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34
3부 49화 전환점 : 대한 민본주의
광무 23년 8월 29일. 신민당 사무총장 안창호는 민의원 본회의에 발언권을 신청했다.
“의원 동지 여러분! 우리의 조국, 대한국에는 명백히 헌법이라는 게 존재합니다. 바로 황제 폐하께서 흠정하신 헌법입니다! 헌법 제22조, 대한국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언론, 저작, 출판 및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갖는다! 제23조, 대한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않고 체포, 감금, 수사, 신문, 처벌이 불가하다!”
“헌법 낭독하러 나왔소? 그럴 거면 들어가시오!”
개화당 의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안창호는 개의치 않고 발언을 계속 이어 나갔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바, 경찰이 권리를 감히 침해할 수 없습니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경찰이 처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8월 22일 원산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입니까?”
“좌익 폭동이잖소!”
“폭동이 아니라 경찰에 의한 학살이었습니다! 여기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 눈이 있다면 똑똑히 보십시오!”
안창호는 대한매일신보 호외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제에 이어 오늘 갓 발행된 제2보였다. 2보에는 원산 총파업의 배경과 진행상황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외국 자본의 부당한 모멸에 맞서 파업한 노동자들,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한 노동자들을 좌익 폭도로 몰아 사살했습니다! 이들은 무장하지 않은 채로 시내를 행진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발포했습니다!”
의석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개화당 의원들도 대한매일신보 특보와 어제 소집된 회의를 통해 사건의 실태에 대해 어느 정도 접근한 상황이었다.
이제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진실을 호도해야 했다.
민의원에 특별 출석한 내무대신 이규완이 나섰다.
“의원 여러분, 노동자들에게 악의는 없었을지 몰라도, 그들을 선동한 소위 원산노련은 모스크바의 배후조종을 받는 불순분자였소! 대한에서 러시아와 같은 혁명을 일으킬 속셈으로 분란을 일으킨 거란 말이외다!”
“증거는 있습니까?”
“현재 경찰에서 수사 중이고, 머지않아 실체가 밝혀질 것이오.”
“증거도 없이 발포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대체 누가 경찰에게 발포할 권한을 부여했습니까?”
“폭도들의 경찰서 위협에, 부득이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신문 보도에서 누가 먼저 공격적인 대응을 보였는지 분명히 나오지 않습니까!”
“야당은 대한국 정부 발표는 믿지 못하고, 외국계 언론이 발표한 건 믿을 수 있다는 거요!”
정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신민당과 진보당은 합동으로 진상조사 결의안을 상정했다.
“작금의 정부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의회에서 직접 조사해야 합니다!”
“정부를 그토록 불신한다면, 차라리 내각불신임을 상정하시오!”
“도대체 야당은 영국과 러시아의 앞잡이인가? 왜 자국 정부의 말은 불신하면서, 외국인들의 말은 믿는가?”
“이제 그만! 진실을 그만 왜곡하시오!”
개화당의 거듭되는 비난에 진보당의 노장 전봉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역시 한때 정부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정부가 얼마나 쉽게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지 압니다! 작금의 정부는 자정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위로는 황제 폐하의 성총(聖聰)을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전 국민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뭐요? 황제 폐하의 정부를 모욕하는 건가!”
개화당 의석에서 거듭 비난과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좋소, 막말로 학살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당신네 신민당과 진보당이 정권 잡고 있으면, 위협적인 외세와 내통이 의심되는 불순세력을 진압하지 않을 거요? 정권을 맡고 있으면, 국가를 위해 때로는 불가피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는 거요!”
“그러니까 만년 야당이지.”
개화당의 논리대로라면, 누가 정권을 잡았든 총파업을 가혹하게 진압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야유와 조롱에 굴하지 않고, 안창호는 소리 높여 반박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민당이, 혹은 진보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면, 개화당처럼 지배자의 오만에 취해 국민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겁니다! 노동자와 농민은 좌익 불순분자가 아닙니다! 개화당의 비뚤어진 잣대, 세상만사를 꼭대기에 올라 오른쪽에서만 바라보려는 바로 그 잣대가 잘못된 겁니다!”
안창호와 의원들의 열변, 신민당과 진보당의 합동 결의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집어치워라! 개화당은 양심도 없나!”
“이러니까 의회가 정부 거수기란 말이나 듣지!”
“개화당은 물러가라! 개화당 독재 타도하자!”
신민당과 진보당 의원들은 격렬히 반발했으나, 개화당은 단독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제국당까지 합치니 표결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젠 직접 민의에 호소합시다. 위로는 황제 폐하로부터 아래로는 국민에 호소합시다!”
“옳소! 거리로 나갑시다!”
두 야당은 남은 회기(會期)를 보이콧하고, 가두투쟁을 선언했다.
야당의 호소는 초기에는 큰 호응이 없었다.
“에이, 설마. 정부가 그렇게까지 했으려고?”
“정부 발표는 무시하고, 외국인들 주장은 믿으란 말인가?”
“러시아의 조종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으면 당연히 진압해야 하는 거 아닌가?”
검열을 피해 영문판으로 발행된 대한매일신보를 읽을 수 있는 식자층은 제한적이었고,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문이 퍼져 나가도 황성 주민들 대부분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산의 노동자 형제들이 학살당했소! 동지들이여, 정부의 만행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파업에 나섭시다!”
“옳소! 우리도 파업에 동참합시다!”
민감하게 반응한 건 노동계였다. 이들은 원산 학살에 슬퍼하고 격분했다.
8월 31일, 황성과 경기 일대의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들을 조직하던 신한청년단은 대부분 구속되거나 감찰 대상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파업이었다.
“쯧, 어쩔 수 없지. 불법파업으로 규정해 법적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대체 인력을 고용해 파업을 무력화하도록.”
노동계의 파업까지는 정부도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정부는 즉각 후속조치에 나섰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서울이니만큼 강경한 조치는 취하지 못하지만,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9월 1일 월요일.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 신학기 개강을 맞이하여 대학가에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국민교육 실시 후 전국적인 교육열이 확산됐다.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은 국민 전체가 이수했고, 중등교육 이수율도 높아졌다.
그래도 고등교육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으니, 대학은 학비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매년 막대한 교육예산을 썼지만, 국민교육을 확대하는데 재정의 대부분이 쓰였다. 일반 국민으로서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배운 사람’ 대접을 받는 풍조에서 굳이 대학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대학생은 국가의 공인된 엘리트였다. 출신을 가리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입신양명의 기조 아래, 똑똑하고 야심 찬 젊은이들이 대학으로 향했다.
초기의 대학은 시급히 필요한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기조도 확립됐다.
가장 선진적인 학문을 익히는 대학생은 대한제국 전체에서, 단연코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었다. 서양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사회주의에 대해 학습하고, 러시아와 유럽 혁명의 진로를 토론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학우여! 여러분은 원산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지 않은가? 개화당 정부는 장기집권하면서 자본과 결탁하고, 노동자를 학살하고, 국민을 속이고, 언론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적은 모두 외세와 내통한 반역자라고 치부한다. 도대체 진정한 국민의 적은 누구인가?”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가 침묵하고 있을 수 있는가! 학우여, 상아탑을 벗어나 거리로 나아가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하자!”
“학우여, 나아가자! 자유 만세!”
미국인 언더우드가 설립하고 운영하여 국가의 간섭이 덜하고, 진보적 기풍이 강한 연희대학교에서 가장 먼저 동맹휴학이 선포되었다.
같은 날, 특수목적의 관립대학이지만 외국 정보 습득이 가장 빠른 황성외국어대학에서도 동맹휴학이 선포됐다.
“연희대학과 외국어대학에서 동맹휴학이 선포됐다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지는 않나?”
“그러다 장학금 끊기면 어쩌려고? 이사장이 바로 그 개화당 대자본가인데?”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그깟 장학금에 연연할쏘냐! 학우여, 우리는 누구보다 불평등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옳소! 동맹휴학!”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하여, 가난한 집안 출신이거나 지방에서 온 학생들이 많은 보성대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의 기치가 올랐다.
보성대학교의 설립자가 바로 탁지대신까지 지낸 대자본가인 이용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황성대학 학우들이여!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대한 최고의 엘리트를 자처하면서도, 부끄럽지도 않은가? 현실을 외면하고 국가권력에 종속될 것인가?”
대한제국 최고의 대학으로 평가받는 황성대학교는 학무부 직속인 국립대학이자, 고등문관 최고 합격률을 자랑하는 국가 공인 엘리트 기관이었다. 애초에 황성대학교 설립 목적 자체가 근대화에 필요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렇기에 황성대학교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사회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관리 임용을 최고의 출세로 여기는 사회에서, 적당히 순응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에 합격하면 입신출세로 나아가는 최고의 통로였다.
“대전쟁 이후 세계에는 자유와 평등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 대한만 그 흐름에서 빠져서야 되겠는가!”
“지금 우리가 정부에 맞선다고 세상이 바뀌겠나? 개화당이 정권을 잡은 지 35년이야. 학생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뿐인가? 야당과 노동조합에 이어 학생이 들고 일어서면, 시민들도 침묵만 지키진 않을 거다.”
“시위하다 체포되면 장차 관리 임용에 문제가…….”
“우리가 정녕 관리가 되어 국가를 지도하는 데 함께하고자 한다면, 더욱더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하지 않겠나! 국민을 업신여기는 정부 밑에서 녹을 받고 부끄럽지 않겠나?”
“옳소! 국가와 국민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면, 마땅히 부응해야지!”
“학우여, 거리로 나가자!”
9월 2일, 황성대학교 학생회도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어이, 황성대 애들도 온다!”
“샌님들이 웬일이래? 보통선거권 집회에도 불참하던 녀석들이?”
“아무튼 환영이다! 어서 와라, 동지들!”
“반갑다, 동지들! 함께 투쟁하자!”
서울 주요대학에서 동맹휴학이 선포되고,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건, 대한제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존에도 학생 시위가 없지는 않았지만, 학비 인상 반대나 시대착오적인 교칙 철폐와 같은 대학 내부의 문제였다.
정치적 목소리를 낸 적이 있기는 했나, 이는 보통선거권 요구와도 같은 원론적인 집회였다. 정부에 맞서 대학생이 단결하여 정치적 목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대학생들이 반정부 시위에 나선다고?”
“에잉 쯧쯧,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나랏일에 이래라저래라하다니.”
“그리 말하지 말게. 대한에 대학생들보다 똑똑한 청년들이 또 어디 있나? 저 청년들이 시위에 나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닌 게야.”
“맞아,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배운 청년들 아닌가. 저 청년들 눈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크게 잘못된 거야.”
예로부터 학자를 높이 평가하는 유교적 전통의 국가인 데다, 국민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한국에서 대학생은 최고의 인재로 우대받았다.
대학생들이 시위의 선두에 서자, 국가주의 교육의 영향으로 야당의 집회나 노동자 시위를 껄끄러워하던 시민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역시 대학생이야. 저 검은 망토 휘날리는 거 봐. 멋지다니까.”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저들 사이에 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라고 왜 못 껴? 우리는 대한국민이 아닌가? 세금 꼬박꼬박 내고, 군대도 다녀왔는데! 비록 대학은 못 갔어도 시위는 함께할 수 있지!”
“맞아! 우리에게도 의기(意氣)는 있다!”
검은색 망토를 걸친 교복 차림의 대학생들은 또래 세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존의 노동조합이 육체노동 중심인 데다, 근대화의 수혜를 입어 국가에 순응하는 입장이었던 황성의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학생들에 이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이들도 개화당의 장기집권과 개혁을 거부하는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
대학생과 사무직이 선봉에 서자, 정부에 비판적일지언정 행동하기를 꺼리던 지식인들도 합류했다.
“해산, 해산! 여러분은 불법시위를 하고 있다!”
“순순히 해산하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다!”
‘천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는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던 경찰들도, 검은색 망토를 두른 대학생들과 양복을 입은 ‘화이트 칼라’의 시위는 손쉽게 진압할 수 없었다.
“대한국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 보장하라!”
“원산 학살 진상 조사하라!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라!”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라! 외국자본과 대자본 횡포를 규제하라!”
“과두 정치 철폐하라! 보통선거권 실시하라!”
“개화당은 물러가라! 개화당 독재 타도하자!”
시위대는 기존에 찾아볼 수 없었던 정치적 요구를 거침없이 외쳤다.
“인민의 자유, 평등, 우애 만세!”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국가!”
“인민이 중심이 되는 민본주의 쟁취하자!”
‘People’의 번역어에 해당되는 ‘인민’ 혹은 ‘민중’은 ‘Nation’의 번역어인 ‘국민’ 혹은 ‘민족’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서양의 ‘Democracy’는 동양에서는 ‘민본주의(民本主義)’라고 번역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었지만, 오랜 전제군주제 전통의 동양에서는 ‘인민주권’이나 ‘민주주의’란 표현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민본’이란 단어 자체는 오랜 유교적 전통을 계승한 데다가, 맹자의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과도 일맥상통하였으므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한국민 만세!”
“일군만민의 군민공치 만세!”
“민본주의여 만세!”
서양의 데모크라시를 받아들인 대학생과 지식인들도 황제 주권은 부정하지 않았고,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끈 이선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을 공유했다.
이들은 동시에 군주정 체제하에서 민본주의가 쟁취되길 원했다.
일군만민의 군민공치, 민본주의 세상에서 군주와 국민 사이를 가로막는 존재는 사라져야 했다.
바로 지난 35년간 국가를 통치했던 과두 엘리트 집단, 개화당 정부-관료집단이었다.
1919년 여름과 가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 역사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언제나 통치에 복종하고 국가에 종속되었던 대한제국 인민이,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