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24
3부 39화 극단의 시대
대한제국과 독일은 선전포고 이후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베르사유 조약 체결 직후 외교공관이 베를린에 재개되었다.
전 러시아대사 조한민이 부임하여 표면적으로는 외교활동을 하며, 배후에서는 유럽 중심부인 베를린을 본부로 유럽 전체의 정보망을 관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조한민은 부임하자마자 베를린의 격동을 시시각각 체험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베를린의 주인은 두 번이나 바뀐 상태였다.
“지금 정세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지만, 이 정권은 오래가기 힘들다.”
조한민은 소위 국가방위정부를 자처하는 쿠데타 세력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판단했다.
군사력을 내세워 수도를 점령하긴 했지만, 시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외교적 지원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베르사유 조약 거부를 천명한 쿠데타 세력은 서방 연합국의 승인을 받을 리가 없었다. 독일이 유일하게 동맹 대상으로 검토할 수 있는 소비에트 러시아는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이들과 손을 잡을 길도 만무했다.
조한민은 정보를 취합해 황제를 향해 보고서를 올렸다.
“나 원,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선이 베를린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보고 받은 시점은, 프랑스를 떠나 사보이 왕가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를 국빈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독일 내전은 이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원역사의 극좌 스파르타쿠스 봉기나 극우 카프 반란과 유사성이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 거부라는 국민적 물결을 타고 그보다 훨씬 크게 터지고 말았다.
‘독일에서 베르사유 조약 거부를 외치며 내전이라.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군.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단기적으로 보면, 러시아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독일을 상대로 전쟁 종료 때까지 버텼다는 게 큰 변수였다.
독일은 원역사의 가혹하기 짝이 없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러시아에 강요하지 못했으므로,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실제 연합국은 독일에 베르사유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보다는 훨씬 관대하다는 점을 일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없었던 세계에선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1919년 1월 봉기를 일으킬 필요도 없었고, 사민당 정부가 극좌를 제압하기 위해 프로이센 군부 및 극우세력과 야합할 필요도 없었다.
즉 사민당 정부는 군부를 전혀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 연맹이 건재한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 폭발력은 예상 범위 밖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변화시킨 역사 때문인가?’
이선의 생각은 단순히 자의식과잉은 아니었다. 이선이 러시아 역사에 개입하면서 발생한 역사의 변화는 점차 나비효과를 낳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막은 결과 예기치 못하게 레닌(울리야노프)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볼셰비키는 원역사와 다른 집단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를 조종하여 러일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고 스톨리핀 개혁을 이어 나가게 했고, 제정의 오랜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혁명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혁명의 성격이 바뀌었다.
혁명 이후에도 러시아가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지 않도록 힘을 보태자, 결국 소비에트가 집권하긴 했지만 역사가 가시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발생한 변화가 중국과 러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러시아에서 발생한 변화가 독일에 영향을 미치고, 독일에서 발생한 변화는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었다.
즉 앞으로의 역사전개는 이선이 예상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 우려가 큽니다.”
“일부 극단주의 세력의 쿠데타로 추정됩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제압될 겁니다.”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우려에 이선은 쿠데타의 실패를 예측했다.
“쿠데타 실패 이후도 문제지요. 베르사유 조약 거부를 들고 일어선 극우보다는,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는 극좌가 더 문제입니다. 만약 독일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혁명이라는 전염병이 유럽 전역에 퍼질 수 있으니까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우려하는 건, 극우 쿠데타가 아닌 혁명의 확산이었다.
이탈리아의 영유권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져, 원역사의 이탈리아 여론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불구의 승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의 근본적인 모순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열강이라지만 이탈리아도 극심한 지역격차와 계급격차가 문제였다. 공업지대인 롬바르디아와 농업지대인 에밀리아-로마냐 등지에선 대전쟁으로 고통받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대변하는 이탈리아 사회당의 세력은 더욱 커지고 있었고, 차기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컸다.
자본가와 지주들은 ‘붉은 물결’의 확대에 공포감을 느꼈다. 바로 그 지점을 변절한 옛 좌익 사회주의자이자 극우 정치깡패들의 우두머리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고들었다.
아직 무솔리니의 ‘전투파쇼단’은 세력이 미미한 정치깡패 집단에 불과했지만, 원역사처럼 세력을 확대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폐하, 사회주의 혁명은 붉은 신기루입니다. 러시아처럼 사회적 모순이 가득하면서도 정치적 출구가 없었던 나라였다면 모를까, 최소한 대의제 선거와 헌정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이뤄질 가능성은 극히 낮지요. 오히려 이들을 잡겠다고 설쳐 대는 극우 세력이 문제입니다. 지금 베를린에서 날뛰는 무리처럼 말이지요.”
이선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극우세력의 성장을 방치했다가는 로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독일처럼 언젠가 로마를 향해 진군할지도 모르지요.”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정치적으로 과격하지 않습니다. 삶과 평화를 사랑하지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그럴 리 없다는 코웃음을 흘렸다.
‘바로 당신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잖소…….’
원역사에서는 불과 3년 뒤에, 정부가 계엄령만 내리면 오합지졸 파시스트 진군을 막는 상황에서, 지배세력의 부추김을 받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국왕이 계엄령을 거부하고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파시스트 집권은 현실이 됐다.
“물론 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오나 폐하, 전세계적으로 왕조의 존속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군주의 단호한 지도력을 보여야 합니다. 결코 군주의 지도력을 시정잡배들에게 내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극단주의 세력은 반드시 국가를 무너트립니다. 국민이 선출한 정부, 군주가 재가한 정부를 신뢰하고 극단주의를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묘하게 가르치려는 것 같은 이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총리 오를란도가 이선을 극찬한 바 있기에 잠자코 들었다. 이탈리아의 피우메 영유권에 전혀 관계없는 제3국인 한국이 적극 지지해 준 것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만약 한국에서 베를린과 유사한 사태가 온다면, 짐은 직접 수도를 지키며 반란군을 제압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보이 왕가의 계승자인 폐하께서도 단호히 진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지요. 짐은 영원의 도시 로마를 그 어떠한 세력에도 넘겨주지 않을 겁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의례적인 말이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그로선 극좌든 극우든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 * *
독일 내전의 상황 전개는 조한민과 이선의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은 정통성이 없었으며, 이들의 명령은 베를린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심지어 베를린 내부에서도 막혔다.
“프로이센 군부독재가 복귀했다!”
“독일 국민이여, 쿠데타 정권에 맞서 불복종합시다!”
“노동자 총파업! 공무원들도 모두 업무를 중단합시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는 독일 국민 대부분이 공유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부가 재집권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루덴도르프가 사실상 군사독재자로 군림했던, 1916-18년의 그 지독했던 총력전 시기를 떠올리면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반혁명 반동세력은 즉시 타도되어야 한다! 독일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반동세력을 분쇄하라!”
베를린의 유일한 동맹이 될 수 있는 모스크바도 반혁명 분쇄를 선포했다.
함부르크의 임시혁명위원회도 반동 쿠데타에 맞선 단결을 외쳤다. 군대를 끌어들여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던 사민당 정부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일단 그들의 목을 조르려는 반란군부터 격파해야 했다.
“위기는 곧 기회요. 먼저 반란군을 무너트리고, 사민당 정부와 군부의 공모를 밝혀내 혁명의 기회로 삼읍시다.”
라데크는 역설적으로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아직 사민당과 진압군의 ‘공모’ 여부를 몰랐지만,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군부와 사민당 정권을 동시에 실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프로이센 군부독재가 복귀하면, 바이에른은 독립을 선포하겠소!”
“라인란트는 프로이센의 압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차라리 독립하겠소!”
프로이센 독재를 혐오하는 남서부 주들, 특히 바이에른과 라인란트는 독립을 위협했다.
가톨릭이 대세인 바이에른은 원래 프로이센에 반감을 느끼고 있었을뿐더러, 특히 라인란트는 실존의 문제였다. 이미 프랑스는 라인란트 분리공작을 계획해서 부추기고 있었는데, 베르사유 조약 거부를 명목으로 라인란트로 군대를 진주시킬 수 있었다.
“연합국 최고위원회는 쿠데타 세력을 부정한다.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독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공화국 정부이며,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한다면 군대를 투입시킬 것이다.”
연합국은 즉각 쿠데타 정권을 부정하는 성명을 내보냈다. 프랑스군은 말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라인란트와 루르 공업지대로 군대를 진주시킬 준비를 했다. 프랑스에는 라인란트 분리공작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독일이 붕괴하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다.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반란군을 타도하라.”
정부로부터 육군총감, 즉 사실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대장은 마침내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다.
‘군대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사민당 정부의 반란진압 명령을 거부할 만큼, 군부 수뇌부도 심정적으로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독일이 산산 조각날 위기였다. 남서부 주의 독립 선포, 프랑스군의 진주 위협, 사회주의 혁명 가능성은 독일제국의 재건을 원하는 군부에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다.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가 모스크바와 손을 잡은 다음에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했어야지. 이래서야 누가 군부를 지지하겠나? 무작정 일만 벌였다가 군부의 위신만 실추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놈들.’
군부의 높은 신망을 받고 있는 젝트는 쿠데타 세력과 같은 군국주의자이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였다. 현재로선 공화국 외에는 대안부재의 상황이었다.
“노동자 총파업으로 전국이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정부의 불복종 호소에, 사민당 정부에 대한 호오(好惡)를 떠나 총파업의 물결이 전 독일을 쳤다. 쿠데타 3일 만에 독일 전국에서 1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합류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군대의 수송을 거부했고, 통신 노동자들은 반란군의 전문을 보내길 거부했다. 공무원들조차 불복종에 나서 업무를 중단했다.
반란군이 총구를 들이밀고 협박하기에는 파업의 물결이 너무나도 컸다.
“육군부에서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젝트 이놈, 결국 눈치만 보다가 사민당 놈들에게 붙은 거냐!”
이미 총파업으로 정부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젝트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제국군 전우끼리 피를 흘리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항복하면 선처를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군부마저 등을 돌린 이상 이번 거사는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소. 차후를 기약하며 물러납시다.”
7월 25일, 쿠데타 지도부는 베를린을 포기하고 중립국은 스웨덴으로 도주했다. 지도부를 잃은 반란군은 진압군에 항복했다. 7일 천하였다.
바이마르에서 베를린으로 복귀한 공화국 정부는 후폭풍에 휘말렸다.
“애초에 강철군단을 끌어들여 노동자 봉기 진압에 나선 정부가 쿠데타를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방장관 노스케를 재판에 올려라! 정부는 즉각 총사퇴하라!”
독립사민당의 격렬한 비난에도 정부는 반박할 말이 없었다.
“현 사태를 막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고 사퇴합니다. 총선은 조속히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연립정부는 사태를 책임지고 조기 총선을 약속하며 총사퇴했다. 강철군단을 끌어들인 장본인 노스케는 장관직 사퇴뿐만 아니라 사민당에서 출당되었고, 반란군과의 공모 여부를 가리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약 거부 세력이 몰락한 건 좋은데, 이래서야 다음 총선에서 극좌파가 득세하겠군. 정말로 독일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거 아니오?”
“쿠데타 실패를 봤잖소? 그래도 독일인들은 이성적이라 러시아처럼 막 나가진 않을 거요.”
“어떤 정권이 됐건,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요.”
쿠데타의 신속한 종료로 프랑스군의 라인란트 진주는 중지됐다. 영국은 독일을 지나치게 약화시켜 프랑스가 대륙에서 독주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쿠데타 실패 후에도, 연합국은 여전히 감시의 눈길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누가 집권하건 베르사유 체제를 벗어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의 본산이자 융커의 본거지인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쿠데타에 가담하여 소위 ‘국가방위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독일을 지배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맞서 동프로이센만이라도 분리를 선포해야 하오!”
“베를린에서 패배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단 말이오?”
“어차피 육로로 가는 길도 막혔는데 무슨 수로 진압한단 말이오. 동부만이라도 베르사유 조약 거부의 대의를 지켜야 하오.”
동프로이센은 여전히 반란군의 거점으로 남았다가, 독일의 분열을 끌면 공격하겠다는 젝트의 최후통첩을 받은 후에야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쿠데타에 동원된 초급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에게는 선처가 약속되었다. 동프로이센 쿠데타에 가담했던 강철군단 병사들은 결국 무기를 내려놓았다.
“프로이센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결국 신성한 독일이 유대-마르크스주의 손에 들어가고 마는구나.”
“배신자 놈들! 언젠가 반드시 유대인과 빨갱이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말리라.”
강철군단의 열렬한 선동가였던 아돌프 히틀러 하사는 분노로 이를 갈며 총을 내려놓았다.
위대한 독일이 ‘유대-마르크스주의’에 넘어갔다는 생각에, 터지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독일, 아니 세계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마르크시즘이든가, 파시즘이든가.
자유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들은 두 극단 사이에서 파괴되고, 양자택일을 해야 할 터였다.
대전쟁 이후의 시대는 곧, 극단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