기여하길 바랍니다.”
이선과 윌슨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작별했다.
원역사대로라면 윌슨은 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 전역을 돌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국제연맹 가입도 무산될 터였다.
물론 역사가 바뀌었기에 변화가 올 수도 있었다. 미국이 가입하지 않는다면 국제연맹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선도 국제연맹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분간 베르사유 체제가 안착되겠지.’
이선은 역사의 큰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국제사회에서 배제된 소비에트 러시아를 제외하면, 베르사유 체제에 순응할 터였다. 아시아에서는 중화민국이 반발하며 조약 조인을 거부했기에 불씨가 남아 있었지만, 중국은 당장 군벌 간의 분열로 정신이 없었다.
이선은 돌아가는 길에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하여 여러 유럽 왕실들로부터 초청을 받았기에 체류 기간이 예정보다는 조금 길어졌다.
그런데 유럽에서 체류하는 동안, 세계사는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 *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한다!”
“오직 15개조만을!”
“정부는 조약비준을 거부하라!”
베를린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연합국뿐만 아니라 조약에 서명한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립정부에 비난이 쏟아졌다.
“프로이센의 영토를 폴란드에 넘겨주라니 용납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프로이센 군대의 명맥을 끊으란 말인가!”
“배신자들! 매국노들! 독일을 파멸시키려는 조약에 서명하다니!”
“독일을 파멸시키려는 매국적 사민당 정권 타도하자! 프로이센이여 궐기하라!”
우익과 민족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조약 거부와 반란을 선동했다. 극단적인 군축과 영토 할양을 강요받은 프로이센 군부와 융커의 분노가 가장 컸다. 이들은 공화국 전복의 기회를 엿보았다.
우익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좌익과 사회주의자들의 분노도 쏟아졌다.
“동지들! 탐욕스러운 서방 제국주의는 카이저와 그 측근들, 프로이센 융커와 군부가 저지른 범죄를 독일 인민 전체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저들은 종전 후에도 조약을 강제하기 위해 봉쇄를 이어 나가 독일 인민들을 아사로 몰아넣었고, 조약으로 영구히 착취하려고 합니다. 독일 노동계급은 서방의 약탈적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옳소! 조약을 거부하자!”
누구보다 카이저와 프로이센 군부를 혐오하는 좌익 독립사민당도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오히려 이들은 윌슨주의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기에 실망도 더 컸다. 급진적인 모스크바보다는 워싱턴을 택하려 했던 독일 좌익은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실망과 분노는 급진좌익의 목소리를 전에 없이 크게 만들었다.
“동지들, 러시아 인민의 전례를 따라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11월 혁명으로 카이저를 몰아내기는 했지만, 서방과 부르주아지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는 배신자들의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분노한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움직여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반동적 융커와 군부가 선수를 칠 겁니다.”
베를린 주재 러시아 대표부가 혁명의 온상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카를 라데크(Karl Radek)는 오스트리아-헝가리령 렘베르크(리비우) 출신으로, 혁명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러시아 사회민주당에서 두루 활동한 라데크는 1918년 이후 소비에트 정부의 주 베를린 대사가 되었다.
연합국의 눈치를 보는 독일 정부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를 격하함에 따라 대사관은 대표부로 축소됐지만, 라데크는 외교관으로서의 특권을 활용하여 친소비에트 여론을 조성했다.
라데크는 트로츠키와 같은 세계혁명주의자였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에 포위된 소비에트 러시아를 구원하려면 독일로 반드시 혁명을 전파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민의 쇼비니즘을 이용한다는 건 마르크스주의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지금 교리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베르사유 조약에 맞서는 광범위한 동맹이야말로 세계혁명의 길입니다. 베르사유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공동의 적입니다.”
트로츠키가 신생 적군에 외세의 러시아 개입에 반발하는 옛 제정 장교를 대거 영입한 것처럼, 라데크는 베르사유 체제에 맞서는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광범위한 동맹을 추구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현실로 다가오자, 라데크의 전략은 의외로 효과를 발휘했다. 조약 거부와 서방 연합국에 맞선 항전을 준비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도 동맹을 찾아 대표부를 찾았다.
독일 산업계의 거물이자 전시 군수책임자로 국가총동원과 배급체계를 이끌었던, 현재는 독일민주당 지도자로서 신생 공화국을 적극 지지하는 정치가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는 베를린-모스크바 동맹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자본가와 사회주의 혁명가의 동맹이라는 건 실로 역설적이다 못해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는 예외가 없었다.
“서방의 야욕에 맞서 베를린과 모스크바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단, 이는 세계혁명이 아닌 국가 간의 동맹이 되어야 합니다. 러시아와 독일은 명백하게 상황이 다릅니다. 혁명 시도는 격렬한 내전을 촉발시킬 것이며, 다시 프로이센 군부와 융커가 득세하게 만들 것입니다. 설마 모스크바가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의 독일 정부는 유약하기 짝이 없는데,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 소비에트와의 동맹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연립정부 내에서도 조약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추진해 보겠습니다. 선생은 급진주의자들의 혁명 시도를 잠재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지요.”
라테나우와 라데크는 비밀리에 접촉하여 독일-러시아 상호원조조약을 계획했다. 원역사보다 3년이나 빠른 시도였다.
그러나 민심은 반드시 지도자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분노한 여론의 폭발은 지도자들도 말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립사회민주당 좌파, ‘스파르타쿠스 연맹(Spartakusbund)’을 향해 분노한 노동자들이 쏟아 들어왔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이끄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의 전쟁을 1914년 개전 당시부터 반대해 왔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추구하는 확고한 극좌파였다.
러시아 혁명의 이행이 원역사와 달리 전개되었으므로, 스파르타쿠스 연맹도 바이마르 제헌의회와 연립정부를 받아들이고 재야세력으로 남았다.
하지만 사민당의 유화정책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극좌파로 쏠림에 따라, 스파르타쿠스 지도자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동지! 분노한 노동자들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배신자 사민당 정권을 타도하고 러시아처럼 혁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동지들. 여러분의 의기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대중의 분노는 혁명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입니다. 아직 혁명의 때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현실을 냉철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독일과 러시아는 상황이 달랐다. 혁명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소비에트 러시아도 가능하다면 독일 정부와의 협상을 선호했다.
문제는 이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지도력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전쟁승리를 위해 분투해 왔던 독일 노동계급은 민족주의적 감정이 지배했다. 조약 비준이 임박하자, 자연발생적인 분노가 베를린에 폭발했다.
“굴욕적인 조약에 반대한다!”
“독일 민족이여, 노예 되기를 거부하라!”
분노한 군중의 수는 시위 조직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시위를 지지했던 독립사민당도 군중을 통제하지 못했다.
“조약 반대를 위한 총파업을 결의한다!”
베를린 노동조합이 단결하여 파업을 찬성하면서, 총파업의 규모는 50만에 이르렀다.
11월 혁명 이후, 반동적인 프로이센 군부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모집했던 해군 혁명수병대가 베를린에 주둔했다. 이들 역시 조약에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불온한 움직임을 직감한 정부는 육군을 베를린에 불러들이고 혁명수병대의 해산과 원대복귀를 명령했다.
해산 명령에 수병대의 분노가 터져 나왔고, 조약반대 시위대와 결합하면서 폭발성을 띠기 시작했다.
“배신자 사민당 정권 타도하라!”
“혁명 만세!”
7월 11일, 혁명수병대와 봉기한 노동자들은 베를린 경찰청을 점령해 무기를 확보하고, 중앙역을 점령해 시가전에 돌입했다.
수병대의 봉기 소식을 들은 사민당 정부는 공포의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러시아에서도 소비에트가 두마를 해산할 때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선봉에 섰지. 그 전례를 따르는 게 분명하오.”
“으음, 그렇다면 역시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단 말인가.”
“틀림없소. 근래 라데크와 스파르타쿠스 일당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소.”
사민당 정부는 봉기의 배후에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모스크바가 있다고 의심했다. 정작 민족주의 우파 인사인 라테나우가 모스크바의 배후설을 부정했지만, 사민당 정부는 강경론이 지배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타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군부의 충성심을 믿을 수가 있나?”
“우리를 배신자로 여기는 급진주의자들보단 군부가 낫지 않겠소? 군부를 책임지고 통제하겠소.”
사민당 정부의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는 우익과 동맹을 맺어 극좌파를 진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공화국에 마음 깊이 충성하는 군부 인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민당 정부는 이들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차악일 뿐이었다.
믿을만한 병력이 부족한 정부는, 프로이센 국가근위대 외에도 극우 군사조직 강철군단에도 베를린 진입과 봉기 진압 명령을 발동했다. ‘유대-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은 기꺼이 진압 명령을 받아들였다.
“베를린으로 진입하여 유대-마르크스주의 빨갱이들을 모조리 섬멸한다.”
“좋다. 근데 사민당 반역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싸워 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들 또한 독일의 적이다. 먼저 빨갱이들을 때려잡고, 그다음에 반역자들의 정부를 무너트린다.”
“오오! 그래야지! 독일제국을 재건합시다!”
“베를린으로 진격하라!”
극우파들은 사민당 정부를 극좌파 못지않게 증오했다. 이들은 마침내 공화국을 타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스웨덴으로 망명해 있던 전 군부독재자 루덴도르프 대장이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베를린 군관구사령관 발터 폰 뤼트비츠(Walther von Lüttwitz) 대장이 쿠데타를 지도했다. 강철군단은 반혁명의 선봉에 섰다.
7월 13일, 베를린으로 진입한 프로이센 국가근위대와 자유군단은 봉기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독일을 배신하고 배후에서 비수를 꽂은 유대인 빨갱이들을 모조리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주로 동부전선에서 복무했던 병사들로 모집했던 강철군단의 잔혹성은 악명 높았다. 이들은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는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척결해야 할 병균이었다.
정규군인 국가근위대, 베테랑으로 구성된 강철군단은 혁명수병대와 노동자 봉기군을 손쉽게 격파했다.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시가전은 15일이 되면 거의 진압단계였다.
시위를 주도했던 독립사민당과 스파르타쿠스 연맹 지도자들은 가까스로 체포를 피하고 좌익세력이 강력한 함부르크로 도피했다.
여기까지는 사민당 정부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그다음 상황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였다.
7월 19일, 베를린을 완전히 제압한 뤼트비츠 장군은 쿠데타를 감행했다. 갑작스러운 배신에 사민당 정부는 경악했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이오! 왜 저들이 정부를 향해 총구를 돌린 거요?”
“극좌 다음은 극우라! 아주 가관이구만그래!”
국방장관 노스케는 부랴부랴 군부에 진압을 요청했다. 하지만 군부 수뇌부의 태도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군은 전우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지 않습니다.”
사실상 쿠데타를 방관하는 군부의 태도에 정부는 베를린 방어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래서 군부는 믿을 수가 없다고 한 거 아니오!”
“프로이센 군부의 광기에 연방주들이 가담할 리가 없소. 정부를 이전하고 결사 항전합시다.”
베를린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병력은 없다시피 했으나, 여전히 사민당을 지지하는 철도 노동조합의 호위를 받아, 정부는 가까스로 열차를 타고 드레스덴을 거쳐 중부 바이마르로 피신했다.
이튿날인 7월 20일에 베를린에는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는 선언문이 공포되었다.
「국가근위대와 강철군단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베를린의 좌익 폭동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독일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를 불러들인 원흉, 11월의 배신자들이자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한 반역자들, 사민당 정권을 타도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이에 애국자들은 구국의 결단으로 사민당 정권을 타도했다. 우리는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고, 위대한 독일제국을 재건할 것이다!
도이칠란트, 세상 그 무엇보다 도이칠란트!」
바이마르로 피신한 공화국 정부도 즉각 맞불을 놨다.
「아직도 군국주의적 야욕을 저버리지 않은 일부 프로이센 군부와 융커들의 반동적 반란이 발생했다. 독일 국민이여, 독일의 노동자들이여, 독일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이여! 국민의 압도적인 투표로 선출된 제헌의회와 공화국을 수호하자! 카이저를 복고하고 끔찍한 전쟁을 다시 획책하는 반란군을 타도하자! 공무원들은 반역자들의 훈령에 응하지 말고, 병사들은 반란군 장교들의 명령을 응하지 말라! 연방의 국민들이여, 프로이센 군부의 압제에 굴하지 말라! 노동자들이여, 총파업으로 반란을 격퇴하자!
독일 공화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1919년 7월, 독일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베를린의 국가방위정부(반란정부)와 바이마르의 공화국 정부. 함부르크로 도피한 ‘임시혁명위원회’까지 합산한다면 세 개의 정부였다.
독일의 정세, 그리고 세계의 정세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회오리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