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30
3부 45화 원산 총파업
“마침내 황제 폐하께서 성단을 내리셨소!”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예전부터 개입을 외쳤던 팽창주의 파벌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었던 황제가 동의를 했으니, 그들의 기쁨은 컸다.
물론 공식 선전포고도 파병도 아닌 ‘군사지원’이라지만, 이제 전쟁은 기정사실이었다.
“대한국 정부는 삼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시베리아 군사지원을 결의합니다. 의회는 즉시 의결해 주길 바랍니다.”
“찬성! 압도적인 찬성이오!”
내각 각의에서 군사지원은 신속히 결정되었고, 정부의 거수기나 다름없는 중추원은 즉시 의결했다.
중추원 의결에 이어 민의원도 표결에 들어갔다. 개화당과 제국당은 당론으로 찬성을 결정했고, 신민당과 진보당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강화조약으로 유럽에서의 대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우리 대한의 청년들도 이제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로 돌아가야 합니다. 러시아 정부를 선택할 권리는 러시아 인민에 있으며,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디까지나 국제전이 아닌 내전입니다. 타국의 내전에 명분 없이 개입하는 건 도의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옳지 못합니다.”
신민당 사무총장 안창호가 반대의사를 보이자, 즉각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황제를 시해한 역적들을 토벌하는 게 어찌 명분 없는 개입이란 말인가!”
“이미 시베리아 정부가 지원을 요청했소!”
“우리 한인 동포들이 본국의 보호를 바라는데, 이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 있소?”
진보당을 대표해 전봉준이 발언권을 얻었다.
“나 전봉준은 2년 전 러시아를 방문하여 민심을 살핀 바 있습니다. 러시아의 근본적인 문제는 오랫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문제였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정부가 과격하다고는 하나, 토지개혁을 열망하는 인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전봉준의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더 큰 비난과 야유가 쏟아졌다.
“진보당은 누구 편인가? 태도를 똑바로 하라!”
“그 토지개혁 타령 그만하시오! 대한에서도 농민의 열망이 있었다지만, 농민봉기나 내전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소!”
“과격파들의 선동 때문이지! 지금 저들의 위협을 꺾어 두지 않으면, 대한에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전 의원은 20년 전 만인대를 잊었나 봅니다? 그때는 정부의 허락도 없이 청조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더니, 합법적인 군사지원은 반대하는 겁니까?”
전봉준이 목소리를 높여 반박하려 하자, 옆에 있던 진보당 총재 손병희가 눈짓으로 전봉준의 발언을 만류했다.
개화당과 제국당은 당론으로 만장일치, 신민당과 진보당은 의원 각자의 판단에 맡겼다. 그 결과, 의석수의 5분의 4가 군사지원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 반대는 거의 없었고, 그나마 기권이었다.
이로써 군사개입은 확정되었다.
“총재, 왜 반박 못 하게 했습니까?”
“녹두,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어요. 우리 의원들도 대부분 유학을 익혔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황제 시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말하는 이들이 적잖습니다.”
“이 전쟁이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말리지 않으면 누가 나섭니까?”
“성상께서 혜안이 있으시겠지요. 아무튼 소나기는 피하고 봅시다.”
전봉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선이 잠시 부재하니, 우익세력이 기승을 부렸다. 그로선 어서 이선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 무렵, 이선은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 총독 첼름스퍼드(Chelmsford) 자작과 회동한 이선은, 영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천명하는 약속을 받았다.
“자유를 향한 귀국의 선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전 인도 총독이자 신임 외무장관 커즌 후작은 제정 시절부터 대러 강경파였다. 커즌은 처칠과 손잡고 백군을 통한 배후 개입이 아닌, 영국군이 직접 내전에 개입하도록 했다.
특히 바쿠 유전을 소비에트에 넘기지 않으려는 영국의 야심은 분명했다. 1919년 8월 페르시아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카스피해를 건너 바쿠에 진주했다. 적군의 공격을 받던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정부는 영국군의 진주를 환영했고, 영국은 적군을 격파하고 바쿠 유전을 통제했다.
기실 이선은 오래전부터 바쿠 유전을 개발하고 관리한 브라노벨의 대주주이기도 했으므로, 소비에트 정부의 유전 국유화 시도는 개인적으로도 용납 못 할 일이기는 했다.
“곧 약속대로 집행되리라 기대하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영제국 정부는 귀국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이선은 확고하게 소비에트 러시아에 맞서는 서방과 손을 잡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선이 국내 문제를 외면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개화당 우파와 군부는 개입 명령에 기뻐 춤을 추고 있겠지. 마음껏 기뻐하게나. 채찍을 휘두르기 전에 당근 하나 정도는 안겨 줘야지.’
이선은 이미 숙청으로 마음을 굳힌 터였다.
‘박영효만의 문제가 아냐. 개화당 자체가 고인물이 되고 낡아빠졌어. 개화당은 여전히 내게 충성하고 최대 지지기반이지만, 이제 결별할 때가 왔다.’
민영환은 최초의 비 개화당 출신 총리였지만, 이선의 기대와 달리 개화당 우파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이선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개화당 우파가 사실상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었다.
단 7개월의 부재로도 이럴 진데, 자신이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뻔했다.
‘군부 내 파벌형성을 명분으로 삼을까.’
무엇보다 이선이 거슬리는 건 군부 일각이 결탁했다는 점이었다. 박영효는 군무대신을 오랫동안 역임하고 7년간 총리를 하면서 그의 신세를 진 군인이 많았다.
당장 1호 프로이센 전쟁대학 유학생으로, 장기간 참모총장과 군무대신을 역임하며 국군의 기틀을 만든 박유굉 대장도, 박영효와 같은 반남 박문이자 팽창주의 파벌의 지도자였다.
그렇다고 박유굉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다든가, 군부 지도자로서 정부에게 도전할 의사가 있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순수한 프로이센형 군인으로서 국가주의와 팽창주의를 신봉했고, 이를 후원하는 박영효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선이 박유굉을 통제하는 것처럼, 이진이 그의 후임자들을 통제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기에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태자는 보아라. 모든 중대 사안을 내게 묻고 처결하겠다는 너의 뜻은 갸륵하나, 그래서야 대리청정의 의미가 퇴색된다. 너는 장차 나를 이어 군주가 될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여라. 모든 일에 원훈과 각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네 태도는 실로 훌륭하다. 하지만 군주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의 조언도 의심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제나 언로는 다양하게 열어 두어라. 결코 신뢰하는 소수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아니 된다.」
이선은 훈령을 요청하는 이진의 전문에, 부황으로서의 조언을 보냈다.
대리청정을 수행하는 이진의 능력이나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제한적인 정보만을 얻는 이선으로선 확실치 않았으나, 이진의 경험이 미숙하여 신뢰하는 원훈에게 휘둘리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제 귀국까지는 얼마 안 남았다. 속히 들어가서 해결해야겠군.’
한국의 ‘군사지원’ 결정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공식적으로 한국을 규탄하고 관계를 단절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계속되는 적대행위를 규탄하며, 제국주의 정권과의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다.」
소비에트와 적대하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미국 등이 차례대로 모스크바에서 외교공관을 철수하던 중에도 남아 있던 한국 대사관도 철수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국대사 이위종도 모스크바를 떠났다. 대사관은 핀란드 헬싱키로 이전할 예정이었다.
“결국 이렇게 러시아를 떠나게 되는군.”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이위종은 부친 이범진을 따라 처음 부임한 지 17년 만에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다. 35년 생애 중에 반을 러시아에서 보낸 이위종은 절반은 러시아인이 되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도 얻었다.
이위종의 아내, 러시아 귀족의 딸인 엘리자베타는 세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떠났다.
“설령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있겠죠.”
“우리가 아는 세상은 사라져 있을 거요…….”
오랜 추억이 가득한 땅을 떠나는 사내의 눈, 정든 고국을 떠나는 여인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했던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서 헬싱키행 기차에 올라탔다.
역에는 러시아 제국기와 차르의 초상화가 있던 자리에 붉은 깃발과 함께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는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러시아에 거주했던 이위종은 농민과 노동자의 분노를 이해했고, 소비에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한국 내에서 대표적인 대소 유화파였으나, 정부의 입장이 결정된 이상 철수해야 했다.
극단의 시대는 양극단에서 한쪽을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시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 * *
법적 절차가 완료되자, 정부는 군사개입을 준비했다.
“육로는 만주철도와 치타 회랑을 통해 군사지원을 이어 나가고, 해로는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이어 나갑시다.”
“그런데 지금 원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있잖습니까?”
“아니, 그건 왜 해결이 안 되는 거요? 파업이 한 달이 넘기다니 말이 되나?”
7월 초부터 시작된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은, 8월까지 장기화되고 있었다.
함흥-원산으로 이어지는 공업지대는 대한제국 유수의 중공업지대였고, 대전쟁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중국과 만주 수출입으로 분산되어 있는 인천과 남포, 일본과 미국 수출입에 집중하는 부산과 달리, 원산은 대부분 러시아로 향하는 물건이었다.
“파업의 대상이 되는 기업이 영국 기업인데, 이쪽도 아주 비타협적이긴 매한가지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미국과 영국 자본도 꾸준히 한국에 진출했다. 영국-네덜란드 석유자본인 로열 더치 셸(Royal Dutch-Shell)이 한국에도 진출하면서, 원산에 제유공장을 설립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한국인이었지만, 사장과 감독관은 영국인이었다.
“이 게으른 황인종 놈들아, 똑바로 해! 네놈들의 게으름으로 회사가 손해를 보면 되겠어?”
문제는 영국인 감독관이 아시아 식민지에서 군림하던 버릇을 못 버렸다는 것이었다. 주권국가 국민이자 명백히 동맹국인 한국인 역시 ‘미개한 황인종’으로 생각했다.
“또 고장 냈어! 이런 멍청한 옐로우 멍키새끼들!”
감독관이 기계 고장에 분노하여 노동자를 두들겨 팼다. 계속되는 멸시에 분개하던 노동자들은, 감독관의 노동자 구타로 폭발하고야 말았다.
“야 이 개자식아, 우리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죽여!”
노동자들은 분개하여 감독관을 공격했다. 공장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여 일방적으로 감독관의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체포하자, 파업이 개시됐다.
“총파업!”
“노동자들을 석방하라!
“폭행의 원인이 되는 자를 처벌하라!”
노동자들의 분노에 놀란 원산 경찰이 합의에 나섰다. 사태 20일 만에 노사 양측은 합의, 문제가 된 감독관을 해고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그 후에 회사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위 노동조합, 원산노동연합회는 좌익들의 조종을 받아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불량한 단체이다. 우리는 원산노동연합회를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합의 또한 무효다.”
회사의 뻔뻔한 태도에 노동자들은 격분했다. 오히려 이들의 태도가 노동자들을 더욱 급진적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외국자본의 착취를 몰아내자!”
“노동자 형제들이여! 단결은 우리의 무기다!”
7월 25일, 마침내 원산노동연합회는 원산 전역에 총파업을 선언했다. 로열 더치 셸의 노동자들 외에도, 다른 공장과 항만 노동자들도 파업에 가담했다.
“최저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외국인 감독 파면!”
“노동자 대우개선!”
“노동조합 단체교섭권 확립!”
이제 요구는 일개 공장이 아닌 국가를 향하고 있었다.
“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야. 요컨대 배후에 사회주의자들, 빨갱이들이 있다 그 말이지?”
황성의 정부는 원산총파업 소식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 정도 규모의 총파업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주요 군수공업지대이자 대러시아 수출의 거점인 원산에서 총파업이 발생했다는 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조속히 진압해야 하지 않을까요?”
“당연한 소리. 경찰력을 동원해 진압하라. 원산 경찰만으로 진압할 수 없다면, 함경남도 전체 경찰들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해!”
“옛!”
정부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의사를 분명히 했다.
국내 치안의 책임자인 내무대신 이규완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14대손으로 방계왕족이기는 하나 몰락한 잔반이 된 뚝섬 나무꾼 출신이었다.
하지만 의기 하나만큼은 대단했던 이규완은 무작정 금릉위 댁을 찾아갔고, 박영효에게 발탁되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개화당의 호위무사가 되었다.
갑신경장 이후에는 군사와 경찰 계통에서 쭉 활약했고, 정령으로 전역한 후에는 경무청의 중책을 맡았다.
이규완은 이선에게 충성심이 높았는데, 1895년 대군주의 밀서 사건이 터졌을 때 군인과 경찰들을 동원하여 완화군 추대를 외쳤던 장본인이었다. 단순히 이선에 대한 개인적 충성을 넘어, 대군주가 국가를 배신했다고 판단해서였다.
이선의 신임을 받은 이규완은 경무총감을 역임했고, 법 집행에 있어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이준용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체포에 반발하자, 이규완은 직접 운현궁으로 달려가 황제의 백부인 이재면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즉각 체포했다.
이준용은 재판에서 수뢰를 인정하고 막대한 벌금을 낸 후 풀려났고, 이선은 이규완을 공개적으로 치하했다.
“법 집행에 있어 황족이든 일개 서민이든 모두 공정해야 한다. 경들은 모두 본받으라.”
이규완은 청렴결백하면서도 엄정해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다.
그런데 더더욱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게 있었으나, 바로 황제와 국체(國體)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불령(不逞)한 사회주의자들은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 순량한 근로자는 올바르게 대우하겠으나, 국체에 도전하는 자들은 엄격히 처벌될 것이다.”
이규완은 때마침 일어난 원산총파업의 배후에 사회주의자가 있다고 의심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일소되어야 했다.
충돌은 불가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