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on, The Age of Revolution RAW novel - Chapter 645
3부 60화 하얼빈역
1919년, 러시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우랄 동부도 내전이 심화되었다. 스톨리핀은 자신의 기반인 극동, 시베리아 정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남러시아 백군, 정치적 정통성이 있는 사마라 제헌의회 정부를 통합하는 작업에 나섰다.
우랄 인근 우파(Ufa)에서 열린 합동회의에서, 일단 백군의 형식적인 통합이 이뤄졌다.
이른바 ‘전(全)러시아 임시정부’가 선언되었다. 스톨리핀이 총리, 사회혁명당의 체르노프가 두마 의장, 입헌민주당의 밀류코프가 외무장관, 코르닐로프 대장이 육군 총사령관, 콜차크 제독이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군주제지지자·공화주의자-자유주의자·인민주의자-대러시아주의자·자치주의자에 이른 기이한 대연합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에 반대한다는 것뿐이었다.
1919년 여름과 가을에 백군은 우세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특히 소비에트 적군이 대대적으로 후퇴한 동부전선에서는 쾌조의 진격을 했다.
시베리아 백군과 투르키스탄 백군은 우랄산맥을 넘어 예카테린부르크-첼랴빈스크-우파-사마라-심비르스크를 점령하고, 볼가강까지 이르렀다.
동부 백군의 진격은 볼가강의 주요도시 카잔에 도달한 후에야 적군의 반격에 부딪혀 멈춰졌지만, 모스크바 동쪽 800km 지점까지 도달했다.
“지도만 보면 백군이 점령한 영토가 압도적으로 넓어 보이지. 하지만 점과 선만 잇고 있을 뿐이야. 철도와 역 주변만 통제하는 상황이 아닌가.”
이선은 전황 지도를 보면서 우려를 표명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백군은 카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동서 9,000km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주요 도시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농촌에서는 지하로 숨어들어간 소비에트, 다양한 반(反)백군 파르티잔이 들끓었다. 이들은 백군이 소비에트 정부가 추진한 각종 개혁을 뒤엎고 제정 시대로 돌아가게 하리라 의심했다.
아시아의 백군 병력이 계속 우랄 방향으로 향하면서, 후방의 치안관리는 현지 민병대와 대한제국 파병군이 맡게 되었다.
특히 치타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긴 철도 구간은 사실상 한국군 관할이었다.
한국군은 협조적인 현지인과 고려인을 행정에 내세우고, 주민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한국 정부와 러시아 임시정부간에 협의하고 싶다고 전하게.”
한청신협약을 체결한 직후, 한국은 백군 당국과 협의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르빈(하얼빈)과 동청철도는 러시아제국의 조차지이자 소유물이었고,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는 시베리아 임시정부를 거쳐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관할이 되었다.
한국이 백군을 지원하는 대신, 하얼빈과 동청철도의 관리를 청국에 ‘반환’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물론 실질적인 통제는 한국이 하게 될 터였다.
“경이 짐을 대신해서 러시아 임시정부와 논의하도록 하시오.”
“예, 폐하.”
이선은 김옥균을 협상 대표로 지목했다. 러시아 측에선 마침 극동을 시찰하며 후방 행정을 맡고 있던 스톨리핀이 직접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회담 장소는 남만주철도와 동청철도의 교차점인 하얼빈이었다.
「늙은 몸이 노둔하여, 고뿔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황공하오나 다른 이를 파견해 주시길 청하옵니다.」
그런데 김옥균이 갑작스럽게 병석에 눕게 되었다. 69세의 노인이라 감기도 우습게 볼 병이 아니었다. 김옥균이 감추고 있어서 주위에서 모를 뿐, 이미 그는 폐가 좋지 못했다.
“경은 무리할 것 없소. 대신할 사람은 있으니. 속히 쾌차하시오.”
이선은 대신 봉천에 있는 이완용을 협상대표로 지목했다.
“신 이완용, 삼가 황명을 받드나이다.”
이완용은 흔쾌히 명을 받들었다. 곧 주청 고등판무관이 되리라 믿고 있는 그로선 바라던 바였다.
‘내가 러시아와 협상해 동청철도와 하르빈까지 회수하는 공을 세우면, 반환받은 청국은 물론이요 대한에서도 내 공을 칭송해마지 않으리.’
이완용은 한껏 기대를 품으면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남만주철도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만주의 완전한 지배가 눈앞이었다.
스톨리핀과의 회담은 10월 25일 토요일로 예정되었다.
“침략자 이완용이 회담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군.”
“경비가 엄중한 성경(봉천) 한국 대사관을 떠나는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조차지이니만큼, 치안과 사법도 러시아가 관할하지. 의거를 감행하기에는 성경보다 훨씬 쉬울 걸세.”
“내가 직접 하얼빈으로 가서 이완용을 저격하겠소. 중국과 아시아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윈 아깝지 않소이다.”
“오, 장 동지! 동지의 의기와 사격 솜씨라면 믿을만하지요. 좋소, 장 동지에게 의거를 맡기겠소. 하얼빈의 우리 동지들이 장 동지에게 협조할 거요.”
30대의 중국인 사내가 이완용 암살을 맡기로 결의하고, 이완용을 뒤따라 하얼빈으로 향했다.
‘장 동지’라 불리는 이는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1900년 의화단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한 경험이었다. 바로 장삼(張三)이란 소년이었다.
소년 장삼은 고향을 떠나 의화단에 가담해 북경 전투에서 싸우다가, 9개국 연합국에게 처절하게 참패하는 것을 보고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문을 외우면 총알을 막아 내고, 권법으로 ‘양귀’를 제압하리라는 의화단의 외침은 사기였다. 마침내 냉정한 현실을 깨닫게 된 장삼은, 시체더미 속에 숨어 살아남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장삼은 한국군이 태극기를 자금성에 게양하는 것을 보았다.
살아남은 장삼은 정반대로 돌변했다. 의화단이 사기라는 걸 깨닫게 된 이후, 동양도 서양의 힘을 흡수해야만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일본과 한국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장삼은 러시아가 점령한 만주로 도주, 의화단 경력을 지워 버리고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들어가 근대 학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일개 소년병이었던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남만주 자치령이 수립된 이후, 한국은 친한파 육성 계획의 일환으로 만주의 청년들을 선발해 한국 유학의 기회를 주었다. 한국 유학을 다녀온 청년들은 대개 충실한 친한파가 되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장삼도 유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북벌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본격적인 발전궤도에 오른 한국의 발전상을 본 장삼은, 그 또래의 고등교육을 받은 만주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장삼이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신해혁명으로 청국이 만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의화단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장삼은 고향인 산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2의 고향인 만주에서 교편을 잡아 후학 양성에 나섰다.
세계대전 발발 이후 한국과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산동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과 만주의 아시아주의자들은 한국과 일본이 선도자가 되어 아시아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리라는 기대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한국인은 서양인과 함께 만주의 지배자요, 만주인은 허울뿐인 2등 지배자요, 중국인은 야만적이고 하등한 피지배자 취급을 받고 있다. 실로 한국인은 노란 얼굴을 한 서양인일 뿐이다.”
한국은 서양 제국주의와 야합하여 만주의 주권을 침탈하고, 이권을 나눠 먹었다. 3차 협약은 한국의 위선을 똑똑히 보여 주는 본보기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컸다고 했던가. 장삼은 일본과 한국이 아시아주의의 이상을 배신했다고 분노했다. 장삼은 ‘침략의 주구’인 이완용을 척살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의화단의 참담한 패배 이후, 장삼은 총이야말로 무력의 상징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광적으로 사격술을 익혔고, 만주 아시아주의 조직 내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격수로 통했다.
‘과거에는 권법 따위로 싸우려 했으니 실패했지만, 이제는 총으로 침략자를 단죄하겠다.’
* * *
1919년 10월 26일 일요일, 하얼빈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
당초 25일로 예정되었던 회담은, 러시아측 철도 사정으로 인해 하루 연기되었다. 이완용은 하얼빈에서 하루를 기다리며 도시를 구경했다.
“일요일에 근무라니, 러시아에서 초과수당을 받아 내야겠어.”
“하하, 그래도 덕분에 도시 구경도 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꼭 작은 러시아 같군요.”
“뭐, 원래는 송화강변의 작은 어촌이었던 걸 러시아가 도시로 개발한 거니까. 러시아를 이식한 것이나 다름없지.”
러시아풍 건축물이 들어선 하얼빈을 둘러보던 이완용은 씩 웃었다.
“과거에는 청국이고 현재는 러시아지만, 앞으로는 대한의 도시가 될 거야.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나아가는 요충지로서 개발해야지.”
이완용은 대한제국이 만주를 넘어 시베리아까지 뻗어 나가는 날을 상상했다.
과거의 약소국 조선으로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대한제국은 북방의 강자였던 러시아조차 지원을 구해야할 열강으로 성장했다.
바로 그 첨병에 이완용 자신이 있었다. 그는 ‘동양의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세실 로즈가 아프리카에 유니온 잭을 꽂았듯이, 이완용은 만주에 태극기를 꽂았다고 자부했다.
「우리(영국)가 세계를 더 정복할수록, 인류에게는 더욱 이득이다.」
세실 로즈의 말을, 이완용은 이렇게 변주했다.
「대한이 동양을 더 정복할수록, 동양인에게는 더욱 이득이다.」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자 제국주의자인 이완용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 서양의 세계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예외적으로 서구화에 성공한 한국과 일본이 동양의 지배에 나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반도국가인 대한은 북방과 대륙을 정복하고, 섬나라인 일본은 남방과 해양을 정복한다. 만주인과 지나인과 같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민족은 문명화된 민족을 위해 복종하는 게 당연하다. 문명화된 대한이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묶여 있고, 미개한 인간들이 거대한 만주를 지배한다면 그건 공간낭비지.’
유학을 익혔던 이완용은, 겉으로는 청 황실을 우대하고 중국 문화에 찬사를 보냈으나, 속으로는 경멸감을 품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만주는 당연히 대한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야 했다. 이제 그 목표달성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환영단은 제대로 동원했겠지?”
“예. 우리 교민들을 우선으로 동원하고, 다음으로는 한국어 구사가 가능한 만주인들로 채웠습니다.”
“흠, 그래. 확실한 친한파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얼빈은 러시아가 관할하는 도시이니만큼, 러시아인이 한국인보다 많았다. 이완용은 만주의 ‘주인’이 한국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군중을 동원했고, 한국 영사관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친한파 만주인까지 태극기를 쥐어 주고 역에 도열하게 했다.
그 인파 속에 총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가 있으리라곤, 이완용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역 경비를 맡은 러시아 철도경비대의 검문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허, 과거에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던 한국이 이렇게까지 클 줄이야.’
스톨리핀은 10년 사이에 상황이 역전되어 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모스크바로 진격하고 정통 러시아를 되찾을 수 있다면 극동의 이권이 아깝겠는가. 소비에트를 몰아내고 러시아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분명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가 없이 하르빈과 동청철도를 넘겨줄 순 없지.’
한국이 백군을 배후에서 후원하고, 이선이 니콜라이 2세의 자녀들을 망명 받아 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러시아주의자이자 로마노프 왕조의 충신인 스톨리핀은 하얼빈과 동청철도를 그냥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많은 걸 얻어 내야만 ‘반환’에 동의할 수 있었다.
“도착했군. 군악대, 연주하게.”
“국가 연주!”
러시아 열차의 도착에 맞춰, 양국의 국가가 연주되었다.
스톨리핀이 기차에서 내리고, 이완용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각하! 원로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 중인 상황이다 보니 시간이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
“아, 그러시군요. 대한제국과 러시아 양국의 협조 위에서, 전쟁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예, 반드시 승리해야지요.”
“자, 그럼 먼저 촬영하시지요. 양국의 협조를 상징하는 사진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완용은 스톨리핀과 악수하며 카메라를 향해 돌아봤다. 사진을 찍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태극기와 러시아 삼색기를 들고 있는 군중 사이에서 한 사내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이다!’
장삼은 이완용과 스톨리핀이 악수하며 사진 찍을 때를 노렸다. 바로 그 순간만이, 이완용이 경호원에게서 떨어지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러시아 경비대나 한국 경호원이 제지할 틈도 없이, 장삼은 단숨에 뛰쳐나갔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이완용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탕! 탕!
경비병이 달려오기 직전, 암살자는 스톨리핀을 향해서도 발포했다. 1900년 북경 점령 당시 러시아군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는 장삼은, 러시아 당국자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Китай Ура! Азия Ура! (중국 만세! 아시아 만세!)”
암살자는 달려온 경비병에게 제압당하면서도 러시아어로 만세를 외쳤다.
“버, 범인이 중국인인가?”
세 발의 총알이 모두 관통당한 이완용은 그대로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키타이’란 단어를 들은 이완용은 범인에 대해 물었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어, 어리석기는…….”
이완용은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저 멀리 정교회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한 발만 더 뻗으면 만주 전역과 시베리아가 눈앞에 있었는데, 이렇게 쓰러지다니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그로선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의화단 생존자이자 아시아주의자의 저격이었다.
이완용은 저격 20분 후에 사망했다.
대한제국 전 외무대신, 대청국 외무고문 이완용은 향년 62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희대의 매국노로 남은 원역사에 비하면 영예로운 삶과 죽음이라 할 수 있겠으나, 자신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이완용으로서는 절대 피하고 싶었던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견위수명(見危授命,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친다.)’이라는 개념은 절대로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는데…….”
스톨리핀은 이완용보다 한나절을 더 버텼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러시아 혁명가들의 숱한 암살 기도를 피하고도 살아남았던 스톨리핀은, 1911년 키예프(키이우)에서 암살당한 원역사보다 8년을 더 살았으나 결국 암살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약간의 시간이 더 주어진 덕에, 스톨리핀은 로마노프 황가, 러시아 임시정부를 향해 유언을 남기고 죽을 수 있었다.
1919년 10월 26일, 대한제국의 만주 침략 첨병이었던 이완용이 암살당했다.
공교롭게도, 원역사에서 ‘하얼빈 의거’가 발생한 바로 그 장소에서, 꼭 10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실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었다.