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41
3부 56화 다른 길의 끝
민영환과 박유굉의 충격적인 자결은 국민 사이에 동정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일국의 총리까지 지내신 분이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따지고 보면 이건 총리만의 책임도 아니지 않나. 자결하는 건 말도 안 되네.”
“유서에서 죽음으로써 황제 폐하와 국민에게 사죄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책임을 통감하고 군주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죽음을 택하다니. 참으로 진정한 충신일세.”
“박 대장도 독립전쟁과 북벌전쟁의 영웅이자 국군의 근간을 만든 사람인데, 이렇게 가다니 씁쓸하네.”
“군인들이 크게 슬퍼하겠어. 군부의 대들보라 따르는 이가 많았을 터인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애먼 사람이 간 게 아닌가 싶군.”
“그러게 말이야. 새 내각이 책임져야 할 자들을 처벌하겠지.”
여전히 유교적 ‘충의(忠義)’ 관념이 지배적인 기성세대 사이에서는 자결을 진정한 충신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이가 다수였다. ‘순사(殉死)’라고 극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화당 정부에 비판적이던 유림조차도 충신의 표상이라 평했다.
“자결이 어찌 충신의 표상일 수가 있는가. 마땅히 살아서 책임을 져야지.”
“고인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자결은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요, 성상의 뜻을 받드는 바도 아니다.”
근대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이들은 자결을 비판했다. 개화당 원로인 윤치호나 신민당 사무총장 안창호가 대표적인 이였다. 이들이 미국 유학파에 자살을 엄금하는 기독교 신자라는 점도 있지만, 근대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한 구습이었다.
“고 총리대신 민영환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를 추증하고, 대훈위금척대수장을 추서한다. 또한 충정(忠正)의 시호를 내리니, 충정공의 장례는 국장으로 예우하라.”
이선도 고인의 충정을 높이 평가하며 최고의 예우를 했다.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이 서거했을 때와 같은 예우였다.
“고 군무대신 박유굉에게 대훈위금척대수장을 추서하고, 충의(忠毅)의 시호를 내린다. 충의공의 장례는 군장(軍葬)으로 예우하며, 신위를 장충단에 배향(配享)하라.”
대한제국군을 대표하는 인사이니만큼, 박유굉의 장례는 군장으로 치러졌다. 전사자와 순직자를 배향하는 장충단에 신위가 배향되었다.
‘어찌 그리 쉽게 목숨을 끊는단 말인가.’
이선으로서도 씁쓸한 귀결이었다. 이선은 애초에 민영환은 처벌할 생각도 없었다. 총리로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만 권유할 생각이었다.
‘이런 성품이니 본인 책임도 아닌 을사늑약에 대신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했구나. 진작 깨달았어야 했거늘.’
이선은 역사가 바뀌었으니 운명도 바뀌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민영환은 이선에게 임오군란 이래 목숨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에 자결을 선택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사대부로서 여전히 유교적 충의가 관념을 지배했다.
‘프로이센 군인도 지사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박유굉도 마찬가지였다. 팽창주의 파벌을 꺾고 군부의 확고한 문민통제를 위하여 숙청하려 했지만, 박유굉이 군복을 벗고 그를 따르는 파벌을 좌천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죽음을 택한 건,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지사’로서의 관념이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지사의 책무는 죽음을 마다치 않고 충의를 이루는 것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나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올 정도로, 지사는 나라의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유교의 기본 윤리였다. 이는 일본식 할복과 결이 다르다.
작금의 상황이 국가 위기 상황인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관료’가 아닌 ‘신하’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다를 수 있었다. 강건한 황제가 선위를 명했다는 것 자체가 국가의 위기이자 신하로서 불충이라 여겨졌고, 선위의 원인에 원산 학살이 있었다면 죽음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선위를 고집했다가는 더 죽어 나가는 사람 나오겠군. 허, 갑신경장으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교국가로군.’
이선은 새삼 놀랐다. 조선 왕실에서 태어났지만 미래의 기억으로 유교적 관념이 지배하지 않는 그로선 도저히 자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성세대 한국인들은, 설령 급진적 서구화를 이끈 엘리트 개화파라 할지라도 여전히 관념적으로는 ‘유교적 조선인’이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또한 유교적 개념을 받아들인 하급무사계급에 의해 추진되었다지만, 성리학적 관념이 지배했던 조선은 근본적으로 상황이 달랐다.
유교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케이스이니만큼, 대한제국은 여전히 유교적 조선과 서구적 근대국가의 과도기 사이에 있었다.
며칠 후, 이규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선은 직접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엄격하고 청렴하다고 유명한 관료답게, 대신을 지낸 이의 저택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한옥이었다.
가난한 나무꾼 출신으로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혐오했던 이규완은 근검절약과 ‘노동의 신성’을 주장했다. 미국 체류 당시에 배운 청교도적 생활습관을 받아들여, 고위 관료가 된 후에도 몸소 작업복을 입어 노동을 하고 짚신을 꿰 신었다. 함경남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직접 분뇨를 짊어지고 농사를 짓기도 했으며, 경악하는 관료들에게 글줄만 읽지 말고 노동자와 농민의 근면함을 배우라고 꾸짖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선이 신임하여 대신까지 발탁한 것인데, 막상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음을 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이는 동면의 양면이었다. 노동은 신성하지만, 노동이 중요한 만큼 노동자는 국가의 통제 하에 있어야 했다. 전근대적 사농공상과 관존민비 관념은 벗어났을지라도, 국가와 황제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결코 다른 의견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회복이 되기 전까지는 무리하지 마시오.”
황제가 거동했음을 알게 된 이규완이 황송해하며 앉으려고 하자, 이선은 계속 누워 있으라고 했다.
“건강은 좀 어떻소?”
“지극한 황은으로 살아남았습니다. 하오나 늙은 몸이 제대로 죽지조차 못해 불충을 안겼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선은 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은 어찌 이리도 목숨을 쉽게 버리려 하는가? 자결이 곧 순사는 아니다! 경은 살아서 책임을 져야 한다. 내무대신으로 최고책임자인 경이 이대로 죽으면,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넘길 생각인가? 경은 반드시 살아남으라. 살아서 책임을 지라. 알겠는가?”
이선의 엄격한 명에 이규완은 눈물을 흘렸다.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이선은 사법부의 재판을 통해 정의를 되찾기를 원했다. 내무대신 이규완 이하 원산 학살의 책임자는 재판정에 서야 했다.
가장 큰 책임자는 현지의 발포 명령자, 즉 함경남도 치안국장 안환이었다. 안환은 황성에서 파견된 법무부 검사 김병로(金炳魯)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거 놔라! 내가 무슨 혐의가 있다고 잡혀야 하는 거냐!”
“원산에서 발포 명령을 내려 다수의 사상자를 낸 혐의요.”
“국가를 전복하려한 빨갱이들을 진압한 게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이냐! 대체 누구의 명령이냐? 폐하께 직소하겠다!”
노동자들이 ‘태자께 직소’하겠다는 걸 발포하여 짓밟은 이로선 역설적인 말이었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지엄한 황명이오. 순순히 포승줄을 받으시오.”
안환은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황제의 사냥개로 국가의 적들을 사냥해 왔다고 믿었던 그로선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었다.
“흐흐, 토사구팽이란 말인가. 쪽발이 앞잡이 역적들도 쓸어버리고, 마우재 앞잡이 빨갱이들을 쓸어버렸던 나를 이렇게 팽하다니.”
“안 국장, 당신은 폐하께서 팽하고 말고 할 공신도 아니오. 범죄 용의자일 뿐이지.”
“그래, 이제는 내가 경무청에서 고문당할 차례인가? 마음대로 해 봐라. 나 같은 애국자를 숙청하고 나서, 러시아처럼 빨갱이 세상이 온 다음에 후회나 하지 말고! 어이, 검사 나리. 빨갱이 세상이 오면 당신 같은 관료라고 멀쩡할 줄 아나?”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빨갱이’에게 저주를 퍼붓는 안환에게 김병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첫째, 고문경찰의 시대는 끝났소. 당신은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될 거요. 둘째, 당신이 죽인 건 빨갱이가 아니오. 평범한 노동자들이지. 셋째, 대한은 러시아가 아니니 빨갱이 세상 올 일 없소. 헛소리하지 말고 황성으로 갑시다.”
안환이 함흥에서 체포되어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갔다는 소식은 원산에 빠르게 전해졌다.
이윽고 발포에 가담한 원산경찰서장과 경찰서 간부들도 직위해제하고 황성에 소환됐다. 가담 여부에 따라 피의자 신분이나 증인 신분으로 재판정에 설 예정이었다.
“황명으로 죄인 안환을 황성으로 압송했다!”
“만세! 정의가 실현되는구나!”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원산 노동자들은 학살 주범이 체포되어 끌려갔다는 소식에 열렬히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책임자 처벌에 나선 이선은, 우경화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박영효와 이준용의 처리를 놓고 고민했다.
법적으로는 이들을 처벌하기가 어려웠다. 박영효는 전임 대신이자 원훈으로서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준용은 자금을 댔다. 정당제 국가에서 파벌을 형성했다는 건 죄가 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배임이나 횡령으로 기소하는 게 한계였다.
“금릉위와 흥친왕을 어찌하오리이까?”
“민영환과 박유굉의 자결, 이규완의 미수로 동정론이 불고 있는데, 무작정 처벌할 수야 있나. 그간 박영효에게 공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따르는 이도 여전히 적지 않지.”
본래 이선도 박영효를 재판에 기소하여 망신을 주고, 원훈의 지위를 박탈하여 정계에서 영구히 몰아내는 선에서 끝내려 했었다. 하지만 박영효의 오른팔과 왼팔인 박유굉과 이규완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 하는 바람에 동정론이 부는 상황이었다.
“이준용도 대원왕께서 잘 부탁한다고 유언하셨는데, 다른 분도 아니고 대원왕의 유언을 무시할 순 없지.”
이선은 진작부터 야심만만한 사촌동생을 마뜩찮게 여기고 멀리했지만, 다름 아닌 대원군의 총애를 받던 운현궁의 계승자였다. 할아버지에 대한 효성만큼은 진심인 이선으로선, 유언을 저버릴 수 없었다.
이선은 흥친왕 이준용, 의친왕 이강, 의친왕의 아들인 어린 이우(李鍝)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준용아, 짐이 황족일수록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진작 경고하지 않았더냐. 어찌하여 미몽을 버리지 못하고 제국당 무리들과 어울린 거냐. 국수단 같은 불량배 놈들에게 운현궁이 자금을 댄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송구하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이선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이준용을 꾸짖었다. 신하를 벌하기보다는 사촌아우를 꾸짖는 태도였다.
“대원왕께서 너를 잘 부탁한다고 유조를 내리셨으니, 내 너를 벌할 수는 없다. 대원왕의 신위에 감사드리거라.”
“황공하옵니다. 평생 대원왕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겠습니다.”
이선은 이준용을 더는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황실 의사로부터 들으니 비만한 이준용은 건강이 좋지 못했고, 특히 신장(腎臟)과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 이선보다 오래 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네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들었다.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고, 황성보다 훨씬 따뜻하지. 제주 별궁을 네게 하사하니, 거기서 건강을 다스리며 살도록 해라.”
말이 좋아 ‘하사’지, 사실상 유배였다.
궁내부 재산인 제주 별궁은 이선조차도 바빠서 단 한 번 해군기지를 방문했을 때 찾아갔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 시대의 제주는 멀리 떨어진 오지였다.
“제주에 있는 너를 대신해 운현궁은 네 양자에게 계승하도록 한다. 동의하느냐?”
“예,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이준용에게는 딸만 있을 뿐 아들은 없었던 데다, 이미 나이 50이라 자식을 볼 가능성도 적었다. 황실 종법(宗法)상 운현궁의 대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양자를 들여야 했다.
황제의 차남인 정친왕 이안이나 예친왕 이은이 출계(出系)하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이미 별도의 친왕으로 봉해진 아들을 흥친왕을 계승하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자식이 많은 의친왕의 자제가 출계 대상이 되었고, 이우가 흥친왕을 계승할 양자가 되었다.
“우야, 이제 네가 운현궁을 계승할 거다. 대원왕의 후사를 잇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황실의 든든한 지친이 되어 주길 바란다.”
엄격한 표정을 짓던 이선은, 어린 조카에게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광무 16년(1912)생으로 올해 8살인 이우는 부모를 닮아 어린 나이에도 총명하고 잘생겼다.
특히 빼어난 용모로 인해 자라나면 미남자가 되리라는 전망이 보였다. 이선의 막둥이 딸로 역시 8살인 이금(李錦)은 동갑내기 사촌을 좋아해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의친왕이 우가 장성할 때까지 운현궁 관리를 돕도록 하게.”
“예, 폐하.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선은 이강에게 운현궁 관리를 맡겼다.
흥선대원군 이래 권력을 상징했던 운현궁에 정치적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황실의 가장 가까운 지친으로서의 의미만 남을 터였다.
이준용을 제주로 추방한 이선은, 연금된 박영효를 불러 독대했다.
“폐하, 불충한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금릉위, 짐이 그간 경의 공로를 어찌 모르겠소. 대한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식산흥업과 승전에 큰 공을 세웠소. 더욱이 짐과 경은 임오년 이래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낸 동지요.”
이선은 박영효에게 어주를 하사하고, 들이키게 했다.
“신은 진실로…….”
“경이 소조를 능멸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 나도 잘 아오. 경의 충정을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경의 방식은 틀렸소. 국민은 함부로 죽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오. 경장 이후를 생각해 봅시다. 각지에서 사족과 유림의 반발이 거셌소. 우리가 무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전부 사살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랬으면 현재의 대한이 있었겠소? 무력으로 앙금을 눌러 봤자, 언젠가 터질 뿐이오.”
이선도 갑신경장 이후 개혁이라면 무조건 반발하는 지방 사족들을 진압하고 싶다는 생각이 수차례였다. 하지만 협력자는 새 질서에 포섭하고, 반대파는 시대에 뒤떨어진 채 도태시키는 형태로, 최대한 피를 덜 흘려 가며 개혁을 이끌어 나갔다.
“고균을 통해 짐의 뜻을 전해 들었을 거요. 경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오.”
“예, 폐하.”
이선은 박영효에게 관용을 베푸는 길을 택했다. 대외적으로 김옥균과 함께 이선의 고굉으로 통하는 인사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동안 공적이 많았다.
끝끝내 기소해서 처벌하려 한다면 이선은 괜찮아도, 태자와 신정부에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었다. 막중한 개혁에 집중해야 할 신정부의 힘을 빼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경이 책임은 져야 하오. 경의 재산 일부를 죽은 노동자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으로 지불하시오.”
“마땅히 그러하겠습니다.”
“이제 원훈의 시대는 지났소. 고균과 구당, 송재도 원훈의 지위에서 내려오겠다 하였소. 원훈은 국가의 공로자로서 충분한 예우는 받겠지만, 정치에 개입할 일이 없어야 하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선은 원훈의 정치 개입을 영구히 금하도록 했다. 김옥균과 유길준은 어차피 연로하여 은퇴 수순이었고, 서재필도 원훈 지위를 반납하기로 했다.
“경의 저택이 미국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예. 신의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미국에 유학 중입니다.”
“그래, 모처럼 아들과 재회도 할 겸, 당분간 미국에 가 있으시오. 때가 되면 다시 불러들이리다.”
말은 좋게 해도, 사실상의 국외추방 명령이었다. 이선은 박영효를 국내에 둘 생각이 없었다.
술잔을 넘기는 박영효의 입맛은 더없이 썼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때가 되면’이라고 했지만, 그때가 언제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죄인에게 살길을 열어 주시니, 지극한 황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성수무강하시옵소서, 폐하.”
“고맙소. 경도 미국에서 편안히 노후 보내시오.”
이미 박영효는 정치적으로 손발이 다 잘린 상황이고, 미국에 가도 익문사와 주미대사관에서 호위를 빙자한 감시도 할 터이니, ‘편안히 노후를 보내는’ 길밖에 없었다.
한때 이선과 같은 길을 걷는 동지였다가, 어느 순간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 개화당.
결국 다른 길의 끝이 막다른 길이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