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44
3부 59화 아시아주의
제3차 한청협약, 혹은 한청신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진 때는 독립전쟁 평양전투 승전 25주년 기념 주간이었다.
민족주의적 열기에 도취된 대한제국 국민은 열렬한 환호로 협약 체결을 반겼다.
“대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대고구려의 재건!”
“만주는 대한의 영역이다!”
국민교육 시행 이래 애국주의·민족주의 교육을 받아온 한국인들은 대한제국이 고구려의 후예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를 수복해야 할 고토라고 인식했다. 이들에게 만주 장악은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었다.
여당인 개화당은 물론이요, 자유주의 신민당이나 인민주의 진보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서북지방을 최대 지역기반으로 삼는 신민당은 만주를 향한 서북 주민들의 열망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를 자처하는 평양은 특히 대륙을 향한 감정이 컸다.
천도교의 이주와 만인대 활동으로 간도에 기반을 확보한 진보당도 마찬가지였다. 천도교뿐만 아니라 신흥 단군교(대종교)도 진보당과 제휴했고, 강력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아예 만주를 병합하고 대한의 영토로 만듭시다!”
“무슨 소리. 만주는 대한과 별개의 국가요. 하물며 민족자결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어찌 병합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소? 단지 청국의 국력이 미약하여 대한이 보호에 나서기 위함이오.”
총리 이상설을 비롯한 정부, 이동녕·안창호·전봉준·손병희 등 야당 지도부는 일각의 팽창주의적 요구에 선을 그었다.
무리한 팽창을 추구하지 않는 개화당 지도부는 물론이요, 야당 지도부도 9월 의거와 신정부 수립 이후 확보된 개혁적 동력을 팽창주의로 낭비하기보다는 국내 개혁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과도한 조치는 역효과만 불러일으킨다.”
이선은 외교에 이어 만주의 군사와 행정까지 장악한 데 만족했다.
총독이나 통감이란 칭호 대신 ‘고등판무관’이란 표현을 쓴 건, 국제연맹에서 추진하는 위임통치령의 사례를 참조하기 위함이었다.
대한제국에 할당된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은 없었지만, ‘독립할 능력이 부족한 지역’을 관리하는 직함이 고등판무관이니만큼 만주도 이를 따른 것이었다.
‘역시 나라를 팔아먹은 자는 달라. 남의 나라 국권을 박탈하는데도 가차 없군. 내가 보기에도 3조와 4조는 좀 과도한 감이 있는데. 이래서야 고등판무관이 청국은 물론이요, 한국 정부를 넘어서 실질적인 만주의 지배자가 되는 거 아닌가.’
오히려 이완용은 자신이 내린 훈령보다 더 많은 걸 조약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선이 최종재가는 했지만, 이쯤에서 이완용의 야심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선은 이완용의 야심이 짐작이 됐다. 총리에 취임할 가능성은 사라졌으니, 총독이나 다름없는 고등판무관의 지위에 올라 만주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으리라 추측했다.
‘이제 이완용의 가치는 다했다. 내가 임명했다곤 하지만, 이완용이 청국에 너무 오래 있었어. 고등판무관이 총독처럼 설치게 둘 수는 없지. 정부의 확고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고등판무관은 적당히 현지 민심을 존중할 수 있는 인사로 임명해야겠다.’
1920년 1월 1일 자로 출범 계획 예정인 주청 고등판무관에 이선은 이완용이 아닌 다른 인사를 후보군으로 올렸다. 협약을 강요한 이완용에게 청국 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면, 한청관계를 고려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한 시점에 소환할 생각이었다.
제5조에 의거하여 청국 각 부처에 고문으로 파견될 한국인 관리들도 온건하고 유능한 인사들로 선별할 계획이었다.
“몽골과 티베트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할 터이니, 대청국의 이름 아래에서만 남아 주십시오. 대청 황제의 형식적인 통치권만 인정해 준다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세요. 내정은 완전히 자유롭게 하고, 단지 국체만 공유하자는 겁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각자 완전한 자치권을 갖고 있으나 국체를 공유하는 유럽의 도나우 연방처럼 말입니다.”
한청신협약 제7조를 이행할 의무가 있는 대한제국은, 독립을 호소하러 온 몽골 사절단에게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근거하여 재편된 도나우 연방을 대청국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만약 이조차도 못 받아들인다면, 대한국도 어쩔 수 없이 청국의 편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의 차관과 원조 없이 고립된 채로 국가를 운영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중국이나 러시아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리란 기대는 하지 마시고.”
당근과 채찍을 연달아 내미는 한국의 압박에, 몽골도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한국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몽골의 확고한 주권을 대한제국이 보장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중국이든 러시아든 귀국의 독립을 방해할 수 없을 겁니다.”
한국은 만주를 확실히 장악하고, 몽골-신강-티베트는 대청국의 일원으로서 자치에 맡기는 길을 택했다. 한국은 만주를 통제하고 시베리아에 개입하기도 바빴다. 인구가 희박한 몽골, 머나먼 신강, 영국의 영향권인 티베트까지 손을 뻗을 여유는 없었다.
달라이 라마나 몽골의 왕공들은 진작부터 한국에 줄을 대고 있었으므로, 대청국이란 간판 아래 각국에 친한 정권이 세워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 * *
‘박영효가 숙청당하고 이상설 같은 애송이가 총리가 되다니. 어심이 그렇다면 아무래도 총리는 물 건너갔구만. 뭐, 만주의 총독이 된다면 그 권력은 총리 못지않겠지.’
눈치 빠르기로는 한국 관리들 중에서도 최고급일 이완용은, 박영효와 개화당 우파의 숙청, 이상설 총리 임명과 추진되고 있는 개혁의 의미를 곱씹었다.
정치적 성향을 놓고 보면 개화당 우파에 가까운 이완용으로선 이제 총리의 야망은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그동안 공들여 놓은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자신이 한국 내 최고의 청국 전문가라고 자부했고, 눈치 빠른 그도 황제가 자신을 경질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초대 고등판무관도 당연히 자신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 공! 나는 광서황제께서 총애하셨던 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 거요! 이래서야 대청의 열성조께서 나를 뭐라고 하시겠소!”
“전하, 대한이 있었기에 대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걸 잊으시면 안 되지요. 이번에도 대한 덕에 몽골의 분리주의를 누를 수 있지 않았습니까? 몽골의 지배야말로 강희황제의 위대한 유업(遺業)인데, 몽골을 놓치면 그야말로 열성조께서 한탄하실 일이 아닙니까?”
친한파인 숙친왕조차도 신협약에 분노를 표명하자, 이완용은 그를 어르고 달랬다.
“대한은 대청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나랍니다. 애초에 대청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중화민국? 청 황실을 몰아내고 남은 영토마저 빼앗고, 대청 황제를 민국의 포로로 삼아 자금성에 갇혔을지도 모릅니다. 러시아? 저 사회주의자들은 제일 먼저 황족부터 숙청하려고 들 겁니다. 일본? 류큐(오키나와)와 대만을 통치하듯 만주를 지배하려고 들 겁니다.”
“…….”
숙친왕으로서는 이완용의 달변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숙친왕의 표정이 좋지 못하자, 이완용이 웃는 낯으로 달콤한 말을 했다.
“희소식을 알려드리지요. 현재 대한국의 대리청정을 맡고 계신 소조, 미래의 황제가 되실 황태자께서 친왕 전하의 따님과 결혼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야말로 대한과 대청이 한 몸이 되는 거지요. 친왕 전하께서는 대청 황제의 황숙이자 장차 대한 황제의 국구(國舅)가 되시는 겁니다.”
이완용의 말에 숙친왕의 표정이 풀렸다.
“흠, 지난번에 김옥균 공이 왔을 때도 논의된 사항이긴 하오만. 나야 좋지만 그게 가능하겠소? 귀국에서 외국인 왕비가 있었던 전례가 없는데.”
“아, 걱정 마십시오. 제가 힘을 써 보겠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께서도 양국의 국혼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실 겁니다.”
국혼은 이선이 이완용에게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고 한 건데, 이완용은 마치 자신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성사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좋소. 나도 황실에 타진해 볼 터이니, 공도 잘 부탁하리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만 믿으십시오.”
황궁에서 주청 한국대사관으로 돌아온 이완용은 분노하는 군중과 맞닥뜨렸다.
“대청을 속국으로 만드는 신협약 반대한다!”
“외무고문은 한국으로 돌아가라!”
이완용은 혀를 끌끌 차더니, 대사관 경비병을 향해 외쳤다.
“도대체 청국 경찰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경찰권도 가져와야겠구만. 경비병, 당장 저것들 쫓아내!”
“옛!”
공사관 경비병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우리를 향한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분간 민심을 살피심이…….”
“만주족이야, 한족이야? 어느 쪽이 문젠가?”
“물론 한족들이지요.”
“그거야 예상한 바 아닌가. 한족들이 설치는 건 청국 정부도 좋아하지 않네. 불령한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켜야지. 앞으론 철저히 관리해야겠어.”
1908년 인구조사 당시 동삼성의 인구는 자치령 포함 약 1,600만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1880년 봉금령 해제 이후 만주로 이주한 한족 빈농들이었다.
청국의 만주 이전 이후 한족의 만주 이주를 다시 금하고, 중국 관내의 만주족이 만주로 이주하면서, 만주족의 비율이 상당히 늘어나기는 했다.
1919년 현재 만주의 1,900만 인구 중 만주족이 약 300만, 자치령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약 100만, 나머지는 한족이었다.
만주에 이주한 한족들의 절대다수는 가난과 재해를 피해 온 빈농들이니만큼, 특별한 민족의식 같은 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전히 청조는 천명을 받아 300년을 다스려온 왕조고, 청국 황제에게 충성했다. 오히려 토지개혁을 실시한 한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이주 2세대, 그중에서도 지식인층의 성향은 달랐다. 중국과 청국은 별개의 주권국가로 분리되었음에도, 중국을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일해야 한다는 범중화주의가 만주에도 스며들었다.
당연하게도, 청국 정부는 범중화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중국으로 통일된다면 청조는 곧 멸망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국 정부는 만주의 한족들을 향해 동화정책과 함께 대청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했다.
청조와 함께 만주로 이전한 강유위(캉유웨이)와 일단의 개신유학자들이 ‘보황(保皇)주의’를 외치며 대청 황제의 천명을 정당화했다.
“보황! 천명을 계승한 대청 황제 폐하를 받들어 만주에 대동세상을 구축하자!”
“대청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산동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중국 전역에 격렬한 반일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다. 그 여파는 만주까지 닿았고, 만주의 한족 청년들 일부는 범중화주의에 공명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케케묵은 황제 타령인가? 황제를 타도하고 민국과 통합하자!”
“저 무능하고 부패한 군벌 놈들은 중국을 조각내서 제 이익만 챙기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범중화주의는 현실적인 힘이 없었다.
중국의 실권자 단기서가 재통일을 열망하고는 있으나, 안휘군벌의 고압적인 태도는 손문과 국민당 외에도, 다른 군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남경의 안휘군벌, 북경의 직례군벌, 광동의 국민당, 기타 군벌들 사이에 중국의 패권을 두고 항쟁이 이어졌다.
중국은 끊임없는 군벌 간의 항쟁으로, 본토도 버거운데 만주는 손을 뻗을 여지조차 없었다.
만주의 범중화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현시점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만주와 몽골, 한국과 일본, 저 멀리 터키와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우랄-알타이 민족은 모두 형제민족이다. 중국의 분열과 러시아의 붕괴는 우리의 기회다. 우랄-알타이 민족의 대단결로 아시아를 재편하자!”
19세기 말 헝가리에서 기원해, 핀란드와 터키에서 유행한 ‘범투란주의(Pan-Turanism)’가 만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다분히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이었다. 대청국의 만몽 통치와 한국과의 연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범투란주의는 실체가 어쨌든 간에 유용한 이론이었다.
시대착오적인 보황주의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만주족 지식인들은 범투란주의를 흡수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만주족과 몽골족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아니라, 동으로는 한국에서 서로는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를 재편할 우랄-알타이 민족의 일원이었다.
“중화사상은 물론이요, 그 이름도 해괴한 우랄 알타이 어쩌구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그따위 범민족주의 이론은 노동자와 농민을 지배층에 종속시키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와 농민들이여! 소비에트 러시아가 우리에게 위대한 선례를 알려주었다! 허울뿐인 청 황제와 만주 권귀들을 몰아내고, 만주에 노동자 농민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자!”
보황주의, 범중화주의, 아시아주의, 범투란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정치집단도 등장했다. 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였다.
한국·일본·미국의 투자로 남만주 일대에 공업지대가 형성되고, 산업노동자 계층도 형성됐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노동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는 한족 노동자들은 자연히 불만을 품게 되었고, 러시아에서 불어온 사회주의 바람에 영향을 받았다.
사회 발전 속도가 한국보다도 훨씬 뒤처진 만주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지하에 서서히 세력을 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청국 당국으로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할 일이었다.
“한국에 기대를 걸었던 우리가 어리석었다. 청국의 압제에 놓였다 자주독립을 쟁취한 한국은 진정으로 아시아의 해방을 추구한다고 믿었거늘.”
만주의 이념그룹 중 한청신협약에 가장 실망이 컸던 건 아시아주의자들이었다.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각국이 단결하여 서양 열강에 맞서자는 이론으로, 1880년대 이래 한중일 지식인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일본의 자유민권계열 야당들은 이른바 ‘흥아론(興亞論)’을, 한국에는 김옥균이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주창했었고, 중국의 손문도 ‘왕도적 아시아주의’에 공명하며 한국·일본과의 연대를 주장했다.
청국의 만주족과 한족 청년들 일부는 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한 한국이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만주와 몽골을 지켜 내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한 한국이 시대에 뒤떨어진 청 황실을 대신해 만주의 진보를 이끌어 내리라고 믿었다.
이들은 직접 한국에서 유학하거나 한국어를 익히며, 한국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에서의 야합과 한청신협약은 만주 아시아주의자들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2차 한청협약으로 이미 배신감을 느꼈던 이들은, 3차 협약으로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과 함께 야합해서 만주를 차지한 게 아닌가? 결국 서양 열강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한국인도 노란 얼굴을 한 서양인에 지나지 않아.”
“김옥균이 주장했던 삼화주의도 결국 침략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배신감을 느낀 만주 아시아주의자들은 친한에서 반한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의 적은 첫째로 위선자 한국 황제요, 둘째로 삼화주의 사기꾼 김옥균이오, 셋째로 침략에 앞장서고 있는 이완용이다.”
“먼저 침략의 주구 이완용을 처단하여 우리의 의기를 보이자!”
“그래. 이완용을 처단하여 우리의 의기를 보이면, 한국의 아시아주의자들도 침략당한 만주의 현실을 깨닫게 되겠지.”
“진정한 아시아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아시아의 배신자 이완용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일단의 아시아주의 청년들이 ‘아시아의 배신자’ 이완용 척살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